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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4 한국경제]

 

김형오 前 국회의장 '백범일지 특별전' 개최


 

"백범 관련 자료수집 본격 나설 것"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사진)는 백범일지(白凡逸志) 출간 70주년을 맞아 관련 도서 380여 권을 선보이는 특별전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를 오는 1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연다.


백범 김구가 희망 담아 쓴 친필 휘호, 70년 만에 첫 공개

 


15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두 아들에게 유서 형태로 쓴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국사원출판사가 출간한 지 정확히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특별전에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된 백범일지 원본의 영인본(복제본)을 비롯해 활자본 초판본,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아들인 윤종에게 준 서명본, 중국어·일본어·영어·독일어·몽골어로 된 백범일지 번역본 등이 공개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활약한 윤봉길 이봉창 이재명 등 한인애국단원, 김구 선생의 피신을 도운 중국인, 윤봉길 의거 직후 백범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미국인 부부에 관한 자료와 사진도 특별전에서 선보인다.

 

김형오 기념사업회 회장은 백범일지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한자리에서 볼 좋은 기회라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백범과 관련한 자료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5년부터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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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조선일보]



"나는 못난 사람"

70년전 오늘, 백범이 세상에 말을 걸었다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행사, 김구기념관서 30일까지 열려
윤봉길 아들에 준 친필서명본 등 관련 서적 380여권 한자리 모아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1947년 12월 15일,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은 '백범일지' 출간사에 이렇게 적었다. 김구 선생은 1928년 두 아들 인과 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유서로 '백범일지' 상권을 썼다. 하권은 중국 충칭에 임시정부를 세운 이듬해인 1941년부터 쓴 글이다. 1947년 이 두 권과 '나의 소원'을 합쳐 출판사 '국사원'에서 활자본을 냈다. 김구 선생이 '생애의 기록'이라고 불렀던 이 책이 15일 출간 70주년을 맞았다.


14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 특별전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된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백범일지’ 출간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김구 선생 친필 원본의 영인본을 비롯해 1947년 처음으로 활자로 제작된 국사원판 초판본 등이 선보인다. /오종찬 기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를 15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연다. '백범일지'를 모태로 나온 380여권의 책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한문 혼용체인 '백범일지' 친필본의 영인본(원본을 사진 등을 이용해 그대로 복제한 책), 국사원판 초판·재판·3판본, 백범 연구서·소설 등이 전시된다. 친필로 쓴 원본은 김구재단이 소유하고 있지만, 훼손을 우려해 이번에 선보이진 않는다.


1947년 나온 초판본은 70년 세월을 반영하듯 누렇게 색이 변하고 군데군데 찢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아들(윤종)에게 준 친필 서명본도 공개됐다. 윤봉길 의사 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 관장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이번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전시 하루 전인 14일 열린 개막식에는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박유철 광복회장, 나경원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포함한 100여명의 손님이 함께했다.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의 아들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충칭 임시정부 시절 김구 선생을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며 "주석이었음에도 누구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탈한 분이었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조완구 선생의 외손녀인 조명숙(74)씨는 이날 전시회장 안에서 책들을 애틋하게 만졌다. 조씨는 "외조부가 백범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했다"며 "외조부의 기록은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외조부의 흔적을 좇곤 한다"고 했다.


김형오 회장은 '백범일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으로 유학자 고능선 선생과의 대화를 꼽았다. 고 선생은 백범에게 과단력이 부족하다며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撒手丈夫兒·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라고 가르친다. 김형오 회장은 "김구 선생은 아마 평생 이 말을 가슴에 품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립운동을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성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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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국민일보]



21세기포럼, ‘기독문화대상’ 김형오 장로 등 5명 선정




재단법인 21세기포럼 문화재단(이사장 홍순모)은 제12회 기독문화대상 문화예술 부문에 병암 서예한문연구원장 여운부 장로, 교육부문에 장대현학교장 임창호 목사, 봉사부문에 부산가정법원 천종호 부장판사를 각각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에 새로 마련된 특별상인 민석 지도자대상 정치부문에 김형오 장로, 목회부문에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를 각각 선정했다.

 

문화예술부문 수상자 여운부 장로는 1974년부터 서예를 통한 선교에 관심을 갖고 1980중국 현 지교회설립을 위한 기금마련초대전부산 서구지역 장애우 돕기를 위한 초대전에 작품을 희사 한 것을 시작으로 1978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외 선교와 불우 이웃돕기, 기독교 기관단체를 위한 개인전과 초대전을 9회까지 개최, 8000여만원을 희사했다.

 

또 두루마리 선교지와 한문성경보감을 발간하여 전국 교도소에 무료로 배포 하는 등 40여년 간 오직 한 길을 걸으며 후배양성과 재능기부 등을 한 점 등이 높이 평가됐다.

 

 

교육부문 임창호 목사

 

교육부문 수상자 임창호 목사는 고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20077월 탈 북민 성인 6명과 어린이 3명으로 부산 다대동에서 장대현교회를 개척하면서 대안학교인 장대현학교를 함께 설립해 봉사하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10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임 목사는 이러한 교육사역을 통해 10년 동안 대학 진학에 20여명, 이 들 가운데는 국가고시를 거쳐 간호사로 취업한 사람이 3명이 있으며 또 모금을 통해 3명을 탈북시켜 귀중한 생명을 구출해 내는 등 10여년 동안 탈 북민 교육에 애쓴 공적을 높이 평가받았다.

 

 

봉사부문 천종호 부장판사

 

봉사부문 수상자 천종호 부장판사는 8년 동안을 12000여명의 비행소년을 재판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사건 전문판사로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소년범들을 가슴으로 품으며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가정과 같은 안식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201011월 창원에 처음으로 청소년회복센터를 개소했고, 현재 전국 19곳의 센터의 개소를 주도했으며 지난해 5월에는 청소년복지지원법의 개정까지 주도해 회복센터가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로 인정받게 했고, 국가 차원에서의 예산지원이 없는 회복센터의 운영을 돕기 위해 독지가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또 그 는 학업을 중도 포기한 소년들을 위해 국제금융고등학교 창원법원특별반과 부산가정법원특별반의 개설을 주도했다.

 

천 부장판사는 법정 안에서는 호통판사지만 법정 밖에서는 소년들의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소년범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평가됐다.

 

특별상 정치부문 김형오 장로

 

특별상 민석 지도자대상 정치부문 수상자 김형오 장로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18대까지 5선 의원을 연임하시는 동안 크리스챤 국회의원으로서 올 곧은 자세로 의정활동을 해 왔다.

 

특별히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면서 국회의장으로서 위민정치를 위해 좌우로 흐트러지지 않는 중립에서 책무를 잘 감당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정계를 은퇴하고 우리사회에 아름다운 족적을 남겼다.

 

  




특별상 목회부문 김문훈 목사


특별상 민석 지도자대상 목회부문 수상자 김문훈 목사는 1999년부터 포도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깊은 영성과 탁월한 설교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특별히 전국 방송망을 통한 대중설교로 교회성장과 교인들의 신앙향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기독문화대상은 재단법인 21세기포럼이 기독교 문화창달과 차세대 지도자육성, 그리고 기독교계의 숨은 봉사자들을 발굴해 포상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2006년 제정해 올 해로 12회째를 맞이하게 됐다.

 

시상식은 1214일 오후 6시 부산 주례동 동서대 UIT6층 국제세미나실에서 개최한다.

 

부산=윤봉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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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30 조선일보



[사설] 청와대 다수도 '문정인·노영민 생각'과 같나



문정인 대통령 안보특보가 28"(청와대) 안보실 사람들은 (내 발언이) 조금 부담스럽겠지만 많은 청와대 사람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주 들어 문 특보는 '·미 동맹이 깨지더라도 전쟁은 안 된다''북의 핵 보유 인정해야'라는 말과 생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문 특보의 위치로 볼 때 '많은 청와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란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 특보의 이 말 속에 현재 외교·안보 라인의 실상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역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노영민 신임 주중 한국 대사는 29일 롯데 등 중국 진출 한국 기업의 피해가 사드 보복 때문만은 아니고 경쟁력이나 기업 내부 분쟁 때문이라고 했다. 대사가 주재국 입장을 변호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을 왜곡한 '아부'.

 

과거 노무현 청와대는 '대미(對美) 자주파''·미 동맹파'로 갈려 싸웠다. ·미 관계의 불필요한 악화로 이어졌다. 지금 다시 정권 실세들이 과거의 자주파식 행태를 보이고 있다면 현 정부 안보 정책의 우왕좌왕이 바로 이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안보 노선을 놓고 여야(與野)도 갈라져 있는데 청와대마저 그 내부가 동맹파·자주파로 갈려선 안된다. 

 

문 특보는 자신이 외교·안보에 관한 '촛불 민심'을 대변하고 있다고 했다. '북이 핵을 보유해도 미국의 북 공격은 안 된다'는 것이 촛불 민심이란 뜻인 듯하다. 결국 5000만 국민이 김정은의 핵 인질로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고 이것이 '평화'라는 것이다. 문 특보는 자신만이 아니라 청와대 다수가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미 동맹에 무게를 두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안보실과 외교부의 입지가 실제 좁아질 가능성이 있다.

 

·미 동맹이 깨지더라도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만 전쟁을 막은 다음에 한·미 동맹 없이 북핵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가장 중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문 특보와 같은 사람들은 북핵은 인정하고 한국의 핵무장은 반대한다. 북한만 핵을 갖고 우리는 없는 상태에서 한·미 동맹마저 깨지면 우리는 사실상 항복하든지 제26·25를 당하든지 둘 중 하나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어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한국핵정책학회에 나와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상대가 핵을 못 갖게 하고 못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다. 셋 중 하나는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못하고 있다. 아무 힘 없이 '평화'만 외치고 있다. 그렇게 얻은 평화는 곧 깨질 수밖에 없는 가짜 평화다.



[2017-09-30 조선일보] 사설 전문 바로가기 클릭


[2017-09-29] 한국핵정치학회 격려사 전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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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한국핵정책학회 추계학술대회 격려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



친애하는 한국핵정책학회 회장 및 회원,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 한반도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으로 625 전쟁 이래 최대 안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시기에 한국핵정책학회가 기로에 선 한국, 핵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최고 전문가들의 기탄없는 토론과 진단 그리고 명쾌한 처방을 기대합니다.


