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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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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플 2010.09.15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2. 한가위 2010.09.16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한가위 이후에도 기대할게요
    명절 잘 보내세요

  3. BlogIcon 김화자 2010.09.18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 처럼 넉넉하시고 풍요로 우신 추석 명절 되십시요.
    행복 하시고 따듯하신 한가위 되시길 기원 합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4. 세레나데 김 2010.09.26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연립 주택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 웃었습니다.
    어라, 다시 들어가 보니 그새 사라졌네요.
    신비스런 그녀를
    <이스탄티 걸>이란 이름으로 불러 봅니다.

  5. 소나티네 2010.09.27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이스탄티걸이 또 고개를 쏘옥~~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는 그만큼 잔상을 많이 남깁니다

  6. BlogIcon 스압 2010.09.30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에 지은 집에 사는 이들은 기분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우리집 벽이 수백년전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니!!'
    집에 값비싼 골동품 하나씩은 기본이겠네요. 부럽다. 돈 떨어지면 조금씩 팔아도...ㅋㅋㅋ

  7. 유한새 2010.09.30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기의 철옹성에 무혈입성이라...!!

  8. 만국기 2010.10.12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탁월한 역사 기행문입니다.

  9. 형오투어 2010.10.12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퓨터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스탄티노플,
    그 가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정말 끝내 줍니다.
    착륙하고 싶지 않네요.

  10. BlogIcon silk flowers 2010.10.18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역사의 도시군여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3
                     - 3중 성벽 어딘가에 박혀 있을 대포알을 찾아서

 

▲황금문(알튼카프)! 황제의 대관식 또는 전쟁 승리의 개선문 등 의식용으로 사용했던 비잔틴 제국의 자존심. 이 문을 통해 옛 황궁까지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길(‘승리의 길’)이 나 있다.
마르마라 해를 끼고 세워졌던 성벽은 끝 부분에서 작은 비상문을 꼭짓점 삼아 육지 쪽 3중 성벽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육상에 세워진 제1군문인 황금문을 성 바깥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성문과 외성 쪽 출입구를 보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여기저기 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내성 쪽은 사진 찍을 곳이 마땅찮아 정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공원묘지를 헤치며 들어갔지만 나무들로 뒤엉켜 있어 돌아 나왔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역사학도인 니사가 건네준 프린트물 속의 황금문.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2중 성문과 입구의 화려한 모습을 아쉬운 대로 상상할 수 있다. 쌍두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치켜든 채 준마를 타고 저 문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개선(凱旋)했을 비잔틴 황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그림 ①②와 위 사진 ①②는 동일 건물. 전면(全面)을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흰 대리석 수백 장으로 장식한 황금문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황금이 어디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황금문을 지나서 우뚝 솟아 있는 내성벽의 주탑. 무화과나무들이 발돋움을 하며 성 안을 넘겨다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위풍당당한 주탑에는 키가 한참 못 미친다.


▲성곽 탐사를 하던 도중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백라이트와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벨그라드카프(제2군문)를 통과하고 있다. 성문 안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둘러보고 싶은 성곽은 아직도 여럿이건만…. 갑자기 마음과 발길이 조급해졌다.


▲까마득한 성벽 위를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 저렇게 한적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길 위에선 자연스럽게 손잡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다. 페가에 문(실리브리카프) 근처 어디쯤에서 마주친 풍경이다.

 


▲내성과 외성․해자가 있던 자리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밭을 일군 부분이 해자가 있던 곳.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일하는 틈틈이 허리를 펴고 고개 들어 성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면 피로가 금방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창살과 자물쇠로 가로막힌 내성과 외성 사이 공간도 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7페이지)에 따르면, 높이가 약 12미터인 내성벽(주탑 높이는 18미터)과 7.5미터 가량의 높이를 지닌 외성벽 사이에는 폭 12~18미터에 이르는 통로가 나 있었다.


