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로그 | 미디어로그 | 방명록  


새싹들의 꿈과 희망은 누가 키우는가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PD 박명성 / 번역 이경후 / 제작·기술감독 유석용 /

연출 Stephen Daldry / 음악 Elton John / 극작·작사 Lee Hall

  


 

<모든 어른은 어린이들을 위한 조연>

설 연휴를 틈타 뮤지컬을 보러 갔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그리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아내가 박정자 선생이 초대했으니 함께 가자 해서 무조건 따라 나섰다. 공연장은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디큐브아트센터, 작품은 <빌리 엘리어트>였다.

  

뮤지컬 이전에 저예산 영화(2000년 제작, 2017년 국내 재개봉)로 만들어져 대박을 터뜨렸다는 것도, 실제 모델(필립 말스덴, 탄광촌 출신 영국 로열발레단 발레리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영화를 보고 반한 세계적인 뮤지션 엘튼 존이 원작의 감독인 스티븐 달드리, 시나리오 작가인 리 홀과 의기투합해 뮤지컬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란 사실은 더더구나 까마득히 몰랐다. 그저 박정자 선생이 지난해 비운의 왕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역을 뭉클하게 연기한 <영영이별 영이별>을 보고 교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그런 유의 연극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선생님이 초대해주셨다. 그만큼 무심했고 또 무지했다. 그래서 더욱 전율이고 감동이었다.(정순왕후에 대해선 몇 해 전 수필을 쓴 적도 있고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의 장릉과 세조의 광릉, 정순왕후의 사릉 등도 둘러본 적이 있어 꽤 아는 척을 했던 처지였다.)

 

박정자 선생은 주연이 아닌 조연(빌리의 할머니 역)이었다. 주인공은 놀랍게도 12세 소년이었다. 아니, 출연한 모든 어른은 어린이들을 위한 조연이었다.

 



무대는 마거릿 대처 집권 초기에 발생한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과 경찰과의 극렬한 대립으로 시작된다. 생존권을 외치는 선량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이를 무참히 짓밟는 공권력, 그것을 때 묻지 않은 소년의 눈으로 보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겠구나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그런 판에 박힌 내용이 아니었다. 발레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탄광촌 소년이 가족과 이웃의 도움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을 딛고 왕립 발레단에 입단한다는 줄거리였다. 탄광촌은 무너지고 파업은 실패해 절망뿐인 현실에서 소년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였다.

 

<킬링 타임에서 힐링 타임으로>

러닝 타임 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템포가 빠르고 변화가 다양했다. 어린 소년들의 연기는 해맑고 신선했다.

인터미션 20분 후 다시 시작된 2부는 속도감이 더해 한 시간 넘는 극이 30분 만에 끝난 느낌이었다. 객석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모든 관객과 함께 일어서서 내려진 커튼 뒤를 향해 계속 박수를 보냈다.

 

공연을 마친 박정자 선생을 잠깐 만났다. 70대 후반 원로 배우의 놀라운 열정과 연기력 그리고 건강을 늘 존경하고 선망했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실감했다. 주연이냐 조연이냐는 이분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작품인가, 어떤 연기로 관객과 호흡할 것인가를 배역 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노배우의 얼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인공 빌리 역을 맡은 소년의 빼어난 연기를 거듭 칭찬하자 연출을 맡은 박명성 선생이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총명이 넘쳐나는 인상이다. 배역에 몰입한 자세가 온몸에서 느껴진다. 이런 아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빌리 역을 맡은 소년 배우만도 다섯 명이라고 한다. 6개월 장기 공연이니 싱글 캐스팅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같은 배역이 다섯 명이나 된다니 놀랍다. 쑥쑥 자라고 있는 미래의 꿈나무들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 우리 공연계의 용틀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노래연기, 세 박자를 모두 갖춰야 하는 것이 뮤지컬 배우다. 발레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그것도 소녀가 아닌 소년), 게다가 다섯 명씩이나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세 시간짜리 무대의 주역으로 키워낸 신시컴퍼니’(대표 박명성)의 안목과 역량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대에게 추천하는 이유>

요즘 나라 형편이 편하지 않다. 미래가 걱정스럽다. 모든 것이 정치에서 시작해 정치로 귀결된다. 사회 전체가 다양성을 잃고, 정치에 기대거나 눈치를 보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눈에 불을 밝힌 정의가 거리를 지배하고 새판 짜기가 시대 조류로 겉치장을 하게 되면 쏠림 현상이 심화된다. 내실은 약해지고 성찰은 부실해진다.

그래서일까? 거기에 휩쓸리거나 구애받지 않고 새싹들이 새 희망으로 자라고 있는 공연 예술계의 모습이 반갑고 또 고마웠다. 보기 참 좋았다.

 

온전한 민주주의와 건강한 나라의 미래는 다양성, 바꿔 말하면 자유와 창의에 있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대한민국, 희망을 접기엔 아직 이르고, 걱정과 불안은 기우였음을 이 한 편의 뮤지컬이 일깨워주기를 간절히 염원해본다.

! 이 아이들이 희망찬 창공을 향해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날개를 꺽지 말아야 할 텐데, 차라리 내버려둘지언정 잘못 인도하지는 말아야 할 터인데... 또다시 걱정이 밀려온다. 그러나 믿어보자. 빌리가 그 완고하고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형과 아버지 그리고 이웃들을 설득시키고 동조자·지지세력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한국의 빌리들도 이 어둠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크고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국의 미래를 염려하며 나처럼 잠 못 드는 이가 있다면, 우울한 노인 세대가 있다면, 웃으며 또 울며 카타르시스를 하고 싶다면, 서먹했던 사람의 손을 다시 한번 잡고 싶다면, 무언가 이 사회와 공동체를 위하여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이 뮤지컬 관람을 권유하고 싶다. 가족끼리 보기에도 매우 좋은 드라마다. 그날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 중 대다수는 아이들과 그 어머니, 그리고 청년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었는지도 모른다.

발레는 영혼의 빨래인가. 꿈과 희망에는 생년월일이 없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살았던 진실을 <빌리 엘리어트>의 아이들은, 그리고 어른들은 신나고 상쾌하게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온 마음으로 깨닫게 해준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달드리팬 2018.02.20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등 스티븐 달드리 감독 팬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로는 봤는데 뮤지컬은 아직... 이 리뷰 보니 부쩍 땡기는데 티켓 값이 좀... 뮤지컬 보고 나오다 하늘에 달 떴으면 스티븐 달드리 감독님께 저 달 드리고 싶어요.

현재도 진행형인 역사의 아이러니

경남 사천,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에서

김형오

설 연휴 마지막 날,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지(胎室祉)와 단종 태실지를 찾았다. 한파가 기승을 부렸지만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서 고향 고성 성묫길에 일부러 짬을 냈다.

예로부터 태(胎)는 태아의 생명줄이라 하여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 왕실은 태를 왕자나 공주의 몸처럼 귀하게 여겨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실(胎室)을 조성한 뒤 소중하게 모셨다. 태실이란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 깨끗이 씻은 태는 작고 홀쭉한 항아리(內壺)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한 뒤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더 큰 항아리(外壺)에 넣고 길일(吉日)을 가려 태실지에 묻었다. 국왕의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했으며 태실 주변에는 금표를 세워 접근을 제한하고 벌목‧채석‧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운 범위는 왕은 300보, 대군은 200보, 왕자와 공주는 100보였고 한다.

