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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네요.

해군 초계함 침몰 사고와 최진실-안재환의 죽음에 이어 故 최진실 동생 최진영도 세상과 이별을 했다고 합니다.

우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보도에 의하면 전기선으로 목을 매 자살하여
현재 연세대 강남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족의 신고로 119 대원이 출동했으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으며
구급차에서 119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하며 병원으로 이동했으나 더 이상 손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병원 측의 설명에 의하면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해봐야 알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문득 최진영이 지난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 신애와 함께 출연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당시 그의 <라디오스타> 출연은 '스카이 3집'을 통해 가수로 활동하던 2004년 이후
4년만의 예능 프로 나들이었기에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의 출연배경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김구라가 OBS에서 '진실과 구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최진실과 친분을 쌓은 것이 
최진영이 <라디오스타>에 출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신애 역시 <라디오스타> 출연을 망설이다 최진실과의 의리와 최진영의 출연이 결정되자
함께 나오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MC인 김국진은 최진영 측근이라는 사람의 말을 빌어 
최진영이<라디오스타>에 나와 누나 최진실에 대한 모든 것을 폭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

그러자 최진영은 그런 인터뷰 한 적 없다며 도대체 그 최측근이 누구냐며 답답해했죠.
평소에도 자신은 그런 이야기한 적 없는데 측근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억측이 많다며 하소연했었죠.




이 자리에 나온 김에 주변의 연예비담을 알려달라는 MC들의 짖궂은 요구에
최진영은 MC들과 함께 특유의 입심을 자랑하며 
세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소라와 이영자가 서로 화해한 것은 아니라고 했었죠.

그리고 그는 누나인 최진실이 자신의 활동에 간섭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실제로 최진실이 <라디오스타>의 MC들에게 최진영을 거칠게 다뤄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케이블 티비 프로그램인 '택시'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에피소드도 이야기했습니다.
최진실이 '택시'의 MC이자 친구인 이영자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메세지를 보낸 뒤,
촬영 직전에 집에 들러서 직접 동생의 의상을 챙기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누나의 관심에 대해 그는 동생을 걱정해주는 건 좋은데 참견이 심하다며 답답함을 토로했었죠.
그런 한 편으로 그는 최진실이 본받을 것이 많은 스승이라며 누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평소에 무서운 이미지로 오해를 받는다는 최진영에 대해
<라디오스타>의 MC들 역시 진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진영이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가정 환경의 영향도 컸죠.
그것은 가족 중에 남자가 혼자여서 집안을 책임져야 겠다는 마음 때문에 강하게 보이기 위해 애쓴 결과였습니다.

이영자의 어느 고백에 따르면, 최진영이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마다
동생이 돌아온 것을 본 누나 최진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친구들도 덩달아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습니다.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했던 그는
MBC 청춘드라마였던 '우리들의 천국'에서 장동건과 함께 출연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장동건이 너무 잘 생겨서 한참을 입을 벌리고 쳐다보기만 했다고 합니다.

이후 <라디오스타>에 출연하기 2~3개월 전에 우연히 서로 마주쳤는데
장동건은 "형은 늙지도 않고 여전하다"고 이야기했었답니다.


최근에 그는 가수 김정민의 소속사에 몸을 담으며 활동복귀 선언을 했고
새롭게 연예계에 복귀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안타까움은 더 크네요.




누나인 최진실의 사망 직후, 최진영은 미니홈피를 통해 세상에 하지 못한 말을 했죠.

 "지친다. 사람이란 것에 지치고, 살아온 것들에 지치고, 이런 나 때문에 지친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최진실-최진영 남매였는데, 이렇게 둘 다 가버리게 되면
남아있는 그들의 어머니와 환희-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으로 <라디오스타>에서 최진영의 짧은 한 마디가 귓가를 맴도는군요.

김구라가 최진영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최진실의 동생으로 살고 싶어요?"

그는 주저않고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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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hoebe 2010.03.29 1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나가 갔을때도 많이 놀랐는데 동생마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2. sm4359 2010.03.30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그랬나요원망스럽기까지하네요좀더힘을내보지요늙은엄마조카들은어떻게하라고요

  3. 김한준 2010.03.30 0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인의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건 실례지만

    그 순간 두 자식을 잃고 충격받으실 어머니를 생각하시지...

  4. 슬프네요 2010.03.30 1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째 이런일이...

  5. BlogIcon blue lizard sunscreen 2011.10.25 1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 반쯤.

  6. BlogIcon www.laincontournable.fr 2015.04.10 15: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유가 98/99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뮌헨에 0:1로 뒤지고 있다가
    추가시간 3분 안에 2골을 넣어 극적인 역전승을 일컫는 말이었죠.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을 뒤바꾸기 어려운 것은 이미 많은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부담과 그 동안 달려온 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구 스타를 갈망하던 청소년이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 두고 가출을 일삼다가 일순간 촉망받는 신인배우가 되고, 나아가서 인정받는 중견연기자로 거듭나고 또한 교수가 되어 교단에 선다면 그 인생도 드라마틱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종영한 <지붕킥>의 연기자이자 지난 24일 <무릎팍도사>의 게스트였던 정보석의 이야기입니다.

'전환점' 혹은 '터닝포인트'라는 말 아시죠? 일정한 흐름으로 일이 진행되던 것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계기를 뜻합니다.

정보석은 고교를 7번씩 옮겨다닌 말썽꾸러기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대학생활을 장학생으로, 입지가 탄탄한 연기자로 급상승하게 된 전환점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정보석이 신인시절을 거치면서 자기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타고난 외모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1989)의 '진우'
젊은 날의 초상 (1990)의 '영훈'
걸어서 하늘까지 (1993)의 '물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1995)의 '기자 권순범'

어느 평론가는 이 배역들을 두고 각기 조금씩 성격이 다르지만 정보석이 가진 이지와 우수가 드러나는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정보석이 가진 예리한 얼굴선과 특유의 눈매는 시대가 지난 지금도 도시적이고 샤프한 인상을 줍니다만,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권기자 역을 선정하는데 있어서도 영화팬들 대부분이 이 배역은 정보석이 제격이다라고 했을 정도였죠.




그는 감각적인 끼를 발산하는 배우라기보다는 분석력을 지닌 노력하는 배우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정보석은 남들에 비해 대본을 비교적 빨리 외우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대본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배우로서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전쟁 특집극에서 어느 장군의 '부관'역으로 데뷔했던 그는 사실 대학 졸업 직전까지 연기보다는 연출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연출에 소질이 있던 그가 졸업작품에서 선배에게 연출을 양보하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연기하겠다고 한 것이 연기자 인생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보석이 신인급 연기자로서 드라마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인공을 맡게 된 기쁨도 잠시, 배역을 받고 촬영한 지 하루만에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자진 사퇴해야 했습니다. 그가 물러난 자리에 손창민이 대신했죠.


▲ 그가 대학 4학년 때 신입생 환영회에 나온 여학생을 점찍었는데 훗날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정보석의 마음에는 용광로 속과 같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되돌아보고 배역을 분석한 끝에 <젊은 날의 초상>의 조연을 맡으며 다시 꿈을 키워갔고, <사모곡>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것이었죠.