▲페가에 문 안쪽 마을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떼들. 양들은 보기와는 달리 심보가 고약해서 겨울에는 남들 추우라고 떨어져 자고, 여름에는 남들 더우라고 붙어서 지낸다는데, 정말인가? 불볕더위인데도 하나같이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이 양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복원된 모습이지만 3중 성벽의 위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1천 년 동안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성벽 아니던가.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대를 타고 오르는 토마토 줄기에도 올망졸망 토마토들이 매달려 있다.


▲노점 좌판 위에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야채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당근‧가지‧고추‧토마토‧배추(?)…. 아마도 해자를 메운 밭에서 수확한 것들이겠지? 이런 재료들로 식탁을 차리면 몸 안의 피가 한결 정갈해질 것만 같다.


▲아름답지 않은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까지 개운해지는 이런 풍경들이 ‘이스탄티노플’에는 도처에 널려 있다. 셔터를 누르면 ‘그림 같은 사진’이 나온다. 고도(古都)의 실체를 느끼기 위해 찾는 이는 우리 말고는 없는 것일까.


▲2중 성문 맨 안쪽 성문 벽에 매달아 놓은 대포알. 저 정도 크기라면 1453년 전쟁 당시에는 작은 대포알에 속했으리라. 성문 통과 가능 높이는 2.5미터이고 폭은 2.9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그 옆에 세워져 있다.


▲아랍어로 표기된 글자라서 해독을 못하는 게 아쉬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정확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서 보았던 성벽에 박힌 대포알 아닌가?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도 열심히 성곽을 탐사하는 우리 일행에게 현지인들이 한 곳을 가리키며 자꾸 저 안으로 들어가 보라 한다. 그래, 가 보자! 눈에 잘 안 띄는 벽과 벽 사이를 지나 30미터쯤 걸어가자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반 지하 석굴(?)이 나타났다. 내성에 딱 붙어 있는 조그만 교회다. 출입구 옆에는 걸인들이 잠자리로 삼아 몸을 눕힌 듯 더러운 소파 위에 천 조각이 어지럽다. 이 문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어둠침침한 반 지하 공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浮彫)물들. 비잔틴 교회인 모양이다. 눈높이에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휴대하고 간 랜턴과 집시 풍의 사내가 빌려준 촛불을 켜들고 구석구석 발밑을 비추어가며 대리석 석곽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내는 촛불 값으로 건네준 5터키리라(우리 돈으로 4,5천 원)를 받아 들고는 횡재했다는 듯이 신바람이 나서 맥주를 사 마시러 갔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파괴된 주탑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부 구조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막힌 아치형 구조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주탑의 뒤쪽(안쪽)임을 말해 준다.


▲내성 안쪽 풍경. 돌로 된 성벽과 나무로 지은 가옥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들의 저 강인한 생명력!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 위 석벽 틈 사이로 잡초가 둥지를 틀고 있다. 석벽에 새겨진 글씨는 로마자 표기라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석벽 맨 위 앞머리의 글자가 ‘콘스탄티누스’로 시작되고 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병사들이 총검으로 무장을 했듯이 나는 녹음기‧지도‧카메라를 늘 탐사에 지참했다. 등에 멘 배낭에는 또 다른 ‘비밀 병기’들이 숨어 있다.


▲무너질락 말락 위태롭게만 보이는 성벽 아래 풀밭에서 이 도성의 시민인 듯한 한 사내가 길게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1500년을 지탱해 온 난공불락의 성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야 있겠느냐는 듯이….


▲레기움 문에서 톱카프(성 로마노스 시민문)를 향해 가는 길. 어느새 날이 저물어 성벽 위 조명등에 불이 들어왔다. 오른쪽 하늘로는 포물선을 그리며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비잔틴 제국 깃발에 그려져 있던 쌍두 독수리의 환생은 아니겠지? 성벽 너머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1453년 당시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탑을 관통한 저 구멍은 혹시 대포가 뚫고 지나간 자국? 성벽에 혹시 박혀 있을지도 모를 대포알을 찾는 사람처럼 우리 일행은 성곽 이곳저곳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톱카프로 가기 직전에 만난 외성벽의 모습.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철골로 버팀대를 세워 놓았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저만치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미너렛(첨탑)이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3편에서는 육지와 바다(마르마라 해)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는 비상문부터 톱카프 직전(갈색 사각형 부분)까지를 사진에 담았다. 1편과 2편이 지도상으로 볼 때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탐사한 기록이라면, 3편은 지도 맨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탐사한 내용이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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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것이궁금하다 2010.09.02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혼이 지는 성벽 너머로
    사라진 두 남녀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미스터리 이스탄티노플

