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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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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상층부를 재건축한 모습을 담은 옛 그림.(위 왼쪽) 돔 위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다. 물론 미너렛(첨탑)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슬람 사원이 된 이후로는 돔 위에 십자가가 없다.(위 오른쪽) 그러나 이 건물 내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하기아 소피아에는 위 왼쪽 그림에서처럼 십자가 모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아래 그림)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Mezquita.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창건한 사원. 후대의 통치자들이 확장을 거듭해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재정복 당한 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는 “어디에나 있는 건물을 짓자고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건물을 부수고 말았구나.”라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원의 중심부만 개조해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8일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던 쿠데타. 532년 1월 10일 정치적·종교적으로 대립하던 청색파(Factio Veneta)와 녹색파(Factio Prasina)간에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 응원 도중 싸움이 벌어져 주동자들이 사형을 언도받자 이들은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파가 연합해 ‘니카(승리)’를 외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에 편승해 황제의 반대파였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諫言)으로 피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반란군을 급습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저서로는 『전사(戰史)』『비사(祕史)』『건축기(建築記)』 등이 있다. 그는 『건축기』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또 이렇게 칭송했다. “이 대성당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원주 위로 치솟아오른 거대한 돔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습은 견고한 석조 건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려 우주를 덮고 있는 것 같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6개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극장), 영국의 스톤헨지(거석 기념물),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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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유수의 건축가이자 유력 언론의 칼럼니스트인 알리 에사드와 이스탄불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맺었다. 알리는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 서적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제목이『콘스탄티노플의 기념물』인 이 책은 독일 베를린에서 1855년에 간행된 서적을 100권 한정판으로 찍어낸  영인본이다. 일련 번호는 021/100. 세상에서 100권밖에 없는 책의 21번째 주인 자리를 내게 양도해 준 알리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은 특히 아야 소피아의 건축공학적 특징을 수준 높은 그림과 함께 mm 단위로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 조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판형이 신문(대판)보다도 커서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그림들은 2,3편에서 좀더 상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황제는 대성당에 가기 전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음 네 가지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군주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황제를 위해 목숨과 가정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의 허물을 사과하노라. 나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면 용서하기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성사와도 같은 황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대성당을 나온 황제는 황궁으로 가 거기에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도성 시민들이 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황제와 술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오스만의 역사가들은 “이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었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을 뿐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고 부인한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된 표현이다.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마지막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호전성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피정복자인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교도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말로써 보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은 피정복민들에게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신앙의 자유, 남녀 평등,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코란(2:256)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이슬람의 빠른 전파는 무력이나 강제적 개종보다는 오히려 관대와 포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고색창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1573년에 착공해 2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도리아, 이오니아, 고딕, 르네상스 등이 하모니를 이룬 고전 건축 양식의 집합체이다.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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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메로스 2010.11.19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말로 블로그판 <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
    그러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가 드물듯이
    과연 이 작업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아무튼 참 대단하십니다.

  2. 레드블랙 2010.11.20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가슴 안에서 거문고와 비파가 현을 강렬하게 긁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가 봅니다.

  3. 앙코르 2010.11.21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주마간산, 하지만 다음에 다시 탑승해 이스탄티노플 구석구석을 샅샅이 탐사해야지.

  4. 프로페셔널 2010.11.22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이는 깊게, 넓이는 넓게...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맛이 납니다.
    사진의 적절한 배치도 베리 굿!

  5. 동네주민 2010.11.22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저 웅장한 건축물을 매일 볼텐데...
    우리가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이런..벅찬 감동을 매일 느낄까요??

    매일 매일 느끼는 벅찬 감동이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것 같네요...

    우리 동네에는....??

  6. 포에버 2010.11.25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야, 아야, 아야! 그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화해와 공존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이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정말 숙연해집니다.

  7. Halil Arça 2010.12.08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ello,

    This is Mr. Arça, I received your post.
    Can you please send me your e-mail adress.
    halilarca@yahoo.com
    Thank you

  8. 2010.12.09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dddd 2011.02.28 0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성사도 성당이 무었때문에 부숴졌고
    그리스 본토인들은 얼마나 차별받았는데.....

  10. BlogIcon eatwithmeist 2012.12.18 04: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연구와 정성을 다해 작성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얻고 갑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살고, 터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을 알리고자 블로그를 열었는데..제 술탄아흐멧 관련 포스팅에 님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60마리의 황소가 끄는 수레에 초대형 대포를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오스만 군사들. 백마를 탄 술탄의 양 옆에서 장총을 든 예니체리가 호위를 하고 있다.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는 들꽃들이 곧 닥쳐올 비잔틴 시민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2009년 1월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스만 투르크 군이 배를 끌고 산(언덕)을 넘어갔다는 생뚱맞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통역 실수려니 생각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그거야 뭔가 어수선하고 중구난방인 상황에선 엉뚱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해 세계 전쟁사를 바꾼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니, 경이롭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1453년에  엄연히 있었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양군의 배치도. 흰 두건을 쓰고 백마를 탄 술탄(왼쪽 위)은 우르반의 대포를 앞세우고 메소테이키온 성벽 맞은편 400미터 지점인 리쿠스 계곡에 황금빛 막사를 설치했으며, 황제는 그에 정면으로 맞서 성벽 바로 안쪽에 비잔틴 정규군과 함께 포진했다. 육지와 바다 모두 술탄의 병사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잘려나간 지역까지 감안하면 오스만 군은 우선 수적(數的)으로 비잔틴 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골든혼을 가로질러 선박의 침입을 봉쇄했던 방어 철책(위 그림 오른쪽 상단 및 아래 사진 참고)을 직접 보고 난 뒤로는 술탄이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넘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엄청난 굵기의 쇠사슬을 보자 비로소 1453년 전쟁 당시의 분위기가 눈에 잡힐 듯 실감이 났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나는 21세의 청년 술탄(메메드 2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매료되었습니다. 나중엔 술탄과 그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에 매몰되다시피 해서 틈만 나면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적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여야 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청년 술탄과 그의 야심찬 정복 전쟁, 콘스탄티노플의 결사항전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마음을 차분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처절했던 당시 상황에 지금 국회를 비교할 순 없겠지요.)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453년 당시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방어용 쇠사슬(컬러 사진).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400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연결 고리 간격이 18인치에 이르는 이 거대한 쇠사슬이 도시 주변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당시에 찍은 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증명해 준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의 동쪽 끝 지점. 왼쪽 끝에 톱카프 궁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신시가지(페라 지역)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골든혼으로 접어든다. 골든혼 입구 성채 아래 에우게니오스 성 탑과 페라 방파제 위의 탑 사이에 연결돼 있던 쇠사슬은 거기 어디쯤 위치해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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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과 성벽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놓아두고 이 대형 선박들은 왜 산(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보다가 나는 문득 내 책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알카에다 지도자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혹시 술탄의 이 기발한 역발상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맞닥뜨렸던 난관을 돌파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을 통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운다.”란 말도 있듯이….