그의 연기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당시 촬영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정보석에게 욕설을 하고 멱살을 잡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로 KBS 신인상을 거머쥔 정보석은 영화 <젊은 날의 초상>의 배역을 따내며, 드라마 <젊은 날의 초상>에서 받았던 설움을 만회했습니다.





그에겐 잘난 얼굴은 장점인 동시에 컴플렉스이기도 했습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지적이고 샤프한 이미지가 오히려 천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 연기자에겐 마이너스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보석은 자신의 이지적인 이미지를 보다 잘 살려 악역을 멋지게 소화해낸 배우로 거듭났습니다.

예컨데 <걸어서 하늘까지>에서는 그의 리얼한 연기 덕택에 진짜 소매치기를 배우로 쓰는 것이냐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여러 드라마에서 그는 지적이면서도 비열한 악역을 잘 소화해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대조영>, <상도>와 같은 사극이나 오연수와 함께 했던 드라마 <달콤한 인생>에서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잘 표현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다 더 지독한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는 <지붕킥>에서 코믹하고 무능한 배역을 통해 또 한 단계 진전된 연기를 선보이며 흥행몰이에 일조했습니다. 기존에 보여줬던 정보석과는 또 다른 이미지였기에 신선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연기자가 한 사람 나오기까지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야구 선수로 꿈을 키워가던 중 치명적인 허리 부상으로 절망에 빠져 가출을 일삼고 여러 차례 전학하며 방황하던 그를 바로 잡은 것은 바로 책과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의 은사인 최낙구 선생님의 가르침과 방황기에 월부로 구입해서 읽게 된 세익스피어 전집은 그에게 폭발하지 못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내면의 에너지를 성실한 연기자로 우뚝서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죠.

그 바탕에는 중학교 도덕선생님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 웃으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보석은 부모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갈 길을 찾아 더욱 매진했습니다. 당장에는 부모님께서 반대할 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효도를 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적어도 부모님의 뜻대로 살아서 훗날 부모님께서 자식이 원하던 길을 막았던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남기지 않게 해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효도의 참 길이라 생각햇습니다. 당시에는 엄한 꾸중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도 요즈음은 더욱 편하게 그를 대하신다고 하니 그의 판단이 결국 스스로에게는 옳았던 것이죠.




방황을 접고 마음을 고쳐먹은 학생 정보석은 신문배달, 야채장사, 독서실 총무 등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기자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상대나 법대로 가라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당히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의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연기의 기초조차 닦지 못하던 그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기적을 이뤄낸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현장성 있는 참교육은 위대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 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싶습니다. 당장의 지식보다는 인격 형성과 인생의 방향에 대해 접근하는 교육이 왜 필요한 지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악조건을 극복하여 꿈을 이룬 정보석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TV가이드, TV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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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커피믹스 2010.03.25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의 전환점에서의 저런 말들 정말 가슴깊이 와닿죠
    물론 자기자신도 많은 고민과 생각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난 14일 SBS에서는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 돌풍을 일으켰던 세 친구, 금메달리스트 이승훈 선수와 모태범 선수, 이상화 선수의 성공 코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됐습니다.

메달리스트들도 인정한 금메달리스트인 이승훈 선수. 그의 시상식은 진정한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스피드스케이트 장거리 5000m와 1만m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

특히 이승훈 선수는 쇼트트랙에서 스피드 스케이트로 전향한 지 7개월이 채 되지 않은 상황과 국제시합 첫 출전 무대에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점 등이 부각되면서 '천재 스케이터'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았는데요.

이 다큐멘터리에서 이승훈 선수는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절대 천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성공은 7개월이 아닌 15년이라는 세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재가 아닌 이승훈 선수는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해 도전했지만 또 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던 대표팀 선발 전 등 좌절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 선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연습하는 노력이 15년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심하게 좌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저앉기보다 또 다른 기회에 도전한 이승훈 선수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꾸준한 연습벌레였던 것입니다.


계속된 대표팀 탈락에 좌절했던 당시 심경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훈 선수.


쇼트트랙 대표팀 탈락 이후 자신이 느꼈던 심정과 당시 가족들이 겪었던 어려움 등을 진솔하게 얘기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이승훈 선수.

올림픽 메달을 딴 후 한 기자회견에서 이승훈 선수는 "깊은 물에 빠졌을 때 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밑바닥을 치고 위로 올라가서 숨을 쉬는 것이 더 빨리 올라갈 수 있지 않나. 지금 나는 가장 밑바닥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빨리 정상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는데요.

다큐멘터리 속 이승훈 선수의 눈물이 더욱 감동적이였던 이유는 바로 타고난 천재가 아닌 실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정상에 선 금메달리스트의 눈물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Posted by 포도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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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커피믹스 2010.03.17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밑바닥을 치고올라간다... 멋진 말이네요

    • BlogIcon 포도봉봉 2010.03.1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이승훈 선수는 너무나 훈훈한 금메달리스트인 것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는지.. 자기 경험이라서 정말 와닿았던 것 같아요~~

  2. 에헤라디여 2010.03.17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저 장면에서 뭉클했어요..남모르는 수많은 좌절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해요.그 시간들은 정말 우리가 상상할수도 없는거겠죠...묵묵히 응원하고싶어요..수고했어요 짝짝짝 !!앞으로가 정말 더 기대대는 이승훈 선수..홧팅

"과연 키스가 효험이 있나봐. 방망이에 불이 붙었네."

생애 첫 국가대표로 뽑혀서 맹활약하던 이만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입니다.




프로 선수 이만수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알려진 바가 많지만,
아마시절 이만수에 관한 이야기는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만수는 아마추어시절, 즉, 중고교선수였을 당시에도 강타자로서 이름을 날렸는데요.
고교시절 그를 가장 빛나게 했던 순간은 바로 1977년 청룡기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승자 준결승에서 동산고에게 연장전에서 2-1로 지는 바람에
패자부활전에 내려간 이만수의 대구상고는 청주고와 광주일고를 연파하였고,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동산고를 상대로 3-1로 이겼습니다.

승자 준결승과 결승전에서 1승 1패를 주고 받은 대구상고와 동산고는
최종 결승전에서 마지막 일전을 치렀습니다.
결국 대구상고가 동산고를 7-2로 꺾고 7년만에 청룡기 정상을 탈환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 타격상, 최다안타상, 타점상을 휩쓴 이만수는
이미 고교 졸업을 앞두고 최연소 국가대표 포수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죠.

한양대 1학년으로 태극마크를 단 이만수는 호주에서 열린 첫 경기부터 화제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는 경기 중에 팀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파이팅"과 같은 괴성을 지르기로 유명했는데,
막내의 신분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군기(?)잡힌 그의 목소리가 오죽했겠습니까?


그의 괴성을 보다 못한 현지 아나운서가 6회말쯤 공수교대할 때에
이만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은 도대체 뭐냐? 왜 그렇게 괴성을 지르는 거냐?"

이에 이만수는 "선수들에게 기를 불러넣기 위한 격려의 외침"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야구장에서도 현지 팬들로부터 화제의 인물로 꼽히며 인기상종가를 쳤을 뿐만 아니라
현지 언론들도 '두 팔 번쩍 들고 화이팅을 외치는 이만수'의 사진을 곳곳에 실었다다고 합니다.