조선 왕실이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태를 풍수지리가 좋은 땅에 묻으면 좋은 기를 받아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고 국운이 흥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둘째,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들의 명당을 국유지로 만들어 태실로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싹을 자르자는 의도에서였다. 셋째, 왕릉을 도읍지 1백리 안팎에 모신 반면 태실은 팔도의 명당에 조성함으로써 왕조의 은덕을 백성들이 두루 누리게 한다는 통치 철학에서였다.

▲세종이 탄생한 지 22년 되던 해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조성된 세종대왕 태실지는 1975년 경상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태실비는 1734년(영조 10년)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높이 180cm, 너비 33cm, 두께 27cm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산 위에 있던 것이 이 자리로 옮겨졌다.

내가 찾은 사천시 곤명면 지역은 풍수지리가 빼어나 지관(地官)들은 물론 역대 왕실에서 관심이 깊던 명당이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 왕권 강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힘을 쓴 세종은 아끼던 원손(元孫)인 단종(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외아들)의 태실을 자신의 태실을 묻은 앞산에 안치하도록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논밭 한가운데 우거진 소나무 숲이 동그랗게 펼쳐져 있는 곳. 이곳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의 태실지이다. 태실로 정해진 명당들은 대개 이처럼 마당 한가운데에 무쇠솥을 엎어놓은 형상, 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 형상인 ‘돌혈(突穴)’이라고 한다.

교장을 지내고 교직에서 은퇴한 최남기 선생이 나와 동행해 안내 겸 해설을 맡아 해주셨다. 해박한 역사 지식에 풍수지리에도 밝아 나로서는 조금 생소했던 태실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 선생 견해에 따르면 풍수학 상으로는 오히려 세종보다도 단종의 태실지가 더 명당이란다.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이렇게 좋은 묏자리는 전국에 별로 없단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둘 다 지근거리인 명당에 태를 묻었지만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단종은 가장 슬프고 불행했던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니 말이다. (※단종에 관한 이야기는 내 책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장릉, 청령포 편>와 <이 아름다운 나라-사릉 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단종의 태실지는 풍수 대가들의 추천을 받아 세종이 직접 낙점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풍수의 역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종 태실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면 역사의 과녁을 만나게 될까.

과연 명당이란 명성에 걸맞게 단종의 태실지는 사방이 나지막한 원형 숲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배꼽 모양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거북 등처럼 도톰하게 언덕을 이룬 이런 땅을 풍수에서는 ‘돌혈(突穴)’이라 일컫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이 기의 흐름을 막아 기가 태실지에 몰려 있어야 명당의 조건에 부합한다.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 우리는 단종 태실지로 갔다.

 

▲1975년 경상남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된 단종 태실지. 태실비는 1734년(영조 10년)에 높이 170cm, 너비 51cm, 두께 21cm 규모로 조성되었다.

단종의 태를 언제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단종 태실지가 경북 성주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최남기 선생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사천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세종, 단종 태실 수개 및 표석 수립 의궤>에 따르면 곤양현(지금의 곤명면)의 태실지를 중수한 기록이 나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을 겪으며 왜적들에 의해 도굴되고 파괴됐던 태실지를 1601년(선조 34년) 일부 수리하고 1734년(영조 10년) 대대적으로 중수(重修)했다고 합니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비도 이때 세워졌습니다. 다만 성주 사람들이 단종 태실의 존재를 주장하는 걸 보면 성주에 있던 태실이 사천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태실을 처음 언제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작년 가을에는 성주 쪽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의궤도 확인하고 태실지도 둘러보고 갔습니다.”

올해 1월에는 문화재청 소속 전문위원 다섯 명이 사천에 내려와 현지 조사를 하고 갔다. 위원들은 사천시청 문서고에 보관된 의궤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태실지가 있는 은사리에서 현장 조사를 벌였다. 조사를 마친 위원들은 이날 “우리나라 전체 25곳의 태실지 중 13곳은 이미 훼손되고 현재는 12곳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는 상태가 양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가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 지정될지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세종 태실지는 단종보다 높은 곳, 사람이 다니지 않아 꽤 미끄러운 산길을 10분 정도 걸어올라간 곳에 있었다. 꾸불꾸불 산을 내려오던 용이 한숨을 돌리면서 힘차게 비상하다가 딱 멈추어 봉우리를 이루어낸 돌혈, 이런 곳이야말로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의 필수품인 기(氣) 계측기를 꺼내든 최 선생의 설명은 계속된다.

“계측기를 작동시켜 보면 바로 이곳으로 기가 이렇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뒷산의 기가 급격히 돌혈 쪽으로 뻗어나야 좋은 형세인데 세종 태실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물이 흘러 기를 가두고 있어야 명당입니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감출 장(藏)에 얻을 득(得)자를 써 바람은 감추고 물은 얻는다는 뜻이다. 산으로 병풍을 친 경주 양동마을이 장풍(藏風)이라면, 물이 돌아나가는 안동 하회마을은 득수(得水)로 명당의 요건을 갖춘 곳이다. 최 선생은 풍수에서 더 중요한 건 바람보다 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설명을 듣다가 조금은 생뚱맞게 이런 생각을 했다. 최 선생은 세종보다 단종 태실지가 명당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단종 태실지는 장풍보다는 득수에, 세종 태실지는 득수보다는 장풍에 더 특장(特長)이 있는 것인가. 단종 태실지는 춥고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 오래 있을 수 없었던 반면 세종 태실지는 잔잔한 봄바람이 살랑거려 자리를 떠나기가 아쉬웠던 까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였던 1929년, 일제는 경향 각지에 있던 태실들을 모두 파헤쳐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이전한 뒤 원래 조선 왕실 창덕궁 소유였던 태실 자리는 아예 복원을 못하도록 모두 민간에 팔아 사유화시켜 버렸다. 한반도 명산과 요지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한 일과 다름없는 치졸하고 저열한 행위이다. 아무튼 명당으로 소문난 자리다 보니 당대의 권세가와 재력가들이 앞을 다투어 태실지를 사 들였다.

그 뒤 이 태실지들은 모두 사설 묘로 둔갑해 버렸다. 단종 태실지에는 유물이랄 것도 없이 거북비와 버섯 모양의 석조물, 단 두 점이 최씨 무덤 밑에 외롭고 초라하게 서 있다. 세종 태실지 역시 김해 허씨와 하동 정씨의 가족 묘만이 덩그러니 산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왕조 당시의 조형 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 상개연엽석, 지대석, 돌난간, 팔각대, 주춧돌 등의 석물은 원래 산봉우리에 있던 태실지에서 50m쯤 떨어진 산자락에 한데 모여 있다. 주객의 전도랄까. 그나마 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유물들을 한 군데로 모아 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태실 모습과 그 조형물, 관련 유물들.

