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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김형오 前 국회의장 


"동포에 대한 헌신·희생이 白凡정신… 정치인들에게 이게 안 보여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펴낸 김형오 前 국회의장

만난 사람=홍영식 논설위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인터뷰 장소로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을 선택했다. 그는 “정치지도자들은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는 백범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 솔선수범, 희생의 리더십을 실천한 위대한 혁명가입니다. 평생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 백범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합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백범의 차남 김신 전 교통부 장관(1922~2016)의 요청으로 2015년 7월부터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후 3년간 오롯이 백범의 일생을 좇아 그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는 “애국 열정의 휴머니스트를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든 날들”이라고 했다. 김 전 의장이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해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그 결과물이다. 김 전 의장이 ‘백범(白凡·평범한 사람)’을 대표해 물으면 김구 선생이 답하고, 김 전 의장이 추가 설명을 붙였다. 김 전 의장을 만나 엄혹한 시대에 맞서 몸을 던진 독립투쟁가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들어봤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백범에 관한 책을 펴내자고 제안했을 때는 좀 언짢게 생각했어요. 《술탄과 황제》(김 전 의장이 2012년 쓴 책)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니 나를 이용해 책 장사를 하려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봉사로 여기고 이 자리(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에 왔어요.(김 전 의장은 월급과 판공비 등을 일절 받지 않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를 야단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면서 혼잣말로 ‘요즘 젊은이들이 백범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이후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민이 컸습니다. 내가 책을 쓸 능력이 있는지, 이미 수많은 연구자가 백범 연구 결과물을 내놨는데 어떻게 차별화할지 고뇌의 시간을 보냈죠. 결국 ‘이 시대에 백범의 정신이 필요하겠구나, 한 번 해보자’고 결심하고 3년간 매달렸습니다.”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이 책이 제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릅니다. 탈고한 뒤 긴장이 풀렸는지 한 달 반을 편도선·기관지염으로 고생했어요. ‘제발 더 이상 책상에 앉아서 고생하지 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견뎌내고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책 제목이 독특합니다.

“백범일지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드물 겁니다. 백범이 살던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어느 시대나 젊은이들은 고뇌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죠.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와 투지가 필요합니다. 백범일지를 제대로 읽으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성세대도 백범일지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봉건적 세계관을 가졌던 백범이 혁명가로 변신한 정신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백범은 ‘상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입신양명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시대와 환경이 보통사람을 위대한 인생, 위대한 혁명가로 만들었어요. 백범의 올곧은 자세가 사상과 지향점을 키운 원동력입니다. 19세에 동학 접주가 돼 수천 명을 이끌기도 했지요. 그러나 준비 안 된 리더가 얼마나 무참하게 끝나는지 깨달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계몽운동을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자 감옥에 가고,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영글어지고 단단해졌습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외치면서 통합과 개화를 강조했습니다. ‘상놈 콤플렉스’에만 머물지 않고 성숙한 평등주의자로, 독립투쟁가로 나아갔습니다.”


▶백범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솔선수범입니다. 책임정신과 헌신, 이게 아주 남달랐던 거죠. 역경에 좌절하거나 온전히 타협해 주저앉는 스타일이 아니고, 극복하고 돌파해 나가면서 바르게 끌고 가려는 정신과 자세를 지녔습니다.”


▶백범은 치부조차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성공하면 자기를 미화하는 게 보통인데, 백범은 그러지 않았어요. 감옥에서 고초를 당할 때 ‘젊은 아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맛있는 사식을 넣어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까지 했다’는 내용까지 일지에 썼어요. 일지는 아들들이 보라고 쓴 일종의 유서입니다. 이런 것까지 글로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이지요. 험난한 도망자 생활을 할 때 도와준 처녀 뱃사공과의 러브 스토리를 일지에 남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범은 분열된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백범 리더십 중 가장 위대한 것은 투철한 애국심입니다.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바탕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게 임정을 끝까지 지킨 힘입니다.”


▶백범이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주도했습니다. 두 의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국내외 동포의 독립 투쟁을 가열시킨 촉매가 됐습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도 ‘한국과 합작해 대(對)일본 공동전선을 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백범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광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우리 스스로 광복에 힘을 보태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죠. 광복군이 참전했다면 광복 후 우리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갈 힘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전 여부는 곧 광복 후 외세 의존이냐, 탈피냐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안 거죠.” 