    사진제공 : 파이낸셜 타임즈


전문가도 아닌 저는 오늘 아침, 왜 이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먼저 제 이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그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랜 기간 정치권에 몸 담았고, 대한민국 의전 서열 두 번째인 국회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어느 정당, 어느 정파에도 소속돼 있지 않습니다.


20년 남짓한 국회의원 생활 초반 10여 년 동안 저는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정치외교학도였던 저는 왜 전공과는 거리가 먼 이 분야에 종사한 걸까요? 대한민국을 살릴 미래의 먹거리이자 성장 동력은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상임위에서 2년 정도 활동하다가 다른 상임위로 옮기는 것이 당시 국회의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관례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줄곧 과학기술 그리고 정보통신 분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이 분야에 문외한이던 저는 매년 국정감사 우수 위원으로 선정됐고, 몇 가지 자부할 만한 업적도 쌓았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저는 상임위 경험을 살려 아랍에미리트(UAE)로 날아가 그곳의 실질적 통치자인 모하메드 왕세자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한국의 원자력은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으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값싸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지을 수 있고 지은 후에도 가장 경쟁력 있고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돼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습니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 후 1년도 안 되어 한국 대통령과 모하메드 왕세자는 아랍에미리트에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정식 합의했습니다. 석유 부국 UAE가 사막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장기 비전하에 우리 기술로 만든 원자력발전소의 완전 가동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적어도 한 곳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익히고 관계자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위도 방폐장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저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당시 여당의 실세 정치인들과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정치 생명을 걸고 위도 중저준위 방폐장 설치를 반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경 보호를 내세운 시민단체는 물론 다수의 군민들도 격렬한 반대 시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야당 의원인 저도 곤경에 처한 정부를 수수방관하거나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도 방폐장 설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며칠간 제 의원회관 사무실은 마비 상태였고, 저는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중저준위 방폐장이 많은 인센티브를 받고 경주에 설치키로 한 것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위도 방폐장 문제가 불거지기 2년 전쯤 스웨덴의 방폐장을 직접 시찰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여름철이라 안내자나 저나 모두 반팔 차림으로 가운조차 걸치지 않고 암벽 동굴 속에서 한 시간을 시원하게 보내다 나왔습니다. 동행한 스웨덴 대사와 제 아내 역시 간편복이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쓰다 버린 장갑장화옷가지마스크 등을 압축해 기밀용기에 담아 보관하는 곳이 위험하다 못해 금방 방사능에 오염된다면 우리 부부는 벌써 이 세상에 없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참석자 여러분!

제 고향은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밀집한 부산입니다. 집안 어른친척조카친구들이 두루 살고 있습니다. 부산울산경주는 500만 명의 인구 밀집 지역이며, 산업·문화·역사의 중심지입니다.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난다면 큰 문제지만, 지난 40년간 한국의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 중 단 한 곳도 방사능 유출 문제로 심각한 사고가 났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우는 없습니다. 기차 사고, 비행기 사고, 빌딩 화재도 발생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집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숙명입니다. 사고가 두렵고 필연적이라면 비행기와 기차도 세워야 하고, 대형 빌딩은 출입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또 원전의 안전이 문제라면 서해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의 원전에 대해 짓지 말라고 강력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와 서해바다를 마주하는 중국은 원전 35기가 가동 중이며, 2030년까지 무려 100기를 더 지어 원전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원전은 거의 대부분 한국 서해 바다와 맞닿는 중국연안에 위치합니다. 바람은 언제나 중국 쪽에서 불어오고 조류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만 원전을 안 짓는다고 피해가 안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쌓아올린 원자력 발전 최첨단국 한국의 위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가당치도 않은 논리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선동과 감정과 허구로 짜인 각본에 놀아나는 대한민국이라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힘듭니다. 나라의 미래와 경쟁력과 비전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책이 이대로 추진된다면 한국의 미래가 얼마나 어둡게 될지, 또 한국의 추락이 어느 나라를 더욱 이롭게 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자리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

우리는 요즘 정말 불안합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우려 때문이 아닙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때문입니다. 북한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 간의 말 폭탄이 언제 한국으로 방향을 틀지 알 수 없습니다. 양쪽은 핵을 가지고 서로를 겨누는데, 우리는 핵도 없고 비핵화가 기본 정책입니다. 싸우지 말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외교학을 수십 년간 공부하고 현장에서 정치를 해온 사람입니다. 또 역사를 좋아합니다. 제가 아는 정치학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힘센 나라를 끌고 간 경우가 없었으며, 제가 본 역사책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자기보다 강한 나라를 침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쟁과 싸움은 상대가 만만하고 깨뜨릴 수 있다고 판단할 때 생기는 것이지 지려고 싸우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평화가 말로써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화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2500년 전의 정치인도 자유를 지킬 용기를 시민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 페리클레스보다 조금 앞선,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명령에 의해 싸웠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지불할 용기나 용의가 있는가요? 자유는 공짜로 숨 쉬는 공기 같은 건가요? 아니,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인가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성립하는 냉혹한 국제정치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아니면 상대가 핵을 못 가지게 하고 못 쓰도록 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몇 개 있다고 결코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놓은 원자력 기술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면 우리는 원자탄은 물론 그 용도가 무궁무진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대열에서도 낙오될 것입니다. 이는 북한이 원자탄을 만들었다고 해서 더욱 고도의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는 원자력 발전소를 제대로 짓거나 운영할 수 없는 이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는 치열한 경쟁시대에 접어 들었는데 우리는 우리의 특장점마저 땅에 파묻어려 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1000년 제국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오스만 튀르크가 새로이 융성하는 역사적 사건에 빠져 있었고 이것을 책으로 냈습니다.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과분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분명한 한 가지는, 나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흥할 때는 흥하는 이유가 있고 망할 때는 망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시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죽어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뇌이며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고 역사 앞에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참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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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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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헌기 2017.09.30 1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이지, 이 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무 명명백백한 사안이기에 철회하는 걸로 짐작합니다만, 가만히 있으면결코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반대 서명했습니다. 좋은 성과 거두고잘 다녀오세요.

  2. 나라가 2017.10.03 0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친건지 아님 북한만 중한건지
    40년넘게 투자해서 일귀낸 기술력을
    지손으로 박살내겠다는
    한심한 정부 어느나라 정부인지 한심하네요.
    진짜 쑈나하고 앉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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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ra Church (Kariye Müzesi : Kariye Museum)



1편을 쓴 지 거의 12개월 만에 2편을 낸다. 무던히도 게으른 내 자신을 질책하며 기다려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와 사과를 드린다. 본 편에서는 코라교회가 자랑하는 세기적 미술품, 즉 비잔티움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에 대한 본격 설명을 드리려고 한다. 1부에서 설명했지만, 간단히 서두를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원래 코라교회는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성벽 바깥에 세워진 복합 수도원이었다. ‘시골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aviour in Chora)’ 또  ‘야외에 있는 거룩한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Redeemer in the Fields)’라는 뜻이다. 내 책 «술탄과 황제»에 자세히 설명한 5세기 초에 건립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육지성벽(QR코드 17) 안으로 들어오게 됐지만 ‘교외∙시골(chora)’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본당 건물은 마리아 두카이나(Maria Dukaina,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장모)가 1077~1081년 사이에 십자가형 구조로 재건축한 것이다. 그 후 12세기 초 지진 등으로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는데, 이삭 콤네누스(Isaac Comnenus, 알렉시우스의 3남)가 재건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증개축은 테오도르 메토키테스(Theodore Metochites : 1260~1332)가 라틴제국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한 기념으로 안드로니쿠스 2세의 명령을 받아 이루어졌다. 원래의 건물에 지름 7m의 대형 돔을 올리고 궁륭(vault) 일부와 안쪽 나르텍스(narthex)를 개조하고, 또 서쪽에 바깥 나르텍스를 덧붙이고 남쪽에 영묘로 사용할 보조 교회당인 ‘파레클레시온(parecclesion)’을 증축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모자이크 성화와 프레스코 성화를 완성한 것이다. 오스만 시대 빛과 공기의 순환을 위해 창문을 넓힌 것 외에는 현재 건물은 모두 그 때의 것이다.


메토키테스는 뛰어난 학식과 교양으로 황제(안드로니쿠스 2세)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 하다가 60세가 되던 1320년에는 권력서열 제2위인 재상에 올랐다. 바로 이때 그가 코라교회를 재건했다. 그러나 권력과 명예는 끝이 있는 법, 1328년 황제는 자신의 조카인 '안드로니쿠스 3세(Ανδρόνικος Γʹ Παλαιολόγος, Andronikos III Palaiologos : 1328~1341년까지 재위)'에 의해 쫓겨났다. 이와 함께 메토키테스의 영광도 끝났으며,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트라케 지방으로 추방됐다. 하지만 추방을 풀어 달라는 간곡한 탄원서를 새로운 황제에게 계속 올린 덕분에, 2년 뒤(1330년)에 자신이 세웠던 코라교회에 평수도사 자격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제국은 교회를 세운 사람에게 노후에 그 교회의 수도사로 들어가 최후를 마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메토키테스도 이 전통에 따라 코라 성당의 부속 수도원으로 돌아가 2년 후인 1332년 3월 13일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코라교회의 페라클레시온에 안치됐다.


후술하겠지만 코라교회의 모자이크가 완성된 14세기를 흔히 비잔티움 제국의 르네상스로 일컫는다. 한때 이교도 냄새가 난다고 외면 받던 인간을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가치관이 이때 되살아났으며, 바로 이것이 한 세기 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20~25년간 완성된 모자이크를 제작한 예술가가 누구인지는 유감스럽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잔티움 르네상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만들어진 코라교회의 성화는 고대 그리스 회화나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 원근법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드러나며, 일부 그림에는 인체의 해부학적 사실주의가 표현되어 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약 50년 뒤인 오스만 튀르크의 바예지드 2세 때 총리인 알리 파샤(Atık Ali Paşa)는 코라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하여 카리예 자미(Kariye Camii)가 되었다.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회칠로 덮였고, 또 잦은 지진으로 작품에 손상이 갔다. 그러다가 1948년 미국 비잔티움 연구소와 덤바튼 오크스 비잔티움 연구회의 토마스 위트모어와 폴 언더우드가 후원 및 복원 작업에 착수하여 이후로 모스크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앱스(apse)의 미흐랍(mihrab)과 바깥에 있는 19세기의 미나렛(minaret)은 남아 있다. 현재 코라교회는 박물관(Kariye Müzesi)으로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코라교회를 관람할 때는 순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신도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부터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느낄 수 있도록 성화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누구에게 봉헌된 것이고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야 성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코라교회는 하기아 소피아(아야소피아 박물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초기에 건설되고 9세기 이후 성화가 복원된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건물 내부 전체가 비잔티움 후기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정교한 대석, 대형 모자이크로 장식된 하기아 소피아에 비한다면 코라교회는 소박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내부를 꽉 채운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를 마주하는 순간 호흡이 멎을 것 같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술성과 영성에 당신은 압도되고 말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후기 비잔티움 예술의 진면목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코라교회로 안내하도록 하겠다.