*“사우디의 숙원 사업이었던 메카에서 타이프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 하지만 험준한 바위산 위로 무거운 건설 장비를 옮길 도리가 없어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 모하메드 빈 라덴은 불도저·포크레인 등의 중장비를 분해해 낙타 등에 싣고 현장까지 옮긴 뒤 재조립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사우디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 또한 발상의 전환이 낳은 창조적 아이디어지요.”(『이 아름다운 나라』 162쪽)


  일부 문헌에는 메메드 2세의 참모로 일한 이탈리아 사람(성명 미상)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 자체가 애매하고 불분명한데다가 만약 그랬다 해도 그것은 *평지 이동이었습니다. 술탄의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요. 술탄은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산등성이와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 넘어갔습니다. 20층 빌딩 높이와 맞먹는 험한 비탈길을 바다(0미터)에서부터 끌고 간다니, 감히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21세의 청년 술탄은 해냈습니다. 비상한 두뇌와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4월 22일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가 배를 끌고 간 본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 대대적인 거사를 위해 술탄은 **4월 21일부터 보스포루스 해변 쪽과 골든혼 안에 있는 카슴파샤 지역에 걸쳐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육로 뱃길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포병 부대에게 간간이 페라 지역을 향해 대포를 쏘라고 지시합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눈길과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서 상상력을 차단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란 작전이자 위장 전술입니다.

 

*베니스 인들이 롬바르디아 전투에서 소함대 전체를 바퀴 달린 받침대에 싣고 포 강(아디제 강)에서 가르다 호수까지 이동한 일.
**4월 21일은 육지 성벽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이 계획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기상천외하고 전무후무한 작전! 백마를 탄 술탄의 독려를 받으며 드디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해안가로 끌어올려진 배들은 그 순간부터 마치 거대한 수레로 변신한 듯 힘센 황소들에 의해 경사진 언덕을 끌려 올라갔다. 가파르고 험한 길에선 도열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이 황소들을 도왔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산으로 가는 건지, 산이 바다로 변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장관(壯觀)’이란 말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술탄은 출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언덕을 오르는 배들에게 돛을 드높이 올리고 노잡이들을 승선시켜 노를 앞뒤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뱃머리에서는 악사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연주했습니다. 놀이동산 바이킹도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순간 무색해졌을 것입니다. 독심술이 뛰어났던 걸까요. 술탄은 그렇게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을 카니발처럼 치르게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배들이 골든혼을 향해 언덕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더 세차고 무서운 기세로 배들을 바다에 밀어 넣었습니다. 무려 70척이나 되는 크고 작은 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맞추어 골든혼으로 철석철석 내려왔습니다. 그걸 본 비잔틴 인들은 아연실색하면서 공포와 전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리전 효과까지 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군의 사기는 하늘로 솟구친 반면 비잔틴 진영의 분위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크고 수많은 배들을 술탄은 *무슨 재주로 이동시켰을까요.

*오스만군은 먼저 페라 지역 뒤 야산의 가시덤불과 야생 포도밭을 갈아엎고 길을 내었다. 그 다음 길 위에 목재를 깔고 마찰을 줄이기 위해 표면에 돼지기름을 발랐다. 바퀴 달린 받침대가 바다 위의 배를 동여매면 도르래가 배를 해안가로 끌어 올렸다. 이 배들은 한 척 한 척씩 끌고 갈 황소들과 연결시켰다. 황소 옆에선 수십 명의 병사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런치만은 ‘바퀴 달린 받침대’란 표현을 썼지만 다른 책들엔 그냥 ‘받침대’로 나와 있다. 앞 그림은 바퀴가 없는 반면 아래 그림은 바퀴를 단 채 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의 『해외 여행』에 수록된 1455년 작품. 한 폭의 그림 안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전쟁 당시의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복합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담고 있다. ‘1페이지짜리 그림책’이라고나 할까.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표지도 이 그림 일부로 장식되어 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배를 이동시킨 육로가 애매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스탄불 현지에서 만난 학자와 전문가들조차 배의 정확한 이동 경로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나는 그러나 그 경로를 내 나름대로 유추 혹은 규명해 보려고 단지 지도 몇 장만 들고서 며칠 동안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자동차와 도보로 4~5차례나 그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메메드 2세('파티'; 정복자)와 텔레파시라도 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페라팰리스 호텔 앞에서 마치 특파원이라도 된 듯 내 녹음기 안에 탐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런치만의 책(168쪽)에는 술탄이 여기서 200미터 위쪽인 영국 영사관 앞에서 왼쪽으로 꺾인 경로를 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술탄이 이 페라 호텔 옆길로 배를 끌고 왔을 것 같았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 페이지에서)
여기서 잠깐, 택시(Taxi)는 터키에서도 탁시(Taksi)로 표기한다. 탁시 뒤에 m자 하나를 붙이면 탁심(Taksim), 내가 서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스탄불의 명동’ 격인 번화가 이름이 된다. “탁심에 가려고 탁시를 잡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다.


▲ 혹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황소 발자국이나 수레바퀴 자국을 찾는 심정으로 나는 며칠을 두고 몇 번이나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3층 건물을 가로질러 쳐놓은 빨랫줄 위에서 옷가지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빨래를 널고 걷는 일에도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 이 도시에서는 축구장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다. 문득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과 터키의 3·4위전이 떠올랐다. 터키 사람들은 굉장히 축구를 좋아한다. 혹시 이 축구장을 닦고 스탠드를 올리는 과정에서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그 옛날의 돼지기름 먹인 통나무가 나온 것은 아닐는지…. 나는 바로 이 옆길(테페바쉬)로 배가 지나갔다고 믿는다.