  2. 알밥 2010.09.03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될 만큼 생생한 사진에 감탄 또 감탄...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아프선프 2010.09.03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명록에 답변해주셈~~

  4. 콜럼버스 2010.09.04 1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참 기발한 조어입니다.
    어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매우 적절한 용어랄까요?
    신생어 사전에 등록될 것 같습니다.

  5. 두륜 2010.09.06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 여행이 대단히 인상 깊으셨나 보네요.....

  6. 불국사 2010.09.09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여... 터키하면 지난 월드컵 축구, 한국전쟁참전 등 정서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운나라... 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우리경제와도 직접적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의장님의 글을 보면서 바로옆 나라처럼 자세히 재미있게 소개해 주시니 지금 제가 세월을 거슬러 그곳에 있는 느낌입니다. 사진중에 가방매고 모자쓴 뒷모습이 의장님이죠? 뒷모습은 학생같네요. 5탄도 빨리 올려주세욧!!!! 기다립니다.

  7. 비잔티움 2010.09.09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콘스탄불? 앞에게 낫네요... 그이름 바로 지은거예요? 아님 오래 고민해서 지은건가요? 암튼 기발한 상상!!!

  8.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대하지만 섬세하며 복잡하지만 알기쉽게 풀어쓴, 1453년 성벽의 흙내음과 골든혼의 바다내음, 그리고 대포소리와 화약냄새가 아련히 느껴지는 생생한 포스팅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부중인데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9. 옴니버스 2010.11.18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곽을 따라 함께 걷고 난 듯 다리가 저릿저릿한 느낌이군요.
    멋진 가상 체험 공간입니다.

  10. 리얼리스트 2010.11.23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땀냄새 물씬 풍기는 리얼 포스팅!
    인문학의 향기에 젖어들게 하는구나.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
                              - 지도에는 없는 도시를 가다

  그대 혹시 이런 이름의 도시를 아시나요? 이스탄티노플(Istantinople).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아무리 찾아 봐도, 지명 사전을 열심히 뒤져 봐도, 네이버 지식 검색에 입력을 해봐도 결코 나오지 않는 도시. 그러면서도 왠지 익숙한 그 이름, 이스탄티노플. 이 도시가 지금으로부터 550여 년 전으로 나의 시계와 발걸음을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탄티노플은 다름 아닌 이스탄불(Istanbul)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합성어, 바로 내가 창안하고 개념 짓고 명명(命名)한 도시입니다. 절묘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게도 이스탄불의 ‘불’과 콘스탄티노플의 ‘콘’, 그렇게 한 글자씩만 떼어낸 다음 조합하면 이스탄티노플이란 단어가 탄생하니 말입니다.

▲ 한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 차양 넓은 모자를 방패삼아 쓰고 격전지 성곽 순례에 나섰다. 마치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내 옆에 있는 ‘미녀 삼총사’는 왼쪽부터 해안 성곽을 전공하는 역사학도 니사, 터키어가 유창한 현지 통역사 이경숙씨, 이스탄불 총영사관 정은경 박사이다.)


  언어유희로 웃어넘기거나 폄하할 일이 아닙니다. 터키의 경제수도 격인 이스탄불은 실제로 그 도시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와 문화가 발길 닿는 곳마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현재의 이스탄불과 과거의 콘스탄티노플이 공존하는 도시랄까요.


  잘 아시다시피 동서양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은 민족·인종·지역·종교·문화가 얽히고설킨 곳입니다. 아시아 내륙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최종점입니다.