각종 기사에 '리 맨스'라고 불리며 유명 인사(?)가 된 그를 향해
상대팀 선수들은 "한 달에 몇 번 그러냐?"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네요.




3차전 마친 후 아델라이드시에서 교민들이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환영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파티에 나온 2명의 아가씨가 이만수 옆 자리에 앉더랍니다.

그 중 한 아가씨가 "당신이 그 유명한 리 맨스?"냐고 물으면서
"당신이 가진 기념배지를 갖고 싶다."고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이에 이만수가 흔쾌히 배치를 떼어서 주었고
이 아가씨는 갑자기 그의 무릎 위에 앉아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26살의 '리완'이란 이름의 이 아가씨는 그를 차에 태워 드라이브까지 시켜줬습니다.

이날 이후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던 이만수의 방망이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3경기 동안 타격 부진으로 8번타자로 내려앉았던 그는
호주 아가씨의 사랑(?)을 받은 덕택인지 잇달아 맹타를 과시하며
10게임을 모두 마치고 나니 21타수 10안타, 타율 0.476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야구에서는 타율 3할(0.300)만 쳐도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만수는 이 때 거의 5할을 친 셈이었죠.
이는 팀 내에서 김재박 다음으로 가장 우수한 성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대표팀 막내가 말이죠.
더구나 초반 3경기 부진 속에 이런 기록이 나온 것이었기에 더욱 큰 화제가 되었죠.

이만수의 신들린 타격을 지켜본 대회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한 여인의 키스가 이만수의 타격을 눈뜨게 했다'며 흐뭇해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이만수는 학생시절이든 프로시절이든 가는 곳마다 이슈와 폭소를 양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로에서는 각종 최초의 기록을 석권하는 대표 선수가 되었고,
그의 등번호 22번은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영구결번으로 지정받았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죠.

현재 그는 2005년 메이저리그 우승팀 화이트 삭스 코치를 거쳐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서 2007~2008년 연속 우승에도 기여를 했습니다.
실로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큰 영광을 누린 셈이죠.

그리고 그는 얼마 전에 황금어장 <무릎팍도사>를 통해서 특유의 유쾌함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만수의 국가대표 초년병시절 에피소드를 접하고 나니,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광고 카피가 떠오르네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

(사진 출처 : 주간스포츠)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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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무릎팍도사에 이봉주가 출연했습니다. 속눈썹 이야기부터 황영조와의 관계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트랙을 돌며 두 팔 벌려 테이프를 끊을 것 같은 그가 은퇴했다는 사실이 저는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지구를 약 다섯 바퀴를 돌았다는 그의 마라톤 인생은 부상과 좌절, 재기와 투혼이 얽힌 한 편의 드라마였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짝발과 평발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온 온갖 시련을 묵묵하게 노력과 끈기로 이겨낸 것은 더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죠. 그의 마라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었고, 또한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이봉주'하면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월계관을 쓴 그와 함께 보스턴 하늘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듣는 순간, 새벽잠을 설쳐가며 중계를 지켜본 보람이 있었죠. 올림픽, 아시안게임이 아닌 마라톤 단일 종목만 열리는 국제 대회 중계를 저는 그렇게 열심히 시청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봉주와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세계 최고의 마라톤 대회에서 51년만의 쾌거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1897년에 처음 열렸으며, 올림픽 다음으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대회입니다. 1950년에 열린 이 대회에서 손기정의 지도를 받은 한국대표 함기윤,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위를 석권하며 화제를 모았다고 합니다.

이후 이 대회의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우리 나라는 무려 51년만에 이봉주가 왕좌에 등극하며 한국 마라톤의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문득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손기정옹 이후 황영조가 몬주익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던 장면이 떠올랐죠.

이봉주의 우승을 통해 미국-유럽권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인이 수상하는 장면을 본 것은 낯설면서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51년 만이라니~




부상의 불운과 부친상의 슬픔을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

2000년 2월에 열린 동경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최고기록이자, 역대 한국최고기록인 2시간 7분 20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올림픽을 앞둔 터라 많은 사람들의 기대도 부풀어갔죠.

그러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그의 뜻대로 되기는 커녕 오히려 큰 시련을 안겨주었습니다. 15km를 달릴 무렵 선수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는데, 아프리카 출신의 한 선수가 넘어지면서 이봉주와 부딪혔던 것이죠. 그 때문에 덩달아 넘어진 이봉주는 24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손에 쥐어야 했었습니다.

이봉주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연말에 열린 후쿠오카 대회에서 다시 2위를 차지하며 희망을 얻었고, 보스턴 대회 성공의 초석을 다졌죠. 당시 이봉주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2000년 동경국제대회 등 여러 대회에서 2위만 해서 '단골 2인자'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일본에서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다 묵묵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모습 덕택에 일본팬들도 많이 늘었다고 하더군요.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웃을 일이 생기니 슬픈 일이 다가오고, 슬픈 일 다음에 기쁜 일이 생기는가 봅니다. 2000년 후쿠오카 대회의 호성적으로 간신히 희망을 찾는가 했으나 보스턴 마라톤 준비에 한창이던 때에 부친상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이봉주에게는 훈련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대회 준비에 치명적인 시련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결국 보스턴에서 월계관을 쓰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하늘에서 그의 아버지가 도왔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황영조와는 또 다른 길을 걷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마라톤'하면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와 보스턴 우승자 이봉주를 떠올립니다. 동갑내기인 둘은 서로 친하면서도 또한 너무도 상반된 스타일을 갖고 있죠.

황영조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인터뷰도 쉽게 잘하는 편이지만, 이봉주는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잘 타면서도 순수한 인간성이 매력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황영조는 이른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은 뒤 오래지 않아 은퇴의 길을 걸었지만, 이봉주는 대기만성형 선수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죠. 시기적으로는 황영조의 퇴조와 이봉주의 부각이 맞물리는 부분도 있었는데,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바통 터치하는 형국으로 그들의 역사는 전개되었습니다.

실제로 황영조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에 뽑히지 못한 채 은퇴의 수순을 밟을 무렵, 자연스럽게 김이용과 이봉주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결국 승자는 이봉주였습니다. 이봉주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성과를 꼽으라면, 바로 보스턴 마라톤 우승이었습니다. 이로써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마라톤은 황영조-이봉주의 역사로 굳어지게 되었죠.

두 사람 모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경력을 갖고 있지만,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이봉주는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각각 우승하여 서로 다른 분야에 각자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지만, 단일 대회로서는 보스턴 대회를 빼놓을 수 없거든요.