자, 그렇다면 명당을 유택(幽宅)으로 삼았으니 그 당사자와 후손들은 출세하고 번성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당대를 영예롭게 살았거나 후세에 크게 자부할 만한 인물이 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종의 태를 묻었던 자리에는 우리나라 한 대기업과 관련 있는 인사의 묘가 조성되었고, 단종 태실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로 규정지은 사람이 묻혀 있다. 임금의 태실지에 조상을 묻었다고 해서 자손들이 흥하고 망하는 건 아닌 듯 싶다. 하물며 단종의 태실지도 세종이 손수 낙점했다지만 단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불운한 생애를 살지 않았는가. 태실지를 사들여 사묘로 만든 이의 비석에도 그 후손이 이런저런 직위를 지냈다고 쓰여 있으나 그리 대단한 벼슬은 아니었던 것 같다. 풍수는 결국 마음이고, 자기 할 나름인 것이다.

▲세종대왕 태실비를 쓰다듬으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 있는 최남기 선생. 추운 날씨인데도 열정적인 해설을 들려준 최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원래 있던 태실은 멀리 서삼릉으로 옮겨 갔고 지금은 다른 성씨들이 묻혀 있는 이 태실지는 과연 문화재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갑자기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 시대 최고의 명당인지라 산세는 수려하고 경관이 빼어났다. 죽은 이들을 위한 명당(明堂)이 산 사람들 눈에는 명소(名所) 혹은 명승(名勝)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진다. “명당은 땅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다.”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마인드 2012.02.01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당은 마음에 있다...
    명언이십니다.

  2. BlogIcon choijinsang 2012.02.01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당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있다..."...

장인의 손길, 명장의 숨결을 만나다

2011 대한민국 명장 및 경남 최고장인전

 

김형오

경남 창원,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직선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도청 방향으로 틀어 전시관(성산아트홀)을 찾아 들어갔다. 12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3시. 제1회 ‘대한민국 명장 및 경남 최고장인전(展)’이 열리고 있다. 명장 네 분과 최고장인 여섯 분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주인공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 스마트폰에 담긴 순서대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작품 감상을 해보자.


▲ <자연의 소리>. 석공예 명장 김상규 선생의 작품이다. 화분, 수박, 호박 등을 돌로 깎아 만들었다. 참 힘든 작업을 했구나. 수박과 호박은 마치 실물을 보는 것 같다. 생동감 넘치는 자연미를 섬세한 조형 언어로 빚어냈다.


▲ 대한민국 명장회 회장을 지낸 한완수 선생의 세라믹 작품. 천연산 황토와 고령토를 고순도로 정제하고 광분채하여 고열로 처리하는 전통기법으로 빚어낸 신소재 고효능 도자기이다.

▲ 금속공예 명장인 변종복 선생은 이번 전시회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청동으로 만든 그의 작품 <얼굴>은 너무나 리얼하여 진짜 실로 꼰 머리채인 줄 알았다. 변 선생은 자기 작품뿐 아니라 다른 분 작품까지 해설을 해주었다.


▲ 변종복 선생 작품 <삼족오문연잎청동촛대> 또한 섬세하고 정교하다. 부분 부분 참 재미있는 구도를 지니고 있다.


▲ 내가 좋아하는 와심(瓦心) 이계안 선생은 <결정>과 <삼채> 달항아리를 출품했다. 국회의장 시절 나는 이 분의 달항아리 한 점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계 최대의 아태문화원(이종문 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또 그보다 좀 더 큰 달항아리를 퇴임 기념으로 국회에 기증했는데 이 작품은 헌정기념관에 비치되어 국회를 찾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달항아리는 그보다도 좀 더 커 보인다. “힘이 있을 적에 한두 점 더 남기고 싶어서” 만들었단다. 예술가의 창작 의욕을 누가 꺾을 것인가. 그 달항아리를 앞에 두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 나전칠기공예 최고장인 박재성 선생의 작품 <빗접>. 영롱한 자개 빛깔과 은은한 옻칠이 어우러져 편안함을 자아낸다. '빗접'은 빗·빗솔·빗치개·가르마꼬챙이·뒤꽂이·동곳 등 머리를 손질하는 도구들을 넣어 두는 함을 일컫는다.

▲ <동화(진사)> 연작을 출품한 도자공예 최고장인 김용득 선생의 도예 작품들도 참 예쁘다. ‘동화(銅畵)’란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구리 안료(銅顔料)를 이용해 선홍의 고운 발색을 내던 기법인데, 제작 과정이 까다로워 백자와 청자에 비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 정찬복 장인의 출품작 나전칠기 접시 소반. 작품 이름은 <과기>이다. ‘과기’란 중국 송나라 때에 산시성의 가마에서 구워내던 도자기를 뜻한다.


▲ 조복래 장인의 가구는 퍽 인상적이어서 좀 설명을 하려고 한다. <상감삼층장>은 오래 된 고사목(느티나무)을 위주로 나뭇결을 잘 살렸으되 오동나무, 가죽나무, 배나무, 먹감나무를 섞어 작업했다. 특히 장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과 쇠목은 단단한 가죽나무로 짰다. 괴목이 빚어낸 오묘한 무늬가 붓으로 그린 것보다 아름답다.

▲ <상감삼층장> 앞에 선 조복래 장인.


▲ 이한길 장인의 진사(동화)와 분청. 도자공예 외길을 걸어온 작가의 인생이 이름(이한길)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 감상을 마치고 찰칵! 여자 분들을 제외하고 사진 왼쪽부터 이계안 장인, 김상규 명장, 나, 변종복 명장, 조복래 장인.

아쉬운 점 한 가지. 이렇게 훌륭한 작가들의 명품이 한 곳에 오롯이 전시되었건만 내가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가면서 1시간여 머무는 동안 관람객이 거의 없어 썰렁했던 것. 전시회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는 좀 더 많은 관람객이 찾아 주었을까. 서울로 옮겨 전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명품명장 2011.12.15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인의 손길이 빚어낸 명품들도 놀랍지만 그걸 글로 옮긴 심미안도 찬탄스럽습니다


가슴 안에서 빛나야 진짜 보석이다

스마트폰으로 스케치한 이영미술관의 진짜 보물들


김형오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는 곳. 이영미술관(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은 자체 시설도 크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풍광 또한 이만한 곳이 드물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미술관이 기차역을 개조해 지어졌듯이, 이영미술관은 2001년 돼지우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3000여 마리의 돼지를 키우던 돈사(豚舍)가 지금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거듭났으니, 다산성(多産性)인 돼지의 축복을 받은 걸까? 장미꽃밭으로 변신한 전남 구례의 쓰레기 매립장처럼 이영미술관은 역발상의 신선한 성공 모델이다.

다음은 내가 이영미술관에서 찾아낸, 다른 여느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짜 보물들이다. 아이폰으로 스케치한 사진들이라서 퀄리티는 조금 떨어지지만, 이영미술관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곳인가를 알게 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으리라. 진짜 보석은 가슴 안에서 반짝인다. 내 후각과 미각과 시각과 촉각과 청각 모두를 행복하게 해준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도 내 가슴 한 기슭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그 공감각적 보물찾기에 동행해 보자.

보물 1 : 금강산도 식후경, 밥상 위의 행복

▲빨갛게 달구어진 장작이 타고 있는 가마솥! 오늘 무슨 잔칫날인 줄 알았다. 이렇게 큰 무쇠 가마솥이 펄펄 끓고 있다니….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김이환 관장님이 준비를 단단히 하셨다.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김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에 저절로 발목이 붙잡혔다. 저 안에서는 무엇이 익고 있는 걸까?

