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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Hagia Sophia(Ayasofya)


* 이 글은 필자가 성 소피아 사원(아야 소피아는 그리스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의 터키식 이름)을 수없이 방문하고, 관련 책자 중 의미 있는 내용을 선별해 정리한 것이지만 특별히 하산 박사(Hasan Firat Diker ; 파티 술탄 메흐메드대 교수, 아야 소피아 전공)의 도움이 컸다. 그는 나와 함께 2년에 걸쳐 4일간 아야 소피아의 구석구석을 함께 살피고 다녔다. 이 글 중에는 그가 전해준 사실에 근거한 신비로운 이야기도 일부 담겨 있다.



* (일반 상식) ; 단일 예배당 건축물로는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건물(연 3000만 명 이상). 애초에 신전 터였으며 지금 건물은 세 번째 교회임. 첫 번째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완공되었으나 40여년 만에 화재로 소실(360년 2월~404년 6월). 두 번째 교회는 3중 성벽을 쌓은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지어졌는데(415년 10월), 117년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거의 축출될 뻔했던 니카 반란 당시 소실 파괴되었으며(532년 1월), 그 잔해가 서쪽 입구 지하 2미터 등에 있다.

현 건물은 532년 2월 23일에 짓기 시작하여 537년 12월 27일에 봉헌됐다.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판테온과 함께 가장 잘 보존된 고대 건물. 설계 기간 포함하여 5년 10개월, 최단 기간에 건설. 916년간 기독교(그리스 정교) 성당으로, 482년간 이슬람 모스크로, 1935년부터 현재까지 박물관으로 사용.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식 방문하는 등 이스탄불을 찾는 이들의 기본 방문 코스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첫 예배를 드리던 봉헌식 날, 건물의 웅장하고 찬란한 자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성경에도 나오는 솔로몬 왕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더 장엄하고 훌륭하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는 말이다. 하기아 소피아를 황제가 이렇게 찬탄한 이유를 알아보자.


 

<건축사적 의미>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 BC 8세기(호메로스 시대)에 출현한 이래 1300년 동안 발전한 모든 예술적 형태의 총집합이다. 하기아 소피아 건립 이후 1000년간 기독교 교회의 전형이 되었으며 오스만 터키의 모스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전까지는 신 중심, 또는 제사장이나 황제, 군왕 등 소수의 사람만이 신과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설계된 바실리카형 사원이나 교회여서 신상을 앞에 두고 직사각형으로 지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모든 이들이 신과 가까운 곳에서 신에게 직접 기도 드리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하기아소피아는 이를 반영했다. 중앙집중형 바실리카 교회 또는 바실리카형 중앙집중 교회라 부를 수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Anthemius ;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 변호사, 건축가, 실질 설계자 및 총감독)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Isidorus ; 수학자, 구조물 전문. 포물선 이론 창안, 컴퍼스 활용,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특징>

안밖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중앙 돔(후술)과 대리석, 모자이크(후술)로 대별된다.

대리석 기둥들은 고대 신전에서 가져온 것, 직접 만든 것, 잘라서 붙인 것 등을 썼다. 반암(盤巖, Porphyry)은 황제의 돌이라 칭할 만큼 초록빛과 붉은 보라색을 띠는데 6세기 때는 더 이상 채취가 안돼 다른 곳에 있는 것들을 가져와 재사용했다. 대리석 기둥 위 주두 부분은 흰 대리석으로 아칸서스 나무잎들이 물결치듯 흔들리는 모양이다. 이 대리석들은 모두 마르마라 섬(마르마라 바다 위의 가장 큰 섬, 당시 이름Proconnesus)에서 채석한 것. 그래서 '마르마라 대리석'이라 하고, 또는 대리석 자체를 '마르마라'라고도 함. **숨은 그림 찾기 ; 그래도 황제는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 이 코린트식 기둥머리 위에 황제(유스티니아누스)와 황후(테오도라)의 표식(모노그램)을 해두었다. 아칸서스 나무잎들이 황제(황후)를 향하여 일제히 절을 하는 듯 바람에 날려 굽어 있다. 남쪽 본당 1,2층 기둥들 가운데에 있다.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의 모노그램들. 남쪽 홀 중앙 나이브에서 본 모노그램(왼쪽 사진), 남쪽 버트레스와 동남쪽 콘치 사이 중앙 기둥에 있는 모노그램(가운데 사진), 남쪽 홀 중앙에 있는 모노그램(오른쪽 사진).