이렇게 서로 다르고 사연이 많은 그들이었지만, 이봉주의 아내를 황영조가 소개시켜줬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경쟁자이자 친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봉주는 평발, 짝발로 인해 물집이 생기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봉주가 은퇴하고 나니 한국 마라톤계가 휑한 느낌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마라톤 뿐만 아니라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스포츠는 그 어떤 분야보다 국민에게 힘이 되었고, 대한민국을 알리는데 앞장섰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은 2000년대에 걸맞는 기량을 요구하고 있지만, 체육 인프라와 투자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부끄러울 정도로 열악합니다. 앞으로 제 2의 이봉주를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부 기업들은 스포츠 스타가 급부상하면 당장의 광고효과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느껴져서 유감스럽기도 합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후, 51년만에 이봉주가 우승했는데,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다시 월계관을 쓰려면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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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악랄가츠 2010.02.04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봉주 선수의 발 사진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네요.
    항상 푸근한 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무거운 태극기 마크를 달고 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BlogIcon 칸타타~ 2010.02.04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힘든 운동인데도 고통을 감내하며 뛴 걸 보면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진데다 근성과인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2. BlogIcon gemlove 2010.02.04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이봉주 선수 발을 보니 눈물이 ㅠㅜ 신체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그 자리까지 올라가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3. BlogIcon 탐진강 2010.02.04 2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봉주가 황영조 보다 친근감이 넘치죠.

지난 27일 <무릎팍도사>에 배우 나문희가 출연하여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해 털어놨습니다.
연기인생 49년만에 예능 프로그램 첫 출연이라고 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국민어머니'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알려진 김혜자나 강부자, 정혜선, 여운계와 같은 배우를 떠올리기 마련이죠.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이 분야에 도전장을 내민 여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나문희입니다.

그녀는 현재 충무로가 원하는 어머니 역 배우 0순위로 꼽힙니다.

'대기만성'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그녀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 나문희가 평소에 꼭 같이 연기해보고 싶었다는 김윤진과 힘을 모은 작품 <하모니>


절제력과 성실함

"비록 작은 역이었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소화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물론 '저 역할은 내가 하면 좋겠다'며 주연배우를 부러워한 적이 있지만,
곧 '저 배우가 나보다 연기를 잘하기 때문에 맡긴 것이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어요." <여성동아 2008년 9월호 중>

배우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꿈을 꿉니다.
나문희라고 욕심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긴 연기 인생동안 거의 조연으로 살아온 그녀가 존경받는 배우로 자리잡게 된 것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절제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우직하게 노력한 것은 훗날의 성공을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느 인터뷰를 통해 40여년의 연기 인생 속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본을 50번은 봐야 안심이 됩니다."

이를 증명하듯이 <열혈남아>에서 함께 연기했던 설경구가
나문희의 대본을 보곤 자신의 대본이 깨끗했던 것이 부끄러웠다고 이야기했었다죠.


▲ 나문희가 황정민의 순수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한 영화 <너는 내 운명>


관찰력과 해석력

<무릎팍도사>에서 그녀는 주변 인물을 많이 참고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목소리가 좋다는 평을 받고 MBC 공채 성우 1기로 뽑힌 그녀는
'주말의 명화'에서 마르린 먼로의 전담 성우로 활동하며
학교에서 못한 훈련을 방송국에서 경험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영화를 보며 성우로서 경험을 쌓아갔던 것은
그녀가 TV 연기자로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조연으로서 55세의 나이에 KBS 연기대상을 안겨준 '이북사투리 할머니' 역시
그녀의 주변 인물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변 인물에게서 얻을 수 없다면, <인간극장>, <아침마당> 혹은 다큐멘터리를
참고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나문희는 "내가 참고한 주변 인물에겐 로열티를 준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주변 인물의 특성을 적시적소에 뽑아서 연기로 표출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 됐습니다.

노희경 작가는 나문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마. 희경 씨.'
'버스나 전철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 희경 씨.'
'재래시장에 많이 가. 희경씨.'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봐봐. 희경씨. 그게 예쁜 거야'
'골프 치지 마. 희경씨. 대중목욕탕에 가. 희경씨'

나문희의 연기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관찰력만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변 인물의 특성을 자기화할 수 있는 해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찌 보면 오랜 조연생활에서 갖는 노하우가
주변 인물을 잘 활용하게끔 바뀌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조연급 등장인물들은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가 많으니까요.


▲ 나문희가 "이 영화가 끝나면 죽어도 좋다"고 했던 영화 <열혈남아>


진솔함과 인간미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에서
노희경 작가의 나문희에 대한 평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 마디로 답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 말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한마디로 답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그녀의 연기에 시청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연기가 화려하게 치장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없는 캐릭터를 억지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일상의 캐릭터를 상황에 맞게 응용함으로써
오히려 더 실감나는 연기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내의 어머니와 자식, 할머니와 손주의 관계에 있어서
그녀가 동료 연기자들을 실제로 자식 같이, 손주 같이 생각하려고 애썼다며
고백한 부분은 인상깊게 다가옵니다.

이런 꾸밈 없는 그녀의 연기가 시청자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비결 속에는 동료 연기자를 아끼고 신뢰하는 그녀의 인간미도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득 영화 <주먹이 운다>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녀는 부모를 잃고 소년원에 있는 손자(류승범 분)를 뒷바라지하는 할머니 역을 맡았었는데
천신만고 끝에 권투 신인왕에 오른 피투성이 손자를 껴안고 함께 울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나문희의 할머니 역 연기에 류승범의 열연이 더해지며 더욱 짠한 감동을 줬던 영화 <주먹이 운다>



지금까지 나문희의 성공비결에 대해 꼽아봤습니다.

혹시 당장에 목표한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내시는 분들 계십니까?

30~40년을 무명 배우, 조연 연기자로 세월을 보내다
최근 새로운 어머니 상을 개척한 나문희.

'대기만성'의 그녀를 보고 힘을 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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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북로그컴퍼니 2010.03.10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희경 작가님의 감성수작 <거짓말 1,2> 대본집 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난 해 많은 사랑을 받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은 노희경 작가의 두번째 대본집이예요. 한국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 폐인 드라마 <거짓말>의 읽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BlogIcon dreadnought guitar 2011.11.05 0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뭔가 유용한 배우고 욕망.

  3. BlogIcon auto auctions in michigan 2011.11.05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당히, 읽기는이 귀중한 주제에 완전히 신선한입니다

지난주와 이번주, 2주간에 걸쳐 방송된 무릎팍도사 경인년 특집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나라 힙합계의 대부, 타이거JK였습니다.

이 방송에서 타이거JK는 데뷔 전 힘들었던 시절, 희귀병인 척추염으로 또 다시 좌절해야 했던 경험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게된 과정 등을 상세히 털어놓았는데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타이거JK. 힙합계의 대부로 강하게만 보이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방송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사는 2010년 새해의 시작을 여는 특별 게스트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타이거JK의 첫번째 고난

첫 데뷔를 위해 실력있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만만하게 한국을 찾은 타이거JK.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왔던 이곳에서 그는 철저한 외면은 물론 아버지의 명성에까지 먹칠을 하는 불효자로 전락합니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의 정서에 상처받은 그는 음악을 포기할까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음악에 빠져들 수 있었던 비법이 바로 '나에게 쓰는 편지'였습니다.

데뷔 초 좌절을 겪은 타이거JK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색 바랜 이 편지 속에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미래가 적혀있습니다.


# 1996년 나는 제일 돈을 많이 버는 슈퍼스타가 될 것이다.

# 1996년 1월 전까지 1억 원을 벌 것이다.

# 내 믿음은 너무 강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


타이거JK는 좌절의 끝에서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썼고 이를 벽에 붙여놓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99년 드렁큰타이거로 다시 돌아온 타이거JK는 1집 '난 널원해'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에 이어 2집과 3집이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발병한 척수염. 타이거JK는 20kg이상 살이 찌는가 하면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됩니다.