  ‘바로 이 길이다!’ 싶은 곳에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지만 답은 매번 ‘역시나’였습니다. 그러던 중 술탄과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요. 내가 애초 생각했던 이 길(테페바쉬)로 ‘배가 내려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노라고 몇몇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더군요. 더위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사학자(런치만), 작가(나나미), 현지 교수(페리둔) 모두 주장이 다른데 나도 내 견해를 주장해 보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4의 길’로 갔습니다. 현지인들이 믿고 있는 그 길로! (약도 별첨)

▲ 지도를 파는 가게에도 몇 군데 들렀다. 페라 지역 일대가 상세하게 담긴 축척이 큰 지도를 몇 장 샀지만 그것도 선박의 이동 경로 탐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한 것 같은 이런 걸출한 인물의 기념비적인 행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선박의 이동 경로를 찾아 헤매는 길에 만난 이정표들. 저 화살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과 마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조금은 허황된 생각마저도 드는 거였다. 내가 집착이 깊었나 보다.


  이스탄불대학교 역사학과장인 페리둔(Feridun M Emecen) 교수는 3가지 경로를 그 가능성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런치만의 경로(톱하네→카슴파샤 설), 두 번째(돌마바흐체→카슴파샤 설)와 세 번째는 그보다 이동 반경을 조금씩 더 넓혀 놓은 경로입니다. 페리둔 교수는 그 중 3안이 자기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것이란 견해입니다.


▲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는 1453년 전쟁을 전공하고 책도 낸 이 분야의 중견 학자. 연구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지만 그래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배의 이동 경로도 그 중 하나. 페리둔 교수는 스티븐 런치만의 추정(1안)보다 선박의 이동 거리를 확대한 2안과 3안을 제시했다. 1안<2안<3안 중 그의 견해는 3안이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이동이 쉽고 사전에 적에게 노출도 덜 되는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 의견은 런치만 쪽에 더 가깝다. 거침없는 술탄의 성격과 이런저런 기록, 그리고 내가 직접 탐사해 본 결과를 종합해 내린 입장이다. 페리둔 교수와는 이메일을 통해 아직도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답답함을 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그 사이에 이미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도시 계획으로 길들도 변경된 그 지역에서 550여 년 전의 흔적을 찾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막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축구장을 건설중인 테페바쉬란 마을과 *페라팰리스 호텔 주변 등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이동 경로는 맨 끝에 부록으로 처리했습니다.)

  *세계적인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 호텔 411호실에 묵으며 명작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배를 골든혼 바다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술탄은 다음 작전으로 *부교(浮橋)를 설치합니다. 부교 옆에는 튼튼하고 널찍한 받침대를 두어 거기서 블라케르나에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식량과 무기 등의 물자와 병력도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습니다. 기동력이 훨씬 빨라졌습니다. 

  *술탄은 골든혼에 있는 배들의 엄호 아래 도시 성벽 바로 위쪽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 적국인 그리스 인들이 쓰던 1000여 개의 와인통을 세로로 나란히 쌍으로 묶은 다음 그 위에 두꺼운 널빤지를 고정시켜 사람과 물자 그리고 수레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섯 사람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다닐 만한 넉넉한 너비였다. (로저 크롤리,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대공격』 166쪽 참고) 일부 주장에 따르면 부교 위에 단단한 받침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성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고 한다.


 

◀ 육지 성벽 조금 못 미친 지점, 골든혼 연안 성벽에 걸려 있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의 현판. 술탄 메메드 2세가 1453년 4월 23일 월요일, 카슴파샤 지역에서 이 부근까지 골든혼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놓아 성을 공격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부교가 여기보다 육지 성벽 쪽으로 좀 더 올라간 지점에 가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5편 지도의 부교 위치 참고)




  부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엇갈립니다.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선 육지 성벽이 끝나고 골든혼 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아래 지점에 현판을 세워 두었지만 그건 술탄의 치적을 알리기 위한 것일 뿐, 부교의 위치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이스탄불정복자협회 사무실에서 회장단과 함께. 이 단체는 말하자면 ‘정복자 술탄의 팬클럽’이다. 전쟁과 관련해 성벽을 비롯한 기념될 만한 곳에 10여 개의 현판과 원기둥을 설치해 놓은 것도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들도 나의 물음표를 속 시원히 지워주지 못했다. 헤어질 때 나는 메메드 2세의 초상이 새겨진 금빛 배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마치 정복자협회의 홍보대사라도 된 듯이 이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날까지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아무튼 배가 언덕을 넘고 골든혼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이면서 다이내믹한 육상 전투와 스릴 넘치는 해상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 갈라타 타워에서 바라본 골든혼과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두 개의 터키 국기가 나부끼고 있는 숲 사이로 우뚝 솟은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마르마라 해가 마치 하늘인 양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중앙 탑 오른쪽 사원은 쉴레마니예 모스크. 지금은 평화롭게 유람선이 떠다니지만 1453년엔 이 좁은 만(灣)에서 격렬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었다.


▲ 베니스의 조선소와 건조 중인 선박 그림. 당시 제노바와 쌍벽을 이루며 콘스탄티노플을 동방 무역의 주요 기지로 삼고 있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한 호위 함대를 만드느라 조선 산업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항해술과 해상 전투 경험 역시 풍부했지만, 비좁은 골든혼 안에서 치른 *오스만 군과의 해전은 사전에 기밀이 새어나감으로써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그 동안 해상전에서만큼은 우위를 점했던 황제 군은 이 뼈아픈 패배로 골든혼에서의 해상 주도권마저 상실하고 만다.

*술탄의 배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해 옴으로써 골든혼 봉쇄 사슬이 무용지물이 되자 황제는 즉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작전을 짠다. 하지만 이 계획은 동참키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미루어지는 바람에 기밀이 새어나가 오히려 오스만 군의 역공을 당하고 만다. 결과는 참패.


  「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지음)이란 동화처럼 과거를, 역사를 사진 찍어 주는 카메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든혼 주변과 페라 지역을 탐사하면서 그런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불분명한 것들이 많고 책마다, 또 학자마다 견해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힘은 상상력에 있는 것. 내가 수집한 팩트와 정보에 상상력을 가미해 내 나름대로 역사를 재구성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6세기 콘스탄티노플 지도.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한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급속히 번성해진 모습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지도 맨 아래쪽에 오스만 가지부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왕조 12대 술탄의 얼굴을 동그라미 안에 차례로 그려 넣은 것. 오른쪽 첫 번째가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초상이다.(파란색 사각형)


  한가위 전에 한 편을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6편을 힘겹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7편은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아래 그림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탄티노플’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 TIP=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탐구 학습 코너 ##

  국내에서 그 동안 배의 육지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존 자료는 런치만과 나나미의 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나미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런치만의 설명 역시 애매했습니다.