▶백범 리더십이 오늘날 우리 정치권과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백범은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공인으로서 깨끗했습니다. 돌아가실 때 돈 한푼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리도 노린 적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면 서슴지 않고 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자유한국당은 희생과 헌신의 자세가 보이지 않고, 백범이 가지고 있던 애국심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당도 문재인 대통령 개인 인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국정을 주도하고 여당은 심부름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합니까.

“지지율은 뜬구름 같은 겁니다. 높은 지지율이 계속 유지될지는 장담 못 합니다. 걱정되는 것은 경제입니다. 경제 정책이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문제입니다. 근로시간 단축도, 최저임금 인상도 우리가 처한 경제상황과 따로 놉니다. 기업 및 노동자와 우리 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연구한 끝에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규제 문제입니다. 정부 자체가 규제 덩어리입니다. 규제 권한이 강화되면 관료는 옷 벗은 뒤 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기죠. 국회의 규제 입법도 심각합니다. 규제 입법하는 의원 이름을 공개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공공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래서 어떻게 기업이 투자를 하고 고용을 하겠습니까.” 


▶국회의원 20년 경력 중 10년 이상을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관련 상임위에서 활동해 원자력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값싼 전기료로 생산성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자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탈(脫)원전 정책으로 전기료가 오르면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바보 같은 짓입니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춘 1등 산업을 밟아버리는 겁니다. 신재생에너지로 감당하기는 아직 어림없습니다. 국가재앙 시대를 자초하고 있어요. 국가의 미래가 망가지고 있는 것 같아 처연한 심정이 듭니다.”



김형오 前 국회의장은…

 

언론인 출신 14~18대 국회의원… 정계 은퇴 뒤 '역사 소설' 작가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언론인 출신으로 14~18대 국회의원(5선)과 국회의장(18대)을 지낸 정계 원로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1978년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으로 부산 영도구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2012년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작가로 변신해 《술탄과 황제》라는 역사 소설을 펴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정치인 시절부터 통찰력 있는 식견과 균형된 시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쓰는 술탄과 황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등도 펴내며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1966년 경남고 졸업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75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75~1978년 동아일보 기자 △1992~2012년 14~18대 국회의원 △2006~2007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7~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2008~2010년 국회의장 △2013년~ 부산대 석좌교수 △2015년~ 한국경제신문 객원대기자 △2015년~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 


정리=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



[2018-07-16 한국경제]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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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상상력ㆍ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야당 부활의 관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출간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내년 백범 70주기, 일지 72주년

책임ㆍ헌신으로 살아온 그의 정신

여야 정치인 모두가 되새겨봤으면”

“자기 세력만 옳다는 논리로 갈등

지금의 진영정치로는 희망 없어

진영보다 가치 중시하는 정치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1일 오후 마포 사무실에서 가진 한국일보 이유식 고문과의 대담에서 "우리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백범의 희생과 헌신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며 “상상력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 야당 부활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2018-07-11(한국일보)


김형오 전 국회의장에게 요즘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지난 달 백범 서거 69주년에 즈음해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에 대한 세간이 관심이 높은데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비상대책위원장 물망에 끊임없이 오르내려서다.


그는 2010년 6월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 임기를 마친 후 야인으로 돌아와 정치보다는 저술에 몰두해 왔다. 그동안 내놓은 책만 해도 '술탄과 황제' 등 여러 권이지만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다. 이런 와중에 그는 틈틈이 정치원로서 후배 정치인들에게, 또 청와대를 향해 쓴소리(그는 바른소리라고 했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김 전 의장에게 저술가와 정치인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백범의 삶과 사상을 새롭게 해석한 그의 책이 나온 시점에, 새 리더십을 찾아 헤매는 한국당의 러브콜이 이어진 것이 참 묘하다. '벼랑에서 잡은 나뭇가지마저 놓아버리는' 백범의 결기가 지금 한국당에 꼭 필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했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명망가를 얼굴 마담 삼아 이 궁지만 넘겨보자는 잔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3년째 백범선생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그를 지난 11일 오후 마포 사무실에서 만나 왜 지금 백범을 다시 불러냈는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국당의 살 길은 뭔지 묻고 답했다.


-한문체로 된 백범일지를 한글로 풀어쓴 책이 1947년 처음 나온 뒤 지금까지 300종이 넘는 해석본이 다양한 내용과 형태로 출판됐다. 우리나라에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백범일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백범이 묻고 김구가 답하는 새로운 접근과 내용이라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 왜 하필 백범인가. 