현재는 교회의 뒤쪽으로 입구가 나 있어 일단 들어가서는 본래 교회의 입구(정문쪽 입구)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교회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성화들로 채워져 있고, 오른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화들로 채워져 있다. 성화들은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장면을 설명하는 글들이 적혀 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공간 전체에 많은 그림을 배치하였기에 시간 순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쪽 저쪽으로 오가면서 발품을 팔아야 한다.


코라교회는 현재 남아 있는 다른 비잔티움 교회에 비해 크지 않다(742.5㎡). 교회는 크게 출입구인 나르텍스(narthex), 본당(nave/naos), 부속 교회 (parecclesion) 이렇게 3구역으로 나뉜다. [그림1]







[그림1]


정문으로 들어서면 맨 처음 나오는 공간이 바깥쪽 나르텍스(outer narthex)인데, 폭 4m 길이 23m의 횡단 복도이다. 이곳에서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로 들어가는 문 위에 비잔티움 후광을 한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삼위일체와 양성론 표시를 하고 있는 모자이크가 있다. 예수의 눈동자가 보는 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예수의 좌우 눈∙귀의 높이와 형태가 다르다. 바로 비잔티움시대 미술 기법으로 감상자가 어디에 있든 예수와 눈을 마주치게 하는 기법이다. 예수의 양 옆에는 “ἡ Χώρα τῶν ζώντων(Land of the Living, hē Chōra tōn zōntōn)*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그림 2]. 그 반대편인 외부 출입구 위에는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성모 마리아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양 손 위에는 “ἡ Χώρα τοῦ Ἀχωρήτου(as the Container of the Uncontainable, hē Chōra tou Achōrētou)**라는 명문이 있고 그 양 옆에는 두 천사가 경배하고 있다[그림 3]. 이 두 성화는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임을 나타낸다.


* 산 사람들의 나라, 곧 ‘천국’을 의미함. 시편 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 담겨지지 않는 자의 땅 또는 담을 수 없는 자의 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땅’을 의미함.


[그림 2]                                                                 [그림 3]




                          [그림 4]


안쪽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본당(nave)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나오는데, 그 위에 이 교회를 중건한 메토키테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교회를 바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4]. 그는 황실의 고급관리들만 쓸 수 있었던 황금색과 흰색 줄무늬가 있는 큰 모자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옆에는 “Ό Κτητώρ Λογοθέτηϛ τοῦ γενικοῦ Θεόδωρος Μετοχίτης(창건자이며 보물창고의 로고테테스(λογοθέτης, Logothete)인 테오도르 메토키테스)”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왼손으로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손짓을 하며 앉아 있다. 예수의 양쪽에는 안쪽 나르텍스 출입구에 있는 성화와 마찬가지로 “ἡ Χώρα τῶν ζώντων(이 코라 톤 존톤 : 살아 있는 자들의 땅)”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1. 성모 호데게트리아


본당(Nave)
메토키테스 모자이크 아래에 있는 본당 출입문 양편으로 왼편에는 사도 베드로가 오른편에는 사도 바울의 모자이크가 있다. 베드로는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그림 5], 바울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보내고 있다[그림 6]. 두 그림 모두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인체 비율과 색감이 뚜렷하고 벽감(니치)에 배치도 잘 되어 있다.


[그림 5]                                                                  [그림 6]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 신도들이 예배하는 본당이 나온다. 본당의 성화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세 점의 성화만이 남아있다. 지성소 오른편에는 성경을 펼쳐 든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다[그림 7]. 왼손에 든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라고 쓰여 있다. 왼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이 있다[그림 8]. 성모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 길을 가리키는 여인) 이콘이다. 그림 속의 테오토코스(Theotokos : 신의 어머니∙성모)는 한 손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구원자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두 그림 모두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림 7]                                                                  [그림 8]


호데게트리아는 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72쪽에서 언급한 누가복음의 저자인 성 누가가 그렸다는 호데게트리아 성화에서 이미지를 따온 모자이크다. 틈만 나면 카리예 박물관을 찾은 것은 이 호데게트리아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호데게트리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QR코드 8 참고). 성모 마리아의 머리와 양 어깨에 수놓인 별은 예수를 낳기 전과 후 모두 동정녀임을 나타낸다. 비잔티움 전승에 따르면 이 이콘은 <누가복음> 저자인 성 누가에 의해 최초로 그려졌으며, 성모가 초상을 보고 "이 그림과 함께 언제나 나의 축복이 있으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콘이 모셔진 곳에서는 수많은 기적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 순례자들에 의해 러시아에까지 전해졌다. 복사본 또한 신비한 이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책 237쪽의 각주 81 및 ①편 설명 참고)

[그림 9]


본당 입구 위에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聖母永眠,Koimesis, Dormition of the Virgin)’을 그린 성화가 있다[그림 9]. 그림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침대에 누워 있고 후광을 한 베드로∙바울 등 사제, 전도사, 초기 주교가 성모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 위에 성모 마리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아기를 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육체는 남았지만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천국으로 가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영성(영혼)을 표현하는 비잔티움인들의 예술 방식이 정결하다.



2. 코라 교회의 모자이크 성화


마리아의 생애 -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 왼편
본당에서 다시 안쪽 나르텍스로 나와 모자이크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안쪽 나르텍스에는 두 개의 돔이 있다. 본당으로 통하는 중앙 홀(세 번째 방)을 기준으로 왼편의 돔은 지름이 3.40m로, 열여섯 개의 홈과 다섯 개의 창이 있다. 돔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Theotokos : 신의 어머니)가 있고, 방사선으로 퍼져 나가는 각 홈에는 다윗 왕부터 시작되는 마리아의 조상 16명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창문이 나 있는 돔의 맨 아래쪽에는 마리아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11명의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10]. 오른편의 돔은 지름이 3.74m로, 중심 원에 예수 그리스도(Pantocrator : 전능자)가 있고, 24개의 홈에는 아담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조상 24명을 그려 넣었고, 그 아래에는 9개의 창이 있다. 이 창 사이에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11].


* 다윗(David) 이후의 조상들은 솔로몬(Slolmon), 르호보암(Rehoboam), 아비야(Abijah), 아사(Asa), 여호사밧(Jehoshaphat), 요람(Jehoram), 웃시야(Uzziah), 요담(Jotham), 아하스(Ahaz), 히스기야(Hezekiah), 므낫세(Manasseh), 아몬(Amon), 요시야(Josiah), 여고냐(Jeconiah), 스알디엘(Shealtiel) 이고, 그 아래 그려진 구약의 인물들은 하나냐(Hananiah), 아사랴(Azariah), 미사엘(Mishael), 다니엘(Daniel), 여호수아(Johua), 모세(Moses), 아론(Aron), 훌(Hur), 사무엘(Samuel), 욥(Job), 멜기세덱(Melchizedek)이다.


** 돔의 홈에는 아담(Adam), 셋(Seth), 노아(Noa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라멕(Lamech), 셈(Shem), 야벳(Japheth), 아르박삿(Arphaxad), 셀라(Shelah), 에벨(Eber), 스룩(Serug), 나홀(Nahor), 사라(Sarah), 아브라함(Abraham), 이삭(Isaac), 야곱(Jacob), 벨렉(Peleg), 르우(Reu), 므두셀라(Methuselah), 에녹(Enoch), 에노스(Enosh), 아벨(Abel)이라는 24명의 초상이, 그 애래 창문 사이에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인 르우벤(Reuben), 시므온(Simeon), 레위(Levi), 유다(Judah), 스불론(Zebulun), 잇사갈(Issachar), 단(Dan), 갓(Gad), 아셀(Asher), 납달리(Naphtali), 요셉(Joseph), 벤야민(Benjamin)이 그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요셉과 벤야민은 라헬(Rachel)이 낳은 자식이고, 단과 납달리는 빌하(Bilhah)가, 갓과 아셀은 실바(Zilpah)가 낳았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레아(Leah)가 낳았다.


 

[그림 10]                                                         [그림 11]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가 있는 돔의 아래, 본당 벽 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방에는 마리아의 생애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내용은 야곱 복음서에서 따온 것들로 정통 복음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물론 현재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성화에 대한 설명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됨을 미리 밝혀 둔다.


*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Joachim)과 안나(Anne)는 둘 다 유다 지파의 후손이다. 이들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돌고 아이가 없었다. 봉헌 축제 때 요아킴은 성전에 가서 봉헌을 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이런 수치를 당한 요아킴은 산으로 올라가 40일 동안 밤낮으로 아이를 달라고 기도한다. 축제의 마지막 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안나 앞에 천사가 나타나 딸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마리아라고 지으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준다. 이에 대한 증거로 예루살렘의 황금문 앞에서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천사는 떠난다. 한편 요아킴은 기도를 끝내고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친 뒤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다가 황금 문 앞에서 안나를 만난다. 그리고 예언대로 안나는 딸을 낳는다. 마리아가 6개월이 되었을 때, 일곱 걸음을 걷고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와 안기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다. 마리아가 세 살이 되자, 요아킴은 아이를 얻으면 성전에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마리아를 성전에 바쳤다. 이때 마리아를 받아 준 제사장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였다. 그 뒤 마리아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천사가 가져다 주는 빵만 먹으며 자란다. 그런던 어느 날, 제사장이 다윗 가문의 소녀들 중에서 누가 황금실과 고급 린넨과 비단으로 아름다운 천을 짤 것인지를 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마리아가 선택되었다. 마침내 마리아가 열다섯 살이 되어 결혼할 때가 되자 사가랴는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열두 명의 구혼자들의 지팡이를 놓고 기도한 후 돌려 주었다. 요셉이 지팡이를 돌려 받을 때 지팡이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나와 그의 머리 위를 맴돌더니 동시에 그의 지팡이에서 푸른 싹이 돋아났다. 요셉이 마리아의 배우자임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요셉은 “나는 이미 결혼하여 아들 넷이 있고, 나이도 많아 저 처녀의 남편이 될 수 없다.”고 했으나 자카리아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요셉을 설득했다. 어쩔 수 없이 요셉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요셉의 집에 머물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물가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난다. 천사는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 아래, 펜던티브(Pendentive : 둥근 지붕과 네모난 벽 사이를 잇는 삼각형 모양의 공간)에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성전에 봉헌하러 간 요아킴(Joachim)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나 많이 파괴었다[그림 12].  요아킴과 사가랴(Zacharias∙자카리아)가 예물시비하는 장면, 사가랴가 세례 요한을 낳는 장면은 지워졌다.


