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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한국핵정책학회 추계학술대회 격려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



친애하는 한국핵정책학회 회장 및 회원,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 한반도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으로 625 전쟁 이래 최대 안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시기에 한국핵정책학회가 기로에 선 한국, 핵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최고 전문가들의 기탄없는 토론과 진단 그리고 명쾌한 처방을 기대합니다.


    사진제공 : 파이낸셜 타임즈


전문가도 아닌 저는 오늘 아침, 왜 이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먼저 제 이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그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랜 기간 정치권에 몸 담았고, 대한민국 의전 서열 두 번째인 국회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어느 정당, 어느 정파에도 소속돼 있지 않습니다.


20년 남짓한 국회의원 생활 초반 10여 년 동안 저는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정치외교학도였던 저는 왜 전공과는 거리가 먼 이 분야에 종사한 걸까요? 대한민국을 살릴 미래의 먹거리이자 성장 동력은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상임위에서 2년 정도 활동하다가 다른 상임위로 옮기는 것이 당시 국회의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관례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줄곧 과학기술 그리고 정보통신 분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이 분야에 문외한이던 저는 매년 국정감사 우수 위원으로 선정됐고, 몇 가지 자부할 만한 업적도 쌓았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저는 상임위 경험을 살려 아랍에미리트(UAE)로 날아가 그곳의 실질적 통치자인 모하메드 왕세자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한국의 원자력은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으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값싸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지을 수 있고 지은 후에도 가장 경쟁력 있고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돼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습니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 후 1년도 안 되어 한국 대통령과 모하메드 왕세자는 아랍에미리트에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정식 합의했습니다. 석유 부국 UAE가 사막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장기 비전하에 우리 기술로 만든 원자력발전소의 완전 가동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적어도 한 곳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익히고 관계자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위도 방폐장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저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당시 여당의 실세 정치인들과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정치 생명을 걸고 위도 중저준위 방폐장 설치를 반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경 보호를 내세운 시민단체는 물론 다수의 군민들도 격렬한 반대 시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야당 의원인 저도 곤경에 처한 정부를 수수방관하거나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도 방폐장 설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며칠간 제 의원회관 사무실은 마비 상태였고, 저는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중저준위 방폐장이 많은 인센티브를 받고 경주에 설치키로 한 것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위도 방폐장 문제가 불거지기 2년 전쯤 스웨덴의 방폐장을 직접 시찰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여름철이라 안내자나 저나 모두 반팔 차림으로 가운조차 걸치지 않고 암벽 동굴 속에서 한 시간을 시원하게 보내다 나왔습니다. 동행한 스웨덴 대사와 제 아내 역시 간편복이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쓰다 버린 장갑장화옷가지마스크 등을 압축해 기밀용기에 담아 보관하는 곳이 위험하다 못해 금방 방사능에 오염된다면 우리 부부는 벌써 이 세상에 없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참석자 여러분!

제 고향은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밀집한 부산입니다. 집안 어른친척조카친구들이 두루 살고 있습니다. 부산울산경주는 500만 명의 인구 밀집 지역이며, 산업·문화·역사의 중심지입니다.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난다면 큰 문제지만, 지난 40년간 한국의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 중 단 한 곳도 방사능 유출 문제로 심각한 사고가 났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우는 없습니다. 기차 사고, 비행기 사고, 빌딩 화재도 발생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집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숙명입니다. 사고가 두렵고 필연적이라면 비행기와 기차도 세워야 하고, 대형 빌딩은 출입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또 원전의 안전이 문제라면 서해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의 원전에 대해 짓지 말라고 강력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와 서해바다를 마주하는 중국은 원전 35기가 가동 중이며, 2030년까지 무려 100기를 더 지어 원전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원전은 거의 대부분 한국 서해 바다와 맞닿는 중국연안에 위치합니다. 바람은 언제나 중국 쪽에서 불어오고 조류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만 원전을 안 짓는다고 피해가 안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쌓아올린 원자력 발전 최첨단국 한국의 위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가당치도 않은 논리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선동과 감정과 허구로 짜인 각본에 놀아나는 대한민국이라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힘듭니다. 나라의 미래와 경쟁력과 비전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책이 이대로 추진된다면 한국의 미래가 얼마나 어둡게 될지, 또 한국의 추락이 어느 나라를 더욱 이롭게 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자리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

우리는 요즘 정말 불안합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우려 때문이 아닙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때문입니다. 북한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 간의 말 폭탄이 언제 한국으로 방향을 틀지 알 수 없습니다. 양쪽은 핵을 가지고 서로를 겨누는데, 우리는 핵도 없고 비핵화가 기본 정책입니다. 싸우지 말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외교학을 수십 년간 공부하고 현장에서 정치를 해온 사람입니다. 또 역사를 좋아합니다. 제가 아는 정치학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힘센 나라를 끌고 간 경우가 없었으며, 제가 본 역사책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자기보다 강한 나라를 침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쟁과 싸움은 상대가 만만하고 깨뜨릴 수 있다고 판단할 때 생기는 것이지 지려고 싸우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평화가 말로써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화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2500년 전의 정치인도 자유를 지킬 용기를 시민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 페리클레스보다 조금 앞선,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명령에 의해 싸웠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지불할 용기나 용의가 있는가요? 자유는 공짜로 숨 쉬는 공기 같은 건가요? 아니,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인가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성립하는 냉혹한 국제정치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아니면 상대가 핵을 못 가지게 하고 못 쓰도록 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몇 개 있다고 결코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놓은 원자력 기술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면 우리는 원자탄은 물론 그 용도가 무궁무진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대열에서도 낙오될 것입니다. 이는 북한이 원자탄을 만들었다고 해서 더욱 고도의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는 원자력 발전소를 제대로 짓거나 운영할 수 없는 이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는 치열한 경쟁시대에 접어 들었는데 우리는 우리의 특장점마저 땅에 파묻어려 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1000년 제국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오스만 튀르크가 새로이 융성하는 역사적 사건에 빠져 있었고 이것을 책으로 냈습니다.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과분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분명한 한 가지는, 나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흥할 때는 흥하는 이유가 있고 망할 때는 망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시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죽어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뇌이며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고 역사 앞에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참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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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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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헌기 2017.09.30 1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이지, 이 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무 명명백백한 사안이기에 철회하는 걸로 짐작합니다만, 가만히 있으면결코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반대 서명했습니다. 좋은 성과 거두고잘 다녀오세요.

  2. 나라가 2017.10.03 0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친건지 아님 북한만 중한건지
    40년넘게 투자해서 일귀낸 기술력을
    지손으로 박살내겠다는
    한심한 정부 어느나라 정부인지 한심하네요.
    진짜 쑈나하고 앉았으니


‘백범의 길’을 따라 걸은 1박 2일


 

- 김 형 오 -


출간을 준비 중인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가제) 집필진과 함께 마곡사(麻谷寺)를 찾았다.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마곡사는 치하포 의거(1896년)로 수감되었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년) 선생이 1898년에 탈옥한 후 반 년 정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승려 생활을 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우리가 마곡사에 간 날은 마침 김구 선생이 태어난 날(8월 29일)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백범일지』에서 마곡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특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世間)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간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어느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심정을 보는 듯했다.

김구 선생이 속세를 떠나 마곡사에 들어갈 당시의 심경을 떠올리며, 우리도 복잡하고 바쁜 도심을 떠나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마곡사에 도착하자 주지인 원경(圓鏡) 스님이 직접 나와 맞아주셨다. 선생(원종)이 머물렀던 절의 주지가 법명이 비슷하여 더욱 호감이 간다. 스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마곡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인 일양(溢洋) 스님의 안내로 마곡사 순례를 시작했다. 넘칠 일(溢)자와 바다 양(洋)자를 쓰신다는 일양 스님. 바다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사찰 안에서 장난삼아 ‘쓰나미’라고 불린다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스님의 안내로 처음 만난 것은 대광보전(大光寶殿)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이었다. 라마교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그래서인지 이전에 봐왔던 석탑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첫 인상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는 느낌도 들었다.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에 상부는 라마교 형식을 그대로 닮은 구리로 된 조형물을 올렸다. 풍마동(風磨銅)이라는 원나라 제품이라 한다. 티베트·네팔 등지에서 보던 스투파 형식의 구리 불탑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다. 탑 주변에는 아직도 붉고 노란 꽃이 한 꽃송이에 피어 있는 화초들이 우리를 반긴다. 꽃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 하여 ‘금관화’라는데 외래종이다. 