“책 서문에 자세히 썼지만 이 나라가 거저 생긴 게 아니라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과 아픔으로 일군 나라라는 것을 동시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백범일지는 일기(日記)가 아니라 일지(逸志), 즉 소소한 이야기다. 아들에게 전하는 유서 형식으로 ‘못난 아비의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아비 대신 훌륭한 사람을 찾아 스승으로 섬기라’는 뜻과 함께 그의 지고지순한 국가관과 민족애, 헌신적인 삶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어떤 회고록이나 자서전도 이 책의 솔직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울림이 더 크다. 2015년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이후 효창원의 백범 묘소와 동상 앞에서 수없이 그와 대화한 결과물이다.”


-최근 정치상황이나 정치리더십, 특히 지방선거 참패 이후 혼란과 갈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유한국당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내년이면 백범 70주기이자 백범일지 출판 72주년이다. 평생을 책임과 헌신으로 살아온 백범의 정신과 자세를 오늘날 여야 정치인 모두가 되새겨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500년 전 그리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는 정치리더의 4대 덕목으로 지식과 소통, 애국심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백범이야말로 이런 덕목을 몸으로 실천했다. 특히 솔선수범에 근거한 애국심과 도덕성은 지금 우리 정치와 보수야당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제목을 단 이유 등 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했지만 이미 많은 언론이 다룬 내용이어서 화제를 돌렸다. 김구의 책임과 헌신 리더십을 이 시대가 요구한다면 그 자신도 그런 요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더구나 대혼란에 빠진 한국당은 그가 한때 몸담았고 국회의장의 명예까지 안겨줬던 정당의 후신 아닌가.


-한국당이 쇄신의 깃발을 들고 개과천선하겠다며 강호의 명의들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 차원의 비대위원장 후보를 마구잡이로 언급해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망신을 자초했다. 유력 후보로 계속 거론되고 구체적 제안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입장에서 이런 방만한 방식을 꼬집는다면.


“난 정계를 은퇴한 사람이고, 백범선생기념사업회를 마지막 봉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후배들이 나를 찾아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 혹은 메스를 쥐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원들의 일치된 각오와 자세, 즉 나를 버려서라도 변화를 수용하고 보수의 새 미래를 여는 밀알이 되겠다는 폭넓은 공감대를 먼저 만들어야한다고. 또 말로만 반성을 외치며 이회창이니 이국종이니 명망있는 얼굴마담을 쫓아다니는 것은 ‘낚싯대로 사자를 사냥하겠다’는 심보이니 그만두라고. 솔직히 말해 내가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아니다. 지금 날보고 비대위원장 맡으라고? 한마디로 턱없는 소리다.”


-한국당은 궤멸 수준의 패배를 당하고도 왜 감동을 주는 정치를 못하나. 시대착오적인 친박-비박 싸움을 거듭하며 네탓 타령만 하는 한국당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최근 한 토론회에서 한국당 중진들을 향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심정으로 깨끗이 던져라”고 했던데 어떤 맥락과 의도를 담은 충고인가.


“요술방망이를 가진 누군가 와서 금나와라 뚝딱 식으로 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중진들이 앞장서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것이다. 국민의 엄중한 심판은 복도에서 무릎 꿇는 참회 코스프레로 해소될 사안이 아니다. 혁신비대위가 필요한 위기상황이라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반성과 살을 내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한국당이 지금 그런가. 다음 총선까지 아직 2년 가까이 남았으니 이번 국면만 잘 모면하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회주의적 현실도피적 행태가 더 판을 치는 형국 아닌가. 기득권을 누려온 중진들이 한국당의 존폐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정치의 앞날을 내다보는 큰 눈을 가져야 답이 보인다. 불출마든 퇴진이든 죽을 각오로 임하면 반드시 살 길이 보이는 법이다.”


-같은 자리에서 초ㆍ재선들의 무사안일을 책망하며 “더 이상 위아래 눈치보지 말고 어떻게 몸을 던질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달라”고 주문했다. 당부하고 싶은 실천의 내용이 뭔가.


“2016년 4ㆍ13 총선에서 200석 운운하던 새누리당이 민주당에 밀려 2당으로 몰락한 직후 초선 대상 연찬회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당지도부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청와대의 공천 전횡으로 보수정당 사상 최악의 패배를 맛보는 동안 누구 하나 쓴소리한 적이 있느냐’고 질책하며 초선들이 앞장서 사나흘 철야토론하며 뼛속까지 반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후 어떻게 됐는가. 뭐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초선들부터 무리지어 친박 행세를 일삼고 취미삼아 정치를 하지 않았나. 낡고 늙은 이념에 물든 당 대표가 막말과 기행으로 당을 말아먹어도 차기 공천을 좇아 각자도생하지 않았는가. 박근혜 정부의 불행은 나이먹은 늙은이든, 애 늙은이든 잿밥에만 눈이 어두워 한국당을 농단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상력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야당 부활의 관건이다.”