  나는 지난 8월 초순 나의 휴가를 온통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3일은 그 유명한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 소피아 성당)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하였고, 또 3일은 배낭을 멘 채 1500년 된 성곽을 뙤약볕 아래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었습니다.


▲ 어디선가 본 듯 눈에 익은 꽃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입성하는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저 하얗고 빨갛게 피어난 꽃들에 그 당시 숨진 병사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닐는지….


  아야 소피아는 온종일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해마다 이 도시를 찾는 2700만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나 다름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일행처럼 사흘 내내 아야 소피아의 1․2층은 물론 부속 건물들과 외벽, 지하실까지 보물찾기하듯이 뒤지고 살펴본 이는 드물 것입니다. 게다가 그 건물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전문가(하산 박사)를 만나 열정적 토론을 한 이틀 반은 이 위대한 건축물의 숨소리, 눈물 자국마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 성곽 위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모습.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야 소피아에서 나는 1453년으로 돌아가 황제의 간절한 기도와 술탄의 장엄한 연설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소리들은 관광객들이 쏟아내는 소음 가운데서 들릴 듯 말 듯 나를 애태웠습니다.


  “도시를 세운 이(콘스탄티누스 1세)가 도시를 망하게 한다(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설과 *
선지자 모하메드의 예언대로 메메드 2세(모하메드 또는 마호멧의 터키 식 이름)가 정복자(‘파티’, Fatih)가 되는 이런 역사는 우연인가요, 필연인가요.


  *“한 쪽은 육지이고 다른 두 면은 바다로 된 도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삭의 7만 아들이 그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심판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 대포? 노! 성 아래에서 성 위로 물건을 들어올리기 위한 장치였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제대로 머물러 있지 않지만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획기적인 대 사건…. 이슬람 세력(오스만 투르크)이 기독교 세력(비잔틴 제국)을 포위한 채 총공격을 감행한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은 세계 전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투였습니다. 동원 가능한 인력은 물론 모든 역량과 지혜가 총집결되었습니다. 육전·해전·지하전이었고, 또한 외교전·첩보전·심리전이었습니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이 전쟁을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계기로도 작용했습니다. 아시아계이면서 이슬람 신앙을 지닌 오스만 세력이 유럽에 속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이 기념비적인 사건은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동안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서양인들로서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패배와 굴욕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잔인하고도 처절했던 사생결단의 전쟁이었지만, 정복 이후 오스만은 비교적 관대하게 기독교 문화를 포용했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500년 가까이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큰 의미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건만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덜 알려져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역사학자도 아닌 나를 ‘1453년’에 심취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9세기 성벽(왼쪽)과 12세기 성벽(오른쪽)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을 지키던 성벽이다. 물론 보수 및 복원의 손길을 거친 모습이다.

  2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성곽은 3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개 면은 바다와 만(마르마라해와 골든혼)에 접해 있고, 한 개 면은 육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육지 부분은 3중 성벽으로서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로마 제국을 1000년 넘게 지켜 준 난공불락의 철옹성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입니다.

▲ 짧게는 40미터, 길게는 90미터 간격으로 방어용 타워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면 톱니바퀴 모양이다.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병정놀이하는 아이처럼 성곽의 앞과 뒤를 가로지르고 성벽의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포탄 자국과 혈흔을 더듬었습니다. 총공격을 독려하는 술탄(메메드 2세)의 우렁찬 목소리와 죽음으로 성을 지키려는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습니다.

  

▲ 통상 성곽 앞에는 군데군데 묘지가 조성돼 있다. 묘지는 성곽 터를 측정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그 도시에 머문 기간은 너무나 짧고 한편으로는 길었습니다. 순간과 영원 사이를 오고간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그 도시를 생각하면 어떤 때는 열 권의 책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가 또 어느 때는 한 줄의 글조차 감히 적어내기가 막막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두 번은 짧게, 한 번은 조금 길게 그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두 번의 방문 이후 나는 그만 그 도시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뛰고 설레는 도시가 돼 버렸습니다. 도서관을 뒤져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영문 혹은 터키어로 된 책자도 구해 보았습니다.