         금관화 둘레와 오층석탑, 심검당과 대광보전                고려석탑과 원나라 양식이 결합된 오층석탑과

                                                                                 상부의 풍마동


                             금 관 화                        대광보전 현판 : 표암 강세황의 낙관이 뚜렷하다

오층석탑을 본 후 대광보전으로 향했다.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이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13년(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년)의 현판이 도드라진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불상이 불전의 가운데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모셔진 불상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 관람객은 놓치기 쉽다며 스님이 직접 불상 뒤로 안내한다. 앞의 불상 크기의 커다란 관음보살상이 지그시 내려다본다. 앞에는 진리와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불상, 바로 뒤에는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 그림, 절묘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대광보전 안의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비로자나불               관음보살 그림


법당 불상 앞바닥에는 앉은 뱅이가 걸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짰다고 하는 삿자리(갈대 또는 나무를 깎아 엮어 만든 자리)가 인조 카펫 아래 덮여 있다. 물론 앉은 뱅이는 삿자리를 완성한 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대광보전 전면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에 눈길이 간다. 백범이 환국 후 마곡사를 다시 찾았을 때(1946년) 찍은 사진을 보면 색칠을 다시 한 듯 주련 글씨가 선명했지만, 지금은 색이 완전히 바래서 고아(古雅)한 느낌을 준다. 돌아 나오니 친절하게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잘 설명된 안내판이 있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청정함이 극에 이르면 광명이 걸림 없으니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히 비출 뿐이라.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비록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이 유혹을 만날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 주련 :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기둥에 시구(詩句)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주련은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문화유산이다. 사찰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 또는 고승들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주련으로 써 붙인다.

이 중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却來觀世間)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猶如夢中事)”라는 구절은 첫머리에 백범이 마곡사를 찾을 때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간다”는 표현과 겹친다. 마곡사를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어서도 백범은 주렴 구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광보전은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광보전에서 나와 계단을 따라 뒤편으로 올라가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향했다. 마곡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밖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은 이층짜리 건물이었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천장이 높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천장 가운데 유리창을 내어 법당 안으로 자연 채광이 되도록 했다. 바로 그 부분이 밖에서 볼 때 1층과 2층을 구획 짓는다. 이곳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자리하고,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일양 스님이 “이 중 한 나무 기둥을 잡고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서 우리 일행에게도 한 번 해보라고 권유한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인지 기둥에는 윤기가 흐른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유형문화재 제191호)가 봉안되어 있다. 마곡사 옛 스님의 솜씨라는데 그림의 크기도 수준도 보통이 아니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대웅보전은 마곡사의 건물 중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16세기 말 축조되었다고 한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金生, 771~?)의 글씨라는데 증명할 길은 없다.

대웅보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 옛 부처님 나시기 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 의젓한 동그라미 하나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으니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 어찌 가섭이 전하리.
本來非皂白(본래비조백)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으니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도다.

대웅보전 주련

                      마곡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내부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는 일행

마곡사의 중심 불전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을 본 후, 백범당(白凡堂)으로 향했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있을 당시 생활했던 공간은 원래 심검당(尋劍堂)이었으나, 선생을 기려 호를 따 백범당으로 별도 배치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과 친필 휘호 ‘행복(幸福)’, ‘양심건국(良心建國)’ 등이 걸려 있고, 옆에는 김구 선생이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았을 때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백 범 당                                          백범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

심검당은 현재 오층석탑의 오른편, 대광보전 가기 전에 있다. ‘ㄷ’자형 건물인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정면 건물로만 보인다. 마곡사에 여러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서 측면 건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 어느 방에 백범이 기거했을 것이다. 영·정조 시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년)의 심검당(尋劍堂) 글씨가 오른쪽에,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년)의 마곡사(麻谷寺) 글씨는 왼쪽에 나란히 걸려 있다. 해강의 ‘마곡사’ 글씨가 이 절의 로고인 듯 여기저기 해강의 글씨로 표지를 해두었다. 해강의 글씨는 드물게도 대나무 그림이 배경을 이룬다. 삼일만세운동 때 명월관(明月館) 주인(?)인 죽농 안순환(竹儂 安淳煥, 1871~1942년)의 그림이다. 교수들과 함께 가니 의외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된다. 김구 연구 전문가들로서 한문과 한국 근현대사에 해박하여, 나 같은 사람의 수준을 올려 주기에 딱 좋은 여정이 되었다.

‘칼’은 백범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칼’을 씻고자 찾아온 그를 ‘칼을 찾는 집(尋劍堂)’이 맞이한다. 물질의 칼이 아닌 마음의 칼을 찾으라는 뜻이리라. 심검당 글씨는 마음을 씻을 칼을 찾는 이의 마음을 칼같이 차갑게 하는 듯하다. 옆의 부드러운 마곡사 글씨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마곡사 편액                                                    심검당 편액

백범당부터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범 명상길이 시작된다. 마곡천(麻谷川)을 따라 걷다가 만난 곳은 김구 선생이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삭발터. 젊은 나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과 고초를 다 겪은 그였지만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도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며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 곡 천                                               백범 김구선생 삭발터 

마곡천을 건너 산행을 시작했다. 산 속의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마곡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하다는 군왕대(君王垈)였다. 우리는 지기를 느껴보기 위해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강한 기운 덕분일까? 땅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선의 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년)도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김구 선생도 이곳에 올라 땅의 기운을 느끼며, 조국과 우리 민족의 힘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지 않았을까?

                     군왕대로 올라가는 길                                군왕대의 지기를 느껴보았다.

군왕대를 뒤로 하고 마애불(磨崖佛)이 있다는 백련암(白蓮庵)으로 향했다. 백련암으로 가던 길에 영산전(靈山殿)과 매화당(梅花堂)에 들렀다. 영산전에도 군왕대와 마찬가지로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명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마곡사에 은거할 때의 일이다. 세조는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로 행차했으나, 김시습은 미리 알고 마곡사를 떠난다. 세조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타고 온 가마를 두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사용했던 가마는 현재 마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영산전의 옆에는 매화당(梅花堂)이 자리하고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매화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禪房)이지만 한때 호신술로 유명했던 매화당 권법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라고 한다.

                              영 산 전                                            세조의 친필 영산전 현판

영산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 허공이 큰 깨달음 속에서 생겨난 것이
如海一漚發(여해일구발)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 듯하니
有漏微塵國(유루미진국) 티끌같이 수없는 중생의 세계도
皆依空所生(개의공소생) 모두 허공을 의지하여 생겨났도다
漚滅空本無(구멸공본무) 물거품이 소멸하듯 허공도 본래 없거늘
況復諸三有(황부제삼유) 하물며 다시 삼제가 있을 수 있을까?

영산전 주련

백련암을 찾아 가는 도중에 “백범이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백련암에는 백범의 흔적은 없고 바로 뒤의 마애불만 보았다. 안내자도 설명도 없어 조성연도조차 불확실한 수수한 마애불은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 볼 뿐이다.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다. 웬일인가 싶었더니 스님이 가리킨다. “저 송림(松林) 좀 보세요. 주지 스님이 이리로 올라가라 했는데 우리는 내려갑니다.” 과연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자랑할 만한 숲이요, 공기의 질이 다른 것 같다.

                              백 련 암                                                 백련암 마애불 앞에서

마곡사 순례를 마친 후,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과 차담을 잠시 나누었다. 원경스님으로부터 김구 선생에게 있어 마곡사, 마곡사에 있어 김구 선생의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차담 후, 오늘의 답사를 정리하고 ‘백범의 길’ 집필에 대한 방향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본격적으로 가졌다. 앞으로의 답사와 조사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특히 아직 우리가 찾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자료 수집에 전 국민이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형오 협회장과 원경스님                                     원경스님과의 차담

첫날의 모든 일정을 마친 후, 각자의 방사로 돌아가 개인시간을 가졌다. 밤 10시,태화산(泰華山)의 맑은 공기와 선선한 바람이 방 안을 감돌고, 마곡사의 은은한 범종 소리가 귓전에 남는다. 일정을 함께 한 교수 한 분이 말했다. “이렇게 빠듯한 일정을 자로 잰 듯이 지키면서 마음 편히 온종일 보내 본 행사는 근래 처음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국에 뿌려진 백범의 발자취를 더듬는 이 쉽지 않은 일이 결코 어려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기분으로 잠이 들 수 있었다.