타이거JK의 두번째 고난은 갑작스런 척수염 발병입니다.

대다수 척수염 환자들의 겪는 신체마비 증상을 똑같이 겪어야 했던 타이거JK.

용하다는 비법이란 비법은 모두 써봤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이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자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 나는 꼭 완치될 것이다.

다시 꼭 나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과 운동을 하면서 부단히 노력한 그에게 또다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척수염 극복 사례로 의학계에 보고되는 등 그의 병이 크게 호전된 것이지요.

타이거JK의 '나에게 쓰는 편지'는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자기개발 도서 '시크릿'의 비법과 일치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세세하게 표현해서 이것이 이뤄졌을 상황을 상상하고 끝없이 갈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성공비법, 시크릿의 비법이었는데요.

타이거JK는 이 도서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이 비법을 현실에 적용해 활용해왔던 것입니다.

1월 17일입니다. 새해의 첫 달도 어느새 절반이 지났는데요.
혹시 2010년 야심차게 세웠던 결심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당장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써 보는 것은 어떨까요.

                                                                                                                      Posted by 포도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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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미나 2010.01.17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있네요..타이거.. 잘 읽고 갑니다..

    • BlogIcon 포도봉봉 2010.01.17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타이거JK를 보면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당장 나에게 쓰는 편지 쓸려고욤.

  2. BlogIcon 악랄가츠 2010.01.18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자가 봐도 너무 멋진 JK형! 흑흑
    지금도 약을 먹어야지만 살아 갈 수 있다고 하셔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팬들을 위해 더욱 파이팅하셔서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 BlogIcon 포도봉봉 2010.01.19 1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ㅠㅠ 원래 타이거JK팬이었는데 이번 무릎팍도사 보면서 더 좋아졌어요. 윤미래랑 특히 아들 조단.. 초우량아 조단이 넘 이쁘더라고요.

한국에서 류시원은 장동건에 비해서 영화에서 두드러진 것도 아니었고
손지창, 김민종에 비해서도 가수로서도 인기곡을 남긴 것도 아니었으며
정우성에 비해 CF를 많이 찍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류스타로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에 진출한 뒤 5년 동안 가수로서 전 공연 매진을 불러모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부른 18장의 앨범은 오리콘 차트 10위에 모두 진입했고
그 중 2005년에 낸 싱글 앨범은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걷어붙인 소매, 백구두, 강풍에도 끄떡없다는 고정 머리가 인상적인 류시원.
그가 한류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엇을까요?

저는 그가  한국에서 다양한 연예활동을 한 것이
가장 큰 한류스타로서의 성공을 이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류시원이 데뷔 후 5년여간을 중심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보는 동시에
그의 한류 성공 비결을 찾아볼까 합니다.


▲ TV저널 (1994년 10월)


데뷔시절

미대생인 류시원은 초등학교-중학교 동창인 가수 김원준의 권유를 받았으나
처음에는 친구가 해 준 농담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김원준을 통해 알게 된 히트곡 제조기인 김형석씨가 드라마 '느낌'의 OST를 맡으면서
훗날 <가을동화>, <겨울연가>를 만들었던 윤석호 PD에게 류시원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윤PD 역시 연기 경험 없는 신인을 원했던 터라 류시원에겐 좋은 기회가 됐죠.

그렇게 그는 1994년 드라마 <느낌>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급 연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드라마인 <창공>에서부터 주연급 배역을 맡게 된 것은
그의 타고난 끼를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특유의 저음과 부드러운 인상도 여성에게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류시원은 이 드라마를 통해 승승장구해나갔지만
공교롭게도 '창공'에 함께 출연한 친구 김원준은

그 드라마 이후 5년간 나오지 못했습니다.


▲ TV가이드 (1999년 3월)


시대의 대표 미녀와 함께 연기하다

류시원이 많은 드라마를 찍으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그 시대의 대표 미녀들과 함께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무릎팍도사에서 그 미녀들의 명단을 정리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소연, 김하늘, 김혜수, 김희선, 명세빈, 박선영, 장나라, 전도연, 최지우, 하지원

특히, 김희선, 김혜수, 명세빈은 그의 단골 파트너였죠.
이 세 미녀들과 함께 한 대표작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명세빈 : 순수, 웨딩, 종이학
- 김혜수 : 곰탕, 스타일
- 김희선 : 세상 끝까지, 프러포즈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과 호흡이 척척 맞는 연예인은 김희선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드라마 출연 뿐만 아니라 가요프로그램 MC로서도 함께 진행한 적 있었죠.

그가 출연한 드라마 중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는 <진실>이었습니다.
58%에 이르는 시청률을 기록했으니 대박이 터진 것이죠.

일각에서는 류시원에 대해 왕자 같은 이미지만 구축해 왔다는 비판을 합니다.
또, 일부 비판론자들은 '천의 얼굴'을 소화해야 하는 직업이 배우인데
류시원은 변신에 소홀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는 <무릎팍도사>를 통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비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배우로서 여러 차례의 변신을 통해 모두 성공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이것 저것 다 하면서 뚜렷한 특징이 없는 배우보다는
그래도 한 영역이라도 자기 색을 갖고 있는 연기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강조했습니다.


▲ 맛대맛 홈페이지


다재다능한 왕자

류시원은 가수, 연기자, 진행자, 카레이서 등  이력이 다양합니다.

그는 김희선과 함께 음악프로그램 진행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SBS 라디오 <기쁜 우리 젊은 날> DJ로도 활약한 바 있습니다.
어느 PD와의 친분으로 맡았던 SBS TV <호기심 천국> 역시 무난히 소화해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대중음악계에서는 이미 8집을 낸 중견가수이기도 합니다.

요리와 맛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99년 <류시원의 맛있는 유혹>이란 책을 내기도 했고
SBS의 <맛대맛>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류시원의 다재다능한 부분들은
류시원 특유의 왕자 이미지를 더욱 화려하게 포장해주는 것 같습니다.


▲ 스포츠조선 (2009년 7월 27일)


자동차, 스피드 그리고 승부욕

류시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동차와 스피드죠.
거기에 승부욕까지 포함됩니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가졌는데다,
군대시절에도 자동차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었을 정도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류시원은 이세창과 더불어 자동차 관련 잡지에
단골 손님으로 자주 나온 대표적인 연예인이기도 했죠.

류시원의 스피드에 대한 욕심은 유별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 모터스포츠 (1997년 6월)

예전에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의 특징에 관해

방청객들과 함께 ox퀴즈를 풀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류시원은 질투가 많은 남자? OX?"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는 O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승부욕이 강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겪었던 일을 언급했습니다. 

어느 날 류시원이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자기 차를 추월하는 순간, 괜히 약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는 약이 오른 걸 참지 못한 나머지, 그 차를 기어이 추월하고 나서야
자신의 차를 돌려서 목적지로 향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스피드, 승부욕은
결국 그가 인기 연예인에서
카레이서로 거듭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카레이서로 데뷔해서도 12년 동안 4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을 만큼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이따금씩 고속도로에서 카레이서 동료들과 스피드를 즐긴다고 하더군요.