▲부뚜막과 나무 선반 등이 옛날 시골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행주며 그릇들은 또 얼마나 정겹고 소박한지…. 뚜껑을 살짝 열어 놓은 이 가마솥 안에서도 밥 냄새가 구수하다. 오, 해피 데이! 장작불 가마솥에서 갓 지어낸 밥과 국을 맛보게 될 줄이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지푸라기로 엮은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온돌방에서 도란도란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갑자기 이 집 된장과 간장 맛이 궁금해졌다.

▲놋그릇과 도자 접시, 가마솥에서 나온 밥과 국, 통영에서 전영근 화백이 가져온 싱싱한 생굴과 맛깔스런 김치, 접시에 다소곳이 담긴 장떡(밥상 위쪽)….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은 소담스런 성찬이다.

보물 2 : 설치미술과 정물화, 휴식 같은 산책

▲뱃속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인 탐방에 나설 시간.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듯하여 가 보니 이제 막 볏이 돋기 시작한 토종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닭장이 나온다. 그런데 이 녀석들, 낮잠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 꼼짝을 안 한다. 주인이 가끔씩 자리를 옮겨 주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작대기를 걸쳐 세워 놓은 저 지게는 또 얼마 만에 보는가. 검불이나 곡식 따위를 긁어모으던 나무 갈퀴 두 개가 소품처럼 지게 위에 얹혀 있다. 멋진 설치미술 작품이 따로 없다.

▲투박한 장독 위에 올려놓은 나무를 엮어 만든 소쿠리에서는 모과가 상큼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십리 밖에서도 모과향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대로가 한 폭의 아름다운 정물화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 함이던가. 정원 한 편에 300년 세월을 살았다는 벽오동나무가 잎을 죄다 떨어뜨린 채 겨울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내년 봄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신록을 자랑할 때 그 진수를 보러 다시 와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나무(‘배롱나무’로도 불린다)를 만났다. 혹한의 겨울에 대비해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 뒤로는 빈 독인지 속이 꽉 찬 독인지 궁금해지는 배가 볼록한 독들이 백일홍 나무를 응시하고 있다. 혹은 수호하고 있는 걸까? 백일홍의 꽃말은 ‘가 버린 친구를 그리워함’이다. 문득 지난여름 난분분난분분 낙화했을 꽃들이 그리워졌다. 백일홍은 나뭇가지 틈새를 살짝만 건드려도 겨드랑이를 공습당한 새색시처럼 몸을 파르르 떤다 해서 일명 ‘부끄럼나무’ 혹은 ‘간지럼나무’로도 불린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독들이 ‘너희 정치인들도 우리를 본받으라’는 듯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도열해 있다. 저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나하나 열어 보고 싶게 만든다.

▲나무판자를 깔아 놓은 산책로. 우리는 정담을 나누며 이 길을 산책했다. 돌담 위에 나란히 얌전하게 포개져 앉아 있는 것들은 고풍스런 기왓장들이다. 7천 평의 넓은 면적을 훨씬 더 넓게 쓰는 것은 공간 활용을 그만큼 잘했다는 얘기다.

보물 3 : 깜짝 공개, 보물창고의 문을 열다

▲이제부터는 진짜 보물창고 탐방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 이런 보물들이 숨어 있는 줄 짐작도 못할 텐데 우리 부부에게는 특별히 공개했다. 사진 속에서 빛나고 있는 공예 작품은 여덟 사람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전통 자개상이다. 통영 명인의 얼과 혼이 깃든 명작.

▲상다리는 사자 모양이다. 네 귀퉁이에서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 네 마리가 튼튼하게 상을 받치고 있다. 천년을 써도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같이 위풍당당하다.

▲자개로 만든 용이 구름을 헤치고 밥상 위로 날아오를 기세다.

▲육중해 보이는 사자의 다리와 발목에는 아름다운 매화가 활짝 꽃잎을 열고 있다.

▲선반 위에 놓인 놋그릇과 찻잔. 50명 정도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놋그릇엔 하나하나마다 인장을 찍어 외부 반출을 막았다. 요즘엔 닦기가 좀 쉬워졌겠지만 그래도 웬만한 정성 없이는 관리하기 힘든 그릇들이다.

▲보물 중의 보물을 발견했다. 이 보물들을 보고 온 뒤로 며칠 동안 얼마나 배가 부르던지…. 이게 뭔가? 맞다, 분명 전혁림 그림이다. 그런데 그 소재는? 김이환 관장 왈, ‘제주도 문짝’이란다. 허걱, 제주도 문짝 그대로를 캔버스로? 실제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 제주도 나무인 만큼 재질이 딱딱하다. 다른 나무보다 그림 그리기가 더 까다롭다. 그 대신 변치 않는다. 참 신기하고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제주도 문짝을 캔버스로 삼은 작품 앞에서 아내와 찰칵! 쪽문인 듯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나룻배 모양 목기에 담아낸 저 현란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놀림! 그 옆에 붉은 글씨로 ‘全爀林’이라고 화가의 한자 이름을 써 놓았다.

▲통영의 목공예 명장이 만든 3층장에 전혁림 화백이 이미지와 색을 입힌 아주 특별한 작품. 이런 소장 가치가 높은 걸작은 대대손손 보관을 잘해야 될 텐데, 공개해도 괜찮은 건지 조금 걱정스럽다.

▲보물들을 향해 열심히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는 내 모습이 유리창에 투영되었다. 사진 찍기란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인지도 모른다.

보물 4 : 조각품들은 말한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미술관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조각 작품들. 찬찬히 뜯어보니 정말 예사롭지 않다. 특이하게도 모두 하나같이 제목이 없다. <무제(無題)>라는 타이틀조차 달지 않았다. 작가가 아예 짓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까닭은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는데 손가락만 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 작품에는 어떤 해석이나 설명도 사양한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껴 달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김춘수 시인의 <꽃> 중 이런 구절이 생각났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와 동시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이름은 한용진. 1934년생으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이다. 자연석에 최소한의 손질만 해서인지 그의 작품은 인위적이지 않고 투박하다. 자연과 일체를 이룬다. 맨 위 사진(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은 부분 촬영)에 담긴 조각 작품은 작가가 특별히 애착이 깊어 완성된 날 막걸리 한 사발을 붓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충남 보령 지역의 청석을 탑처럼 쌓아 세워 놓았다. 돌 하나의 무게만도 무려 5톤. 아침저녁으로 그 빛깔이며 질감, 이미지 등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그대, 부디 이영미술관에 가시거들랑 이 모든 제목 없는 작품들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대만의 이름을 불러 주기 바란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길영소백합 2011.12.13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사님과 오붓한 모습이 보기가 좋네요.

  2. 볼록렌즈 2011.12.20 1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술관 전체가 거대한 미술작품인 것 같아요.
    관장님의 안목과 센스가 참 대단하십니다.

통영의 하늘과 바다를 사랑한 사람

이영미술관에서 전혁림을 만나다 3


김형오


도자기 옆에 있는 조형물도 눈길을 끈다. 목어(木魚) 모양 그네? 김이환 관장 부인 신영숙 여사가 사찰의 대들보와 기둥을 그대로 가져와 소재로 쓴 일종의 설치 미술이다. 오래 된 나무라야 변질․변색․변형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대들보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목어는 그네 타기가 아니라 종을 치기 위한 것. 배치가 절묘하다. 뒤편의 도자기가 마치 범종처럼 보인다.