-보수야당의 몰락을 초래한 배경에는 보수정당이 안보와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너무 쉽게 정치를 해온 것도 있다고 본다. 보수세력이 시대와 세대가 바뀌고 사회의 의제와 가치가 변하는 것에 유연하고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우리 세상이 계속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문제를 외면했다는 뜻이다. 선배 정치인들도 반성해야 하지 않나.


“3김 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우리 정치의 패턴은 보수 정치체제와 계보정치다. 그 계보정치가 지금은 진영정치로 퇴화했다. 자기세력만 옳다는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갈등의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선배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한 결과지만, 이런 타성에 젖으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은 공멸이다. 보수정치 차원이 아니다. 이제야 말로 진영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 같은 보수가, 진보 같은 진보가 나와 한국 정치가 가야할 길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보수나 진보가 보다 분명한 개념을 세워야 한다. 완전히 바꿔야 할 계기를 국민들이 6ㆍ13에 메시지를 준 거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도 동시에 준 메시지라 본다."


-보수진영이 사람과 자원을 키우기보다 수십 년 동안 곳간에 있는 것만 빼먹으며 기득권만 누리다가 고립무원의 거지꼴 신세가 됐다. 1960년대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쇠락하던 미국 보수를 다시 세우고 레이건 시대에 꽃피운 ‘헤리티지 재단’ 같은 싱크탱크나 보수 아카데미를 통한 지속적인 인력충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장 새 기구를 만들기 어렵다면 당 산하의 여의도연구소를 활용할 수도 있다. 나는 정당이 국민 혈세인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것을 오래 전부터 반대해왔다. 민간 후원금이나 당비로 운영되는 게 옳다. 다만 정책을 연구하는 조직이나 싱크탱크에는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찬성한다. 당 외곽이나 대학 등에 보수의 이념과 전통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재단이나 아카데미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지가 그룹도 중요하다."


-영국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 일본 자민당의 사례에서 한국당이 벤치마킹할 부분이 있겠는가.


"보수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80년대 초 영국 보수당 등의 역사와 사례를 분석한 소책자를 낸 적 있다. '시대정신에 민감한 개혁과 끊임없는 자기 수혈'을 결론으로 적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흔히 보수라고 하면 퇴행과 정체, 기득권을 연상하는데, 안정적 개혁과 인재 존중이야말로 보수의 참모습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한국당은 보수가 아니라 남은 몇 푼에 집착하는 수구적 집단이다. 그라운드 제로까지 내려가 고민하고 공부하며 집을 다시 지어야 한다. 2020년 21대 총선까지 남은 1년 반 남짓한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찬란한 부활도 가능하고 참혹한 폭망도 가능하다."


-다시 한번 묻자. 한국당 비대위원장 맡는 것도 책임과 헌신인데.


"소를 물가까지 끌고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먼저 내 몫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익집단엔 관심이 없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com 정리=변한나(논설위원실)



[2018-07-13 한국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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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 서울대동창회 신문] - <명사칼럼> 김형오 전 국회의장


영웅은 죽어서 탄생한다



김형오 외교67-7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전 국회의장



김구,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다 


1896년 초봄, 기울어져 가던 나라의 한 청년이 어느 나루터 여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두루마기 밑에 칼을 숨긴 일본인을 맨손으로 처단했다. 일인의 몸에서 나온 거금 800냥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주라 이른 청년은 그 현장에 황해도 해주 텃골 김창수가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이 왜놈을 죽였노라고 방을 써 붙였다. 국모보수, 바로 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고 당시에는 시신도 찾지 못한 치욕과 분노의 사건(을미사변, 1895)에 대한 복수였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나라가 온통 들끓었던 해다. 김창수는 김구의 청년기 이름, 그의 나이 21세였다. 