  현지에서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를 만나 이 부분만 놓고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웬걸요, 혼란만 보탰을 뿐입니다. 교수는 이때껏 통설처럼 여겨져 온 톱하네 설(1)을 부정하고 돌마바흐체 설(2)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훨씬 더 먼 길로 돌아가는 제3 가설까지 거론했습니다.(페리둔 교수는 톱하네가 언덕이 너무 가팔라 현실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3설의 구체적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나는 ‘이스탄티노플’을 떠나던 날도 풀리지 않는 화두를 짊어진 수도승처럼 다시 시간을 짜내어 이 지역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골목길, 좁은 길, 일방통행 길. 참 복잡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시간마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정복자 메메드가 배를 끌고 간 길이 이곳인가요?”

  드디어 한 동네(테페바쉬)에서 가뭄에 단비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그렇게 들었어요.”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그 길을 다시 갔습니다. 런치만의 영국 대사관 설을 뒤집고 페라 관광호텔 설을 새로 제기하기도 하면서 그 거리를 헤맸습니다. 결국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귀국 비행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이스탄불과 계속 연락을 취해가며 뭔가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직전 또 하나의 번역본이 입수되었습니다. 바로 페리둔 교수의 제자인 바자르(Mahmut Ak-Fahameddin Baʂar) 교수가 근간한 터키어 원본(『Istanbul’un Fetih Gnlĝ』-이스탄불 함락 일지)을 우리말로 옮긴 자료입니다.

  야호!(호야?) 바로 내가 주장하였던 배들의 이동 경로가 그 책에 그대로 제시돼 있었습니다. 특종(?)을 놓친 아쉬움과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진작 손에 넣었더라면 그런 생고생은 하지 않았으련만….

  이왕 수고한 것. 그 책은 지도 없이 큰 방향만 나와 있으므로 나는 좀 더 친절하게 내가 생각하는 배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지도로 표시해 서비스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톱하네(대포알 공장)부터 쿰바라치 언덕길, 아스말르 메스지드, 테페바쉬, 카슴파샤 등과 골든혼 연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골든혼 봉쇄 사슬이라는 방어벽을 만난 술탄이 함대를 이끌고 언덕을 넘어 바다로 간 경로이다. 톱하네에서 카슴파샤로 이어지는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제기하고 바자르 교수가 뒷받침한 노선이다.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길인데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켰다. 2설(초록색)과 3설은 그보다 좀 더 위쪽(3설은 지도 밖)으로 선이 그어진다.

P.S.
  6편을 올리고 나서 아이디 ‘술탄’님(한양대 이희수 교수)이 네이버 블로그에 덧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편마다 이어지는 술탄님의 뜨거운 관심과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메일로 보내주신 제3안 스캔 사진도 잘 받았습니다. 터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라면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겠군요. 페리둔 교수의 3안은 베식타쉬(돌마바흐체보다 더 위쪽, 초기 해군 집결지)→옥메이다니(에윱 모스크 맞은편 지역, 골든혼 거의 끝 쪽)였습니다. 하지만 술탄님 말씀대로 ‘역사적 사실이란 정확한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내 견해를 포함한 이 모든 주장에 의미두고 싶습니다.
  이스탄불대학 페리둔 교수와 동문수학한 사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페리둔 교수에게도 술탄님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골든혼 내해에 배를 내린 시점’은 내가 잠깐 착오한 것 같습니다. 런치만 책(169쪽)에 ‘4월 23일 일요일’로 되어 있지만 요일 계산을 해보니 ‘4월 22일 일요일’이라야 맞습니다. 다른 문헌을 보아도 4월 22일이 정설인 것 같아 내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이동 함선의 수는 40척부터 80척까지 견해가 다양해 그 중 런치만의 추정(70척 가량)을 따랐음을 밝혀 드립니다.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는 내가 읽어 본 책들이 대부분 이 설에 입각해 서술돼 있었습니다. 술탄님 지적대로 ‘밤을 이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술탄(메메드 2세)의 성격상 ‘적들에게 시각적인 공포와 전율을 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말입니다.

  아래 지도는 술탄님이 보내 준 터키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입니다. 교과서에 표시된 경로(분홍 선) 외에 내 블로그에 서술된 1안(빨간 선)·2안(초록 선)·3안(파란 선)도 참고삼아 표시해 놓았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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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의 상상력과 추진력, 무엇보다 자신이 반드시 해낼 것이라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걸까요? 술탄 위인전이 있다면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21살이라..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어 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관심갖고 지켜보겠습니다!!

    • 호야 2010.09.28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렇습니다 술탄은 상상력 추진력 게다가 '근거있는 자신감'(이말 참 마음에 듭니다)의 사나이지요. 사실 이스탄불 떠나기 전엔 21세 청년 술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주로 서방쪽 견해에 접하고 갔는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더군요 현지에도 자료 귀한건 마찬가지지만 현장에 서면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더군요.
      여러분들이 댓글 달아주시니 이 작업이 힘들어도 계속할 용기가 납니다 계속 관심 바랍니다 김형오

  2. 헛제삿밥 2010.09.21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이 포스팅 모아서 터키 여행가면 든든할 것 같네요...문화유산답사기+ 지도 가 한 방에 해결될 듯...잘 봤습니다. 감사~~

  3. 트라이앵글 문 2010.09.21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이번 한가위에는 삼각형 달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트라이앵글 문.
    이스탄티노플을 닮은 그런 달 말입니다.

  4. 우주아이 2010.09.24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추석 전에 또 한 편 올렸을 줄이야
    이스란티노플엔 명적도 없나요
    잘 보고 갑니다

  5. 중독 2010.09.27 0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능력자 술탄이 너무 멋있어서 술탄의 팬클럽에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며...
    그리고 이렇게 빨리 이스탄티노플의 기행문이 올려질 수 있다니...
    의장님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 분이신 것 같습니다.
    (*제일 많이 바쁜 사람이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다. -비네-)

  6. BlogIcon 술에물탄 2010.09.30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봉쇄사슬에 막혀 배를 육지로 끌다니...
    배를 끌던 소와 인부(?)들이 불쌍하네요..
    현대의 공중전을 봤다면 엄청 부러워했겠네요.ㅋㅋ

    • 꽃거지 2010.09.30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술에물탄님 센스가 넘쳐나시네요.
      기대안한곳에서 빵 터지고 갑니다.