전혁림 화백 하면 누드화를 빼놓을 수 없다. 청년기는 물론 아흔 넘어서도 여체를 즐겨 캔버스에 옮겼다. 이번 회고전(2012년 2월 28일까지 연장 전시 중)에서도 15X19cm 크기의 목판 85조각에 저마다 다른 포즈를 하고 있는 누드화를 아교로 타일처럼 벽에 붙여 놓은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앞서 <만다라>와는 달리 테두리가 튀어나오도록 하지 않고 사각 평면이라서 그림 그리기는 한결 수월했을 듯. 무식한 내가 "젊었을 때 누드화 많이도 그렸네요"라고 했더니 90 넘어 그린 최신 누드작이란다.(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태 동안 작업) 여기서 한 가지 팁. 이 개개의 유화 작품들엔 전 화백의 영문 사인 ‘JEON’이 들어가 있다. 2004년까지는 ‘CHUN’을 쓰다가 그 이후로 바꾸었다고 한다.

▲ 이 작품에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눈 밝은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보았겠지만 이 누드의 맨 오른쪽은 세 개의 목판으로 구성돼 있는 반면 왼쪽은 두 개여서 비대칭을 이룬다. ‘Balance of Unbalance’를 추구한 걸까? 노! 사실은 목판이 하나 모자라서 그런 거란다. 메인 부분에서 하나를 빼면 이가 빠진 듯 균형이 깨질 테고, 그래서 맨 왼쪽을 두 조각으로 배치했다는 얘기. 가만, 그러고 보니 오른쪽은 세로 그림인 반면 왼쪽은 가로 그림이다. 구도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건 아마도 그래서인 듯.


전 화백은 고향 통영의 하늘과 바다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회고전에 걸린 2005년 작품 <통영항>에는 작가의 절절한 통영 사랑이 화폭 가득 묻어나 있다. 1000호짜리(600X300cm) 대작이다. 이만한 크기면 보통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작업하기 마련인데 전 화백 작품에는 이음매가 없다. 독일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유화 물감을 썼는데 작품 한 점 당 물감 값만도 2000만 원이나 들었단다.


청와대 인왕홀에도 전혁림 화백이 그린 1000호짜리 <통영항>이 걸려 있다. 이 작품은 가로 길이가 좀 더 길어 7m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그렸다는데, 그래선지 미륵산이 크게 부각돼 있다. 노 대통령이 미륵산 용화사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한려수도 300리>도 1000호 대형 작품이다. 이 그림의 탄생 배경 또한 의미심장하다. 전 화백은 1983년 <통영항>이란 100호 작품을 그려 통영시청에 걸었다. 그러나 그 정도 크기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다. 살아 있을 적에 통영항과 한려수도를 좀더 넓은 캔버스에 제대로 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의 <통영항>을 참고 삼아 필생의 역작에 매달렸다. 자신의 얼과 혼을 모두 쏟아부었다. 이 얼마나 수려하면서도 섬세하고 또한 다이내믹한가. 이렇게 멋진 ‘한려수도 조감도’를 그려낼 사람은 전 화백 말고는 없으리라. 헬리콥터 위에서 내려다본 듯 생생한 풍경이다. 1967년에 개통된 운하교가 통영시와 미륵도(산양읍)를 가로지르고, 통영항에는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릴 적 내가 통영에만 가면 꼭 찾곤 했던 남망산에서 바라보이는 섬과 화가의 눈에만 역력히 각인된 섬들이 그 특색만을 살린 채 화려하게 경연을 펼친다. 남해, 삼천포, 연화도, 욕지도, 한산도, 거제도, 가덕도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여러 섬들이 코발트블루의 바다 위에 떠 있다. 통영수산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며 그 일대 섬이란 섬은 모두 섭렵한 전혁림 선생이 섬의 특징을 뽑아냈기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금방 그 섬들을 찾아낼 수 있다.

▲ 한려수도 300리

한려수도 300리 부분(좌)

한려수도 300리 부분(중)

한려수도 300리 부분(우)


 

미술의 전혁림을 비롯해 통영은 예술 분야에서 불세출의 거장들을 많이 배출했다. 음악의 윤이상, 문학의 유치진․유치환․김춘수․이영도.박경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내 어릴 때 통영에서 본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은 세병관(洗兵館)이다. 그 일곱 기둥 사이로 통영항이 전개된다. 자연 만물이 살아 숨쉬고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뛰어논다. 햇살과 바람, 섬과 산과 하늘, 그리고 배들이 노닌다. 

추상화의 절정인 말기 작 <세병관 일곱 기둥 사이로 본 통영항>에는 통영이 낳은 걸출한 예술인들의 창작혼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김춘수의 꽃, 유치환의 바다, 윤이상의 오선지, 이영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히노끼(편백)나무 화판에 스며들어 있다. 영화에 빗대자면 ‘오마주’ 같은 작품이다. 일곱 개의 기둥 사이로 펼쳐진 통영항이라. 참 발상 자체가 담대하고 파격적이다. 두 개의 기둥 사이라면 몰라도 누가 감히 일곱 개의 기둥 사이로 보는 통영항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인 눈으로는 동시에 그런 풍경을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로지 전 화백 같은 거장의 심미안만이 볼 수 있는 영역이다. 한참을 들여다보노라면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이 돌출한다. 몇 권의 책에 담길 내용들을 1000호짜리 캔버스에 압축하고 집약했다. 숨은 에피소드 하나. 맨 오른쪽 반달 모양 공간에도 무언가를 그려 넣으려 했는데 끝내 못 채우고 작가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이 작품이 더욱 인상 깊이 남는다. 저 빈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물감으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고 치열하게 붓을 놀리고 있는 생전의 노화백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해지곤 한다.

▲ 세병관 기둥 사이로 본 통영항

세병관 기둥 사이로 본 통영항 부분(좌)

세병관 기둥 사이로 본 통영항 부분(중)

세병관 기둥 사이로 본 통영항 부분(우)



2010년 7월 12일, 전혁림 화백 49재를 맞아 창원 MBC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바다에 지다>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주관한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영미술관은 몇 달 전 방영된 KBS 주말 드라마 <사랑을 믿어요>의 세트장으로 사용되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전혁림 화백의 작품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친 건 당연한 사실. 예술은 역시 인생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길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누디스트 2011.12.12 14: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저 놀라운 여체미학.
    모든 모델들이 포즈도 다를뿐더러 얼굴과 체형 또한 각양각색이다.
    85개의 누드가 에로티즘의 미학을 발산한다.

춤추는 도자기, 노래하는 도자기

이영미술관에서 전혁림을 만나다 2

김형오


<만다라>에 빠져 있는 내 손을 잡고 김이환 관장은 “우리 집에서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 하신다. 뭘까?