▲ 오렌지룩 (1996년 6월)


끝으로

1년 동안 출연을 고사해온 <무릎팍도사>에 나온 류시원은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본 성공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가수로서 일본팬들을 사로잡은 것을 봐서나
일본에 진출한 한류 연예인 가운데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빌딩이 세워진 걸 봐서나
그는 분명히 성공한 한류스타입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류시원 특유의 귀공자 이미지에 다재다능한 모습이 잘 버무려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국내에서 다양한 연예활동을 펼친 경험과 함께
부드러운 외모와는 다른 남성미, 강한 승부욕까지 결합됐기 때문에
현재의 류시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연예계에 각 분야를 놓고 보면 류시원은 탁월한 스페셜리스트는 아닙니다.
그런데 다양한 연예활동을 큰 숲으로 생각하여 살펴보면
류시원은 자기 색깔이 있는 연예인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대중들의 호불호도 뚜렷한 것 같구요.

그는 다재다능한데다 부와 명예를 누렸으니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아 보였지만
여태까지 연예계에 몸 담으면서 영화 1편 찍지 못했다는 사실은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그런 한 편으로 영화계에 진출하기 위해 그가 부딪혀야 할 벽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캐릭터 변신에 대한 요구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과제를 류시원이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는 신인의 자세로 영화계에 몸을 던지겠다고 했으니 앞으로가 주목됩니다.


▲ 레츠 (1998년 6월)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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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hoebe 2009.12.24 14: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두 모두 즐겁고 기쁜 크리스마스 되세요.^^

  2. BlogIcon 악랄가츠 2009.12.25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보다 11살 많은 류시원...
    진심 저보다 어려보여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반칙케릭터예요! ㅜㅜ

강타자 '김현수 vs 양준혁'

허이재와의 열애설에 오른 젊은 피 김현수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한 백전노장 양준혁

요즈음 연예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야구 선수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 국내에서 가장 정교한 타자 양준혁과 김현수

프로야구 젋은 피 김현수와 최고령타자 양준혁이 연일 신문 연예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이 선수들이 야구 그만 두고 연예계 진출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요. ^^;;;

김현수는 '허이재와 2개월째 열애 중'이라는 기사가 났고 (해프닝에 그쳤지만)
양준혁은 TV 프로인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했습니다.
지난 무릎팍도사에서는 이종범이 양준혁을 '라이벌'이라 언급하며 지원사격까지 해줬죠.

두 선수는 최강타자 세대를 함께 이어가고 있습니다.
양준혁이 과거부터 잘해온 베테랑이라면, 김현수는 앞으로 더 잘해야 할 선수입니다.
또한 현재 이들은 동시대를 뛰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죠.

이들을 보면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양준혁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천하무적 야구단>


공통점


(1)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선수


지난 11일에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김현수는 외야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현수는 기자단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얻는 영예를 누렸죠. 지난 올스타전 베스트10에서도 그는 최다득표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이제 골든글러브 수상, 연예인 허이재와의 열애설 등으로 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계속 상승세를 이어갈 듯합니다.

양준혁도 인기에 있어서는 큰 소리 칠 만합니다. 올스타전에 12번이나 참가했고, 11년 연속 올스타 베스트10에 속하기도 했죠. 더구나 2006년 30대 후반의 나이에 올스타 팬투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에 <무릎팍도사>에 이어 이번에 <천하무적 야구단>에도 출연하여 연예계에도 그의 인기를 확인시켜줬습니다. 도루 부분를 제외한 역대 각종 최다 누적 기록들은 모두 양준혁이 다 갖고 있으니 그만큼 인기를 누릴 만하죠.



(2) 타자로서 명문고 졸업

양준혁과 김현수의 두 번째 공통점은 타자로서 최고 명문고를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이승엽의 경북고, 이종범의 광주일고도 훌륭한 야구 명문고이지만, 타자만 따진다면 양준혁의 상원고(구 대구상고), 김현수의 신일고 역시 명문 중 명문이죠.

양준혁이 졸업한 상원고(구 대구상고)는 왕년 홈런왕 이만수, 역대 최고 교타자 장효조, 타격왕 출신 이정훈과 같은 강타자를 배출했고, 김현수의 모교인 신일고는 캐넌히터 김재현, 올 시즌 한국시리즈 최종전 끝내기홈런을 친 나지완, 아마 최강 강혁 등을 키워냈습니다.


(3) 타격왕 출신 만능좌타자 + 도루능력 갖춘 외야수

김현수와 양준혁은 모두 타격왕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좋은 타격을 위해서는 아웃되지 않고 안타 이상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좌타자로서 좋은 선구안(공을 보는 눈), 좋은 신체조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펀치력도 갖고 있어서 안타면 안타, 홈런이면 홈런 자유자재로 생산해낼 수 있는 만능타자입니다.

게다가 뛰어나지 않지만 도루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양준혁은 2007년에 마흔이 다 된 나이에 20-20클럽(홈런 20개-도루 20개)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외야수 경력이 있으며, 프로필상 키도 188cm로 같습니다. 

양준혁은 자신을 닮은 김현수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는 후배인 김현수가 자신이 젊었을 때보다 훨 낫다며, 보다 강타자가 되려면 공을 치고 나서 방망이를 들어주는 동작이 중요하다고 김현수에게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덕택인지 올해 김현수는 역대 최초로 2년 연속 타율 0.350 이상을 기록하며 홈런 수도 부쩍 늘어났습니다. 김현수가 주변의 조언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어갈 만큼 영특하다는 것이죠.


▲ 김재현과 김현수는 신일고 동문 선후배이자만 작년, 재작년에는 최종전의 적수가 됐죠


차이점


(1) 열애설 터진 젊은 피 vs 불혹의 나이에 노총각 신세

이 두 선수는 위에서 언급했던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나이죠. 아직 김현수는 2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양준혁은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김현수는 연예인과 열애설로 인해 인터넷 곳곳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비해 양준혁은 '언제 결혼하느냐?'라는 질문조차 식상해질 정도로 세월이 지나가 버렸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양준혁이야 말로 야구와 결혼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가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야구 역사거든요. 출장을 기록하면, 최다출장, 안타를 추가하면 최다안타, 홈런을 치면 최다홈런이 되니까요.

(양준혁은 연예계의 인물들과는 두루 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채시라의 남편이자 가수였던 김태욱도 친한 고향 친구이죠. 모 영화 수상 소감에서 추자연 역시 양준혁 오빠에게도 감사드린다고 언급한 바 있구요. 이런 점들 때문에 예능 프로에서도 익숙한 느낌입니다.)


(2) 서울 출신 큰 귀염둥이 vs 지방 출신 동네 맏형

김현수는 서울 출신, 양준혁은 대구 출신이죠. 말하는 모습을 보면 김현수는 보통의 서울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양준혁도 지방 사람 그대로의 냄새가 나죠.
(이 부분에 대해 좋다 나쁘다, 우월하다 열등하다..... 그런 것과 결부시키긴 어렵습니다.)

김현수는 특유의 생글거리는 미소를 곁들여서 이야기할 때 보면 누나팬들의 귀여움을 차지할 만한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양준혁은 동네에 친한 삼촌 혹은 큰 형 같은 이미지가 강하죠. 소탈하면서도 장난끼 있고 편한 느낌.