 

 

본당 뒤 남쪽 홀 중앙 기둥에 있는 테오도라 황후의 모노그램(왼쪽 사진)과 남서쪽 콘치 중앙에 있는 테오도라 모노그램(가운데 사진) 및 건립 일자 모노그램(오른쪽 사진).

 

 

내가 직접 찍은 모노그램 사진. 왼쪽이 테오도라, 오른쪽이 유스티니아누스의 모노그램이다. 위의 흑백 사진들과 모노그램 문양을 비교해 보기 바람.

 

사면 전체 벽은 마르마라 대리석인데 물결치듯, 구름 가듯 연속적으로 이어지거나 서로 마주보듯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는 6세기 당시 장인의 수준 높은 기술력과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 다른 모든 화려한 것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 건물의 값진 자취이다.

 

<찬사>

....빛나는 믿음의 광선 / 향기로운 설법 / 진정한 신앙의 상징 / 가장 바람직한 신성한 장소 / 거울처럼 빛나는 내부의 황홀함...=Sa’aded-Din (오스만 역사학자,1550년대)

....천국에있는 돔의 복제품 ...=Romanus(16세기 저명한 성가 작곡가)

....잿빛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배, 아치, 성스러운 집의 둥근 투구, 천국의 빛나는 지붕...=Paul the Silentiary(10세기, 비잔틴)

.....천상의 예루살렘 , 지상의 하느님 왕국...=Eusebius


그 빼어난 묘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압권은 동시대인 프로코피우스의 헌사다. 일부를 여기 소개하면....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고, 더 높은 곳에서 닻을 내린 배처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전망대에서 보는 것처럼 도시 전체를 굽어보고, ...아름답게 빛난다. 어느 누가 이 기둥들과 대리석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꽃이 활짝 핀 봄날이라 연상할까....어떤 건물보다 더 두드러지고, 훨씬 우아하고, 웅장함과 균형미가 조화로우며 모든 것이 지나침도 부족함도 없다.... 태양광에 의해 빛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빛이 내부에 머물면서 이 안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사원을 밝게 비춘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는, 신을 숭상하는 신비로움을 표현.... 천장은 전부 금으로 입혀 아름다움에 영광을 더했다. 둘레에 반사되는 빛이 퍼지면서 금과 경쟁적으로 빛난다. ...누구라도 이 성당 안에서 기도하라. 들어갈 때마다 이곳은 어떤 사람의 힘이나 기술이 아니라 신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이곳에 머물기를 특히 좋아할 것...."<555년 가이사라(Caesarea) 출신의 역사학자 Procopius가 황제의 명을 받아 작성> (다소 길게 인용했지만 원문은 3페이지가 넘는 분량임)

 

((심화과정))

1)돔(dome)에 관해서

중앙 돔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렇게 큰 돔은 일찍이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이 웅장한 돔은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이자 비잔틴 제국의 권위, 동로마 제국의 영속성을 나타낸다. 이 엄청난 돔을 4개의 큰 기둥 위에 세운다는 것은 건축공학적으로도 혁명적인 일이었다. 로마의 판테온 신전도 원형 돔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360도의 벽이 돔을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건축학적으로는 비교가 안 된다. 더구나 하기아 소피아처럼 기둥으로 하늘의 돔(56미터 높이)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힘의 분산이 필요했으며, 크고 작은 여러 아치가 등장하여 이 건물을 구조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원형의 큰 돔과 반원형 아치들, 그 사이에 다시 소형의 반원 돔 아치들, 그리고 또 그 틈을 메우는 펜던티브, 이렇게 겹겹이 포개진 꽃송이처럼 둥글게 위로 향하며 사이사이의 창문(모두 91개)으로 태양이 비치는 경이로운 자태는 그 이전 어디에서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돔의 바깥 꼭대기엔 황금 십자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 기독교의 상징은 1453년 메흐메드 2세의 정복 이후 초승달 표시로 교체되었다. 첫번째 돔은 불행히도 완공 21년 후 다른 부분과 함께 지진으로 붕괴된다.