                                                        범종루의 동정각
 

[1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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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 기조 발표문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 2세”

-『술탄과 황제』를 통해 본 역사성과 지도력-

 

 

 

김형오 (전 국회의장, 현 부산대 석좌교수)

   

한국과 터키는 1957년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에 기조 발표자로 초대를 받아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 심포지움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17.7.24


수교를 한 해도, 60년이 지난 금년도 한국은 닭의 해입니다. 오스만 터키의 전장(戰場) 군영에서 새벽 기상을 알렸던 호자데데(Hoza Dede: 수탉 영감)처럼 닭은 새벽을 깨우는 길조(吉鳥: 좋은 징조를 주는 새)입니다. 파티 술탄 메흐메드(Fatih Sultan Mehmet; Mehmed the Conqueror)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1453년은 한국의 닭의 해에 해당되며,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 최고의 국경일인 광복절도 닭의 해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닭의 해에 수교 60돌을 맞은 한국과 터키, 두 나라에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와 터키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2009년 1월, 꼭 8년 6개월 전 한국의 국회의장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하는 길에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서 메흐메드 2세를 만났습니다. 쇠사슬 방책으로 골든 혼(the Golden Horn; Haliç) 항구 진입이 봉쇄되자 수많은 배를 이끌고 산을 넘어간 스물한 살 청년 술탄! 누구도 상상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항구를 점령해 천년 제국 비잔티움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 이 청년 술탄에 대한 관심이 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앙카라에서 터키의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회의원들을 만났을 때도 정복자 메흐메드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림 1: 배를 끌고 산을 넘다]

 

귀국 후 내 책상 위에는 터키 관련 서적 수십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중 콘스탄티노플 정복 관련 책자는 번역서 단 한 권(스티븐 런치만; Steven Runciman,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뿐이었는데, 바쁜 국회의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짬 날 때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을 통해 1453년 정복 전쟁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틈만 나면 짬을 내어 이스탄불을 방문해 격전의 현장인 성벽을 수없이 답사했습니다. 대학 도서관과 연구소·박물관을 찾았고, 유수 대학의 교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못다한 질문과 궁금증은

이메일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림 2: 성벽 앞의 필자]                             [2-1: 복원된 성벽]

  

‘이스탄불 정복전쟁’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높아질수록 작가로서의 모험이 곁들인 새로운 길과 정치인으로서의 명예로운 길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은 정계 은퇴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전적으로 여기에 매달리며, 이스탄불로 떠나 두 달간 장기 체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메흐메드 2세를 알게 된 지 4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2년 늦은 가을, 드디어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술탄과 황제』입니다. 책은 나오자마자 언론과 평단 그리고 서점가의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호평과 찬사 속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과 수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책 관련 자료 어디에도 나의 정치 경력은 넣지 않았습니다. 일반 소설도 교양서도 아닌, 아마추어 작가가 쓴 한국과 아무 관련 없는 560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가 4만 권 넘게 팔린 것은 한국 출판사상 지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메흐메드 2세는 어떻게 난공불락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까요?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역발상으로 배를 끌고 험난한 갈라타 언덕을 넘어간 창조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며 치밀한 행동가였습니다. 선대 술탄들이 모두 공략에 실패한 천년 성벽을 뚫기 위해 그는 규모와 성능 면에서 세계 최대‧최고의 대포를 개발했습니다.  

                                         [그림 3: 우르반의 대포]

그밖에도 공성탑 건설, 땅굴 공격 등 첨단 기기와 과학 기술을 총동원해 지 상‧지하‧해상‧공중에서 다양한 전술 전 략을 펼쳤습니다. 육군 중심국이었지 만 해군을 보강하여 장차 지중해 제해 권 장악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군사 조직을 비정규 용병(바쉬보주크), 지방 민병군(아잡), 정규군(아시아군‧유럽군), 정예군(예니체리) 등으로 다원화·체계화하고 보병과 기병의 역할 분담 등을 통해 공격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정복 이후 200년 이상 터키가 유럽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 것도 메흐메드 2세의 업적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메흐메드 2세는 술탄에서 강등되어 왕자로 돌아가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능한 스승들을 모셔 심신을 단련하는가 하면, 직접 전투에 참가해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술탄에 다시 즉위하자마자 서방 각국과 일시적 휴전 조약을 맺는 등 평화 외교를 펼쳐 비잔티움을 비롯, 서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습니다. 헝가리 섭정 후냐디(야노슈 후냐디: Janos Hunyadi)의 발을 묶어놓고, 앙숙 관계였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상호 견제시키기도 했습니다. 배후 안정을 위해 동부 카라만(Karaman ; Karaman Beyliği)과는 정복 전쟁 대신 평화 조약을 맺고, 선친 무라드 2세의 미망인이었던 마라(Mara Brankovic)를 귀환시켜 그녀의 친정 아버지인 세르비아 왕의 환심을 샀습니다.

지도를 통해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전문가들을 초빙해 정보를 얻고, 공격 목표인 삼중 성벽을 직접 사전 답사도 했습니다. 수송로와 지원군 차단을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ı)를 세우고 철저한 봉쇄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림4: 루멜리 히사르]

아랍·러시아 등 강국의 수많은 침략과 오스만 선대 영웅들의 여섯 차례 공격에도 버텨냈던 콘스탄티 노플이 21세의 청년 술탄에게 정 복되는 비결 아닌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셋째, 국론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전쟁‧전승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모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실적 보상과 출세의 사다리를 제공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해 성전(聖戰:Jihad)과 정전(正戰: Justice War)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현상 유지를 원하는 화평파 세력도 참전시켜 토론과 담판을 통해 반대 의견을 제압했습니다. 정복 후 여세를 몰아 정적이었던 할릴 파샤(Halil Chandarlı Paşa)를 제거하고 부족‧호족 등 기득권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종‧종교‧지역·신분을 불문하고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세계 제국으로 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넷째는 리더십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승리의 핵심 요인인지도 모릅니다. 메흐메드 2세는 늘 최전방에서 말을 몰며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해상 전투가 치열할 때는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직접 말을 타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림 5: 말 타고 물에 뛰어든 술탄]

타고난 승부사였습니다. 한 번의 실패 뒤에는 반드시 역전의 비책을 던져 더 확실한 승리를 일구어냅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야영하는 솔선수범 형 지도자였습니다. 실전 같은 훈련, 훈련 같은 실전을 했습니다. 신상필벌 에도 엄격했습니다. 패배자는 결코 용 납하지 않았습니다. 전리품은 약속 대 로 처리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신뢰를 얻었습니다. 군기 또한 엄중했습니다. “튀르크군 1만 명의 행군보다 기독교 군대 100명이 움직이는 소리가 더 시끄럽다”라는, 15세기 한 프랑스 여행가(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Bertrandon de la Broquiere)의 목격담이 그 사실을 실감나게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당대 최고의 헌신과 열정의 지도자 중에서 파티 술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책이 나온 후 나는 이스탄불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몇 차례 더 방문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결심이 섰습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38쇄를 거듭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을 더는 찍어내지 말도록 출판사에 요청하고, 두 달 안에 개정판 원고를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 6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림6: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한 페이지도 전작과 같은 곳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뜯 어 고쳤기 때문입니다. 전작(초판본)의 정신과 뼈대는 그 대로 살리되 사실상 새 책으로 쓰려니 재주가 부족한 저 로서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체제도 바꾸고 문 장·표현도 고치고, 일부는 삭제하고 상당 부분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터키 측 자료들을 요긴하게 활용(특히 페리둔 에메전 교수의 근작: Feridun Emercen, 『Fetih ve Kıyamet 1453』 등)했습니다. 

새 책 역시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언론에서도 크게 리뷰를 해주었습니다. 작년 연말 촛불 시위, 태극기 집회 속에서도 책을 읽어준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초판에 이어 개정판까지 구입해 꼼꼼히 대조해가며 읽었다는 독자도 인터넷을 통해 적잖이 만납니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왜 책으로 쓰려 했고,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 한 걸까요.  

첫째,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한 문명의 축적 위에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그 계기로 보고자 했습니다. 문명 대 문명의 충돌은 보통 승자의 패자에 대한 보복‧파괴‧멸절(滅絶)로 이어졌지만, 오스만은 포용과 공존‧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지도자의 역량과 철학에 의해 문명 파괴가 아닌 문명 승화(Sublimation of Civilization)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나아가 서구적 편견 없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터키 문명, 그 중에서도 동시대 세계사의 한 축으로 취급돼야 할 오스만의 역정(力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림 7: 메흐메드 2세 초상]

둘째, 가장 결정적 시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 그 중에서도 두려움과 대적해야만 하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살펴보고 자 했습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자질, 생 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의 선택과 결단 등을 술탄과 황제의 입장이 되어 파고들었습니다. 솔선수범‧진두 지휘‧신상필벌로 요약되는 승리자 메흐메드 2세는 ‘달리는 리더십’으로 규정했고, 우유부단하지만 끝까 지 모든 책임을 싸안고 가는 콘스탄티누스 11세를 통해서는 ‘눈물의 리더십’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가냘픈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필자로서는 그 나약한 치부를 들추어내기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덧바름으로써 한 단계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역사를 통해 오늘과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국가의 존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은 출발합니다. 국가가 당면한 최고의 위기, 가장 긴박한 순간인 전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오늘날 심각한 안보 위기와 혼란스런 국제 정치 속에서 한국과 한국민은 어떻게 살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560년 전 아득히 멀리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의 흥망성쇠를 통해 역사의 생생한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과 터키, 67년 전 그들은 한반도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고 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또 그 후손들이 오늘 각자의 나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나아가 번영·번성하려면? 국가가 존재해온 이후 끊임없이 계속돼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양국은 위대한 선조들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메흐메드 2 세의 헌신과 열정을 가슴에 새긴다면 험난한 파도도 담대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역사의 새벽을 깨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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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 축사]

 

 

 

“자유와 역사적 연대를 넘어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이 지나고 한국과 터키는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이었습니다. 이틀 후인 7월27일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잠시 중지하기로 합의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4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식 수교국도 아니며, 터키의 국민과 젊은이들이 들어보지도 못하였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도우려, 함께 싸우고 피 흘리며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터키로서도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고려 요소가 있었겠지만 나는 여기서 두 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자유’입니다.