(3) 무명의 설움 vs 신인왕 출신

김현수에 대해 실력 없는 무명 선수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신일고 시절 3번타자였고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던 유망주였습니다. 김현수가 고교선수로 뛰던 시절 동대문, 목동에서 여러 경기를 봤었습니다.

(당시 신일고에는 김현수가 2명이 있었습니다.
36번, 33번 김현수. 36번이 이 글의 주인공이며 36번이 3학년일 때 33번이 2학년이었죠.
36번은 이승엽이 삼성시절 달던 등번호라 고교 좌타자들이 선호하는 번호였죠.)

교교시절 김현수는 공을 잘 맞히는 것에 비해서는 장타력, 빠른 발, 좋은 수비를 겸비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모자란 능력들은 프로에 와서 보강한 것이죠. 그러나 김현수의 경우에는 싹수가 없었던 선수가 갑자기 뜬 것은 아닙니다. 그가 형편 없는 유망주였다기 보다는 스카우터들이 그를 놓쳤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1~2차지명을 받지 못한 그는 신고선수로 입단하여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신고선수는 대학 입학의 예를 들면, 정시합격자 외의 후기모집 합격자 혹은 후보 합격자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신고선수로 시작한 김현수는 정식 지명을 받지 못한 설움을 겪으면서 2군에서 칼을 갈아왔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 설움을 극복한 끝에 재작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선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죠.

양준혁도 처음부터 삼성행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삼성 라이온즈에 뛰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의 지명을 받는 바람에 군에 입대하며 삼성이 자신을 택할 때까지 기다렸죠. 결국 그는 소원대로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데뷔를 했으며, 그 해에 리그를 평정하는 활약을 펼쳐 신인왕에 올랐습니다.

▲ 양준혁은 <무릎팍도사>에서 까투리타령을 기가 막히게 불렀습니다.


정리하며


위와 같이 김현수와 양준혁의 닮은 점, 다른 점을 알아봤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두 사람이 동시에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양준혁과 김현수는 옛날 같으면 큰 형님과 막내동생, 요즈음 같으면 삼촌과 조카로 지낼 연배인데, 한 선수는 불로장생의 야구를 위해, 다른 한 선수는 최고를 향한 야구를 위해 뛰고 있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안타깝게도 두 선수는 정상급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즌 MVP의 운이 없었습니다. 김현수는 작년에 김광현, 올해 김상현에게 MVP를 양보해야 했고, 양준혁 역시 대단한 성적을 거두고도 이종범, 이승엽의 전성기에 가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현수는 앞으로 더 큰 선수가 될 자질을 갖고 있고, 양준혁 역시 그가 써가는 야구 역사를 후배 선수들이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도 앞으로 이들이 그라운드에 뛰는 그 날까지 응원하렵니다. 끝으로 김현수는 시즌 MVP와 팀 우승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며, 양준혁은 올 시즌 당한 부상을 극복하고 재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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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hoebe 2009.12.12 1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구도 내년이나 되야 또 볼수 잇겟군요.^^
    건강하고 재미난 주말 되세요.^^

  2. BlogIcon 탐진강 2009.12.13 0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비교이군요

  3. 아 +_+ 2009.12.14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야구의 역사이시고, 김현수 선수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야구의 버팀목이지요. 다만 고등학교 김현수 선수에 대한 장타력, 발, 수비에 대한 스카우터들의 핑계는 그야말로 '핑계'입니니다. 김현수 선수는 고교 시절 이미 타격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타력도 좋았습니다. 다만 수비의 경우, 고 3시절 약간의 부상으로 포지션을 이동했기에 해당 포지션에 적응하기 까지의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죠. 외야수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체전에서 훌륭한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도루의 경우 코치들이 부상을 염려해 뛰지 말라고 했구요.
    저 역시 김현수 선수의 시즌 MVP와 두산 우승 그리고 양준혁 선수의 빠른 복귀를 희망합니다 ♡

  4. BlogIcon 김지혜 2010.12.28 1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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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이자 탤런트인 윤여정은 영화 <여배우들>에 함께 출연한 이미숙, 고현정의 권유로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고 합니다.

40여년 연기 인생에서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처음이라고 하니, 그녀로서는 참 흥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편으로는,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왔던 윤여정이지만,
배우로서 그녀의 연기 인생은 어떻게 펼쳐져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그 궁금한 부분을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 영화 <여배우들> 중 한 장면.



연기자로서의 출발

배우 윤여정은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를 통해 처음 데뷔했습니다. 남궁원, 전계현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윤여정은 대종상 신인여우상,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속편으로 제작된 <충녀>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그녀는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죠.

또 윤여정은 영화 <화녀>와 <충녀> 사이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장희빈>에도 출연했었는데, 주인공인 '장희빈' 역을 맡았더군요. '장희빈'은 독한 연기의 상징이자, 매 10년간 비교가 되곤 하는 여배우의 '바로미터'같은 배역인데, 그녀가 이런 배역을 맡았다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 신혼 당시의 조영남-윤여정 부부 (1974년 8월 23일자 경향신문)

이처럼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대체로 여성적이고 다정다감하며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특하거나 똑부러지거나, 그녀만의 확실한 색깔의 연기가 작품의 성격과 어우러지며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윤여정은 연기 인생 대부분을 평범하지 않은 중장년 아줌마를 연기해온 연기자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녀가 활약한 1970년대 초반, 윤여정은 배우로서의 실력과 시대적인 운도 함께 따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문희의 은퇴, 윤정희의 출연자격정지로 인해 여배우 기근이던 상황에 출연신청이 밀려서 급기야 과로로 쓰러졌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무릎팍도사>에 나온 윤여정의 '70년대 김희선' 발언은 그만큼 당시 그녀의 인기와 위상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이순재-김혜자의 집안과 윤여정-김세윤의 집안은 대조적이었죠.


결혼과 귀국

1973년에 가수 조영남과 약혼한 뒤 1975년 미국 시카고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었죠. 이 당시 윤여정이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갈 무렵, 이민 간다는 헛소문 때문에 미국 가기 직전 문공부(지금으로 치면 문화관광부격)에 가서 6개월 내에 돌아온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써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웃기는 일이었죠.

그녀가 미국으로 가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중, 조영남-윤여정 부부는 1984년에 영구귀국을 선언했죠. 귀국 후 윤여정은 MBC의 베스트셀러극장 <고깔>이라는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컴백 신고를 했습니다.