                              [그림 12]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편에는 회당 출입을 거절당한 뒤, 상심한 마리아의 아버지 요아킴이 광야로 가서 자신에게도 아이를 달라고 40일 동안 기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3].


그리고 돔 바로 아래에 위치한 벽에는 천사가 안나에게 성모 마리아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있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무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고, 새끼는 부리를 벌려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안나의 옷차림이나 집안에 있는 하인 등은 마리아의 집안이 부유했음을 나타낸다. 흘러내리는 물은 아기 없는 부부생활을 비유한다[그림 14].


      [그림 13]                                          [그림 14] 


옆방으로 가는 통로의 벽에는 예루살렘의 황금 문 앞에서 요아킴과 안나(Anne)가 만나 서로 포옹하며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그림 15]. 그들은 아기를 주신다면 신앙심 깊은 아이로 키우고, 성전에 바치겠다고 서약하고 양 두 마리를 바친다(일반적으로 희생제물은 한 마리). 그 오른편에는 마리아의 탄생 장면이 나온다. 안나는 산파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고, 세 친구들은 선물을 주고 있다. 하녀들은 부채를 흔들고 요람과 아기 목욕을 준비하고 있다. 요아킴은 문 입구에 서서 이 장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수줍은 것 같기도 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다[그림 16].


              [그림 15]                                  [그림 16]


마리아의 탄생 장면 옆에는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성화가 있고[그림 5], 그 위에는 생후 여섯 달 된 마리아가 일곱 걸음을 떼는 장면이 보인다. 엄마(안나)는 마리아가 더러운 흙을 밟지 않을까 얼른 안으려 한다. 하인의 붉은 베일이 바람에 날려 후광처럼 원을 그리고 있다[그림 17].




[그림17]


이 방의 천장 한편에는 마리아가 성전에서 사제들로부터 축복을 받는 장면이 있다. 요아킴은 한 살 된 딸 마리아를 안고 사제 세 명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그림 18]. 반대편에는 마리아의 부모가 마리아를 껴안고 쓰다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9]. 가족의 사랑과 행복 속에서 자란 마리아이다. 이중 구조의 건축학적 요소가 그림의 깊이를 더해주고, 공작 두 마리가 존엄성과 정결성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장면들을 고개를 위로 올리면 한 눈에 볼 수 있다[그림 20].

   

 [그림 18]                                                       [그림 19]


                        [그림 20]


본당 출입문 오른쪽 사도 바울의 성화[그림 6] 위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빵을 가져다 주는 장면이 있다[그림 21]. 이렇게 마리아는 성전에서 천사가 주는 빵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제단 위는 대학자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마리아를 그곳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 세 번째 방의 천장에는 요아킴과 안나가 세 살 된 마리아를 성전에 바치는 장면이 행렬을 이룬다[그림 22]. 이 그림의 윗부분 성전 입구에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마리아를 맞이하고, 그의 머리 위쪽으로 제단에 앉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빵을 가져다 주는 다른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23]. 마리아는 3~12세까지 성전 수종녀(attendant)로 머물렀다. 여자 아이들이 횃불을 들고 마리아를 맞이하고 있다. 이들 역시 성전에서 수종드는 아이들이다[그림 24]. 천장의 모자이크들은 빈 공간 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고개를 들면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비잔티움인들의 예술성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과 찬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림 21]                                [그림 22] 

   

[그림 23]                                                        [그림 24]

 

메토키테스가 성당을 바치는 그림 맞은 편에는 마리아가 사가랴로부터 성전에 쓰일 장막을 만들 자주색 실타래를 받는 장면이 있다. 지성소를 가리는 장막을 만드는 일은 아주 신성한 일이었다. 성전의 다른 성직자들은 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마리아 뒤로는 여섯 명의 처녀들이 서 있다[그림 25].

    

          [그림 25]                                                       [그림 26]


그 그림의 오른쪽에는 사가랴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리아에게서 여성성이 나타나면 성전을 떠나야 한다. 마리아가 결혼할 때가 온 것이다. 다음날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다윗 왕가의 자손 중 12명의 남자를 선발하도록 한다. 사가랴는 그들의 지팡이를 제단에 놓도록 하고, 마리아가 누구에게 선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를 구하고 있다[그림 26]. 그 옆에는 사가랴가 잡고 있는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아나오는 장면이 있다. 사가랴는 왼손을 마리아의 머리에 얹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으며 그 앞에 요셉이 당황하며 서 있다. 그 뒤에는 나머지 열한 명의 구혼자들이 서 있다[그림 27]. 야곱 복음서에는 비둘기가 요셉 머리 위를 돌았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 모자이크에 비둘기는 없다. 하지만 유럽의 교회 그림에는 이 장면에 비둘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27]


두 번째 방으로 가는 복도에는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장면이 있다. 요셉과 함께 있는 사람은 전처의 아들 중 하나인 제임스이고, 요셉은 마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돌아 보고 있다[그림 28]. 다시 마리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이 나오면, 이 방의 서쪽 벽에는 뒤돌아 선 마리아에게 손을 흔드는 요셉이 보인다. 목수일을 하는 요셉은 지방으로 가 6개월 간 집을 비워야 했다. 아쉬운 작별은 하는 요셉과   그의 오른쪽에는 요셉의 큰 아들 제임스가 이미 길을 떠나고 있다[그림 29]. 돔 아래 북서쪽 모서리 펜던티브에는 마리아가 우물가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 소식을 듣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누가복음 1:26~38)* [그림 30].


* 누가복음 1:26-38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림 28]                                  [그림 29] 

 

                                  [그림 30]



마리아의 잉태와 예수의 탄생 - 바깥 나르텍스(Outer Narthex)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모자이크는 바깥쪽 나르텍스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바깥쪽 나르텍스의 모자이크 역시 첫 번째 방 구석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림의 진행 방향은 대부분 오른쪽이다.


이 방의 북쪽 구석 반원에는 작은 나무 아래 요셉이 잠들어 있고, 그 위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임신했으므로 아내로 취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말을 전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다. 요셉은 자신이 없는 사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헤어지려고 했으나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마태복음 1:20~25). 천사 옆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누가복음 1:39~45). 그 옆에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Augustus)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마리아와 요셉이 그려져 있다. 앞에 선 젊은이는 요셉의 아들 가운데 하나고 요셉은 마리아를 태운 당나귀 뒤에서 따라간다(누가복음 2:1~5) [그림 31].

 

             [그림 31]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에 있는 벽을 보면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시리아 왕 구레뇨(퀴레니우스, Cyrenius)가 황금 보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관리들이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다. 구레뇨 앞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서 있고, 요셉의 뒤에는 그의 아들 네 명이 서 있다. 마리아는 만삭으로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이다[그림 32]. 조사원이 배부른 마리아에게 아기 아버지가 누구냐 묻고, 요셉이 '나'라고 하면서 다가선다. 이 작품은 코라교회 모자이크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1:9의 인체비율로 머리가 무척 작게 표현되었다. BC 4C 경 풍미했던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미술에 차용되었다.

 

       [그림 32]


계속 오른쪽으로 가면 건물 안쪽 벽에 예수의 탄생 장면을 그린 모자이크를 만난다.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석관 모양의 구유에는 소와 염소가 머리를 내밀고 있고, 하늘에서 성령이 강림하고, 그 앞에 성모 마리아가 누워 있다. 마리아의 발치에는 요셉이 앉아 있는데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들판의 목자들에게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이 보이고, 마리아 위에는 천사들이 찬양하고 있다(마태복음 1:18~25, 누가복음 2:1~34) [그림 33].

 

     [그림 33]


이야기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지면서 모자이크는 오른편의 나르텍스로 계속 이어진다. 세 번째 방인 중앙홀을 건너 네 번째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건물 안쪽 벽 위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별을 따라오는 장면과 헤롯 왕(헤로데 안티파스, Herod Antipas)을 알현하는 장면(마태복음 2:1~12)이 있다[그림 34].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 그리고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여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간다.

 

    [그림 34]


다섯 번째 방의 벽에는 움푹 파인 공간인 니치(nitch)가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무덤으로도 쓰이던 공간이다. 이 방의 안쪽 벽에는 한 병정의 호위를 받고 있는 헤롯 왕이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해 사제와 서기들을 심문하는 장면의 일부가 남아 있다[그림 35]. 이곳에서 다음 방으로 가는 통로에는 두 개의 원주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림 35]                      [그림 36]


여섯 번째 방은 보조 교회당(parecclesion)으로 가는 입구인데 상당히 넓다. 이곳에도 한때 팔라이올로구스 왕가의 무덤으로 쓰였던 니치가 있다. 이방의 남쪽 벽에는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림이 있다[그림 36]. 시계 방향으로 이어진 바깥 벽들에는 두 살 이하 어린 아기들을 빼앗아 죽이는 군인들, 손에 칼을 들고 아기를 찾는 군인들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37, 38].

    

      [그림 37]                                          [그림 38]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려면 원주 기둥을 지나 다시 다섯 번째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 헤롯 왕의 심문 모자이크 건너편, 이 방의 바깥쪽 벽에는 아기가 살해당해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있다[그림 39]. 다시 네 번째 방으로 건너가면 엘리사벳이 아기 세례 요한을 안고 칼을 든 군인을 피해 동굴로 피하는 장면이 있다[그림 40].    