재건을 위해서 전문가를 찾았더니 이미 감독관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다행히도 첫 설계 감독관의 조카인 동명의 이시도루스가 같은 일을 하고 있어 그를 책임자로 임명, 복원 사업도 신축 사업만큼이나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특징>돔이 더 높아졌다. 지붕(돔)이 무너진것은 높이가 낮았기 때문이라는 진단에 의해서이다.

20비잔틴피트만큼 돔 기초를 보강하고, 펑퍼짐하게 올라갔던 모습을 날렵하게 하여 받치는 힘이 가도록 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6.22미터 높아졌다(20x0.31=6.22미터).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돔 일부가 내려앉았으나(989년, 1346년) 높이와 모양은 더 이상 변경하지 않았다. 돔의 지름은 100비잔틴피트로 설계했다. 10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 때문이었다.(그러나 몇 번의 재건축 및 수차례의 지진을 거치며 돔은 남북 30.9미터, 동서 31.8미터가 됨.)

안에서 고개를 들어 돔을 보면 아랍어가 기하학적 무늬처럼 돔을 장식하고 있는데, 코란 23장 무으민(믿는 사람들)의 경구다.

여기서, 비잔틴 시대에는 돔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당연히 갖게 된다.

하늘로 향하는 가장 높은 곳을 비워둘 리 만무하고, 오스만이 코란 구절을 쓴 것만 보더라도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최초의 감상기라 할 수 있는 프로코피우스의 헌사를 보면 "돔은 황금으로 빛난다"고 하여 금박 모자이크가 돔을 덮었음이 확인된다. 하산 박사 말에 의하면 현재의 돔 글씨와 무늬 내부를 투시기로 정밀 검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터키에서 발행된 책자에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가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까지 중앙 돔에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아흐메드(Ahmet) 1세 때 회반죽으로 천장 돔을 덮었다고 한다.(1607~1609년). 중앙 돔 아랍어 글씨는 당시의 명필 이브라힘(Ibrahim) 작품이다. 그 이후 1847년 포사티 형제가 전면 개보수를 하면서 흰색(이슬람 사원의 보편적 색)과 노란색(비잔틴의 대표적 색)을 덮어씌웠다. 그 이미지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현재의 돔>

돔의  맨 아래를 40개의 창문이 밝게 비추는 획기적인 구도이다.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참석자들에게 신을 경배하기에 충분한 감동을 주었고, 프로코피우스 말처럼 햇빛이 여기서 생성되고 가두어져서 사람들을 에워싸는 신비감 속에 머물게 하였다. 첫번째 돔의 붕괴(558년) 후에 돔 밖에서 버트레스(Buttress ; 지지대)를 설치하면서 창문 몇 개가 가려져 밝기가 떨어졌다. 수차례의 지진과 수리로 돔이 완전한 원형을 이루지 못하고 황금 모자이크도 많이 떨어져나갔다. 사진에서 밝게 빛나는 부분이 황금 모자이크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채색한 유리거나 물감 등으로 색을 낸 부분이다.

 

<하기아 소피아 조감도(17세기)>

*돔에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가, 4면에는 세라핌이 있다.

이는 하기아 소피아 전체 모습을 상상하는 데 매우 적절한 그림이다.

 

2)빠른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테오도시우스 교회)가 전소되고 나서 그 자리에 전혀 다른 새 건물을 짓기 위한 첫삽을 뜨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40일. 로마 지배권 전 영역에서 장인,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었으며, 공사 방식은 남북에 각기 5,000명의 노동자가 경쟁적으로 투입되었다. 건설 공사비로 14만5000킬로그램의 금이 들어갔다.