모든 면에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신생국 한국은 이제 그 국민이 그나마 누려왔던 자유마저 잃게 될 위기였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생명과 자유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 의해 나라가 없어지고 국민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피 흘려 나라를 지켜왔고, 또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당한 자유를 힘들게 누리게 된 터키로서는 한국민의 자유가 유린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터키군은 한국전에서 힘들고 어려운 전투에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리하여 미국·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지켜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신념이 묻어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역사적 연대감’입니다.

첫머리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라”라고 말했습니다만, 우리는 1300년 전 강한 역사적 연대를 형성한 적이 있습니다. 터키는 지금부터 2천 년도 더 전부터 중앙아시아의 주인이었습니다. 가장 넓은 대륙에서 가장 오랜 기간 푸른 초원을 지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와는 사신 왕래를 비롯,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역사적 연대는 한국전을 통해 피로써 다져지고, 터키 지진 사태 때는 땀으로 적시고, 2002년 월드컵 때는 양국기를 함께 흔들며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응원을 하였습니다. 승리와 패배를 가리기 위한 축구 시합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의 기반 위에 양국 모두의 승리를 위한 탑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도 두 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나라를 손꼽으라면 한국에선 터키, 터키에선 한국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대감이 뿌리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수교 60년간 두 나라는 엄청나게 변하고 발전했습니다. 경제·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성화되고, 인간적 신뢰는 더욱 두텁게 쌓였습니다.

한국, 동양적 세계관에서 60년이란 일생, 한평생을 말합니다. 한 생이 끝나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의미에서 ‘환갑 또는 회갑’이라 부르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터키 관계에서 ‘첫 번째 국가 일생(the first nation’s lifetime)’인 60년은 매우 의미가 깊었습니다. 다가올 새로운 제2의 국가 일생은 더욱 의미 깊게 승화·발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특히 양국 간의 학술적·문화적 교류와 협력이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더욱 심화·발전되리라 기대합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이며 심도 있는 연구가 다방면에서 진척된다면 세계적 수준의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터키 기업이 함께 건설하는 ‘1915 차낙칼레 대교’공사가 막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세계 최고·최장의 현수교가 터키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 2023년 개통될 때, 이 다리처럼 두 나라의 협력과 기술 수준, 우의는 더욱 발전하고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때쯤 우리는 오랜 숙원인 남북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대륙의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광범위한 문화 공동체가 오래 전 150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구축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혈맹이며 형제이며 함께 가야 할 영원한 동지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응분의 역할을 해야 할 나라이며 국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며 축사에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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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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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직을 맡고 나서 가능하면 좀 더 자주 아직 살아 계신 애국지사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그분들 얼굴을 뵐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찬규 선생은 광복군 동지회의 가장 막내 회원이며, 인천시의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이십니다.


[독립운동가를 찾아서/광복군 박찬규 지사]
 


“일본군 무기를 밀반출, 광복군에 넘기려 한 18세 애국 소년”




7월 18일 오후, 독립운동가 박찬규 지사(90세) 댁을 찾았다. 강화도 민통선 건너 소담한 집에 사모님(82세)과 두 내외가 살고 계셨다.

국가보훈처 자료와 오늘 들은 얘기를 종합해 일단 애국지사 박찬규 선생의 삶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2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 북경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부대의 군속으로 근무하며 일제의 잔악상에 눈을 뜨고 점차 민족의식을 키워나간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북경에서 암약하던 김순근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전격 전환시킨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3월 일본군 부대 관사에 잠입, 지하공작에 쓸 총기 등을 몰래 빼내려다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극적으로 풀려난다. 6.25 전쟁에 참전, 백마고지 전투에서 공을 세운 호국용사이기도 하다. 2000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했다. (거사를 함께했던 김순근 지사는 일본군의 가혹한 고문에도 꿋꿋이 저항하며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결코 발설하지 않았고, 끝내 형무소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광복 이후 박 지사의 항거를 증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쿄에 있는 일본 법원에 이에 대한 근거 자료가 남아 있어 독립운동가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박찬규 선생은 거동이 다소 불편하지만 여전히 동네를 산책할 정도의 기력이 있으셨다. 사모님은 아직 건강해 보이셨다. 슬하의 1남 2녀는 서울‧인천 등지에 떨어져 살다 보니 자주 오지는 못하는 편이라고 한다. 두 내외는 우리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시고 텃밭에서 기른 토마토와 잘 익은 수박을 큼지막하게 썰어 내오셨다. 준비해 온 「백범회보」와 휴대용 수첩 그리고 정관장을 답례로 드렸다.

평소에도 과묵하신 편이라 말씀이 뜸하신 박 선생을 대신해 사모님이 곁에서 보충 설명을 해주셨다. 그래도 사모님 말씀 중 부정확하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바로 고쳐주셨다. 듣기로 선생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독립유공자 신청도 하지 않고 지내시다가 주변의 권유와 도움으로 2000년에야 유공자 등록을 하셨다고 한다.

집 바로 뒤로는 철책선 너머 한탄강이 흐르고 임진강‧예성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바라다 보인다. 무엇보다 북한 땅이 지척이다. 한여름인데도 벌거벗은 모습인 민둥산과 황량한 북녘 마을을 보고 있으려니 눈을 떼기가 서운했다. 북쪽에서 건너온 대남 방송 소리가 고요한 마을의 정적을 흔든다. 그나마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돌아오는 길, 도로 양옆에 심어진 무궁화 군락이 오늘따라 더욱 싱그럽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무궁화 꽃잎을 보면서, 그 옛날 영화 시작 전 애국가와 함께 틀던 스크린 속의 한 장면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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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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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제헌절 기념식 직후 <국가원로 개헌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되었지만,

KBS1에서 녹화하여 17일 오후 3시에 방송했기 때문에 보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토론 발제를 제가 맡게 되었는데, 참고가 될까 하여 발제문을 아래에 올립니다.

개헌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사진출처] 노컷뉴스


[국가원로 개헌 대토론회 발제문]




새로운 개헌의 과제와 지향점



                                                                       김형오 (전 국회의장)


  제헌절을 맞아 헌법의 존엄성과 시대 여망에 부응하는 개헌의 전기를 마련해준 정세균 국회의장께 감사드린다. 


  현행 헌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의 집중"과 (행위와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을 중심한 행정부가 국회•법원에 비해 과도한 권한을 가진데 반해, 권력을 상호 견제하거나 대통령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시스템은 발달하지 못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는 ‘all or nothing’ 게임에서 패배한 야당이나 과격파 기득권층은 조직적•저항적 반대 투쟁과 전투적 권력 교체를 추구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다수 국민은 정치 참여에서 소외되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불신 풍조가 조성됐으며,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를 심화시켰다.

  한국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먼저 삼권 분립 원칙에 맞지 않는다.

1)자기가 집행할 법률을 자기가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수 있고,
2) 자기가 쓸 국가 예산을 자기가 편성하여 국회는 심의만 하도록 하고,
3) 자기 공무원에 대한 감찰을 자기가 직접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미국 대통령은 생각할 수도 없는 막강한 권한들이다.

  또한 현행 헌법은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대법관•헌법재판관 등의 임명에 대통령이 직접 간여할 수 있다. 삼권분립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더구나 국민 생활과 직결되고 국가 권력의 핵심 집행 기관인 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공정거래위•방송통신위 등의 장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이다.

  장기 집권 방지와 평화적 정권 교체는 현행 헌법의 장점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제도화 정교화되지 못함으로서  지도자의 공인 의식, 책임감, 제도와 공론에 의한 권력 행사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무뎌지게 되는 약점을 안게 됨. 