내 키보다 더 큰 2m 높이는 됨직한 거대한 도자기가 주변을 압도한다. 첫눈에 전혁림 화백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색깔․선․면 처리가 투박한 듯 날렵하고, 무거운 듯 가볍다. 산과 바다, 하늘과 땅, 새와 온갖 것들이 춤추고 노래한다. 거대한 입체 캔버스 위에서 사고가 자유를 만끽한다. 도자기라는 정해진 틀에 닫혀 있으면서 또한 열려 있다. 참 오늘 미술 공부 많이 한다. 아니, 전혁림의 미술관, 작품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이 도자기는 전 화백이 강화의 도자기 요에 직접 가서 그린 작품이란다. 두 점을 그렸는데 한 점은 아깝게도 가마에서 꺼내다가 파손되어 이것밖에 없다고 한다. 이 큰 도자기에 연로하신 몸으로 어떻게 작업하였을지 자못 궁금하다. 전 화백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거대한 도자기가 물레 틀에서 조금씩 돌아가고, 화백께선 붓을 들고 영감과 예술혼을 그 위에 펼쳐나가셨단다. 아드님 영근 화백은 그런 아버님 자세를 흩뜨리지 않으려고 뒤에서 허리춤을 꽉 붙잡고 도와드렸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첫째, 빙 둘러 그림을 그리고 선과 무늬를 넣었는데 마치 자로 잰 듯 시작과 끝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직접 확인해 보았다. 맨 윗부분만 보더라도 삼각형 무늬가 같은 크기로 반복되고 있다. 가로줄도 색깔의 짙고 옅음은 있지만 비뚜로 되지는 않았다. 오늘 여기서 많이 듣는 말, ‘일필휘지’다. 그랬다, 도자기는 덧칠을 할 수 없다. 색을 빨아들이므로 한번 붓질한 자리에 또 칠하면 금방 표가 나고 보기도 안 좋기 때문이다. 일필휘지로 해와 달, 물고기와 새를 그려내며 선생님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두 번째 놀라움. 이 거대 도자기 그림을 완수하는 데 불과 2시간도 안 걸렸다는 것이다. 설마하니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아드님이 지칠까 하여 빨리 끝냈을 리는 없을 테고, 평소 작가의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창조의 욕구가 그대로 발산된 것 같다.

도대체 전 화백은 어찌 이리 창조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신가. 어디서 모티프를 구하시는가? 추상인 듯 구상이고, 구상인 듯 추상이다. 아드님 왈, “아마도 독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영숙 여사는 한술 더 뜬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란다. 아드님이나 제자나 극진한 존경과 사랑이 묻어나온다.

자세히 보면 도자기도 예사롭지 않다. 광주 도자 엑스포에서 대상을 수상
한 도예작가 손호익씨에게 특별 의뢰하여 강화도 초지진의 도요지에서 구워낸 것이다. 아, 아깝고 또 안타깝다. 같은 크기의 작품 한 점이 도요에서 나오다가 파손돼 버리다니!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 어릴 적 영도다리 건너에 '대한도기'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자기 공장이 있었다. 전 화백은 일찍이 거기에서 몇년 동안 직접 도자기를 빚었다. 통영 미륵산 자락에 자리잡은 전혁림미술관에는 전 화백이 직접 빚은 도예 작품 수십 점이 소장되어 있다.

전혁림은 통영의 물길이고 또한 상징이다. 통영 시내 주요 아파트 벽면과 절개지, 그리고 도로변에서는 그의 붓자국이 생생한 그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전 화백의 작품들을 확대 모사해 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지만, 사실은 나폴리를 '서양의 통영'이라 해야 맞다. 우리 국토에 이토록 아름다운 산하(山河)가 있다니! 그 통영을 전혁림은 붓으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의 캔버스는 유한과 무한의 경계가 없다. 모든 것을 담아내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그런 그가 100세를 4년 앞두고 떠나갔다. 하지만 통영은 그를 보내지 않았다. 그의 숨결과 체취는 통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통영시와 통영시민들의 문화의식, 그 수준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통영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 자랑스러운 도시다. 그 핵심, 심장부에 전혁림이 있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필 2011.12.11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가의 한 획은 일필휘지가 되건만
    나의 졸필 한 줄은 왜 일필휴지가 되는가.

<뉴 만다라>, 시작도 순서도 없는 무한 세계 이상향

이영미술관에서 전혁림을 만나다 1

김형오

좋아하는 작가의 혼이 깃든 작품을 보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 속에서 사람 이야기, 인생살이 같은 담소를 나눈다면 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이영미술관에서 이 모든 즐거움을 한꺼번에 채울 수 있었다. 행복한 날이었다.

이영미술관을 찾았다. 근 3년만이다. 다소 쌀쌀한 날씬데도 김이환 관장님 내외가 직접 맞으셨다. 마침 내가 오는 시각에 맞춰 통영에서 반가운 손님 한 분도 막 도착했다. 전혁림 선생의 아들이자 고인 이름의 미술관을 씩씩하게 운영하고 있는 서양화가 전영근 관장이다. 너무 반가웠다. 새벽시장 가서 내게 맛보이려고 통영 갯내음이 싱싱한 생굴도 한 박스 사 들고 왔단다. 그 살갑고 섬세한 마음에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을 뒤로 하고 미술관 내부로 직행했다.

전혁림 1주기 기념전(‘나는 전혁림이다’)에서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거대한(?) 만다라였다.(<뉴 만다라>, 목기에 유화, 2007년) 가로 세로 각 20cm 정도의 나무판 1050개가 하나의 작품으로 진열되어 있다. 물론 목기 하나하나가 작품이니 1050개의 작품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

<뉴 만다라>의 탄생 배경을 알고 나니 작품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이영미술관의 또 다른 주인 신영숙 여사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었다.(이영미술관은 김이환의 ‘이’, 부인 신영숙의 ‘영’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시골에선 아직도 손님에게 떡이나 과자 또는 찻잔을 올릴 때 쓰는 나무 그릇이랄까, 나무 받침 같은 것(목기)을 수십 개씩 들고 가 전혁림 화백에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냥 가정집에서 쓰는 나무 그릇이 아니라 시골집 오랜 대들보(120년 이상 된 조선 소나무)를 구해 자르고 깎고 다듬어 깨끗이 마름질하고 못질 하나 없이 똑같은 규격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내라 했으니 목수의 노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신 여사 말이, 질 좋고 두꺼운 오래된 대들보라야 목기를 만들어도 뒤틀리지 않고 그림도 잘 그려지기에 구하느라 참 고생도 많았고 까다로운 주문에 목수들 또한 구슬땀을 쏟았다고 한다. 어렵게 만든 목기를 통영의 선생님께 들고 가 여기에다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한 이가 신 여사니 어찌 보면 두 사람의 공동작, 신영숙 기획․제작에 전혁림 주연․감독이랄까. “나무를 캔버스로 삼은 그림은 덧칠해선 안 되고 붓 잡으면 단 한 번에 그려야 제대로 되는데 선생님의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게 신 여사의 설명이다.

가까이에서 본 만다라 (화보집에서 재촬영)

처음에는 한 300점 정도 그릴까 했는데 목재 구하는 어려움이 즐거움으로 바뀐 건 전 화백께서 목기에 그림 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좋아하셨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점차 숫자가 늘어나 5백 점, 8백 점, 드디어 1천 점을 넘게 되었다고 한다. 생전에 좀 더 많이 그려서 남겨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전관장의 목소리에 묻어있다.통영에는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60점 있다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만다라>와 <충무항> 두 점을 청와대에 비치하고 싶어 했으나, 일반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어도 이 작품은 다시 만들 수 없어 거절했다 한다.