설계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거나 설계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된 것 같다.

1년 반 만에 13미터까지 올라갔다. 거대한 버팀벽(Buttress)과 위쪽 볼트(둥근 아치형 천장 부분)의 일부분은 두껍게 회반죽을 입힌 벽돌로 이루어졌다. 버팀벽 상층부, 거대한 아치와 돔을 세우는 데 3년 반이 걸렸는데, 이는 회반죽이 굳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내려앉음 현상과 휘어짐 현상(Settling)이 발생했다.

공사 현장에 매일같이 나타나 채근한 황제의 조급함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방 외부에 있는 버트레스는 비잔틴 시대부터 오스만 시대까지 줄기차게 계속 보강되었다.

처음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외관이지만 사방으로 튀어나온 버트레스로 인해 쉽게 감탄사가 나오지 않는다.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구인 서쪽은 지금처럼 회반죽과 분홍색 블록으로 된 것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는데 오스만 정복 이후 뜯어내거나 훼손된 것이다. 바깥 나르텍스 앞으로는 42미터 정도 서쪽으로 주랑이 있었고 황궁에서 나온 황제는 이 주랑을 통해서 교회로 들어갔다. 주랑과 교회당 사이에는 실내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3)모자이크 연구

형상을 새긴 모자이크는 기대만큼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수많은 지진, 성상 파괴 운동, 제4차 십자군의 강탈, 오스만군의 파괴 등으로 인해서이다. 그러나 본래는 대리석이 아닌 벽과 천장은 전부 모자이크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려하고 찬란한 모자이크로 채색돼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 지을 적엔 사람 형상 모자이크를 만들지 않았다. 초기 교회의 전통에 따라 형상을 만드는 것에 반대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함께, 빨리 건물을 완공하고 싶은 황제에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 형상 모자이크는 우선 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용된 모자이크 량은 엄청나다. 우선 금 모자이크만 1억5000만개(Mosaic cubes)이며 금 테세라 방식(*1)으로 하였고, 광택, 무광택 두 종류를 각도와 방향에 따라 설치하는 획기적인 기법(*2)을 사용했다.

*1)작게 만든 모자이크 조각일수록 더 귀하고 값지다. 이를 '테세라(Tessera, 복수형은 Tesserae 테서리 ; 각석, 조각)'라 하는데 시대가 지날수록 테세라 크기가 커진다. 예술성은 경제력과 직결되는 모양이다.

*2)돔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최고의 지혜와 기술이 필요했다. 로도스 섬에서 채취한 매우 가벼운 흙에 적은 분량으로 높은 효과를 보기 위해 애쉬 트리(Ash Tree) 잎사귀를 삶아 즙을 내어 섞어 접착제로 썼다.(*모자이크 부착 방식은 <다. 디시스> 편에서 설명) 

성상 파괴 운동 (Iconoclasm ; 726~843년)으로 형상 모자이크는 철저히 파괴되었고,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2층이나 높은 곳에 있다. 하기아 소피아의 남아 있는 형상 모자이크는 모두 843년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비형상 모자이크는 현재까지 존재하나 이것도 1847년 포사티 형제가 복구 작업을 하면서 회칠로 덮어 버린 것이 많다.

무슬림의 형상 금지에도 불구하고 중앙 돔의 권능자 예수 그리스도 (Pantokrator Jesus Christ), 삼각면 팀파눔의 모자이크는 17세기 말~18세기 초까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위 그림 참조) 

**여기서는 형상화된 모자이크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과 일반 관광객들이 놓치기쉬운 몇 개를 선택적으로 설명드림.


<가. 예수와 현자 레오 6세>


9세기 말, 황제의문 위 반달 모양의 벽면(Lunette).