[그림 39]                                                        [그림 40]


이후의 이야기는 중앙홀을 지나 다시 왼편 나르텍스 두 번째 방으로 돌아가야 이어진다. 성경에 의하면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이 죽었으니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요셉은 헤롯의 뒤를 이어 아들 아켈라오(Herod Archelaus)가 왕이 된 것을 알고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천사의 지시로 나사렛으로 가게 된다. 이 방에는 이집트에서 보낸 4년 동안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나사렛으로 향하는 예수 가족이 그려져 있다(마태복음 2:19~23). 맨 왼쪽에 꿈을 꾸는 요셉이 보이고, 중앙에는 예수 가족이 여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앙증맞은 아기 예수가 요셉의 목에 목마를 타고 있으며 그 뒤를 마리아가 따르고 있다. 그림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도시가 나사렛이다[그림 41].



[그림 41]


다시 첫 번째 방으로 돌아가면 예수의 가족이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맨 앞에 요셉이 가고 바로 뒤에 열 두 살이 된 예수 그리스도는 황금 십자가 후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맨 뒤에 성모 마리아가 뒤따른다(누가복음 2:41~47)  [그림 42].

 

[그림 42]

 


          [그림 43]

 


[그림 44]


두 번째 방으로 건너가면, 둥근 천장에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을 그린 성화가 나온다.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성화이다. 가운데를 흐르는 요단강을 기준으로 예수는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감히 예수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세례 요한이 서 있다(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 [그림 43]. 그 반대편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는 장면(마태복음 4:1~11, 마가복음 1:12~13, 누가복음 4:1~13)이 글씨와 함께 그려져 있다*[그림 44, 45]. 아래(*) 성경 말씀의 핵심을 모두 검은색 글씨로 장식하는 이 모자이크 기법 역시 르네상스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림 45]

 

 

 

* 마태복음 4:1-11 :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바깥 나르텍스의 정문 오른쪽 펜던티브에는 젊은이가 희생 제물로 바칠 양을 잡는 장면이 있다[그림 46].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면 안쪽 나르텍스로 가는 출입문 왼편 펜던티브에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장면(요한복음 2:1~12)이 그려져 있다[그림 47]. 출입문 오른편 펜던티브와 바깥 나르텍스의 정문 왼편 펜던티브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마태복음 14:15~21, 마가복음 6:30~44,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4)이[그림 48, 49] 묘사되어 있다.

 

[그림 46]                                                                 [그림 47]

 

[그림 48]                                                     [그림 49]


여섯 번째 방에서 예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헤롯의 영아학살명령 그림 오른쪽 구석에는 예수가 우물에서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장면(요한복음 4:3~40)이 있다[그림 50]. 아래쪽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음향효과를 내기 위한 장치로 동서남북으로 몇 군데 있다. 벽 안에는 다른 곳과 달리 공명을 일으키도록 암포라 항아리를 설치했다. 남쪽 벽 위에는 예수가 가버나움(Capernaum)의 베데스다(Bethseida) 연못에서 중풍환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이 사실감 있게 보인다(마태복음 9:1~8, 마가복음 2:1~12, 누가복음 5:17~26)  [그림 51].

   

         [그림 50]                               [그림 51]



기적을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 -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 오른편
여섯 번째 방에서 바깥쪽 나르텍스 모자이크 감상은 끝난다. 이 방은 부속 교회당으로 연결되지만, 좀 더 일관성 있게 성화를 감상하려면 다시 오른편에 있는 안쪽 나르텍스로 가서 모자이크를 먼저 보는 것이 좋다.

 

     

[그림 52]     

                          

 

      [그림 53]                                      [그림 54]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 아래 본당 쪽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위쪽에 위치한 예수를 향해 두 손을 벌려 무엇인가를 간청하는 듯한데, 이런 자세를 그리스어로 데이시스(Δέησις, Deesis)라고 한다. 데이시스는 교회 건축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특히 '아야소피아 박물관(하기아 소피아 성당)' 2층 남쪽에 있는 데이시스 모자이크는 후기 비잔티움 예술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데이시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281쪽이나 QR코드 3을 참고하면 된다.


마리아의 뒤쪽 아래에는 왕관을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코라교회를 두 번째로 증축한 알렉시우스 1세의 아들인 ‘이삭 콤네누스(Isaac Comnenus)’이다[그림 53]. 그는 원래 코라교회에 자신의 무덤을 준비했지만, 나중에 트라케 지방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다가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쪽에도 두 손을 벌리고 있는 한 여인이 보이는데, 이 여자 옆에는 ‘가장 위대한 왕 안드로니쿠스(Andronicus)의 자매, 몽골의 숙녀 멜라네 수녀’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그림 54]. 멜라네(Melanie Comnenus)는 미카엘 8세(Michael VIII Palaeologus, 1259~1282년까지 재위)의 서녀로, 1265년 몽골 ‘일 한국’의 아바카 칸(Abaqa Khan)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런데 1282년에 칸이 죽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수녀가 되었다(QR코드 10 참고). 나라를 위해 정략결혼을 마다하지 않은 그녀를 기려서 비잔티움 인들은 기꺼이 교회를 헌당했다. 코라교회에서 골든혼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이 공주를 기념하는 몽골교회(Church of Saint Mary of the Mongols, Kanlı Kilise)가 자리잡고 있다. 설립 이래 지금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스탄불의 몇 안 되는 교회이다.
 
이 방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곱 가지 치유의 기적들이 그려져 있다. 이 모자이크들은 데이시스 모자이크를 기준으로 하여 시계방향으로 살펴보겠다. 데이시스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이 혈우병을 치료받는 기적(마태복음 9:18~26,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이[그림 55], 그 옆에는 오그라든 손을 가진 청년을 치유하는 기적(마태복음 12:9~14, 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이 그려져 있다[그림 56]. 이어 부속 교회당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는 아치가 나오고, 그 옆에는 나병환자를 고치는 기적(마태복음 8:1~4, 마가복음 1:40~45, 누가복음 5:12~16)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57]. 그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장님이자 벙어리인 청년을 고친 기적(마태복음 12:22~26, 마가복음 3:20~30, 누가복음 11:14~23, 12:10)이[그림 58], 그 옆의 반원형 벽에는 각종 병이 든 자들을 치유한 기적(마태복음 15:29~30)이 그려져 있다[그림 59][그림 62 하].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여리고에서 두 명의 장님을 고친 기적(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 10:46~52, 누가복음 18:35~43)이[그림 60], 뒤를 돌아 데이시스 왼편 펜던티브에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마태복음 8:14~15,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장 38~39)하는 장면이 나온다[그림 61]. 좁은 공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코라교회의 특장이기도 하다. 

    

[그림 55]

 [그림 56]                                                    [그림 57]

 

 

[그림 58] 

 

 

[그림 59]                                     

 

[그림 60]                                                     [그림 61]

 

[그림 62]



3. 죽은 자들을 위한 방 : 파레클레시온


이 방의 출입구를 통해 나가 왼편에 있는 두 개의 원주 기둥을 지나면 ‘파레클레시온(Παρεκκλήσιον, Parecclesion)’으로 들어가게 된다. 파레클레시온은 그리스말로 교회에 붙은 ‘부속 교회’라는 의미인데, 코라교회의 파레클레시온은 메토키테스가 가족과 친지들의 영묘로 쓰기 위해 본당 남쪽에 덧붙여 지은 건물이다. 원래 무덤으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어서 석관을 놓을 니치가 좌우로 두 개씩, 모두 네 개가 있다. 코라교회에는 바깥 나르텍스의 맨 남쪽 끝에 위치한 두 개의 방과, 안쪽 나르텍스의 북쪽 끝에 위치한 두 개의 방에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 왕가의 석관을 안치해 두었던 니치들이 있다.


코라교회의 본당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면, 파레클레시온은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화들은 죽음과 최후의 심판, 부활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림 63]                            

 

     [그림 64]                                                    [그림 65]


본당의 성화들이 모두 모자이크인데 비해 파레클레시온의 성화는 첫 번째 방 오른쪽에 위치한 니치의 아치[그림 63]에 있는 미카엘 토미케스(Michael Tornikes) [그림 64]와 그의 부인의 초상[그림 65]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레스코화*다. 이곳에는 수많은 성자들이 그려져 있지만 정교회 신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와 관련된 중요한 프레스코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Fresco a fresco :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며 완성하는 회화이다. 기원전부터 로마인들에 의해 그려져 왔고,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절정기를 맞는다. "젖어 있는"이란 뜻 그대로 마르기 전에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와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대작들이다.

 

[그림 66]                                                   [그림 67]

파레클레시온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 기둥이 서 있는 현관에 해당되는 아치에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Sennacherib : BC 705~681년까지 재위)의 군대와 싸우는  천사들의 모습[그림 66]과 신의 축복을 받은 영혼들과 저주를 받은 영혼들의 모습, 제단에 바칠 봉헌물을 들고 가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려져 있다[그림 67].

 

 

                      [그림 68]


첫 번째 방으로 들어서면 자연 채광을 위해 열 두 개의 창을 낸 큰 돔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돔의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그 주위를 열 두 명의 천사가 둘러싸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비잔티움 제국의 궁전 관리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가지고 있다[그림 68]. 돔 아래 네 귀퉁이의 펜던티브에는 유명한 찬송가 작가 네 명이 각각 그려져 있다[그림 69~72].

 

 

 [그림 69] 성 코즈마스                                     [그림 70] 성 요셉      

 

[그림 71] 성 테오파네스                                  [그림 72] 성 요아네스

 

    

 

 

[그림 73]                                                         [그림 74]

돔의 왼쪽, 즉 북쪽 벽의 아치 왼쪽에는 벧엘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그려져 있고[그림 73], 오른쪽에는 불타는 관목 숲 앞에 있는 모세에게 모습을 드러낸 여호와가 등장한다. 모세는 맨발인데 이는 그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땅임을 나타낸다(출애굽기 3:1~5) [그림 74]. 지성소 쪽의 아치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남쪽에는 솔로몬 왕의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궤(聖櫃)를 설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75, 76]. 

 

[그림 75]                                                    [그림 76]


그리고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의 아치 왼쪽에는 관목 숲 속에 서 있는 모세의 모습이, 오른쪽에는 성 초막을 지고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그림 77, 78]. 오른쪽 벽의 니치는 메토키테스의 친구이자 재상까지 지냈던 미카엘 토미케스의 석관이 놓였던 자리고, 그 건너편의 니치는 메토키테스의 석관이 놓였던 자리다.