  결국 당선된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제왕적 권한을 휘두르다가, 중반기에 들어서면 극심한 대립에 시달리고, 종반기에는 힘없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해, 결국은 민망한 모습으로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었다. 국민에 대한 헌신과 봉사보다는 누려야 할 권력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막강한 헌법적 권한과 5년 단임이라는 시간적 제약, 그 딜레마에 빠져 새로운 업적 쌓기와 전임자 업적 지우기를 반복함으로써 여러 부작용이 발생한다. 전 정부에서 하던 중장기 사업은 신정부 출범과 더불어 사라지고, 주무부서는 통폐합되고, 책임자와 담당 공무원은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공무원은 의욕을 잃고 정부는 단기성과에 집착하다 보니 국가 경쟁력은 떨어지고, 중장기 비전을 잃어버린 나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과 권한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모든 권력 주체들에게 엄정한 책임이 부과되어야 한다. 그 길만이 대통령도 나라도 국민도 사는 길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줄이려면
1)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는 이원정부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2) 미국과 같은 순수 대통령제를 채택해야 한다.
3)어떤 경우든 국회의 권한은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 권한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국회로 넘어오거나 국회의 견제 장치가 더욱 강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강한 상태에서,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에 국민이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의원내각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1)국회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며, 2)새로 마련할 개헌안에는 국회와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성을 명시하고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원정부제를 하잔다면서 대통령은 외치, 총리는 내치를 전담한다는 발상은 효율적이지도 못하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협치에 의한 권력 균점과 야합에 의한 권력 나눠먹기는 다른 것이며, 이런 안이하고 무책임한 발상은 이원정부제 자체의 탄력을 잃게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두겠다는 발상도 임시 미봉책이다. 표풀리즘에 의해  탄생한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두자는 것은 누구도 결과에 책임은 지지 않고 생색만 내겠다는 또다른 포퓰리즘적 발상이다. 개헌을 통해 국회를 완전히 세종시로 옮기지 않는 한 국정의 비효율성은 심각히 증대되고, 국가 경쟁력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일방 독선 아집 무책임의 정치에서 대화 협치 공존과 책임 정치로 변해야 한다.
개헌이 그 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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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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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한국박물관 국제학술대회 기조발표문>




대한민국 문화 국격과 박물관의 역할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한 단상과 소견-



 

김형오 |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박물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류의 지혜 창고입니다. 초고밀도 압축 파일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시공간을 넘나들며 역사 문화 예술 기행을 하곤 합니다. 박물관에서는 시간이 왜 그리도 빨리 흐르는지요. 타이베이 고궁(故宮) 박물관에서 이제 본격적 관람을 할까 했더니 동행한 해설자가 벌써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났다 해서 나머지는 혼자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여름에 본 신안 해저 유물전도 그랬습니다. 652년 동안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24000여 점의 유물을 제대로 보기엔 하루해가 턱없이 짧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라 때 빚은 백자 접시의 단풍 든 나뭇잎 그림에 적힌 당()나라 궁녀의 오언절구(五言絶句) 1·2(·)구가 담담히 폐부를 찔렀습니다. “유수하태급(流水何太急) 심궁진일한(深宮盡日閑); 흐르는 물은 어찌 저리도 급한가.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


오늘의 기조 발표는 박물관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한 인문학도의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한 단상이나 소견, 제안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흐르는 한 조각 나뭇잎이 큰 강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접시에 분명히 쓰여 있을 그 궁녀의 시처럼, 내가 띄워 보내는 이 은근한 붉은 잎이 여러분의 폭넓은 가슴에 잘 도달되기를 바랍니다. [3·4(·); “은근사홍엽(慇懃謝紅葉) 호거도인간(好去到人間)”]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란 말이 있습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에서 미술품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이라 합니다.


20091, 이스탄불에서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순간, 나 역시 강렬한 스탕달 신드롬을 겪어야 했습니다. 1500년 전, 기중기도 컴퓨터도 상상할 수 없던 시대에 하늘 높이 매달린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돔은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 기하학적이면서도 웅장 유려한 대리석 벽과 기둥들, 건물의 배치며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감탄을 자아내는 걸작이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스탕달도 만약 이 건물을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기야 이 건물의 건립자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Iustinianus the Great, 재위 527~565)도 성당 봉헌식 날 감격에 겨워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Solomon, I Have Outdone Thee!”)라고 외쳤다니, 그 순간만큼은 황제 역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수백 번 지진을 겪고도 고전적 위용을 자랑하는 아야소피아는 현대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은 기독교 성당(Hagia Sophia)에서 이슬람 모스크(Ayasofya), 다시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침략과 수난의 역사를 보듬으며 평화와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화해와 공존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로 수없이 이 박물관을 찾았고,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아야소피아에 대한 강연 요청이 올 만큼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나는 일부러 짬을 내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 문학관 등을 찾곤 합니다. 2년 전 이맘때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초청 강연을 하러 보스턴에 갔습니다. 마음이 설렜습니다.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한국 정치에 관한 강연도 나로선 뜻 깊은 일이었지만,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보스턴 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고갱(P. Gauguin)의 그림을 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거기 머문 사흘 동안 날마다 미술관을 찾아가 고갱 그림 앞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되뇌며 작품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관장의 배려로 <모나리자>(Mona Lisa)를 바로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모나리자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몰려 있는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미안하여 선뜻 나서지 못하자 그들은 오히려 얼른 관장 안내에 따르라고 웃으며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같은 해에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에서 잠시 빌려와 전시했던 안견(安堅)<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보러 갔던 생각이 나더군요. 장사진(長蛇陣)을 이룬 관람객들 틈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옆방에서 상설 전시 중인 진본 같은 사본을 충분한 설명을 들으며 조용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국제회의를 박물관에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주변에 종종 전파해 왔는데 실제로 201011월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의 첫 공식 행사가 바로 이곳,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들은 빗살무늬토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등 찬란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며 리셉션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같은 시각 각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은 서울 용산 리움미술관에 모여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날엔 창덕궁과 한국가구박물관 등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매스컴을 통해 지구촌 곳곳으로 중계되었습니다. 이처럼 세련되고 품격 높은 문화 마케팅이 또 어디 있을까요. 외국을 공식 방문하는 귀빈이라면 그 나라 주요 박물관은 반드시 들르는 문화 외교의 관행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물관은 가장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심사가 번잡할 때도 그곳에만 가면 안정감을 되찾고 세상을 포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국보 78, 83)을 전시할 때면 반드시 만나러 갑니다. 그윽한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는 아집과 이기심에 젖은 내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무아지경의 심연(深淵) 가까이 갔다가 돌아 나오면 편안해진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곳, 그곳이 바로 박물관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박물관과 관련해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20여 년 전 일입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옛 중앙청을 허무는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이었기 때문에 부수어 버린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내가 소속한 당의 대통령이 내건 핵심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적인 어려움도 겪었지만, 지금도 그 소신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건물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는 법, 과거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 해서 일제 침략의 역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멕시코시티의 아즈텍 신전은 처참하게 부서지고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이 들어섰습니다. 반면에 앞서 말한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유목 전통의 정복자가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활용했습니다. 두 문명, 두 종교가 공존합니다. 어느 쪽이 더 문명적인가요. 때로는 숨기고 싶은 치부나 깊게 파인 상처까지도 보듬고 가는 것이 참된 역사이며 올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역사란 영욕과 명암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워할 역사는 있을지 몰라도 대체할 역사란 없습니다. 경복궁 복원을 위해서라면 중앙청 건물은 자리를 옮겨서라도 보존해야 옳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한 곳을, 정부 수립 장소를, 불과 5(1945~1950)사이에 일본 제국기(미 군정기·북한 인공기·한국 태극기가 차례로 펄럭였던 세계사적 격동의 현장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피 흘린 자국도, 전쟁과 독재의 총탄 흔적도, 군부 집권의 방패가 되었던 탱크 자취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총독부보다는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훨씬 오래 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라고 부숴 버리면서 한국 근대사도 함께 지우려 했던 것입니다.


박물관은 감동과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을 오스만과 비잔티움, 두 제국 군주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춰 조명한 술탄과 황제(The Sultan & the Emperor)의 초판과 개정판을 쓸 때도 이스탄불에 있는 박물관들은 나에게 깊은 울림과 강렬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 군사 박물관에서 마주친, 560년 전의 낡고 볼품없는 쇠사슬 몇 줄이 이 책의 주인공 술탄 메흐메드 2세를 내 머릿속에서 부활시켰습니다. 쇠사슬 방책에 가로막혀 항구 진입에 실패한 술탄은 배를 끌고 산을 넘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항구와 도성을 점령하고 드디어 세계사의 물길을 바꾸었습니다. 역사의 현장 역시, 살아 숨 쉬는 박물관입니다. 나는 당시의 피어린 전투 상황을 엮어내려고 유네스코 헤리티지인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건립한 장대한 삼중 성벽(Theodosius Triple Walls)30번 넘게 찾아갔습니다. 하루 온종일 성벽 안과 밖, 아래와 위를 뒤적인 적도 있습니다. 그 바보 같은 열정이 내 책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록과 수집은 인간(Homo Sapiens)의 욕구요 본능인 것 같습니다. 기원전 288년에 수집 가능한 당대의 모든 문서 자료 수십 만 점을 보관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양피지(Pergamena) 대량 생산 기술을 개발한 페르가몬 도서관, 대단한 애서가였던 에페스의 켈수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서관. 비록 도서는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유물과 잔해 속에서 고대인의 높은 정신문화를 느끼게 됩니다. 박물관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함께 호흡하고 또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08년 창경궁 안에 설립된 제실박물관을 효시로 친다면,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는 110년에 못 미칩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박물관의 존재 가치에 눈을 뜬 개화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박영효는 건백서(建白書)(1888)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책 중 하나로 박물관 설립을 주장했습니다.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을 쓴 유길준은 박물관을 일컬어 천하 각국의 고금물산을 그 대소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부 수집하여 사람의 견문과 지식을 넓히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지금의 박물관 개념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각설하고, 1991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는 수많은 박물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강원도 영월은 박물관의 고장입니다. 사진, 곤충, 음향, 지리, , 화석, 다구(茶具), 도자(陶瓷), 민속악기, 민화, 불화(佛畫), 종교미술, 인도미술, 아프리카미술, 현대미술, 김삿갓문학, 동굴생태. 그야말로 호명하기도 숨찬 박물관들의 박물관’(?)이 바로 영월입니다. 게다가 단종의 귀양지인 청령포(淸泠浦), 그가 묻힌 장릉(莊陵) 등 역사의 애절한 현장 박물관도 있습니다. 인구 5만여 명당 한 개의 박물관(2015년 기준 전국 982-미술관 202개 포함)을 보유한 대한민국에서, 주민 수가 고작 4만 남짓인 작은 고을이 무려 26(20173월 기준)의 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다채로운 박물관들의 매력에 힘입어 지난해 여름휴가 만족도 조사에서 전국 종합 1위를 차지한 영월은 박람회 및 포럼 개최 등을 통해 국제적인 박물관 특구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국정감사 기간을 틈타 국토 기행의 일환으로 영월을 다녀온 나는 아끼던 사진기 두 대를 동강사진박물관에 기증했고, 당시 군수로부터 내 이름을 붙여 상설 전시하겠다는 감사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20년간 국회의원으로 일한 부산 영도는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패총(貝塚, 조개무지)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민가를 이전하고 전시관과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그 바로 옆에 아시아 최초로(세계 최초인지도 모릅니다) 해양박물관을 힘들여 지었습니다. 조개잡이 하던 아득한 선조의 땅에 대양 개척의 의지와 여망을 담아 보았습니다.