  7. 두륜 2010.09.30 1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 전쟁의 결정적인 향방을 가른 술탄처럼...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2차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든 것처럼...
    모든 일에는 어떻게 진행 될것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고비(분수령)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장님께서 "이스탄티노플"을 연재하시고 난 다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글도 재미 있지만 글 쓴이에 대한 관심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장님께서도 이 글의 연재를 분수령으로 삼아 지금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승화시켜 보다 멋진 정치 지도자가 되길 기원 합니다...
    앞으로 큰 정치인의 행보를 "이스탄티노플"의 이야기와 함께 기대하겠습니다...

  8. 온새미로 2010.09.30 2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자께서 하신 말씀으로 논어(옹야편)에 나옵니다.
    아는 노릇은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공자의 예술론은 '시경(詩經) 삼백 편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에 간사한 생각이 없다(思無邪)는 구절 그것이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야 참된 예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지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학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는 노릇을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시리즈들을 읽으며 공자님 말씀이 떠오른것은,
    형오님도 단순히 콘스탄티노플 전쟁에 대한 사료만 챙기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9. 고슴도치 2010.09.30 2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재를 생명만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전통보존 의식이 투철해서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이 정확하고 풍부할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10. 兼太(けんた) 2010.10.01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에 관한 자료를 찾는중이었다.
    여기는 구글에서 검색하다 오게 되었다.
    우선 사진과 그림 설명만 보며 해석하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니
    운이 좋게도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라 읽을 수 있었다.
    韓国語を日本語 に訳すのはとても難しい..
    何よりも前々から学びたかったから.
    一生懸命勉強して後で 형오と話をもっと上手にできたら嬉しいな.
    おめにかかって嬉しいです.

    • 호야 2010.10.04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日本人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러나 저는 貴下의 韓國語만큼 日本語 實力이 不足해 不得已 한글로 답글을 남깁니다. "韓國語 熱心히 배워 나와 對話하겠다"는 말씀에 깊은 感銘을 받았습니다. 1453年 Constantinople 戰爭에 대해 意見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내 Homepage에 글 남겨 주셔셔 感謝드립니다. 金炯旿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4
                              -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하는 종군 기자 리포트



   ‘술탄’이란 아이디를 쓰는 분이 나의 네이버 블로그에 두 개의 덧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 2편을 읽고 나서입니다. 몇 줄 발췌해 옮겨 보면….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누구도 이처럼 이스탄불을 철저히 뒤지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자 비잔틴 제국의 오욕인 1453년 5월 29일의 역사를 깊은 영혼과 가슴으로 파고들었던 이는 흔치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런 이름은 이 도시에 빠져들어 작은 돌길을 거닐며 지난 세월의 바람 소리와 155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성벽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바로 공존과 화해의 이름이다.

  이 도시의 오랜 돌과 바람과 역사는 그들의 아픔과 사연을 온몸으로 읽어내려 준비된 한 인간에게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너무 기대된다. 이스탄티노플!!! 앞으로 나도 이 도시를 그 분의 저작권 허락을 받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1453년의 생생한 전투 장면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것도 너무 잘난체하는 전문가의 어려운 설명이 아니라, 제법 유명한 한 공직자의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으로 전해주는 묘미가 더하다.”

 

  아이디(술탄)를 클릭했더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 내가 터키로 떠나기 전 자문도 해주었던 이 교수로부터 그런 과분한 칭찬을 듣고 보니 힘이 불끈 나면서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나로선 벅차기만 한 이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기가 이제는 힘들어졌구나 싶어서입니다.

  정말입니다. 이희수 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이 아니었더라면 퇴근을 새벽 한 시 이후로까지 미루어가며 사진을 고르고 캡션을 다는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이름 지은 도시 ‘이스탄티노플’은 무제한 사용을 허가합니다. 한 푼의 저작권료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많이만 사용해 주십시오. 간혹 저작권자를 언급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누구라도 ‘이스탄티노플’을 이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시장(市長)도 없는 그 도시의 명예시민이 되는 겁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을 가리키며 강력한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창과 칼과 활과 도끼로 무장한 채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여덟 명의 호위병들은 술탄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파노라마 박물관 전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이 각자 자기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처음 소개하는 ‘사진 같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뒤에 또 언급하겠지만 ‘이스탄티노플’에 새로 생긴 세계 최대의 ‘파노라마 극장’에 있는 어마어마한 그림의 중요 장면들을 한 컷씩 설명하면서 세계사를 바꾼 1453년 5월 29일, 그 치열했던 전쟁의 현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내가 전사(戰士)가 되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고 죽여야만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의 그 무자비한 야성 본능이 실감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땀으로 목욕을 한 채 황성 옛터와 허물어진 성곽 사이를 걷고 또 걷던 나와 우리 일행들 모습이 그립게 떠오릅니다. 어쩌면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한 작전 지도를 만들려는 오스만의 병사들처럼 우리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과 그 주변을 샅샅이 탐사했습니다.


  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들이 여러분을 550여 년 전 격전의 현장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 육지 성곽 편의 마감 인사를 갈음합니다. 다음 편은 골든 혼 성곽으로 이어집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크게 세 군데입니다. 블라케르나에 황궁의 끝 부분에서 카리시우스 문까지, 거기서 성 로마노스 군문까지, 또 거기서 레기움 문 근처까지가 집중 포화를 받았습니다. 리쿠스 강을 중심으로 1킬로미터에 이르는 메소테이키온 성벽 지역은 그 중에서도 핵심부였습니다. 공격과 수비 모두 이곳에 집중되었습니다. 방어군 입장에서 가장 취약점이 많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술탄(메메드 2세)은 이곳 성벽 400미터 앞에 본진을 쳤고, 전투시에는 성벽 코앞까지 가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비잔틴군으로 하여금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인해전술로 밀어 부쳤습니다.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역시 이곳을 자기 무덤이라 생각하고 병사들과 한 몸이 되어 싸웠습니다. 파노라마 극장의 전투 장면들도 바로 여기를 중심 배경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화염의 위력인가. 보병과 기마병을 총동원해 온갖 무기를 앞세우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하는 오스만 투르크군 병사들에게 비잔틴군이 불 폭탄 세례를 퍼붓고 있다. 오스만 병사들과 함께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채 화형식(火刑式)을 당하고 있다.
창검을 들고 방패·갑옷·투구 등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유럽 및 아시아 지역에서 총동원되다시피 한) 오스만 정규군이다. 흰 두건을 쓴 정예 예니체리 부대들도 칼날을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내닫고 있다. 오른쪽으로 복장과 무기가 각양각색인 비정규군 바시바조우크(Bashi-bazouks)의 모습도 보인다. 그 뒤로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막사 수천 개가 비온 뒤 죽순 돋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막사와 투석기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것이 금각만(골든혼)이다.