 

   [그림 77]                                            [그림 78]


파레클레시온 두 번째 방의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가운데 둥근 천장에는 한 천사가 달팽이 모양의 우주를 떠받들고 있고[그림 79], 예수 그리스도가 가운데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하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왼쪽에는 세례 요한이 '데이시스(간청)' 자세로 있고, 좌우 벤치에는 열 두 명의 사도가 여섯 명씩 앉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예수는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거부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핏빛 강물이 섬뜩한 느낌을 준다[그림 80].

 

 [그림 79]                                                      [그림 80]

 

 

또 북쪽의 반원형 공간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천국의 문에는 6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Seraph) 천사가 문을 지키고 있고, 왼쪽에는  천국의 문을 열쇠로 열고 있는 베드로가 있는데 그의 뒤에는 선택 받은 자들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은 강도가 십자가를 진 채 환영의 몸짓을 하고 있고 그 뒤로 성모 마리아가 반만 남아 있다[그림 82]. 왼쪽 펜던티브에는 영혼을 건지는 천사의 모습[그림 81], 오른쪽 펜던티브에는 거지 나사로를 안고 있는 아브라함이 그려져 있다[그림 83].


  

                      [그림 81] 

 

 

 [그림 82]    

 

 

                             [그림  83]


반대쪽 벽 왼쪽에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죄들의 모습이[그림 84], 오른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궤를 운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85].  특히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육체 묘사는 해부학적 사실주의가 돋보인다. 두 번째 방 양 쪽 벽면에도 석관을 놓았던 니치가 남아 있다.

    

 [그림 84]                                                     [그림 85]


두 번째 방과 지성소를 나누는 아치의 가운데에 미카엘 대천사가 그려져 있다. 그 왼쪽에는 과부의 아들을 살린 기적(누가복음 7:11~17)이[그림 86], 오른쪽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기적(마태복음 9:18~26,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이 그려져 있다[그림 87].

     

[그림 86]                                                         [그림 87]


지성소의 왼쪽 아래 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그림 88], 지성소의 벽과 천장을 잇는 반원 공간에는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지성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이며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예수는 오른손으로는 아담을, 왼손으로는 하와를 석관에서 끌어내고 있는데 역동적이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좌우에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와 의인들이 부활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의 발 밑에는 꽁꽁 묶인 죽음의 신 타나토스(Θάνατος, Thanatos)를 배치하고 검은 바탕에 부서진 문 조각들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예수가 부활해서 죽음의 세계가 정복되었음을 나타낸다[그림 89]. 코라교회(카리예 박물관)를 대표하는 프레스코화의 명품이다.

 

 

                                  [그림 88]



[그림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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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백세시대] 인터뷰

김형오 전 국회의장 “비례대표의원은 힘 못써…
노인회가 후보 추천해 수십 명 보내야 해요”


5선 의원에 최연소 의장… ‘술탄과 황제’ 역사서 쓰려고 정치 포기
美회사와 휴대폰 특허료 소송서 이겨 ‘돈 벌어온 유일한 국회의원’


5선 의원에 국회의장인 정치인은 어느 날, 단지 책을 쓰기 위해 정치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4년여 각고의 노력 끝에 전쟁 역사서 ‘술탄과 황제’(21세기북스)를 펴냈다. 최근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학술 교류행사에서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기조연설을 했으며 터키인들로부터 격려와 함께 격찬을 들었다. 김형오(70) 전 국회의장의 얘기다. 8월 초, 서울 마포의 개인사무실에서 만나 역사서를 쓰게 된 동기,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그리고 노인에 대한 단상을 들었다.

-책이 더 중요했다는 말인데.
“제가 최연소 국회의장이었어요. 지역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어 다들 다음 선거에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제대로 된 책을 쓰려면 시간을 다 쏟아야 했어요. 정치를 계속하면 책 쓰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내용의 책인가.
“1453년 천년제국 비잔티움제국과 오스만튀르크 두 나라가 54일간 치른 격전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전쟁의 주역이었던 오스만의 술탄(메흐메드 2세)과 비잔티움의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두 사람의 리더십에 대한 치열한 탐구입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2009년 터키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서 배를 끌고 산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충격과 전율을 느꼈어요. 황제가 쇠사슬로 해상을 봉쇄하자 술탄은 함대를 이끌고 산을 넘어 공격한 겁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 있지만 이건 역발상이랄까요, 너무 재미있어 완전히 몰입하게 됐어요.”


▲ 김형오 전 의장이 지난해 새롭게 펴낸 개정판 ‘술탄과 황제’(21세기북스).


-4년여를 고생했다고.
“우리나라엔 전쟁에 대한 자료가 없어 외국 책에 의존했어요. 약 100권의 책을 읽다보니 지식도 쌓이고 개중에는 수준 미달의 책도 있어 ‘내가 한 번 써볼까’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2년간 공부하고 2년간 썼어요. 하루 3시간만 자고 10시간 꼬박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 디스크협착증이 생겨 지금도 고생합니다. 눈도 급속히 나빠져 안경알을 3번이나 바꿨어요.”

-얼마나 나갔나.
“2012년에 초판을 내고 지난해 다시 개정판을 냈어요. 합쳐서 4~5만부 나갔어요. 인세 받아 이스탄불 체류하면서 들어간 여관비도 좀 빠졌어요(웃음).”

-책에서 말하려는 건.
“3가지로 첫째는 문명의 승화입니다. 문명 대 문명의 충돌에서 한 문명이 단절‧파괴‧멸절이 아니고 새로운 문명을 계승‧발전‧승화시켰다는 겁니다. 오스만튀르크는 비잔틴 문화‧유적을 그대로 남겨둔 덕에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돼 기독교도 보고 이슬람교도 보게 됐어요.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이 바로 그겁니다.”

두 번째는 ‘전쟁이라는 최종적이며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지도자가 어떤 리더십을 보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술탄은 천재적인 머리에 강렬한 의지, 튼튼한 신체에 백전불굴의 경륜을 지닌 전형적인 고전적 리더십이다. 반면에 황제는 힘도 없고 싸움에서 이겨본 적도 없는 나약한 리더십의 소유자이다. 그렇지만 부하들은 황제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는다. 이게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눈물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김 전 의장은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리더십은 술탄과 황제의 리더십을 합친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흔히 국가는 영원하다고 생각하지만 국가도 언제든지 멸망할 수 있는 유한한 것이다. 지금과 같이 남북관계가 심각하고 동북아 정세가 미묘한 상황에선 우리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김 전 의장은 “한미동맹이 모든 걸 지켜주지 않는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한미 관계를 강화하고 신뢰감을 좁혀가야 한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라는 생각을 버리고 국민도 각오를 단단히 할 때 비로소 핵‧미사일, 사드 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했다.

김형오 전 의장은 경남중‧고교,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왔다. 동아일보 기자(3년), 외무부외교안보연구원, 대통령‧국무총리 정무비서관(15년)을 지냈다. 14~18대 국회의원과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2008~2010)을 지냈다. 교통‧정보통신 분야 상임위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현재 부산대 석좌교수로 있다. 수필가로 등단해 ‘돌담집 파도소리’ ‘엿듣는 사람들’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등을 펴냈다.


-의정 활동 중 업적이라면.
“제가 ‘돈 벌어온 유일한 국회의원’일 겁니다. 미국의 한 회사가 CDMA라는 디지털 방식의 휴대폰 특허를 냈고 우리나라는 그걸 도입해 휴대폰을 생산하면서 세계 1위 생산국이 됐어요. 휴대폰이 팔릴 때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실용 특허료를 받기로 됐지만 미국이 이걸 주지 않았던 겁니다. 1997년에 미국의 회사를 상대를 소송을 벌여 3년여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아 밀렸던 특허료까지 합쳐 2억 달러를 받아낸 겁니다. 그것도 현찰로 말이지요.”


-대한노인회는 노인을 대표하는 비례대표의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가 의장 시절 고령화 사회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노인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만들어야 하는 건 맞는 얘기입니다만 왜 비례대표에요. 비례대표는 힘도 없고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큰 역할을 못해요. 각 당에서 1명 이상 못 주잖아요. 노인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수십명 만들어야 합니다. 노인회가 후보 추천을 하는 겁니다. 노인회가 ‘우리가 추천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돼요. 대신 후보로부터 국회의원이 되면 노인을 위한 법을 만들고 노인복지를 위해 애를 쓰겠다는 서약을 받아놓아야 합니다.”


-노인을 대표하는 정부 부처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우리 사회에 배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성, 청년, 노인이에요. 여성가족부에 노인을 넣을 수 있지요. 새로 부를 만들면 다른 계층에서 또 요구가 쏟아질 테니까요.”


-노인자살률‧빈곤률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왜 이렇게 됐나, 원리원칙에서부터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에서 비롯된 문제예요. 자식에게 모든 걸 쏟아 붓고 정작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만들어놓지 못했어요.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니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노인이 외로운 건 노인문화가 없어서입니다. 제가 30년 전, 정치를 시작할 때 한 말이 ‘우리 시대의 경로당은 컴퓨터’라고 했어요. 이제는 인터넷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며 가끔 경로당에 나가 몸도 부딪치고 살냄새도 맡으면서 시대 변화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김형오 전 의장은 인터뷰 끄트머리에 “노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외롭지 않은 방법을 스스로 개척하고 개발해야 한다”며 “그림, 수필, 야생화 탐사, 여행을 하거나 그럴 여유가 없다면 하다못해 동네 전설이라도 찾아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2017-08-11 백세시대]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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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특별인터뷰] 김형오前국회의장 

“힘 있어야 평화 유지...'안보우선 물밑대화' 등 對北접근 다각화를"


북한은 동포로서 통일 대상이지만

군사적 敵...만만하게 보여선 안돼

엄중한 시기, 섣부른 평화주의 금물

文대통령 '안보 퍼스트' 선언하고

野도 비난보다 국정 적극 협조를

내년 '분권형대통령제' 개헌 필요

불발 땐 엄청난 혼란·파국 올 것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호재기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 심장부를 겨누겠다고 하는데 진짜 미국과 전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일본을 칠 수 있겠습니까. 노리는 목표는 결국 한국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대화를 한다고 해도 위에서는 철저한 안보 메시지를 던지면서 아래로 물밑 대화를 하는 등 다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김형오(70·사진) 전 국회의장은 31일 서울 도곡동 자택 인근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창간기념 특별 조찬 인터뷰에서 “북한이 ‘우리가 한국과 싸우는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을 방어하려 한다면 너희도 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는데 우리는 남의 일 쳐다보듯 한다”며 튼튼한 안보를 시종일관 강조했다.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최근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학술 교류행사인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에서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2세’라는 기조 발표를 통해서도 국가발전을 위한 리더십을 강조했다.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의 저자인 그는 “수많은 나라와 영웅이 정복하려던 1,000년 비잔틴제국을 1453년 멸망시킨 ‘메흐메드2세’의 탁월한 전략가적 자질, 국제적 감각, 솔선수범하는 천재적 리더십, 헌신과 포용정신을 다뤘다”며 “인종·종교·국적·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별로 적재적소에 써서 오스만제국을 200년간 유럽 최강대국으로 키웠다”고 설명했다.