                                ▲ 최근 김수현-임상수의 갈등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에미>

그리고 화제작 <어미>라는 영화를 찍었죠. 이 작품을 통해 김수현과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췄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김수현 사단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 황기성사단의 창립 작품인 <어미> (혹은 에미)를 통해 연출 박철수 감독, 시나리오 김수현, 여주인공 윤여정의 라인업이 구성되었고, 이들이 뜻을 모아 함께 촬영한 작품 <어미>는 결국 그해 대종상영화제의 작품상을 획득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쓴 김수현은 끝내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철수 감독이 시나리오 일부를 고쳤다고 해서 보이콧을 한 것이죠. 박감독은 그때를 회고하며 "김수현 작가로부터 똥감독이란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김수현 작가가 임상수 감독과 마찰을 빚은 바 있는데, 일부 언론에서는 당시의 박철수 감독을 떠올리는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 <사랑이 뭐길래>와 더불어 김수현-윤여정의 대표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그런데 윤여정과 김수현의 인연은 영화 <어미>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1972년 청룡영화상에서 첫 대면을 한 뒤, 윤여정이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이미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김수현과 윤여정의 이런 개인적 친분관계는, 작품을 통해서도 작가와 핵심인물의 관계로 빈번하게 이어지는데, <사랑이 뭐길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KBS의 <첫사랑>과 함께 역대 최고 시청률 1~2위를 기록했던 국민드라마였죠. <목욕탕집 남자들(1995)> 역시 당시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이 두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1987년 윤여정이 조영남과 이혼한 후, <사랑이 뭐길래(1992)>로 뛰어오르기까지 힘든 길을 걸었습니다. 이혼녀라는 꼬리표와 홀로 양육해야 할 두 아이는 그녀가 평생 짊어져야 할 몫이 됐기 때문이죠.

▲ 친구 같은 엄마로 나온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 아들 역은 최민식


2000년대와 영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의 연착륙 이후 윤여정은 여배우로서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출연한 드라마를 살펴보면, <거짓말>에서 친근한 어머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철없는 엄마와 같은 역을 소화했었죠.

그런데 이런 캐릭터들은 영화에서도 살아났습니다.
1990년 <죽어도 좋은 경험> 이후 13년 만에 찍은 영화 <바람난 가족>부터 시작된 영화계 진출은 독특한 캐릭터를 넓혀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 아들뻘 봉태규와 호흡을 맞췄던 영화 <가루지기>

<바람난 가족>에서는 바람난 시어머니의 캐릭터를 소화했죠. 2004년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는 친구 같은 엄마, <그때 그 사람들>은 철없는 엄마 등의 모습으로 등장했죠. 드라마에서 드러났던 중년 여인의 모습을 이어가면서도 그것을 다양하게 구현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의 수녀 역과 <가루지기>의 할멈 역은 서로 극과 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다작을 했으면서도 새로운 캐릭터가 나온다는 건 그만큼 끼와 노력을 겸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에서 여주인공의 고모(수녀) 역을 맡았던 윤여정


글을 마치며

언젠가 어느 노교수께서 은퇴하시기 직전에 "인간이 가장 서러울 때가 언제일 것 같으냐?"라고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집이 없을 때" 등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는데, 노교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정답은 '배고플 때'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일제시대와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온 분의 말씀이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람의 무언가를 쥐어짜내게끔 하는 것은 결국 '배고픔'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여정이 <무릎팍도사>에서 자신을 두고 '생계형 배우'라고 했던 말 역시 이혼 직후의 어려웠던 세월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한 때 최고에 올랐던 배우가 기자에게도 잊혀진 위치로 돌아와서 단역으로 섰을 때 격세지감을 느꼈을 겁니다.

윤여정은 당시 겪었던 시련을 <무릎팍도사>를 통해 털어놨습니다. <전원일기> 촬영 도중 김수미가 툭 던진 말 한 마디에 그냥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배우로서 성공한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윤여정이란 여인의 생명력과 현명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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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완득이 2009.12.10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무릎팍에서 다 나오지 않았던 내용들을 여기서 보고 가네요...
    권위가 없어서 좋아한다고 했다던 말처럼 위엄이 있어보이면서도 다정다감한 면이 있으시더라구요.
    잘 보고 갑니다.

  2. BlogIcon Phoebe 2009.12.10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분 처럼 멋지게 늙어가고 싶어요.
    자신의 색깔도 뚜렷하고
    너무 나서지도 않고...

  3. BlogIcon 김한준 2009.12.10 1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성도 뚜렷하고
    자기 주관 뚜렷하고
    윤여정씨와 김수현작가가 코드가 맞는 이유가 느껴지더군요.
    다만 김수현씨는 너무 자기 철학이 강해선지
    왜 영화가 뜨지 못하고 드라마만 쓰게 되는지 알겠더군요.
    저는 솔직히 너무 외골수적인 김수현씨의 작가관을 싫어하지만
    윤여정씨나 김수현씨처럼 자기 분야서 인정받기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온 점은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해요.
    외골수가 되선 안되겠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건
    자기 분야서 최고가 되는데 필요조건이기도 하고요.

  4. zzzz 2009.12.10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자기 색깔이 뚜렷한 배우죠.
    저 나이에도 "여배우"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배우가 아닌가 싶네요.
    젊었을때부터 천재감독 김기영 감동의 페르소나였다니,
    당시로서도 독특하고 진지한 배우가 아니었나 싶더군요.

    암튼,,무릎팍에서의 그녀,,
    참,,아름다웠습니다.

    그저 기가 세고 깐깐하기만 할줄 알았는데,
    솔직하고 조곤조곤하게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모습이 천상 사랑스런 여자더군요.
    또 한번 반했다죠?

    앞으로도 이렇게 나이들어서도 배우로써 늙어가는 여배우들을 자주 만나고싶네요.

    그리고,,윤여정씨,,지금 당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다들 그 나이에 보톡스에 시간을 역행하려 발악하는 모습인데,
    자연스럽게 멋지게 나이드는 모습에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5. BlogIcon 보안세상 2009.12.10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배우들의 꿈이 나이가 들어서도
    멋진 배우가 되는 것이라 하죠

    그 본을 보여주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6. BlogIcon 악랄가츠 2009.12.10 2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정말 부끄러운 사실인데,
    윤여정님의 성함을 이 글을 보고 있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작품 속에서 봐왔는데,
    성...성함을 모르고 봐왔네요 ㅜㅜ
    요즘 나오는 걸그룹 이름은 열심히 외우면서, 부끄럽습니다 ㅜㅜ
    방송 다시 찾아서 봐야겠어요!

    • BlogIcon 칸타타~ 2009.12.10 2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ㅎ
      부끄러워하실 것까지야 있습니까?
      취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걸요.
      찾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때론 스쳐지날 때가 많잖아요.

  7. BlogIcon 펨께 2009.12.11 0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러 제글에 댓글을 주신것 같은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분이 운영하고 계시는 사이트인지...
    저는 포도봉봉이라는 닉네임만 알고 있는데...
    윤여정씨는 제가 한국에서 생활할때 굉장히 유명한 배우였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녀라기 보다는 그당시 독특한 여배우로 많이 알려졌던것 같네요.
    물론 조영남씨를 빼놓을수는 없겠지요.
    올리신 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 BlogIcon 칸타타~ 2009.12.11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저희는 팀블로그 형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포도봉봉님, 저 칸타타~, 맹태님 등
      여러 명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네델란드가 궁금하면 님 블로그부터 찾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자주 뵐께요.

    • BlogIcon 포도봉봉 2009.12.11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펨께님~ 이 블로그는 김형오국회의장 비서실 사람들이 팀블로그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네달란드는 제가 정말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인데 펨께님 블로그에서 생생한 정보를 얻고 있답니다.
      펨께님도 좋은 하루 되시고 자주 찾아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