▲ 성 안에서 만난 천진난만한 아이들. ‘꼬레’(한국)에서 온 ‘꼬레리(한국 사람)’인 걸 알고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런 아이들만 보면 외손자·외손녀가 생각나서 덥석 안아주고 싶어진다. 

  국회의장 직을 마치자마자 나는 이 도시 방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대표에 출마하라는 주변의 권유와 스스로의 유혹도 뿌리친 채 배낭을 꾸렸습니다. 녹음기와 카메라와 지도는 소중한 탐사 자원이었습니다. 현지의 명망 높은 학자들을 만나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귀중한 자료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4명의 단출한 ‘역사 탐방대’가 5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헤집고 누비고 다녔습니다. 문명과 문명, 그 충돌의 현장에서 많은 물음표들이 지워졌고 새로운 물음표들이 생성되었습니다.


▲ 최후의 날 당시의 황궁 터.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중 비잔틴 양식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스탄불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을 더 많이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의 미묘한 국민감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이 나에게 하등의 고려 요소나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느낀 역사적 전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열망으로 길을 떠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550여 년 전의 치열했던 전투로 세계사는 바뀌었습니다. 한 제국은 사라지고 또 한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터키는 독립전쟁(1919~1923년)을 거쳐 공화국으로 거듭났습니다.


▲ 황궁이 끝나고 삼중 성벽이 시작되는 곳. 방어용 탑이 망루라 해도 좋을 만큼 높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망원경으로 본 듯 느껴지던 것들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니 현미경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너진 성곽 더미에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에서 두 제국의 실체를 느꼈습니다. 나에게는 두 제국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울림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심금을 두드리는 이 웅대무비의 교향곡을 나는 연주할 능력도 해석할 재주도 없습니다. 다만 보고 들었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느낀 ‘이스탄티노플’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소명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는 오직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입각할 것입니다. 때로는 즐거운 상상력도 동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과 상상력 부족으로 본의 아닌 왜곡이나 의미가 잘못 전달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고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것을 오로지 진실의 창을 통해 보려 했던 나의 신념이 부디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는지, 생생한 기억들이 희석되지 않을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오류를 발견하거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이 있다면 서슴없는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카리시우스(에디르네카프) 성문 진입로. 여기를 통과하면 당시 성사도 교회(지금의 파티 자미. 자미(Camii)는 모스크, 곧 이슬람 사원을 의미한다)로 이어지던 메인 로드가 펼쳐졌다. 내 옆에 있는 아가씨는 박사 과정 역사학도 니사.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내 어드벤처에 앞장서 동행해 주었다.

  우선은 이 블로그에 짬짬이 간단한 캡션과 함께 사진으로 ‘이스탄티노플’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훗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 위한 워밍업 삼아서 말입니다. 최대한 편안하고 부담 없이 써나가려고 합니다. 영화로 치면 예고편일 수도 있고 시놉시스일 수도 있는 그런 작업입니다.

▲ 매실? 노! 한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투르크 전사의 후예인지도 모를 중년의 사내가 뱃가죽을 늘어뜨린 채 무딘 칼로 호두 껍데기를 벗겨내고 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현주소라기엔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허물어졌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격전지 성곽을 탐방한 사진 몇 컷으로 여러분과의 만남을 매듭짓겠습니다.

▲ 이중 성벽이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난공불락 철옹성도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는가.

▲ 제법 근사한 사진이 나왔다. 옛 성곽에선 누구나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된다. 구도를 어설프게 잡아도 피사체 스스로가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작품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 허물어진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뾰족 탑이 보인다. 어느 사원인지는 이름을 잊었다. 이런 사원들이 수 백 개를 헤아리니까. 