마침 미술관은 잠시 어린이들이 왁자지껄 지나갔고 드문드문 관람객이 다녀갔을 뿐 넓은 공간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 설명도, 감상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김 관장님은 관람 통제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가 콧김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작품을 한 점 한 점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촬영 금지인데도 특별히 나한테는 사진 찍어도 좋다고 했지만 기념사진 외에는 감히 찍을 수가 없었다. 고인에게 누가 될 것 같아서.

왼쪽부터 김이환 관장, 신영숙 여사, 나와 아내, 전영근 관장


비슷하긴 해도 똑같은 것이 단 한 점도 없다. 검정을 비롯해 파랑 빨강 노랑 등 원색에 선 원 면 점 세모 네모 타원 곡선 직선과 무늬를 적당히 배열해 놓은 것 같다. 김이환 관장 말씀을 듣고 나니 골무 비녀 반짇고리 베개보 같은 우리 어머니․할머니가 즐겨 사용했던 물품과 물고기 바다 새 나비 하늘 구름 같은 통영 이미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상을 연상시키는 빛깔과 모양도 나타난다. 한국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색다른 느낌, 언젠가 꿈꾸어 왔던 이상향, 인류가 지향하는 그 무엇과 연결되어 세계성을 띠고 있다. 소박하고 순순한 이 통영 향토 작가의 꿈과 연륜, 천재성이 나무판에 대담하게 펼쳐진다.

화보집에서 재촬영

단순한 나무 평면이라도 그리기가 만만찮을 텐데 45도(?) 각도로 비스듬한 네 모서리를 일필휘지로 그려낸 대담성과 입체 구조물에 평면 그림의 대조가 신비로우면서도 그 자체로 입체미를 이룬다. 한글 ㄷ자 모양으로 세 벽면을 가득 채워 관람객을 만다라의 그림 세계로 빨아들이고 있다. 왜 1050점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선 1천 점 이상이면 무한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ㄷ자 구조물을 특별히 만들었지만 언젠가 뉴욕 대형 미술관에 전시할 때는 한 벽면 전체를 가득 메우고 싶다고 했다.

기독교도인 전혁림 화백에 의해 불교의 사상이 한국의 전통과 통영의 빛깔로 버무려졌다. 수많은 대들보가 사용되었는데 대들보 질감에 따라 바탕색이 다르고 순서도, 시작도 따로 없단다.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죽음의 춤>이 떠올랐다. 캡슐에 든 2만 3000여 개의 모형 알약을 작가의 배열 순서대로 배치하느라 큐레이터들이 진땀을 뺐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적어도 그런 수고는 필요 없다. 그러나 1050개의 작품이 빚어내는 무한 세계 이상향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내가 바라보는 1/1050의 만다라가 바로 시작이고 또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4년 8개월 걸렸다는 이 작품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다. ♠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성동 2011.11.30 09: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보집에서 재촬영.
    사진 찍기를 허락했으나 고인에게 누가 될까봐 플래시를 터뜨리지 못하고
    화보집에 렌즈를 댄 님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습니다.

  2. 아티스트 2011.12.08 1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술평론가 수준의 평문, 놀랍습니다.
    마침 연장 전시가 되고 있다니 주말에 시간 내어 전혁림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진주성 안에 1984년 문을 연 국립진주박물관은 지역 박물관 중 경주박물관 다음으로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보고입니다. 경남 지역 역사문화실과 임진왜란실, 그리고 기증 문화재를 전시한 두암실을 비롯해 기획 전시실, 야외 전시실, 3D 입체 영화관, 체험 학습실, 정보 자료실, 강당 등을 적극 활용해 다채로운 특별전과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안내와 재치 있는 해설로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게 해준 진화수 국립진주박물관장, 장일영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께 감사드립니다. 내 아이폰이 찍은 사진으로는 질감이 안 살아나는 유물은 박물관에서 펴낸 도록을 캡처해 올렸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전경.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거목 김수근 선생(1931~1986)의 설계로 지어졌다. 사람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건축에 반영했던 김수근 선생은 우리나라 목탑을 형상화해 이 건물을 구상하고 설계했다고 한다.

 

보물 제168호 청자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활짝 핀 매화와 푸른 대나무 이파리 위로 두 마리 학이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 경남 하동에서 출토되었으며 12세기 후반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백자대나무무늬병. 17~18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긴 원통형 병은 조선 시대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처럼 몸체를 다시 대나무 마디 형으로 깎은 것은 희귀한 예다. 여기에 다시 대나무를 그려 넣어 운치를 더했다. ‘대나무 속의 대나무’ 병이다.

 

가야 유물인 수레바퀴모양토기. 이 토기에 부착된 수레바퀴는 무덤에 함께 묻혔던 사람의 영혼을 저승 세계로 무사히 운반하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위로 삐죽 솟은 시계태엽 모양의 장식은 손잡이였을까. 표면에 고사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선조가 내린 한글 교서. 임금이 친필로 쓴 한글 교서로는 유일한 예가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에 피난 가 있던 선조는 포로가 되어 일본군에 협조하던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교서를 내렸다. 그 중 한 구절, “왜를 잡아서 나오거나 왜가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서 나오거나 잡힌 사람을 많이 더불어 나오거나, 이러한 공이 있으면 양인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도 줄 것이니, 너희는 조금도 전에 먹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오너라.”

 

바닷가 마을의 저녁노을을 그린 어촌석조(漁村夕照). 중국 호남성 동정호 아래 소수와 상강이 합쳐지는 곳의 여덟 군데 절경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 한 폭이다. 경남 사천 출신 두암 김용두 선생(1922~2033)이 일본에서 사재를 털어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기증해 만든 두암실에 전시돼 있는 작품 중 하나로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소상팔경도 중 한 폭인 원포귀범(遠浦歸帆). 먼 포구로 돌아오는 돛배를 그린 작품이다. 이밖에도 소상팔경도는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산마을(산시청람, 山市晴嵐),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연사모종, 燃寺暮鐘), 소수와 상강에 내리는 봄비(소상야우, 瀟湘夜雨), 동정호수에 비친 가을 달(동정추월, 洞庭秋月), 모래펄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평사낙안, 平沙落雁), 저녁 눈 내리는 강과 하늘(강천모설, 江天暮雪) 등을 화폭에 담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방명록에 내가 쓴 글귀. “역사의 古都(고도), 경남의 자존심, 글로벌 世界(세계)의 礎石(초석)”

 

 

진주인터넷신문 관련 기사 바로 가기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서당개 2011.04.26 18: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덤으로 한자 공부도 많이 하고 갑니다~~~

  2. 연보라 2011.05.04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김용두 선생 일화는 일전에 EBS에 소개된적도 있었지요...
    나라 보물을 귀히 여기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주십시요

  3. 왕그니 2011.05.06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지역이나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면 박물관에 가보라는...
    의장님 문화 사랑이 느껴집니다..^*^

  4. 헬레나 2011.05.07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 전 국회의장님! 국립 진주 박물관에 방명록에
    쓰신 ,역사의 古都, 경남의 자존심,
    글로벌 世界의 礎石, 글귀가 마음에 와 닫습니다.