김구는 일생의 스승이었던 유학자 고능선으로부터 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더럽게 망한다 울분에 찬 훈시를 듣고 스승과 함께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굳게 결심한다.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一死報國)하기로.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수십 번의 망설임 끝에 김구는 스승으로부터 각인된 평생의 경구(警句)를 되뇌며 최종 결심을 굳힌다. “절벽에선 붙잡은 나뭇가지마저 놓아버려라!” 그는 국모(명성황후)의 비참한 최후에 항거하는 조선인의 결기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로 마음먹는다청년 김구를 일약 전국적 인물로 만든 치하포 의거는 그렇게 탄생했다. 


국모보수는 안중근 의사가 그로부터 15년 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며 내세운 15개 이유 중 첫 번째였다. 을미사변은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던 것이다.


이봉창, 죽음으로 영원한 쾌락을 얻다 


내 나이 31, 그동안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얻고자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일본인 행색의 노동자 이봉창이 첫 대면에서 김구에게 한 말이다. 그는 일본 천왕을 죽이겠노라는 결의를 밝혔고, 최소 1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김구의 지침에 따라 때를 기다린다. 이따금씩 자기가 공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끼니도 거르는 가난한 임시정부 직원들에게 밥과 술을 대접하면서. 


그로부터 1년 후 첫 공작금이 이봉창에게 전해졌고, 며칠 지나 그는 김구를 다시 만났다. “선생이 허름한 바지춤에서 거금을 꺼내 제게 줄 때 눈물이 나더이다. 상해 조계(租界)를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선생은 제가 이 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달아나 버려도 어쩌지 못하겠지요. 내 평생 이런 신뢰를 받아보긴 선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반드시 대업을 완수하겠습니다.” 이봉창은 도쿄로 가 천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그해(1932)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윤봉길, 역사의 시계바늘을 움직이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서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 사랑하는 처자에게 이 글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오른 23세 청년 윤봉길. 그는 이봉창 의거 직후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채소 장수를 하던 상해의 홍구공원이 스스로 목숨을 던질 곳이 될 줄이야. 


1932429, 역사의 날이 밝았다. 윤봉길은 김구가 미리 부탁해둔 동포의 집에서 마치 새벽 일하러 가는 농부처럼아침밥을 든든히 먹는다그러고는 거사 자금으로 산 새 시계를 김구의 헌 시계와 바꾸자고 한다. 자기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필요 없다면서. 택시를 타기 전 윤봉길은 주머니를 털어 차비를 내고도 여유가 있으니 염려 말라면서 가진 돈을 김구에게 건넨다. 김구는 목이 메어 작별 인사를 한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그날 홍구공원의 일본 천왕 생일 축하 및 상해사변 기념식은 윤봉길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의 독립 투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미국인 피치 씨 부부 집에서 은신하던 김구가 성명서를 발표할 때까지 윤봉길은 갖은 고문 속에서도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두 눈을 가린 채 형틀에 묶여 원수의 나라 하늘 아래에서 총살당한 그의 품속에는 나무 십자가가 동행했다.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불쏘시개가 돼야 


위 세 편은 백범일지를 중심으로 엮어본 것이다. 김구와 이봉창윤봉길, 이 세 사람은 서울 용산 효창공원 안에 묘소가 모셔져 오늘도 지하에서 나라 걱정을 하고 계시다. 안중근 의사 가묘도 그 옆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의 영웅, 반신반인(半神半人)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죽지 않는 편안한 길과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웅의 길 중에서 후자를 택한다. 그렇듯 영웅은 죽어야 하고, ‘영웅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비로소 영웅이 된다. 영웅 흉내만 내려 하거나 결과가 아닌 동기와 과정으로 영웅 대접을 받으려 해서는 일도 그르칠 뿐만 아니라 평도 나빠진다. 


바야흐로 남북 간에 새 시대 새 역사를 여는 영웅적(?) 대화가 시작됐다. 잘하면 한반도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영웅이 탄생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웅은 반드시 사후(死後-事後)에 탄생한다는 것이다. 떡과 과일부터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온몸과 온 마음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살 수 있고 영웅도 될 수 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다. 왔을 때 전력을 다해 매진해야 한다. 지금이 그 기회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수많은 도전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시대를 되돌아보며 결코 실패한 영웅들의 전철(前轍)을 되밟지 말아야 한다. 자기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성공도 못하고 영웅도 되지 못한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 김구 선생이 역설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이 영웅들의 애국심과 희생적 노력을 불쏘시개 삼아 마침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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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4월 13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99주년 임시정부수립 기념식 및 임시정부선열 추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나라의 주권이 뺏긴 상황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임시정부를 설립하여 독립을 위한 길을 모색하며 투쟁했습니다. 세계 어떤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런 역사입니다. 행사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올립니다. 