※일러두기=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전체 성곽 중 골든혼(할리치, 금각만)이 끝나는 지점에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까지의 성곽 중 일부를 탐사한 기록입니다. (답사 지도의 하늘색 표시부분)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성곽 탐방로의 극히 일부분임을 밝힙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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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케밥 2010.08.25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생해서 좋군요. 사진 좀 많이 올려주시면 더욱 좋을 듯....여행정보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터키 소식 기대할게요...감사합니다!!

  2. 파묵 2010.08.25 16: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멋진 조어면서 그 의미도 적절한 합성어입니다.
    저도 한번 흉내내볼까요?
    터키(Turkey)는 턴키(Turn Key), 즉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나라입니다.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그랬듯이
    지금의 터키 공화국 또한 향후 세계 정세의 물길을 좌우할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3. 파샤파샤 2010.08.25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과 멋진 사진!
    이스탄티노플,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집니다.

  4. 배가본드 2010.08.26 0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생애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나도 이스탄불이 아닌
    이스탄티노플에 다녀오고 싶어진다.

  5. 국밥 2010.08.26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고계신 모자가 인상적이네요..매우 활동적인 분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트레킹신발에 모자를 쓰고 배낭을 매고 계신 모습이 한층 젊어보이십니다. 좋은 정보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감사~~

  6. 천년의 미소 2010.08.26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두번의 짧은 방문으로, 청년 술탄 메메드의 열정과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간절한 기도를 재연해내는 상상력으로 위대한 우리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구현해내기를 바랍니다.

  7. 이스마엘 2010.08.27 0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네이버 검색해도 정말 안 나오는지
    검색창에 입력해 보았습니다.
    나오던데요.
    하지만 그건 이 블로그에 쓴 글 단 한 편에만 등장하더군요.
    고유명사로 특허 출원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상표 등록인가.

  8. 두륜 2010.08.27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인 콘스탄티누스와 도시라는 뜻의 라틴어 "폴리스" 가 합쳐저 콘스탄티노폴리스 라는 도시가 생겼죠..... 여기서 유래한 도시명 "콘스탄티토플" .... 의원님께서 명명하신 "이스탄티노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으로 사라진 비잔티움의 옛 영화와 발자취가 느껴지는 듯 하네요....

  9. 페이스북 2010.08.29 1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공미(?)가 팍팍 풍기는 성벽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세월의 나이테까지 되살리기가 쉽지야 않겠지만
    복원 작업이 너무 무성의하게 이루어진 느낌입니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모조 전문가들을 동원했더라면
    좀 더 근사한 작품이 나왔을 텐데 말입니다.

  10. 유근준 2010.08.31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격조와 재미를 함께하는 김형오의 필체에 멋진 사진들이 곁들여져 흥미진진한 기행 앞으로 책으로 엮어지면 더욱 볼 만하리라 기대됩니다.

  11. 이우종 2010.09.09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우종
    좀 늦게나마 사이트에 접하게됐군요. 앞으로 전개될 이스탄틴노플의 이야기가
    벌써 궁금해집니다. 마음이 앞서 달리네요. 맛깔난 필치로 새로이 탄생할 역사의 이야기를 빨리 접허고 싶은 마음에 글을 짧게 줄여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12. 조르바 2010.09.09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정말 네이버 쳐 봐도 이 블로그에서밖엔 사용을 안 했네요.
    이어령 교수가 명명한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보다
    더 환상적인 조어 솜씨입니다요.

  13. 도성 시민 2010.10.09 1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이스탄티노플 도성 시민으로 등록했습니다.
    번성기 한때 인구 1백만을 껑충 뛰어넘는
    1000만 시민의 이스탄티노플 도성을 만들어 봅시다!

  14. 칼칼칼칼 2010.10.12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날 위에서 번뜩이는 술탄의 카리스마.
    칼에는 칼로 맞서는 황제의 신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했으나
    칼집은 피냄새를 맡고 싶어한다.

  15. 크리에이터 2010.10.31 0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로는 한 도시가 어느 집념어린 사람의 열정과 창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거나 재창조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느낍니다.
    김형오의 이스틴티노플, 정말 기대만발입니다.

  16. 앙코르 2010.11.21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매력적인 도시로 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