‘메흐메드2세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김 전 의장은 “국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 왕성하고 강성하기도 하지만 지도자와 국민이 잘못하면 쇠약하고 소멸한다”며 “경각심을 갖고 그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북한은 우리의 동포로서 포용하고 함께 가야 할 통일의 대상이지만 군사적으로는 엄청난 적대관계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우리를 어설프게,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너희가 우리를 치면 10~20배로 갚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6·25전쟁 전 ‘전쟁 나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했는데 다 말뿐이었고 수십년간 북한에 만만하게 보여 천안함 사태도 나고 연평도 포격도 당했지만 상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역대 정부가 국가안보에 게을러 방산비리도 나오고 있지만 튼튼한 안보의식이 없다면 한미동맹도 소용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예로 들며 수십배 영토의 아랍권에 둘러싸여 있지만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실제 엄청난 보복을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평화는 호소하거나 애원하는 식으로 안 되며 힘을 기반으로 할 때 유지된다는 게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미국도 한국을 지키는 것이 국가이익이 되니까 지키는 것이지 포기하는 것이 국가이익이라면 포기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키는 능력이 없는 나라는 버림받게 됩니다.” 

김 전 의장은 “전쟁이 나면 총 들고 나가겠다는 국민을 만들고 적을 효율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정병을 기르고 사기를 드높이고 지휘체계를 엄정히 해야 한다”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도 반대하는 주민들께 ‘나라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설득하고 위안을 주고 보상해서 빨리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안보 퍼스트(first)’를 통한 통합 행보를 주문했다. 그는 “한반도는 4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세계 유일의 지역인데 북한은 이를 이용하는 반면 남한은 4강의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대통령이 ‘국가안보와 외교 행보를 초당적으로, 범국민적으로 임하겠다’고 선언하고 여야가 모두 한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평화부터 얘기하지 말고 ‘내가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며 도와달라고 하고 △여당 등 일부에서 태양이 지구 중심을 돈다는 천동설처럼 자주외교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야당도 비난보다는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서야 하고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사드 문제에서 중국이 우리를 만만히 보도록 자초한 측면이 있는데 국익을 위해 말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인간이나 국가나 목숨이 소멸되면 재생이 안 된다”며 “미국의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여기에 있다(The Bucks stop here!)’라는 글을 책상 위에 붙여놓고 자신을 경계했는데 우리 지도자들이 그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헌법 전문에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는 말이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2,500년 전 그리스 페리클레스는 ‘행복은 자유에 있다. 자유는 용기에 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두려워 떨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라’는 명연설을 했다”며 “자유는 지킬 용기가 있어야만 지킬 수 있고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유가 확보돼야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페르시아-그리스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도 결국 자유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며 6·25 때 피란민들이 갈구한 것도 자유와 안전이라고 역설했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구상을 밝혀달라’는 질문에는 “안보상황이 위급한데 메시지가 흐려질 수 있다. 구상은 많이 있는데 너무 한가하게 들릴 것”이라고 전제하며 말문을 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적 통일로 가야 하는데 남북 신뢰 형성부터 시작해 장기적으로 가야 한다”며 “‘전쟁을 서로 하지 않겠다’는 인식 하에 단계별로 가야 하며 섣부른 평화주의는 금물”이라고 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들며 “밑도 끝도 없이 통일대박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포퓰리즘적인 것”이라며 “북한을 자극해서도 안 되지만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통일로 갈 수 없다. 엄중한 시기에 평화통일 운운하는 것은 한가하고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모르는 남의 나라 사람 같다”고 비판했다.  

김 전 의장은 ‘결국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고 묻자 “북한과 미국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물밑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화의 조건을 좋게 하려고 베팅을 세게 걸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도 물밑작업을 해가며 위에서는 국가 생명과 안녕을 책임지는 확고한 자세와 메시지로 빵빵하게 세게 하고 철저한 국방태세를 확립하면서 아래에서는 물밑대화를 하는 등 다차원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내년 6·13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밝힌 개헌에 대해서는 “문 대통령이 다른 대통령과 달리 식언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만약 내년 6월에 개헌이 안 되면 엄청난 파국과 혼란이 올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권력구조인데 대통령과 총리가 각기 역할을 분담해 책임을 지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하며 힘이 세진 국회의원의 권한에 맞춰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 대통령에 대해 포퓰리즘과 진영논리 탈피를 주문했다. “포퓰리즘과 진영논리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암적인 것”이라며 “문 대통령은 41% 유권자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문 대통령의 성심성을 믿는다”고 말했다. 또 ‘뭣이 중헌디’를 외치며 “(문 대통령이) 국가안보에 관해 확실한 주인의식을 갖고 앞장선다면 난 지지한다”며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 아주 영리한 국제정치를 읽는 눈, 행동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인 그는 “유일하게 이념과 계층을 떠나 존경받는 분으로 생각과 행동이 시종일관했다”며 “사회적 갈등이 많은 상황에서 선생의 삶과 행동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그는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동서고금의 역사책을 많이 접했다”며 “시대를 개척하고 투철한 삶을 산 사람의 리더십을 다루고 싶다.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영웅이었던 ‘티무르’ 이야기를 쓸 방침”이라며 활짝 웃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2017-08-01 서울경제]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부동산 대책 '강남 때려잡겠다'는 생각 바꿔야 성공


[창간 특별인터뷰] 김형오 前국회의장

규제식 접근보다 시장자율 전환해야

교육정책은 공교육 활성화에 우선을


창간인터뷰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호재기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3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부동산·교육정책에 관해 규제식 접근보다 시장 자율로 방향을 전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부동산대책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 때 실패했는데 문재인 정부도 핵심을 잘못 잡아 실패의 길로 가는 듯하다”며 “강남 부동산, 복부인, 투기꾼을 때려잡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절대 안 된다. 그 사람들은 한술 더 떠 법 위의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한다”고 말했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원망과 원한, 갈등관계로 풀면 나라가 위험해진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실수요자와 서민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인위적으로 신도시를 만들지 말고 환경친화적 도시재생사업 등 달동네 대책이 중요하다”며 “정부에서 이면도로 등 길을 놔줘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주차가 가능하도록 하며 집을 개보수할 때 융자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달동네 전월세자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된 옛 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이 몰리며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우려된다’고 지적하자 “전월세를 함부로 올리지 못하게 한다든지 임대주택을 더 짓는다든지 전월세대책을 따로 세워야 한다”고 답변했다.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정부 수립 이래 가장 많이 바뀐 것이 교육·입시정책인데 가장 불만이 많은 게 현실”이라며 “새 정부가 외고와 자사고를 없애겠다고 하는데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교육정책은 학생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세워야 하는데 학생들만 상대하다 보니까 실패한다”며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관료나 정치인, 또 비판하는 사람조차 자기 자식들은 외국에 보내고 있으니 제대로 되겠나. 최소한 고교 때만큼이라도 한국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 전 의장은 “일반고를 어떻게 잘 만들고 사교육을 없애고 공교육을 활성화시킬 것인가 그 대책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며 “동서고금을 봐도 사람의 욕망과 본능에 의한 우열은 없앨 수 없다. 공정한 경쟁체제로 몰고 가는 게 정부의 역할이지 ‘경쟁을 없애겠다’는 것은 엉터리”라고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는 학생, 학부모, 여야 정치권 등 온 국민이 참여하는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앞으로 3년간 최소 30년은 지속될 교육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 교육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국민들이 공정한 교육제도에서 각자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서열화를 반대한다’면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줄을 세우는 수능시험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왜 하지 않느냐”며 ‘사고의 전환’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대학입시를 지금처럼 서열을 나눠 줄 세우기식으로 하면 안 되고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며 “대학이 앞으로 3년간 준비하도록 하되 여의치 않은 지방 중소대학들은 연합해서 정부연구소에 위탁하면 된다. 필기시험 위주가 아니라 다양하게 선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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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형오 전 의장  "文정부 성패, 진영논리 극복에 달려"


한·터키 수교 60주년 행사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 기조 발표
"보수진영, 이대로 가다간 존재 무의미해져…철저히 죽어야 회생 가능"


터키 국영방송과 인터뷰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이달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터키 국영 테레테(TRT)방송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앙카라=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지금 보수니 진보니 이런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은 '진영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수명'이 언제 끝날지 몰라요."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학술 교류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에 참석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70)은 보수의 위기 타개책에 관한 질문에 답답함부터 토로했다.


그는 일정의 종착점인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이달 24일 열린 심포지엄에서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인문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서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2세'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표를 했다. 

기조연설 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에서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2017.7.24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발표 이튿날인 25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사회 전반이 극심한 진영논리에 매몰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당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과 조직, 직능이 '어느 것이 더 정당하고 우리 사회에 이로운가'보다는 '어느 쪽이 우리편이냐'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면서 "이래서는 한국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성공하려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직후 정무직 인사를 보면서 새 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하나 싶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영논리를 답습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도 "아직은 기대를 품고 있다"고 했다.