그리스 정교회는 후원자를 정문 출입구 위에 그리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 모자이크 치고는 장인의 솜씨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성상 파괴 운동 이후라서 아직 기술자·전문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깔끔한 성격이라서 주요 자리에 있지만 예술성이 떨어지는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그림은 손과 발이 비례에 맞지 않게 큰 반면에 머리는 작아 작품성은 다소 떨어진다. 예수 좌우의 원형 속엔 성모와 가브리엘 천사를 넣어 레오 6세가 비록 예수에게 비굴하게 탄원하는 모습이지만 그림 속 유일의 인간으로 지상 최고 권력자임을 은연중에 부각시켰다. 예수는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며, 왼손에는 성경을 펼쳐 들고 있다.   "평화가 그대에게."(요한복음 20장 19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요한복음 8장 12절)


<나. 성을 바치는 황제, 교회를 드리는 황제>

비잔틴 역사에 길이 남을 두 황제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를 헌상하는 모습으로서 도시와 교회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인상적인 모자이크이다.

뒤 명문에 있는 것처럼 기독교 성인과 같은 반열에 있는 "걸출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왼편에 보이고, 오른쪽에는 비록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지만 성인으로 추대된 "성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는 좌우의 둥근 메달에 성모(The Mother of God)라고 새겨져 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 자세, 옷 등이 인상적이다. 무거운 옷감을 부드럽게 걸치고 얼룩 주름으로 광택나는 비단 옷은 황제들이 입는 자줏빛이며, 발받침은 은색이 적절히 배치된 모자이크로 구름 위 같은 느낌을 주어 속세와 거리를 둔다. 10세기 후반 작품이며, 서남쪽 현관 연결 통로 문 위에 있다. 급히 돌아가는 이들이라도 꼭 보고 가라고 거울을 비치해 반사되도록 배려(?)했다.


<다. 디시스 ; the Deesis, Deisis>

기도 또는 간청, 탄원이라 하는데 비잔틴 그림(이콘)의 중요 특징 중 하나이다.(구간 본문 237쪽 참고, 개정판 없음)

예수 좌우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류의 구원을 탄원하고 있다. 예수는 왼손에는 성경을 쥔 채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다.


디시스(간청·탄원) 모자이크 또는 이콘은 비잔틴에서시작하여 전 정교회국가와 교회에 전파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의 변화가 온다. 예수 좌우로 성모 마리아와 세레 요한뿐만 아니라 대천사 가브리엘, 으뜸 제자 베드로, 사도 바울 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예수의 모습이나 전체 구도도 조금씩 달라진다.

하기아 소피아의 2층 남쪽 갤러리에있는<디시스>는 비록 상당 부분 모자이크가 뜯겨져 나갔지만 그 중 걸작으로 추천하고 싶다. 언제나 관람자와 시선을 마주치도록 한 비잔틴 기법이 더하여진 예수의 눈은 슬픔과 비애에 젖어 있어 거룩한 하느님보다는 인간,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예수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인 오른쪽 세레 요한은 고뇌에 찬 슬픔이 온 얼굴 가득하다. 아래로 수줍게 내려오는 마리아에게서는 따뜻한 인간의 피, 부드러움과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좁고 부드럽게 오똑한 코, 작고 붉은 입술, 갸름한 볼과 턱선, 초승달 눈썹에 크고 맑은 눈은 비록 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모를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창문 가까이 빛이 들어오는 쪽에 있는 성모의 모자이크는 무광택으로 처리하여 빛을 등지고 있는 성모의 표정을 다소 어둡고 더욱 진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수 후광의 십자가를 반사각도를 달리하는 모자이크로 처리하여 중앙의 예수가 더욱 빛나도록 하는 등 모자이크 기법의 탁월성이 돋보인다. 마리아 쪽이 크게 뜯어져 훼손된 점이 안타깝다. 13세기 중엽~14세기 초기 작품으로 1261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비잔틴을 수복한 후 문예부흥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 이전 즉 12세기 중엽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모자이크를 파괴, 훼손한 장본인이 누군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13세기 중엽 이후 작품이라면 15세기 중엽 이후 오스만에 의한 파손이고, 12세기 작품이라면 4차 십자군의 소행으로 봐야 한다.필자 생각으로는 제작 시기는 미술 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전자에 해당되고, 정복 이후 오스만의 행태로 미루어 보면 인위적 훼손이 아니라 지진 등으로 인한 자연적 훼손과 회칠로 덮어 씌운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모자이크가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닐까 싶다.