나에게 박물관은 배움터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공중 도시, 잉카 최후의 요새인 페루 마추픽추(Machu Picchu)는 돌 하나, 집 한 칸, 길 한 쪽, 밭 한 뙈기가 예사롭게 설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2400m의 이 황량한 고원에 살았을까요? , 도피, 치료, 영생, 은신, 휴양, 개간(開墾) 등등의 단어들과 함께, 현대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해보았습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Maya)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기자(Giza) 피라미드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시대와 지역 등 모든 것을 달리하는 두 문명 사이에서 이질성을 뛰어넘는 동질성을 발견하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카탄 반도에 있는 마야 문명의 상징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를 방문했을 때는 공원 박물관장이 한국계여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다름 아닌 애니깽’(Anniquin / Henequen; 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이민자들의 후예였던 거지요. 어려운 형편임에도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독립운동 비자금까지 쾌척했던 그들의 의로운 삶, 그 증표들을 메리다(Mérida)제물포 거리옆에 그들이 손수 세운 조촐하지만 위대한 박물관에서 직접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카이로 국립 박물관과 룩소르(Luxor:al-uqṣur) ‘왕들의 계곡에서 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를 통해서는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추구하며 엄청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파라오들도 결국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그의 심장은 마트(Ma'at; 정의와 진리의 여신)의 깃털처럼 가벼워야 했습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심장이라는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푼 순간, 나는 정치 현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술탄과 황제라는 작품을 그 빈 마음에 심혈을 기울여 채울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나는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세에 남기고 전한 선인들께 감사하게 됩니다. 전주에 있는 경기전(慶基殿), 그 안에 복원한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보면서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큰 사고입니다. 전주사고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이토록 생생하게 존재했을까요. 태조 어진(御眞)과 몇 백 권에 이르는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가마에 싣고 내장산으로 가 깎아지른 절벽 위 암굴에 모셔 놓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다시 그것을 싣고 강화도로, 묘향산으로 옮긴 선비들의 지극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전주사고본도 왜적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뒤로도 갖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그때마다 실록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안간힘 끝에 기적처럼 후세까지 전해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이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奎章閣)에 보관 중입니다. 나는 지금 서울대 규장각 운영위원으로 있습니다만, 처음 참여 요청이 왔을 때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전란 중에도 실록을 지켜낸 선조들의 간절한 몸짓을 생각하며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수락했습니다.


20159,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화가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그분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경기도 이영미술관에서 개최할 때 그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을 하신 노화백께 100세 축하 기념전은 내가 모시겠다고 했는데 96세에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약속도 지킬 겸 거장의 작품 세계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오늘도 저 하늘에서 통영 바다를 그림으로 노래하고 계실 그분께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돌이켜보면 20년 의정 활동을 하면서 나는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고 되찾는 일에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에는 공관에 8폭 병풍을 그대로 복사한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를 걸어 놓고 외국 손님을 맞을 때마다 자랑하곤 했습니다. 200811월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을 때는 그 나라 상하원 의장을 잇달아 만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들의 반환을 강도 높게 요청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양국 대통령간의 합의(201011, G20 정상회의)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5, 마침내 297권의 의궤 반환이 완료됩니다. 빼앗긴 지 145년 만의 귀환입니다. 5년 주기로 갱신해야 하는 대여 형식이긴 하지만, 프랑스 국내 사정과 우리의 실리를 적절한 선에서 절충해 얻어낸 외교적 성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 박물관(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은 좀 실망했습니다. 아시아 밖에 있는 세계 최대의 아시아 작품 전시관은 시청과 마주보는 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한국인 기증자 이종문 기념홀이라는 커다란 명문(銘文)이 자랑스럽게 나를 맞이했지만, 막상 전시된 한국 유물은 바로 옆의 일본이나 중국관에 비해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관장으로부터 현대 작품도 전시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친분 있는 도예장(陶藝匠)에게 특별히 의뢰해 만든 커다란 달항아리를 보냈습니다. 박물관으로부터 고맙다는 공식 접수 편지를 받았지만 샌프란시스코로 시집보낸 달항아리를 아직 만나러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나는 국회의장 재임 중에 외국 정상이나 고위 인사로부터 받은 기념품과 선물 170여 점을 모두 국회에 기증했습니다. 11대부터 17대까지 전임 의장들의 기증품 합계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퇴임을 앞두고 이 기념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국회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다양하고 폭 넓은 의회 정상 외교의 모습을 국민에게 상징적으로 알리면서, 이 기증품들이 또 하나의 국회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별도로 코스타리카 전·현직 국회의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 나라 관련 서적 188권도 국회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문화유산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답답하고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반구대 암각화 문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암각화는 지독한 물고문을 당하며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고래잡이를 한 증표인 작살 박힌 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어미 고래를 비롯해 여러 모습을 한 인간과 각종 동식물들이 흔적이 옅어지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시절에만도 두 차례 현장 답사를 다녀와 그 심각성을 백방으로 알리고 물에서 빨리 건져낼 대책 마련을 외쳤지만 공염불이 되고 말 상황입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선사시대의 기념비적 문화유산인 이 암각화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요.


최악의 실수라는 오명을 남긴 공주 무령왕릉 발굴처럼 졸속으로 해서도,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처럼 보존을 허술히 해서도 안 됩니다. 반구대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도의 실물은 지금도 대곡천 사연댐 물밑에 잠겨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재 보호에 관한 두 가지 날카로운 대립에 직면합니다. 첫째는 문화재는 물론 그 주변 일대에 어떠한 손상이나 변경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주의적 입장이고, 둘째는 시대와 주변 환경에 따라 적절한 변경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각자가 자기주장만 하고 있는 사이에 반구대 암각화는 서서히 질식당하며 처참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조상에게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할 우리 후손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역사에 죄를 짓고 있는 건 아닌가요.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했기에 반으로 잘린 자식의 시체를 갖기보다는 산 채로 남에게 주는 편을 택했던 솔로몬의 재판법정에 선 생모의 심정으로, 문화재위원과 관계자 여러분들의 대승적 결단을 촉구합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일찍이 문화 국가 건설을 주창하셨습니다. 선생은 1947년에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을 통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께서는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70년 전 이미 문화 국가를 꿈꾸고 설계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예지가 빛나는 선각자다운 면모입니까. 그때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지만 문화를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고 계승해 나간다고 할 수 있을지, 그 무엇보다도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습니다.