20여 년 몸담은 보수진영에 대해 "지금처럼 계속하다가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필패하고,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며 쓴소리를 쏟아내고 "철저히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현장 설명 듣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왼쪽 첫번째)이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이언 호더 발굴단장으로부터 유적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5선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치인은 비위 혐의나 경쟁력 상실로 떠밀려 정치판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많다. 김 전 의장은 그러한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지역구에 뚜렷한 경쟁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전부터 저술가로서 제2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 "너무 늦기 전에 결단했다"고 2년 전 불출마 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다는 김 전 의장은 다음 책의 소재 후보로 1683년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빈 공성전'을 꼽았다. 또 전쟁사다.

"로맨스를 쓰기에는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경험이 일천하니까…"

tree@yna.co.kr 



[2017-07-26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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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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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 기조 발표문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 2세”

-『술탄과 황제』를 통해 본 역사성과 지도력-

 

 

 

김형오 (전 국회의장, 현 부산대 석좌교수)

   

한국과 터키는 1957년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에 기조 발표자로 초대를 받아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 심포지움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17.7.24


수교를 한 해도, 60년이 지난 금년도 한국은 닭의 해입니다. 오스만 터키의 전장(戰場) 군영에서 새벽 기상을 알렸던 호자데데(Hoza Dede: 수탉 영감)처럼 닭은 새벽을 깨우는 길조(吉鳥: 좋은 징조를 주는 새)입니다. 파티 술탄 메흐메드(Fatih Sultan Mehmet; Mehmed the Conqueror)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1453년은 한국의 닭의 해에 해당되며,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 최고의 국경일인 광복절도 닭의 해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닭의 해에 수교 60돌을 맞은 한국과 터키, 두 나라에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와 터키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2009년 1월, 꼭 8년 6개월 전 한국의 국회의장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하는 길에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서 메흐메드 2세를 만났습니다. 쇠사슬 방책으로 골든 혼(the Golden Horn; Haliç) 항구 진입이 봉쇄되자 수많은 배를 이끌고 산을 넘어간 스물한 살 청년 술탄! 누구도 상상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항구를 점령해 천년 제국 비잔티움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 이 청년 술탄에 대한 관심이 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앙카라에서 터키의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회의원들을 만났을 때도 정복자 메흐메드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림 1: 배를 끌고 산을 넘다]

 

귀국 후 내 책상 위에는 터키 관련 서적 수십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중 콘스탄티노플 정복 관련 책자는 번역서 단 한 권(스티븐 런치만; Steven Runciman,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뿐이었는데, 바쁜 국회의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짬 날 때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을 통해 1453년 정복 전쟁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틈만 나면 짬을 내어 이스탄불을 방문해 격전의 현장인 성벽을 수없이 답사했습니다. 대학 도서관과 연구소·박물관을 찾았고, 유수 대학의 교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못다한 질문과 궁금증은

이메일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림 2: 성벽 앞의 필자]                             [2-1: 복원된 성벽]

  

‘이스탄불 정복전쟁’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높아질수록 작가로서의 모험이 곁들인 새로운 길과 정치인으로서의 명예로운 길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은 정계 은퇴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전적으로 여기에 매달리며, 이스탄불로 떠나 두 달간 장기 체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메흐메드 2세를 알게 된 지 4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2년 늦은 가을, 드디어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술탄과 황제』입니다. 책은 나오자마자 언론과 평단 그리고 서점가의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호평과 찬사 속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과 수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책 관련 자료 어디에도 나의 정치 경력은 넣지 않았습니다. 일반 소설도 교양서도 아닌, 아마추어 작가가 쓴 한국과 아무 관련 없는 560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가 4만 권 넘게 팔린 것은 한국 출판사상 지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메흐메드 2세는 어떻게 난공불락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까요?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역발상으로 배를 끌고 험난한 갈라타 언덕을 넘어간 창조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며 치밀한 행동가였습니다. 선대 술탄들이 모두 공략에 실패한 천년 성벽을 뚫기 위해 그는 규모와 성능 면에서 세계 최대‧최고의 대포를 개발했습니다.  

                                         [그림 3: 우르반의 대포]

그밖에도 공성탑 건설, 땅굴 공격 등 첨단 기기와 과학 기술을 총동원해 지 상‧지하‧해상‧공중에서 다양한 전술 전 략을 펼쳤습니다. 육군 중심국이었지 만 해군을 보강하여 장차 지중해 제해 권 장악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군사 조직을 비정규 용병(바쉬보주크), 지방 민병군(아잡), 정규군(아시아군‧유럽군), 정예군(예니체리) 등으로 다원화·체계화하고 보병과 기병의 역할 분담 등을 통해 공격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정복 이후 200년 이상 터키가 유럽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 것도 메흐메드 2세의 업적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메흐메드 2세는 술탄에서 강등되어 왕자로 돌아가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능한 스승들을 모셔 심신을 단련하는가 하면, 직접 전투에 참가해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술탄에 다시 즉위하자마자 서방 각국과 일시적 휴전 조약을 맺는 등 평화 외교를 펼쳐 비잔티움을 비롯, 서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습니다. 헝가리 섭정 후냐디(야노슈 후냐디: Janos Hunyadi)의 발을 묶어놓고, 앙숙 관계였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상호 견제시키기도 했습니다. 배후 안정을 위해 동부 카라만(Karaman ; Karaman Beyliği)과는 정복 전쟁 대신 평화 조약을 맺고, 선친 무라드 2세의 미망인이었던 마라(Mara Brankovic)를 귀환시켜 그녀의 친정 아버지인 세르비아 왕의 환심을 샀습니다.

지도를 통해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전문가들을 초빙해 정보를 얻고, 공격 목표인 삼중 성벽을 직접 사전 답사도 했습니다. 수송로와 지원군 차단을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ı)를 세우고 철저한 봉쇄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림4: 루멜리 히사르]

아랍·러시아 등 강국의 수많은 침략과 오스만 선대 영웅들의 여섯 차례 공격에도 버텨냈던 콘스탄티 노플이 21세의 청년 술탄에게 정 복되는 비결 아닌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셋째, 국론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전쟁‧전승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모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실적 보상과 출세의 사다리를 제공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해 성전(聖戰:Jihad)과 정전(正戰: Justice War)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현상 유지를 원하는 화평파 세력도 참전시켜 토론과 담판을 통해 반대 의견을 제압했습니다. 정복 후 여세를 몰아 정적이었던 할릴 파샤(Halil Chandarlı Paşa)를 제거하고 부족‧호족 등 기득권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종‧종교‧지역·신분을 불문하고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세계 제국으로 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넷째는 리더십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승리의 핵심 요인인지도 모릅니다. 메흐메드 2세는 늘 최전방에서 말을 몰며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해상 전투가 치열할 때는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직접 말을 타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림 5: 말 타고 물에 뛰어든 술탄]

타고난 승부사였습니다. 한 번의 실패 뒤에는 반드시 역전의 비책을 던져 더 확실한 승리를 일구어냅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야영하는 솔선수범 형 지도자였습니다. 실전 같은 훈련, 훈련 같은 실전을 했습니다. 신상필벌 에도 엄격했습니다. 패배자는 결코 용 납하지 않았습니다. 전리품은 약속 대 로 처리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신뢰를 얻었습니다. 군기 또한 엄중했습니다. “튀르크군 1만 명의 행군보다 기독교 군대 100명이 움직이는 소리가 더 시끄럽다”라는, 15세기 한 프랑스 여행가(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Bertrandon de la Broquiere)의 목격담이 그 사실을 실감나게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당대 최고의 헌신과 열정의 지도자 중에서 파티 술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책이 나온 후 나는 이스탄불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몇 차례 더 방문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결심이 섰습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38쇄를 거듭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을 더는 찍어내지 말도록 출판사에 요청하고, 두 달 안에 개정판 원고를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 6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림6: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한 페이지도 전작과 같은 곳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뜯 어 고쳤기 때문입니다. 전작(초판본)의 정신과 뼈대는 그 대로 살리되 사실상 새 책으로 쓰려니 재주가 부족한 저 로서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체제도 바꾸고 문 장·표현도 고치고, 일부는 삭제하고 상당 부분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터키 측 자료들을 요긴하게 활용(특히 페리둔 에메전 교수의 근작: Feridun Emercen, 『Fetih ve Kıyamet 1453』 등)했습니다. 

새 책 역시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언론에서도 크게 리뷰를 해주었습니다. 작년 연말 촛불 시위, 태극기 집회 속에서도 책을 읽어준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초판에 이어 개정판까지 구입해 꼼꼼히 대조해가며 읽었다는 독자도 인터넷을 통해 적잖이 만납니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왜 책으로 쓰려 했고,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 한 걸까요.  

첫째,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한 문명의 축적 위에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그 계기로 보고자 했습니다. 문명 대 문명의 충돌은 보통 승자의 패자에 대한 보복‧파괴‧멸절(滅絶)로 이어졌지만, 오스만은 포용과 공존‧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지도자의 역량과 철학에 의해 문명 파괴가 아닌 문명 승화(Sublimation of Civilization)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나아가 서구적 편견 없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터키 문명, 그 중에서도 동시대 세계사의 한 축으로 취급돼야 할 오스만의 역정(力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림 7: 메흐메드 2세 초상]

둘째, 가장 결정적 시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 그 중에서도 두려움과 대적해야만 하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살펴보고 자 했습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자질, 생 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의 선택과 결단 등을 술탄과 황제의 입장이 되어 파고들었습니다. 솔선수범‧진두 지휘‧신상필벌로 요약되는 승리자 메흐메드 2세는 ‘달리는 리더십’으로 규정했고, 우유부단하지만 끝까 지 모든 책임을 싸안고 가는 콘스탄티누스 11세를 통해서는 ‘눈물의 리더십’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가냘픈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필자로서는 그 나약한 치부를 들추어내기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덧바름으로써 한 단계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역사를 통해 오늘과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국가의 존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은 출발합니다. 국가가 당면한 최고의 위기, 가장 긴박한 순간인 전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오늘날 심각한 안보 위기와 혼란스런 국제 정치 속에서 한국과 한국민은 어떻게 살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560년 전 아득히 멀리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의 흥망성쇠를 통해 역사의 생생한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과 터키, 67년 전 그들은 한반도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고 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또 그 후손들이 오늘 각자의 나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나아가 번영·번성하려면? 국가가 존재해온 이후 끊임없이 계속돼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양국은 위대한 선조들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메흐메드 2 세의 헌신과 열정을 가슴에 새긴다면 험난한 파도도 담대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역사의 새벽을 깨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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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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