* 그리스 화염 : 'Greek Fire'로 불리던 화염 방사기 방식의 불 폭탄.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탁월한 진가를 발휘했다. 이 전쟁 800년 전부터 사용되어 육상·해상·지하 땅굴전 등에서 위력을 나타냈다. 발화재는 지하 석유류에서 채취해 썼지만 정확한 제원(諸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피아(彼我)조차 구별할 수 없는 아수라장 전쟁터. 공격에 나선 오스만 보병들의 등 뒤에서 대포는 무자비하게 작렬했다. 목숨은 도구에 불과할 뿐, 오로지 전진 또 전진이었다.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의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무너지는 성벽더미와 함께 두 제국의 병사들이 서로 뒤섞여 성 아래로 아득하게 추락하고 있다. 나뭇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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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죽느냐 죽이느냐, 무너뜨리느냐 지켜내느냐. 해자(垓子/垓字)는 이미 메워지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오스만 투르크군과 비잔틴 제국의 병사들이 외성벽을 사이에 둔 채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림 왼쪽 끝 가운데 성벽에는 대포알이 박혀 있다. (아직도 성벽 어딘가에 대포알이 박혀 있다는 파노라마 박물관장의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대포알을 찾아 얼마나 성곽을 헤매고 다녔던가?!) 주탑마저도 휑하게 구멍이 나 버렸다.
*공성탑(攻城塔)으로는 불길이 치솟고 하늘은 자욱한 포연(砲煙)으로 뒤덮였다. 정규군 뒤에서 출격 준비를 마친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제국의 수도로 군림했던 이 도시의 운명도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인가.

 

* 공성탑 : 오스만 투르크 쪽에서 비잔틴 제국의 성 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성벽 높이와 대등하게 만든 사다리 구조를 지닌 탑. 목재를 썼으므로 만들기 쉽고 옮기기 편했던 반면 튼튼하지 못하고 불에 잘 타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차례에 걸친 비자틴군의 기습으로 여러 대가 파괴되어 실제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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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5월 24일)이 뜬 뒤로 닷새가 지나 달이 **터키 국기 모양으로 기울어가던 5월 29일 새벽, 화염과 포연이 콘스탄티노플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캄캄했던 밤하늘이 대포와 그리스 화염 불기둥으로 인해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림 왼쪽 주탑 위는 거인 하산이 진두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가 콘스탄티노플 성에 올라가 최초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을 꽂는 장면. 붉은색 오스만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쌍두 독수리가 그려진 비잔틴 국기는 성벽 아래로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주요 상업 기지로 삼고 있던 동맹국 베니스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도 이 순간 같은 운명을 맞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오스만 영웅은 비잔틴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온몸에 화살과 돌 세례를 받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고 만다. 승리에는 영웅적 희생이 따르는 법. 성벽 함락의 결정적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 보름달 : "보름달이 떠 있는 한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전이 당시 널리 전파돼 있었다. 이날(5월 24일)은 공교롭게도 월식까지 있었다.
** 터키 국기 : 터키 국기는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고 이는 오스만 투르크 군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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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성벽 사이로 정규군을 앞세운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깃발을 나부끼며 물밀듯이 성 안으로 쳐들어가고 있다.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대포 소리와 뒤섞여 하늘을 찢어발길 것만 같다. 술탄(메메드 2세)은 첫 성곽 돌파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리고, 모든 병사들에게 3일간의 도성 약탈권을 보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른쪽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비잔틴의 상징인 독수리상도 곧 날개가 꺾인 채 추락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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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노라마 박물관에 그려진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 오스만 병사들이 발포 준비를 하고 있다. 거포는 포신 길이가 8미터 이상이었고 돌로 된 포탄은 600킬로그램을 넘는 무게였다.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한 술탄의 전략은 탁월했다. 헝가리는 당시 비잔틴 편이었고 우르반은 비잔틴 황제 밑에서 일했었다. 그러나 네 배의 급료와 충분한 대포 제작비를 지원하겠다는 술탄 쪽으로 기꺼이 몸을 팔았다. 우르반은 결국 전쟁터에서 죽고, 유럽의 강국 헝가리는 그 후 오스만에게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역사는 아이러니인가, 냉혹한 것인가.

* 우르반의 대포 : 우르반의 거포(巨砲)는 한 번에 세 발에서 일곱 발까지밖에는 쏘지 못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화약이 포신을 달구어 열도 식히고 대포를 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완책으로 거포와 함께 작은 대포들이 동원되어 성벽 파괴의 결정타 역할을 했다.


 

파노라마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맨 앞 페이지 왼쪽 아래에 박물관장과 함께 찍은 내 사진이 방문 소식과 함께 올라 있었다. 그날 나는 방명록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와 술탄 메메드 2세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 오늘도 위대한 터키 국민들에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파노라마 박물관은 지난해 1월 31일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60도 반원형의 파노라마 극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벽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그림 크기로도 세계 최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로는 그 전경(全景)을 한 컷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극장 측의 양해 아래 부분부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캡션 역시 마찬가지. 내가 읽고 겪고 보고 들은 지식은 물론 약간의 상상력까지 동원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임을 밝혀 둔다.