<라. 세 사람의 황제와 결혼한 조에 황후>

작품으로서의 모자이크라기보다는 흥미 있는 역사적 인물 탐구용 모자이크가 남쪽 갤러리 마지막 베이(교각 사이, 칸막이 사이)에 있다. 11세기 중반~12세기 초반 작으로 황제와 황후가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권능자)에게 상징적인 선물을 드리고 있다. 머리 위의 명문대로 보자면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로마의 절대 왕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가 은주머니를 , 그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한 "가장 경건한 황후 조에 오구스타"는 특권 두루마리를 봉헌하고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얼굴 모자이크가 결혼할 때 마다 계속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누스(Romanus) 3세(1028~34년), 미카엘(Michae) l4세(1034~41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9세(1042~55년)로 얼굴이 계속 바뀌었다.

[여기서 잠깐, 질문 하나) 모자이크 상에서는 20대의 앳된 얼굴을 한 조에가 세 번째 남편과 결혼했을 때는 몇 살이었을까요? 답)조에 황후는 황제로서의 첫 남편(로마누스 3세)과 쉰 살에 결혼했고, 세 번째 남편(콘스탄티누스 9세)과 혼인했을 때는 64세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젊음을 유지하고 자기보다 어린 황제(들)와 살기 위해서는 건강과 피부 관리를 위한 특별한 비법이 있지 않았을까.]

조에로서는 새 남편을 새겨야 했지만, 잠시 집권한 미카엘 5세(1042~42년)는 그의 정적인 조에와 미카엘 4세 얼굴을 파괴시켰다. 재집권한 조에가 자기 얼굴의 복원과 함께 새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를 새겨넣었다. 이때 예수 얼굴도 두 사람간 조화를 위해 고쳤다. 모자이크를 자세히 보면 얼굴 부분이 리메이크된 것을 알 수 있다.


<마. 최고의 성모 모자이크>

역시 남쪽 갤러리 마지막 베이에 앞 그림과 나란히 있어 발을 조금만 옮겨도 되고 비교하기도 쉽다.

성모와 아기 예수, 요한 2세 콤네누스 황제와 황후 이레네.

요한 2세(1118~43년)가 대관식을 하던 해에 제작된 듯. 황세자 알렉시우스가 바로 옆에 있다.

성모 마리아는 가운데에 우뚝하게 있으며 진한 파란색 성의에 정숙하고 침착한 모습이다. 얼굴은 매우 어리게 표현되었다. 다빈치 작품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보다는 나이가 들었지만 다빈치 그림에 영감을 주지 않았나 싶다. 성모 얼굴 중 최고 수준의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성모는 황제 복장에 진주 보석 등으로 치장하고 있다. 사치스러우나 남성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몸선과 몸매를 강조하지 않을 때 택하는 방식이다.

황금 주머니를 든 황제는 "하느님의 충실한 왕, 황손으로 태어난 로마 제국의 독재 권력자 콤네누스". 붉은 머리의 "신실한 황후, 이레네"는 두루마리 문서를 쥐고 있다.


<바. 세라핌을 아시나요?> 

본당(Nave)에서 설교단(Apse)으로 향하는 급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펜던티브(pendentive ; 삼각궁륭, 비잔틴 교회 건축물에서 정방형 평면 위에 놓이는 원형 돔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에서 크고 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이상한(?) 형체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돌아서면 4개 벽면에 모두 이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세라핌(Seraphim)이다.