4월 21일, 참진주아카데미 특강을 위해 진주를 찾았습니다.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논개>의 첫 연을 외우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강연 시작 전에 잠깐, 또 끝난 뒤에 30분 남짓 진주성에 들렀습니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해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성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충혼이 서린 곳입니다. 의기 논개가 몸을 던진 촉석루 아래 의암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남강 물결 위에 돛단배가 떠 있는 아름다운 봄날 오후의 진주성 풍경을 내 아이폰으로 스케치했습니다.

 

촉석루(矗石樓)의 촉(矗)은 곧을 직(直)자 세 개가 모여 이루어진 동체회의문자(同體會意文字)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논개가 곧은 마음으로 곧게 떨어져 내림으로써 역사를 곧게 세운 누각이라서 곧을 直자 세 개 矗石樓인가?

 

논개의 낙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촉석루.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 잎들이 왠지 논개의 구국혼처럼 느껴졌다. 논개의 숨결이 서린 촉석루 바로 옆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있다. 촉석루는 논개가 왜장을 안고 몸을 던진 날, 꽃다운 청춘을 삼킨 남강을 내려다보며 애통해 했으리라.

 

의암사적비가 서 있는 의기논개지문. 1740년 경남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웠으며, 비문에는 논개의 순국 정신을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에서 모형 황포돛배가 떠 있는 남강을 배경으로 찰칵! 원래는 위험한 바위란 뜻의 위암(危巖)이었는데, 논개의 순국 이후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의암(義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람에 날리는 넥타이가 풍향과 풍속을 짐작하게 해준다.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었으나 1379년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 침범을 막기 위해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일제의 훼손으로 외성의 자취는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내성만 복원해 놓은 상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전망이 아름다워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린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하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으로 사용하였으며, 경남도청이 옮겨 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으로도 쓰였다.

 

진주대첩으로 청사에 빛나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1592년 10월에 침공한 왜적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이마에 적탄을 맞아가며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겼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다가 39세를 일기로 진주성에서 순절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진주성은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1927년 남강에서 바라보며 찍은 촉석루.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지만 이런 사진들을 기초 자료 삼아 1960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복원되고 재건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인 촉석루는 전시에는 지휘소로 쓰이고,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拱北門). 임금 계신 북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2002년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되었다.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암기력 테스트 2011.04.26 1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교과서에서 배운 지 30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걸 보면
    이 시가 가슴에 스며 화석처럼 굳어졌나 봅니다.
    촉석루 구경, 덕분에 잘했습니다.

  2. 이동기 2011.04.26 1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불렀던 노래<논개> 가사가 생각납니다.

    몸 바쳐서 몸 빠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 위에...

  3. 헬레나 2011.04.26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창랑! 장택상 전 국무총리님의 "성어"가 생각 납니다.
    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그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 는 말씀이 생각 납니다.
    "강류석불전" 전 국회의장님!의 자상함이 사진으로 느껴집니다.
    진주 "촉석루" 구경 잘 했습니다.
    저는 진주 남강 유등축제에 회원님들과,다녀 왔습니다.
    밤에 갔다와서 "촉석루"는 구경 못 했거든요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상층부를 재건축한 모습을 담은 옛 그림.(위 왼쪽) 돔 위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다. 물론 미너렛(첨탑)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슬람 사원이 된 이후로는 돔 위에 십자가가 없다.(위 오른쪽) 그러나 이 건물 내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하기아 소피아에는 위 왼쪽 그림에서처럼 십자가 모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아래 그림)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Mezquita.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창건한 사원. 후대의 통치자들이 확장을 거듭해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재정복 당한 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는 “어디에나 있는 건물을 짓자고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건물을 부수고 말았구나.”라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원의 중심부만 개조해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8일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던 쿠데타. 532년 1월 10일 정치적·종교적으로 대립하던 청색파(Factio Veneta)와 녹색파(Factio Prasina)간에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 응원 도중 싸움이 벌어져 주동자들이 사형을 언도받자 이들은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파가 연합해 ‘니카(승리)’를 외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에 편승해 황제의 반대파였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諫言)으로 피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반란군을 급습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저서로는 『전사(戰史)』『비사(祕史)』『건축기(建築記)』 등이 있다. 그는 『건축기』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또 이렇게 칭송했다. “이 대성당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원주 위로 치솟아오른 거대한 돔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습은 견고한 석조 건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려 우주를 덮고 있는 것 같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6개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극장), 영국의 스톤헨지(거석 기념물),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터키 유수의 건축가이자 유력 언론의 칼럼니스트인 알리 에사드와 이스탄불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맺었다. 알리는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 서적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제목이『콘스탄티노플의 기념물』인 이 책은 독일 베를린에서 1855년에 간행된 서적을 100권 한정판으로 찍어낸  영인본이다. 일련 번호는 021/100. 세상에서 100권밖에 없는 책의 21번째 주인 자리를 내게 양도해 준 알리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은 특히 아야 소피아의 건축공학적 특징을 수준 높은 그림과 함께 mm 단위로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 조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판형이 신문(대판)보다도 커서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그림들은 2,3편에서 좀더 상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황제는 대성당에 가기 전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음 네 가지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군주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황제를 위해 목숨과 가정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의 허물을 사과하노라. 나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면 용서하기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성사와도 같은 황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대성당을 나온 황제는 황궁으로 가 거기에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도성 시민들이 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황제와 술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오스만의 역사가들은 “이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었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을 뿐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고 부인한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된 표현이다.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마지막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호전성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피정복자인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교도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말로써 보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은 피정복민들에게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신앙의 자유, 남녀 평등,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코란(2:256)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이슬람의 빠른 전파는 무력이나 강제적 개종보다는 오히려 관대와 포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고색창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1573년에 착공해 2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도리아, 이오니아, 고딕, 르네상스 등이 하모니를 이룬 고전 건축 양식의 집합체이다.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호메로스 2010.11.19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말로 블로그판 <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
    그러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가 드물듯이
    과연 이 작업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아무튼 참 대단하십니다.

  2. 레드블랙 2010.11.20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가슴 안에서 거문고와 비파가 현을 강렬하게 긁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가 봅니다.

  3. 앙코르 2010.11.21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주마간산, 하지만 다음에 다시 탑승해 이스탄티노플 구석구석을 샅샅이 탐사해야지.

  4. 프로페셔널 2010.11.22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이는 깊게, 넓이는 넓게...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맛이 납니다.
    사진의 적절한 배치도 베리 굿!

  5. 동네주민 2010.11.22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저 웅장한 건축물을 매일 볼텐데...
    우리가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이런..벅찬 감동을 매일 느낄까요??

    매일 매일 느끼는 벅찬 감동이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것 같네요...

    우리 동네에는....??

  6. 포에버 2010.11.25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야, 아야, 아야! 그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화해와 공존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이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정말 숙연해집니다.

  7. Halil Arça 2010.12.08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ello,

    This is Mr. Arça, I received your post.
    Can you please send me your e-mail adress.
    halilarca@yahoo.com
    Thank you

  8. 2010.12.09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dddd 2011.02.28 0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성사도 성당이 무었때문에 부숴졌고
    그리스 본토인들은 얼마나 차별받았는데.....

  10. BlogIcon eatwithmeist 2012.12.18 04: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연구와 정성을 다해 작성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얻고 갑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살고, 터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을 알리고자 블로그를 열었는데..제 술탄아흐멧 관련 포스팅에 님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