▲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가장 큰 거포는 모두 소실되고 그보다 작은 대포들만 남았다. 그래도 이 대포는 무게가 자그마치 15톤(포신 길이 424센티미터, 구멍 지름 63센티미터)에 이른다. 내 몸 하나쯤은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이다. 대포알은 285킬로그램. 그러니 이보다 두 배 이상 더 크고 무거웠을 우르반의 거포는 어떠했을까. 이런 대·중·소 대포들로 49일 동안 쉬지 않고 포를 쏘아댔으니 제아무리 철옹성인들 온전할 수 있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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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박물관 대형 홀에서 감상한 오스만 군악대(메흐테르, Mehter)의 연주. 지축을 뒤흔드는 우렁찬 북과 피리 소리로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비잔틴 병사들을 주눅 들게 한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깃대를 들고 있는 두건 쓴 단원들은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오스만 군악대는 세계 전사(戰史) 상 최초로 등장한 군악대로서 현대 군악대의 효시이다. 서구 열강 군악대도 모두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군사 박물관에서 그 웅장한 연주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550여 년 전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비잔틴 제국 크고 작은 교회들의 종소리를 들었다. 시공을 초월해 한 쪽 귀로는 오스만 군악대 연주를, 다른 한 쪽 귀로는 비잔틴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대포를 쏘며 진격해 오면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종이란 종은 일제히 간절한 염원이 담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시 전황(戰況)을 기록한 그리스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 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오스만군의 대포 소리와 그보다 더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묻혀 버렸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물론 성 안의 시민들 또한 얼마나 위압감과 전율을 느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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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복원도를 참조해 다시 그린 그림. 황금문에서 제2군문(벨그라드카프) 사이의 3중 성벽을 입체적으로 재현했다. 1000년 넘게 아무도 뚫지 못했던 과학과 공학, 그리고 인간의 땀의 결정체이다. (아래의 성곽 사진들과 비교하면서 보기 바란다.)
그림에 표기된 수치에서 보듯이 스티븐 런치만과 시오노 나나미는 성곽 규모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외성벽의 높이(런치만 7.5m, 나나미 10m), 내성벽의 높이(런치만 12m, 나나미 17m), 내성벽 주탑의 높이(런치만 18m, 나나미 20m 이상)에서도 두 사람은 조금 엇갈린다. 런치만은 학자고 나나미는 작가다. 내 눈대중으로는 내성벽 주탑은 20m 이상 되어 보였다. 탑과 성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모양과 크기가 달랐다. 외성벽의 주탑과 내성벽의 주탑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 3중 성벽의 위용이 한 눈에 느껴진다. 지역에 따라 약 45~90m 간격으로 주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제는 외성을 전(前)방위로 해서 통로②에 전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정규군만도 8만 명에 육박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정규군·비정규군·외인부대·시민군까지 모두 합해도 채 7000명이 안 되는 병력으로 대항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성 주탑을 배수진으로 성곽의 모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열쇠를 황제에게 맡겼다. 들어온 이상은 못 나간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결사항전의 각오였다. 황제와 고위 관료, 주요 지휘관들은 말을 타고 통로를 누비고 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형에 따라 폭의 차이는 있지만 통로②는 런치만이 말한 것처럼 내 눈에도 12~18m는 족히 되어 보였다.

* 정규군만도 8만 명 : 8만 명 설은 런치만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쟁에 총동원된 투르크군의 병력을 20만 혹은 30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투입된 병력 총규모를 16만 정도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내성벽.
이 성이 어떻게 1500년 그 오랜 세월을 버텨 왔는가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성벽을 눈여겨 보라. 맨 밑에는 잔돌, 그 위엔 흙, 그 위엔 벽돌, 벽돌과 벽돌 사이엔 또 흙, 그런 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에 강력한 접착제가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도 1500년은 너끈히 버텨낼 것 같지 않은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5~90m의 간격을 두고 주탑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는 제2군문 입구이다. 이 늠름한 3중 성벽 구조의 위용을 보라. 감히 범접할 수 있겠는가. 오른쪽 내성의 주탑들은 파괴된 모습이지만 군문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끝자락에서 본 성벽의 주탑 모습. 여기도 오스만군의 집중 공격이 퍼부어진 곳, 바꾸어 말하면 비잔틴군 방어의 최일선 중 하나였다. 부서진 주탑 너머로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과 멀리 갈라타 지역이 보인다.


▲ 방어용 주탑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아군끼리의 소통과 왕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1453년 당시에는 이 사진에서 보이는 보호 철책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 해자가 있던 자리. 지금은 메워져 밭으로 변해 있다. 해자는 육지 성벽 전체에 걸쳐 팠다. 수심이 깊은 곳은 20m에 이르렀지만, 어떤 곳(예 : 블라케르나에 지역)은 물은 흐르지 않고 구덩이만 파둔 곳도 있었다. 성으로 진격해야 하는 공격군 입장에서는 우선 해자 통과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오스만군은 기를 쓰고 해자를 메운 반면, 비잔틴군은 다시 파내는 데 전력을 쏟았다. 채우고 비우기의 연속이었다. 오스만군은 참호를 만들고 도성 침투용 지하 터널(땅굴)을 뚫느라 파낸 흙을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해자를 메우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면 비잔틴군은 밤중에 몰래 그 위치에 그리스 화염과 폭약을 설치해 폭파시켰다. 그러는 사이 두 제국의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심히 밭을 갈고 있는 저 농부는 그런 해자의 아픈 역사와 기구한 사연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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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자가 있던 자리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하수로(배수관). 성벽 복원도의 빨간 동그라미 친 부분을 참고할 것.


▲ 부서진 외성벽 주탑을 지나 내성벽 주탑 쪽으로 가고 있는 아베크족.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탑 꼭대기에 올라 비잔틴군과 오스만군 간에 오가던 살육의 화살이 아니라 연인 앞에서 사랑의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해보이는 건 아닐까.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4편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종합편이므로 1, 2, 3편 탐사 경로를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군사 박물관(탁심 광장에서 북쪽으로 1km 거리)과 1453 파노라마 박물관(톱카프역 바로 뒷편)이 추가되었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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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독자 2010.09.08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읽고사진들을보면서
    이스탄티노플
    그도시의매력에
    점점빠져들고있습니다

  2. 피플 2010.09.08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우물에서의 은어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 물속을 헤엄치는 은어를 반짝이는 총알에 비유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의 시를 떠올려보면 , 이스탄불을 구석구석 탐사한 일행의 모습이 은어를 닮아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두륜 2010.09.08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감상평을 남길만한 지식은 없지만 가슴으로 느낄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 겠네요...
    "이스탄티노플"의 명예 시민으로서....^^

  4. BlogIcon 너서미 2010.09.08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이스탄불에 갔을 적에
    다리 하나를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것만큼이나 이 땅을 둔 각축전도 치열했더군요.
    이번 포스팅을 보니 보다 더 실감납니다.

  5. 오디세이 2010.09.09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 극장 그림들과 그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필자의 글솜씨가 압권입니다.
    이스탄티노플,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6. 이우종 2010.09.09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타는 탐구욕 과 활활 끓고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감히 시늉이라도 해볼까 하고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 기대해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

    • 호야 2010.09.0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려 감사합니다 이스탄티노플이란 내가 명명한 도시에 스스로 빠져서 공무 틈틈이 시간내어 전심전력하고 있소 대작 수작소리는 못듣겠지만 힘들여 쓰는 역작인것 만은 분명하오 아직도 쓰고 싶은 게 하 많이 남았으니 건강 챙겨가며 하겠습니다

  7. 중독 2010.09.30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그랗게 생긴 대포알을 보니 대포알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쩜 저렇게 동그랗고 예쁘게 만들었죠?
    대포 한번 쏘고 다시 주워다 쏘지는 못했을텐데.
    전쟁동안 쉼없이 대포를 쏘았다니, 대포알 갖고 다니기도 엄청 힘들었겠어요.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하는데, 동그랗게 대포알을 만든 석공(?석공이 만들었겠죠?)의 딸도 예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ㅋㅋ 아들이 잘생겼으려나?