박물관은 나라의 얼굴입니다. 브랜드이며 국격입니다. 인류의 공통 자산이고 문명의 발자취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걸어갈 길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박물관과 문화 정책, 그 새로운 가치와 방향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뜻깊은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박물관 애호가로서의 순정한 편력기, 소박한 소견을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귀담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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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굴에서 살아남는 법




김 형 오 장로, 전 국회의장



  2001년 가을, 나는 250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당선 직후 시작된 나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1년 만의 판결이었다. 국회의원이 선거법을 어겨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의원직을 잃는다. 1심(부산지방법원) 판결이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국회의원직을 ‘두 번 반’이나 박탈당할 수 있는,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죄명은 ‘허위사실유포죄’였다. 상대방의 일탈 행위를 지적하며 공명선거하자는 지구당(내 이름이 아님)의 호소문이 허위 사실에 해당한다는 검사의 황당한 주장을 판사가 받아들인 것이다. 일단 이 죄가 인정되면 500만 원 이상의 벌금이나 징역형을 받는 무서운 조항이다. 판사는 나의 ‘범죄가 가벼워서’ 반감(半減)해준 거라 했다. ‘가볍다’면서 의원직을 상실할 중형을 때린 그 판결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명선거 정착을 위해 만든 법이 정치 탄압의 도구로 악용된 것이다.  처음 나는 내가 고발당했다는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주객전도(主客顚倒)란 말을 떠올리며 평소처럼 활동했다. 그 당시 나는 참 힘든 선거를 했다. 상대방의 모함 때문에 머리까지 삭발하며 결백을 호소했다. 선거 사무실은 24시간 감시받고 도청 당했다. 선거 기간 중에는 항상 미행이 붙었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노골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깍아내렸다. 권력의 위협과 금력의 유혹을 못 이긴 핵심 당원과 운동원들이 탈당하거나 자취를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돈 없고 힘없는 야당 의원인 나를 유권자들은 눈물로 지켜주었다. 

  그런 내가 당선되자마자 기소되고 1심에서 국회의원직을 내놔야 할 정도의 형량을 선고받다니! 그날부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세상의 정의와 신의 섭리마저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한이 밀려왔다. 내 정치 인생은 이것으로 끝나는가. ‘연속 3선 의원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우리 지역(부산 영도)의 징크스가 적중한 것인가…. 

  의기소침해 있던 어느 날, 밤중에 나는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비몽사몽간에 “1, 2, 3, 0”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라졌다. 시계 바늘은 새벽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을 망연히 상념에 잠겼다. “아, 내 정치 인생이 12월 30일로 끝난다는 뜻인가.” 그래 놓고 보니 1, 2, 3, 0이 아니라 1, 2, 3, 1이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혼돈스러웠다.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 있었다. 

  불현듯 머리맡의 성경이 생각났다. 곁에 두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읽지 않은 성경이었다. 나는 어떤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미친듯이 1230페이지를 들췄다. <에스겔>이 끝나고 <다니엘>이 시작된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사자굴에서도 살아난 다니엘이 아니던가! 여기에 내가 붙잡을 뭔가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니엘>을 읽으며 밤을 새우기로 작정했다. 꿈 이야기가 지나고 6장 사자굴에서 건져진 다니엘을 읽었지만 영감이 오지 않았다. 집중력이 흐려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헐! 10장 19절에 이르러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바로 이것이다!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붙잡아주시려고 성령께서 내게 임하셨구나! 나는 얼른 일어나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그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새벽 5시. 머리가 맑아지면서 빛이 그토록 환할 수가 없었다. 첫머리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바로 나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너무나 감사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고 교만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한순간에 깨우쳤다. 무릎을 꿇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나의 교만과 아둔함을 통절히 반성했다. 이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려고 나를 일깨우셨구나.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다니엘 10장 19절을 입에 달고 다녔다.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운동할 때도, 식사할 때도, 화장실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내 입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웅얼웅얼하는 소리에 뭐냐고 간혹 누가 물으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일러준다. 당신도 나처럼 하면 복 받을 거라고. 

  성경의 은사를 접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며 남을 이해하는 눈과 마음이 생겼다. 정치적 미사여구와 입술로만 움직이던 찬사가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미워하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건성으로 다니던 교회도 진리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성소로 자리잡아갔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나를 하나님께 인도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새삼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성경 말씀이 이토록 가슴을 때리는 은총으로 나를 적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도 읊조리다보니 나름대로 해석까지 하게 되었다. 왜 ‘두려워 말라’가 처음 나오며, ‘강건하라’가 마지막에 나오면서 두 번 연속 거듭되는지를. 한 자 한 획이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니 성경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다. 

  이런 연유로 다니엘 10장 19절의 짧은 말씀이 내 심령에 안식을 주고 평생 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후 재판은 2심에서 선고유예,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다시 고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4년 국회의원 임기 중 3년 반을 끈 사건이었다.  참고로    
   그 당시 우리 당(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중 26명이 여당이나 무소속으로 옮겨
   가거나, 또는 유죄를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나는 당을 떠나지 않았고 재판에
   서도 끝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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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9호 2017년 04월 (2017-04-17)




웃으며 떠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김형오(외교67-71)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수감으로 한 시대가 저물었다. 촛불은 아래로부터 타올랐고 태극기는 바람을 가르려 했지만 불길을 막지 못했다. 공익과 공공성, 그리고 법에 의한 지배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임을 일깨웠다.


기존 제도에 대한 뼈아픈 성찰, 타성에 젖은 관행과의 과감한 작별, 국민 공감의 새 정치를 시대가 요구한다.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제대로 검증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심과 여론은 대체로 가늠된다. 진용은 짜여졌고 윤곽도 드러났다. 정책이나 이슈보다는 이미지 대결, 조직과 세력 대결로 부딪치다 립 서비스로 끝나고 말 선거다. 이번에도 어떤 대통령을 뽑느냐가 아니라 누가 되느냐에 관심이 모아질 듯하다. 준비 안 된 대통령에게 맡길 만큼 여유롭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나라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또 간절한 소망은 이번에 당선될 대통령만큼은 마지막 날 청와대를 떠날 때, 제발 웃으며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직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통령이 너나없이 불행하게 떠났다. 쫓겨나거나, 시해 또는 자살로 생을 마치거나, 본인 아니면 자식·형제가 감옥에 가야 했다. 퇴임 후엔 어떤 공적 활동도 없다. 청와대가 한국 현대사, 그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다음 대통령은 자신의 행운을 기뻐하기보다 불운을 걱정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앞길이 어둡고 험난하다.


우선 전임자 문제로 여진이 심상찮다. 임기 내내 촛불과 태극기가 충돌하고, 각양각색 시위와 요구가 분출할지도 모른다. 경제 사정은 어느 때보다 좋지 않고, 안보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자국 중심의 실리주의와 패권 논리가 한반도를 압박하고 한국의 위상을 위축시킨다. 리더십은 실종되고, 정치권은 진영 논리와 기득권에 매몰돼 있다. 포용과 통합은커녕 갈등·분열·대립 구도가 깊어져만 간다. 무엇보다 여소야대 국회다. 협조보다는 비협조가, 양보나 타협보다는 선명성과 원칙론이 지배하기 십상이다. 그것이 차기 지방 선거(2018년 6월)와 국회의원 선거(2020년 4월)에서 이기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민주적 정당 운영과 책임 못 질 ‘표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자성보다는 비난, 자책보다는 남 탓으로 돌리는 버릇도 여전할 것이다. 다음 3년이 대략 그렇게 흘러갈 듯싶다. 그러니 다음 대통령도 밝게 손 흔들며 청와대를 떠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대통령의 웃는 얼굴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명운이 그의 운명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청와대를 웃으며 나올까? 득표율만큼의 지지율이라도 받고 떠날 수는 없는 걸까? 역대 대통령의 실패를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몇 마디 적는다.


대통령 임기는 짧다(어쩌면 이번엔 3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첫 1년은 전 정부에서 만든 예산을 조정하고 새 진용 짜느라 소진하고, 후반 1~2년은 레임덕(권력 누수)에 빠진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2~3년이다. 도중에 세월호나 메르스 같은 악재를 만나면 제대로 한 일도 없이 임기가 끝나고 만다. 그러니 첫째로 욕심을 부리지 말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매년 국정 목표와 우선순위를 바꾼 박 대통령의 과욕과 무능이 스스로를 구속 사태로까지 몰고 오지 않았는가. 헌법상 한국 대통령은 권한이 막강하다. 개헌을 통해 권한을 줄이겠다는 당초 약속은 지키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다 망신살이 뻗친 것이 한국 대통령의 역사다. 임기 3년차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수족이라 믿었던 검찰이 등을 돌리고, 끽소리 못하던 공무원은 딴생각을 한다. 측근 비리가 새어나오는 것도 이때다. 언론은 대통령 약점 캐기에 바쁘고, ‘민의의 전당’은 민의도 국정도 표류시킨 채 ‘차기 후보 옹립을 위한 각축장’으로 전락한다.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이 때를 놓칠세라 ‘정의의 사도’인 양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대통령에게 시비를 건다. 성공하면 ‘왕관’이요, 실패해도 ‘투사’로 남는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러진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추락은 국가 공신력과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새 대통령은 이번에야말로 개헌을 통해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라! 그래야 대통령도 살고, 국민도 나라도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부지런해야 한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토론과 회의, 독서와 숙고, 확인과 경청, 타협과 설득에 바쳐라! 고독한 결단과 무한 책임은 무덤까지 따라간다. 상대방과 반대파의 주장을 경청할 때 설득의 여지가 생기는 법이다. 전임 대통령들이 실패한 이유는 자기 논리, 나만의 동굴에 갇혀 편한 사람, ‘예스맨’만 만났기 때문이다. 청와대라는 ‘교만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대통령이 게으르면 나라 전체가 태만해진다. 득표율만큼의 지지율이라도 받고 떠나는 대통령이 되란 의미는 자기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당선을 위해,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가. 그 정신, 그 자세로 임해야 지지율을 지킬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내 진영, 내 지지자 중심의 정책과 인사를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내 편의 양보를 받아내는 지혜와 용기를 먼저 발휘해야 상대방, 반대파가 비로소 마음을 움직인다. 끈질긴 대화와 설득은 대통령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하여 내가 아닌 남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인정해줄 때 그는 진정 청와대를 웃으며 떠나게 될 것이다. 어떤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를 매순간 생각하며 행동하라! 그러면 길은 쉽게, 또렷이 보일 것이다. ♤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신문> 동문칼럼 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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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 긴급 시국 대토론회 기념사]