천사 중에서 제일 품계가 높은 치품 천사로서 여섯 개의 날개가 있다. 두 날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성경에는 '스랍'으로 표현됨. 이사야 6장 2~7절 참고) 모자이크 그림 중 제일 큰 모습이다. 자세히 보아야 모자이크임을 알 수 있다. 좀 더 관찰하면 동쪽의 두 개는 비잔틴 때 있던 것이지만 서쪽 세라핌은 그후 복사본으로 그린 것이다. 포사티 형제가 보수 작업(1847~1849년)을 하면서 세라핌의 얼굴에 별 모양의 노란 마스크를 씌워 놓았다. 필자가 2009년 방문했을 때는 동북면의 세라핌은 수리 작업 중이라 볼 수 없었는데 2010년 다시 갔을 때는 세라핌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나머지 세 개는 여전히 마스크를 씌워 놓은 상태) 세라핌을 자세히 관찰하면 날개의 색깔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지진으로 파손된 부분을 복구 보완했기 때문이다.

<사. 모자이크는 떨어지지 않는가>

모자이크의 압권은 단연 중앙 돔(메인 돔)이다. 지상 56미터의 높이여서 곧추 쳐다보는 데만도 고개가 아프다. 이곳이 빛나는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니 그 찬란함이 어떠했겠는가.

그 돔 전체 면적 1900평방미터 중 1000평방미터가 여전히 모자이크로 남아 있다.

기둥도 없는 허공에 천장이 떠벋쳐져 있는 형태인 돔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최고의 지혜와 기술이 필요했다. 첫째, 천장의 흙과 돌이 가벼워야 했다. 전국의 토양을 조사한 결과 로도스 섬에서 채취한 흙이 가장 가벼웠다. 이 흙에 접착제를 적게 쓰면서도 높은 효과를 보기 위해 애쉬 트리(Ash Tree) 잎사귀를 삶아 즙을 내어 섞어 썼다. 실제 조사 결과 접착력이 뛰어나고 유연하면서도 가벼워 지진에 매우 강했다. 애쉬 트리는 현재도 서쪽 출입구 휴게소 쪽에 두 그루가 서 있다.(구간 316쪽 쪽 참고, 개정판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여 지은 지 21년째 되던 해에 돔이 무너지고, 19세기까지 천장에서 모자이크가 떨어지는 소리를 예배 중에도 들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구성 ; 작게 만든 모자이크 조각(테세라)일수록 더 귀하고 값지다. 테세라의 원형은 아래 그림과 같다.


<아. 제단은 어디로 향하는가>

거의 모든 제단(앱스)은 동쪽을 향한다. 해 뜨는 방향이라서? 정답은 예루살렘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오스만 지배 이후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전환되면서 그 자리에 미랍(Mihrab) 과 민바르(Minbar)가 설치된다. 자세히 보면 미랍은 앱스보다 약간 오른쪽에 위치하고, 그 오른쪽에 민바르가가 있다. 민바르는 예배볼 때 이맘이 계단에 올라가 코란을 읽는 곳이고, 미랍은 그곳을 중심으로 절하는 곳(경배소)이다. 미랍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를 향한다.

호기심 많은(?) 하산 박사가 이를 정밀 측정해 보았더니 앱스도 미랍도 각도가 각각 틀렸더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앱스와 미랍 사이의 각도를 15도 더 동남쪽으로 틀었는데(제단석도 15도만큼 각도를 틀어 약간 높이 쌓았다) 실제로는 3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정확히 하려면 예루살렘은 앱스보다 25도 더 동남으로 향해야 하고, 미랍은 11도 메카 쪽으로 덜 내려왔기에 동남으로 올려야 한다. 또 당시 나침반이 11도 정도 차이가 나고 1500년 또는 500년 사이에 북극점이 좌표 이동한 점 등을 감안하면 아주 복잡하기에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자. 종탑이 있었는가>

동로마 교회에는 원래 종탑이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책에 1453년 정복 전쟁 당시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종탑들이 울렸다고 썼다. 사실이다. 14세기부터 종탑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교회 중앙 현관문 위에 설치된 종탑이 19세기에 철거되었다.

메흐메드 2세는 정복 이후 교회의 존속 조건으로 새로운 교회도, 종탑도 세워서는 안되고 종을 쳐서도 안된다고 했다. 모든 교회는 그대로 따랐으며, 일부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종탑을 제거한 곳도 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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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Fake Canada Goose 2014.10.31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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