  8. BlogIcon BlueMiR 2012.02.10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보고 갑니다~
    그림좀 몇개 퍼가겠습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2
                              - 타임머신 타고 550여년 전으로

▲ 작열하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지대가 낮은 격전지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멀리 성곽 위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에서 유래한 현대 터키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성 로마노스 군문(제 5군문) 앞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 성로마노스 군문 입구 석벽에는 비잔틴 시대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음직한데 해독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 저 허물어진 성벽은 아마도 세월의 탓이겠지만, 1453년 당시 치열했던 격전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도 저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 격전지 성벽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리라. 한 쌍의 청춘남녀가 이 더운 날 몸을 밀착시킨 채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을 향해 올라가는 길. 성 안쪽의 풍경이다. 그 옛날 먼지를 일으키며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말들이 달렸을 길이 지금은 아스팔트로 바뀌어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 외성 위를 탐사하고 있다. 우뚝 솟은 건 내성의 주탑이다. 인도와 풀밭으로 바뀐 오른쪽엔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성곽의 안과 밖 그리고 위를 입체적으로 탐사했다. 사흘 내내 이런 식으로 다녔지만 성곽 탐사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술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모습.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 함락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스물한 살 술탄이 예니체리 군단의 삼엄한 호위 아래 대신들과 장군들, 이슬람교 고승들까지 거느리고 카리시우스 성문(에디르네카프)을 지나고 있다. 술탄의 행선지는 아야 소피아. 말발굽 아래로 피를 흘리며 어지럽게 쓰러진 비잔틴 병사들의 시신이 처참했던 전투 상황을 웅변해 준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 ‘이스탄불 정복자 협회’에서 톱카프 성문 벽에 부착해 놓은 안내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내 네이버 블로그에 이런 해석을 달아 놓았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정복자 파티의 군대는 대포를 쏘아 부서진 이 근처의 공백을 통해 이스탄불로 진입하였다."
톱카프는 ‘대포·포탄(톱)이 지나간 문(카프)’이란 뜻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펼쳐진 곳 중 하나이다.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켜내려는 자들의 결사항전, 그 현장에 서자 나도 자못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 톱카프 성문 앞 분위기. 복원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성벽의 엄청난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왼쪽 벽에 화살표와 함께 파란색 페인트 글씨로 쓴 "WC"는 낙서인가, 화장실 안내문인가.


▲ 톱카프에서 제 4군문을 지나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을 향해 가는 길. 복원된 성벽 모습이 감동을 반감시킨다.


 

▲ 성곽 탐사 도중 날이 저물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십자가가 세워진 뾰족 지붕 아래서 은은한 종소리가 부드럽게 발목을 잡으며 이제 그만 쉼표의 시간을 가지라고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행군을 멈추기가 아쉬웠다.

 

▲ 마르마라해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왼쪽 끝은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가운데는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이다. 해변에 서 있던 비잔틴 시대의 등대는 현대식 등대로 바뀌어 있다. 내가 탄 배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끝나고 마르마라해가 시작되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등대 오른쪽으로 해안 성벽이 보인다. 해안 성벽 탐사와 아야 소피아 이야기는 다음에 또 사진과 함께 소개할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 전경. 이 도시에 있는 수백 개의 모스크 가운데서 블루 모스크는 첫눈에 알아보기가 가장 쉬운 이슬람 사원이다. 6개의 첨탑(미너렛)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유일한 모스크니까. 마르마라 바다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때 블루 모스크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해냈다.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갤리선 선장이 된 심정으로 유람선을 타고 해상 전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서 읽은 해상 전투 상황을 조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가며 더듬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카리시오스문 일대▶제 5군문▶성 로마노스 시민문▶제 4군문 일대(분홍색 사각형 부분) 아야소피아▶블루모스크▶등대(분홍색 삼각형 부분)
를 사진에 담았다. 블루 모스크·아야 소피아·등대가 담긴 사진은 마르마라 바다 위 유람선에서 찍은 전경이다.
* 하늘색 사각형 부분은 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에 소개한 탐방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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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킬리만자로의 표범 2010.08.30 1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이 시원해지는 사진과 재기발랄한 캡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입니다.

  2. 페이스북 2010.08.30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오노 나나미 책 표지에 써 있는 글귀가 새삼 떠오릅니다.
    "국가의 적은 안팎에 있다.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 주는 것은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방위력
    그리고 상대 국가와의 우호 관계이다."
    대한민국의 일부 철부지 젊은이들,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입니다.

  3. 돌솥밥 2010.08.31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가 참 많은 감동을 지닌 나라 혹은 관광지라는 걸 사진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만큼 굴곡이 많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우리나라도 다 허물어버리지만말고 좀 보존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 다 남겨서 교훈으로 삼는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좋은 사진 잘 보고 갑니다. 땡스!!

  4. 인디아나고 2010.08.31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드벤처 무비
    주인공이 되신 것 갈군요
    이스탄티노플
    3탄도 기대됩니다

  5. BlogIcon 전자돌이 2010.08.31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사진은 인디아나존스 같아요 ^^) 점점더 흥미진진해 지는군요!

  6. 유근준 2010.08.31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의 인간에 대한 순수함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양과 열정이 정말 부럽습니다.

  7. BlogIcon crys1964 2010.09.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트위터로 의장님을 안 후 이제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알면서 좀 더 의장님을 알게 되네요. 기자생활을 하셔서 탐사활동에 더 관심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타고난 학구열이 강하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감동 받았구요. 앞으로도 의장님의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8. 두륜 2010.09.06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더운 날씨에 유적을 땀 흘려가며 둘러 보시는 모습이 인상 깊네요...
    여행 하시는 동안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으신것 같습니다...
    무한부득(無汗不得) 땀 흘리지 아니하면 얻을 것이 없다....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 좋습니다...

  9. 두바퀴 2010.10.17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저 먼 시간과 공간으로 날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이 시리즈가 끝날 때쯤에는 저도 뭔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느낌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