“‘대통령다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유력 대통령 후보들에게 보내는 글-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전 국회의장)



  “삿된 마음(邪心)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했다.” 1945년 12월 2일, 그리던 고국 땅을 디딘 지 며칠 후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 환호하는 청년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탄핵의 교훈을 되새기자>
  헌재가 만장일치로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과 정경 유착, 권력의 사유화를 엄단함으로써 권력의 제도화, 공공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아프게 일깨웠습니다. 잘못된 정치를 헌법이 다스림으로써 한편으론 부끄럽고, 또 한편으론 자랑스럽게도 법치 국가의 준엄성과 정치의 질적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대선은 질서 있고 투명·공정해야>
  흩트려 놓기는 쉬워도 수습은 어렵습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 당선 자체가 목표라면 당선 후는 이번보다 더 힘든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나라 사정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도 엄정․엄격․엄중해야 하고, 24시간 비상 체제로 관리해야 합니다. 대통령 후보라면 그 무엇보다도 ‘삿된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진출처 http://v.media.daum.net/v/20170323145416355?f=o



 <어떤 대통령을 세워야 하나>
  선거일이 5월 9일, 50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후보를 검증할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자칫 지지자 모임, 당원 중심의 조직 투표로 이번 대선이 끝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한 능력과 도덕성 검증을 통한 국민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가 중요합니다.

  후보들은 일부 국민이 아닌 전 국민, 즉 5천만 국민, 7백만 해외 동포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편 가름하지 말고 상대방을 가슴으로 싸안는 대통령이어야 합니다. 그도 나도, 반대파도 찬성파도 같은 나라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모두가 남북통일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 통합이 남북통일보다 시급합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국론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지금은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남남갈등도 치유 못하면서 어찌 통일 대통령이 되겠단 말입니까.
  이번 대선은 누가 되든 여소야대 대통령입니다. 반대파와 견제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국회와 정당은 물론이고, 여러 단체․집단과의 소통․협의․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이른바 ‘국정을 발목 잡는 세력들’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인내와 설득 그리고 정당성뿐입니다. 어느 쪽이 진정성과 절박성을 더 가졌는지는 국민이 판단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난날의 대통령들이 정치하기 한결 수월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라 안팎에 산적한 이 숱한 난관․난제를 돌파할 자신감과 세계관을 갖춘 지도자여야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대통령과 정부가 감당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핵심은 바로 경제와 안보, 문화와 자유입니다.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나라 경제가 어느 때보다도 좋지 않습니다. 계층 갈등은 심각합니다. 공평히 떡을 나누어야 하고, 또 나눌 떡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정경 유착의 고리는 단호히 끊되, 기업의 숨통을 조여서는 안 됩니다. 투자 의욕을 살려 기업도 자본가도 이 땅을 떠나지 않게 해야 노동자가 살고 나라가 부강해집니다.
  무엇보다 국가 안보는 국민 생존과 직결됩니다. 외부의 위협과 압박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흐리멍덩, 우물쭈물하다가는 대통령도 정부도 국민도 낭패를 당합니다. 안보만큼은 가장 단호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국민 공감대가 필수적입니다.
  문화가 피어나고 자유의 공기를 마시는 나라가 튼튼하고 좋은 나라입니다. 실패한 정권들은 문화를 지도하고 장악하려 했습니다. 충만한 자유 속에서 문화는 살찌고 행복은 커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자유를 지키고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피 흘리고 책임을 다했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만큼 대외 의존도가 심하고 국제 정치에 깊이 영향을 받으면서도, 세계를 모르는 지도자가 많은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나라도 우리를 그냥 지켜 주지 않습니다. 최근 몇몇 나라에서 별난 지도자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만큼 대내외적 여건이 한가하지 않습니다. 따라 하다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세상을 알고 세계와 소통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의 비전을 명확히 하라>
  5년 단임제 헌법의 폐해로 우리는 중장기 비전과 계획을 잃어 버렸습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권 교체 이상의 정책 교체가 일어납니다. 관련 공무원이 하루아침에 한직으로 밀려납니다. 이는 국가 경쟁력의 상실과 저하로 이어집니다. 세종시 문제의 심각성은 국가적 위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나라의 중장기 계획은 계속되도록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공무원․공직자들이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나라가 됩니다.


<거국 쇄신 정부를 구성하라>
  대통령은 ‘신의 사도’가 아닙니다. 상대적 다수표를 얻어 뽑힌 사람일 뿐입니다. 능력도 고만고만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눈 감고 마구 휘두르는 「정의의 칼」”을 주지 않았습니다. 임기 동안 반대파(표 주지 않은 국민)를 얼마나 안심시키고 포용하느냐로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진영 논리, 기득권 안주에서 과감히 탈피하십시오. 내 사람만 쓰는 ‘회전문 인사’가 아니라, ‘쓰면 내 사람’입니다. 핵심 측근과 캠프 출신 인사의 기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능력 위주의 과감한 인재 발굴을 하십시오. 국회 인사 청문회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진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1400대의 컴퓨터를 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밥에 그 나물’인 인사로는 안 됩니다. 붕어빵 기계로는 아무리 돌려도 똑같은 붕어빵만 나옵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재를 등용해야 겨우 이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임기 안에 많은 업적을 내겠다는 욕심은 금물입니다. 일을 잔뜩 벌였다가 마무리를 맺지 못한 역대 대통령들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랍니다.
  검찰과 경찰, 국세청과 감사원 등 이른바 힘 센 기관들은 독립성․중립성․객관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권위적 리더십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민주적 리더십으로 바꿔야 합니다. ‘만기친람’은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확실한 위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국정을 이끌어야 합니다. 부처별로 독립 인사권을 보장하십시오.
  대통령은 청와대 밖에 집무실을 따로 마련하고, 현장과 실상도 확인해야 합니다. 토론다운 토론을 하는 국무 회의, 수석비서관 회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개헌으로 정치의 비극을 막자>
  개헌 일정(로드맵)을 확실히 밝히십시오. 늦어도 2018년 6월 전국 동시 지방 선거 때는 국민 투표로 개헌이 확정, 발효되어야 합니다. 국정 농단 탄핵 사태를 겪고도 현행 헌법으로 5년을 또 가겠다는 것은 역사의 퇴보요, 불행한 대통령을 만드는 길입니다. 현행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 행사에 대한 미련 때문에 개헌에 소극적이라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모든 후보들은 빨리 그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국민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이번 대선일에 ‘내년 6월 이전에 개헌한다’는 개헌안을 국민 투표에 부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합니다. 2020년 4월에 치러질 21대 총선에서 대통령 선거를 함께 할지 등은 국민 합의로 정하면 됩니다.


<결국은 국민이다>
  급작스런 대선 국면의 전개는 준비 안 된 대통령, 준비 안 된 정권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국민의 갈등은 더 노골화되고 편 가름은 더 심화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경제 사정과 대외 압력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희망은 있습니다. 아니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탄핵 사건도 그 원동력은 국민의 열정․분노․정의감․애국심이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살아 있습니다. 눈에는 불이 있고 가슴에는 피가 끓습니다. 다시는 국민의 여망을 배신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성숙한 시민 의식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습니다. 바야흐로 빅데이터․인공지능 시대, 초연결 사회입니다. 굴뚝산업 시대의 논리와 권위주의적 행태, 전체주의적 정책과 결별해야 합니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창조적 집단 지성이 측근 밀실 정치를 밀어내고 대통령을 양지로 이끌 것입니다. 진영논리와 기득권에서 벗어나면 살 길이 보입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던 백범 선생의 절규가 가슴을 때립니다. 무엇보다 ‘그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도록 독점과 독선, ‘선민의식’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부터 깨어야 합니다. 핵심 측근들도 깨어야 합니다. 오늘의 이 호소는 그들을 위해 바치는 쓴 약입니다. 마시지 않으면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인보다 훨씬 앞서 깨어 있는 국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1세기적 사회 문화 환경은 정확하면서도 빠른 행동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신 분들의 충정어린 제언과 토론에 기대를 걸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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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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