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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김영삼(YS)과 김대중(DJ), 두 영웅적 야당 지도자 이야기부터 잠깐 하자. 지도자의 자질과 역량이 충분한 분들이지만 박 대통령 쪽에서 키워준 측면도 적잖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치권력과 그 하수인들은 그들을 집요하게 괴롭혔고, 그들은 끈질기게 버텨냈다. ‘인동초’(忍冬草·DJ)와 ‘닭의 목을 비틀어도’(YS)가 각각 고난의 정치 역정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이런 탄압과 고통 가운데서 국민적 동정과 지지를 한몸에 받으며 한국 현대 정치사에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렇다, 돌아보면 공과(功過)와 명암(明暗)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던 시대였다. 두 야당 지도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투쟁과 희생으로 우리는 산업화의 기반 위에 민주화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다. 핍박받는 지도자에겐 언제나 국민의 동정 어린 시선과 지지가 따른다. 연민에 바탕을 둔 지지는 철옹성 같은 지지층을 형성한다. 그런 시대에는 국가 경영이나 중장기 비전, 민주 시민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등을 숙고하며 체득할 시간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목숨을 건’ 생존 투쟁과 저항 말고는 독재에 맞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두 분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고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오랜 경험, 성찰과 단련, 좋은 동지들, 참모진의 조력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3년도 남지 않았다. 어떤 후보가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국정 경험을 쌓고 경륜을 닦아나가도 모자랄 이 시기에 오늘의 정치 환경은 전망을 어둡게 한다. YS나 DJ 같은 출중한 지도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들과 그 시대 정치 유산을 답습하려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고 스마트 기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한다. 게으르고 방만한 대의민주주의에 직접적인 도전과 위협을 가하는 전자민주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우리 정치는 이런 세계적 조류와 시대적 흐름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가. 고답적인 자세로 ‘창조경제’를 외친들 창조도 경제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아픈 곳을 찾아가 눈물 흘리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하지 않거나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한 양 착각하고 있다. 호통치고 옷 벗기는 것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따름이다. 이 또한 그분들 시대에나 통했던 일이다.

사회는 저만큼 앞서 가고 국민은 저 높이 보고 있는데 우리 정치는 아직도 그 시대 그 시절 눈높이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집안싸움, 계파 정치, 진영 논리에 갇혀 기득권에 안주하는 한 희망은 없다. 제1야당 전당대회에 국민이 냉담한 것도, 여당 최고회의가 뉴스 가치를 잃은 것도 형식과 내용을 바꾸라는 시대적 요구를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최근의 건강보험료 말 바꾸기,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 연말정산 파동 역시 마찬가지다. 장관은 소신이 없고 담당 공무원은 나 몰라라 한다. 청와대나 국회·정당이 변죽만 울리고 껍데기만 건드리니 공무원들은 의욕을 잃고 현장만 모면하자는 식이다. ‘수요자 중심, 국민 최우선’ 개념은 머릿속에만 있지 가슴에는 없다. 3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모두 민주화의 그늘에 안주해 과일 따 먹기만 해온 결과다. YS·DJ 이후 우뚝한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나 같은 정치인이 행세했던 ‘좋은 시절’은 이제 끝났다. 세상은 뒤처진 정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도, 동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3년 뒤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되려면 지금부터 새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과거는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다. 국회는 경쟁과 협조, 비판과 통합의 정치를 추구하고 또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이 광속(光速)의 시대에 대의정치가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마침 국무총리 후보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는 청문회가 될까 봐 염려스럽다. 제대로 듣고 또 들으려면(聽聞·청문) 수준 있게 물어야(質問·질문) 한다. 국민은 후보자를 검증하는 국회와 그 지도부를 검증할 것이다. 한 가닥 기대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서 말이다.


김형오 / 부산대 석좌교수·前국회의장


2015.2.3 [문화일보] 시평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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