  김구 선생께서 일생을 바쳐 헌신한 임시정부가 내년이면 수립 100주년이 됩니다.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진 제공 : 뉴스1


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사진제공 : 조선일보


사진제공 : 한겨레


사진제공 : 김구기념관



사진제공 : 김구기념관


사진제공 : 김구기념관


사진제공 : 김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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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길’을 따라 걸은 1박 2일


 

- 김 형 오 -


출간을 준비 중인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가제) 집필진과 함께 마곡사(麻谷寺)를 찾았다.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마곡사는 치하포 의거(1896년)로 수감되었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년) 선생이 1898년에 탈옥한 후 반 년 정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승려 생활을 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우리가 마곡사에 간 날은 마침 김구 선생이 태어난 날(8월 29일)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백범일지』에서 마곡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특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世間)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간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어느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심정을 보는 듯했다.

김구 선생이 속세를 떠나 마곡사에 들어갈 당시의 심경을 떠올리며, 우리도 복잡하고 바쁜 도심을 떠나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마곡사에 도착하자 주지인 원경(圓鏡) 스님이 직접 나와 맞아주셨다. 선생(원종)이 머물렀던 절의 주지가 법명이 비슷하여 더욱 호감이 간다. 스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마곡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인 일양(溢洋) 스님의 안내로 마곡사 순례를 시작했다. 넘칠 일(溢)자와 바다 양(洋)자를 쓰신다는 일양 스님. 바다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사찰 안에서 장난삼아 ‘쓰나미’라고 불린다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스님의 안내로 처음 만난 것은 대광보전(大光寶殿)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이었다. 라마교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그래서인지 이전에 봐왔던 석탑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첫 인상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는 느낌도 들었다.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에 상부는 라마교 형식을 그대로 닮은 구리로 된 조형물을 올렸다. 풍마동(風磨銅)이라는 원나라 제품이라 한다. 티베트·네팔 등지에서 보던 스투파 형식의 구리 불탑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다. 탑 주변에는 아직도 붉고 노란 꽃이 한 꽃송이에 피어 있는 화초들이 우리를 반긴다. 꽃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 하여 ‘금관화’라는데 외래종이다. 

         금관화 둘레와 오층석탑, 심검당과 대광보전                고려석탑과 원나라 양식이 결합된 오층석탑과

                                                                                 상부의 풍마동


                             금 관 화                        대광보전 현판 : 표암 강세황의 낙관이 뚜렷하다

오층석탑을 본 후 대광보전으로 향했다.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이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13년(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년)의 현판이 도드라진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불상이 불전의 가운데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모셔진 불상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 관람객은 놓치기 쉽다며 스님이 직접 불상 뒤로 안내한다. 앞의 불상 크기의 커다란 관음보살상이 지그시 내려다본다. 앞에는 진리와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불상, 바로 뒤에는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 그림, 절묘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대광보전 안의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비로자나불               관음보살 그림


법당 불상 앞바닥에는 앉은 뱅이가 걸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짰다고 하는 삿자리(갈대 또는 나무를 깎아 엮어 만든 자리)가 인조 카펫 아래 덮여 있다. 물론 앉은 뱅이는 삿자리를 완성한 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대광보전 전면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에 눈길이 간다. 백범이 환국 후 마곡사를 다시 찾았을 때(1946년) 찍은 사진을 보면 색칠을 다시 한 듯 주련 글씨가 선명했지만, 지금은 색이 완전히 바래서 고아(古雅)한 느낌을 준다. 돌아 나오니 친절하게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잘 설명된 안내판이 있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청정함이 극에 이르면 광명이 걸림 없으니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히 비출 뿐이라.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비록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이 유혹을 만날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 주련 :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기둥에 시구(詩句)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주련은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문화유산이다. 사찰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 또는 고승들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주련으로 써 붙인다.

이 중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却來觀世間)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猶如夢中事)”라는 구절은 첫머리에 백범이 마곡사를 찾을 때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간다”는 표현과 겹친다. 마곡사를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어서도 백범은 주렴 구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광보전은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광보전에서 나와 계단을 따라 뒤편으로 올라가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향했다. 마곡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밖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은 이층짜리 건물이었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천장이 높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천장 가운데 유리창을 내어 법당 안으로 자연 채광이 되도록 했다. 바로 그 부분이 밖에서 볼 때 1층과 2층을 구획 짓는다. 이곳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자리하고,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일양 스님이 “이 중 한 나무 기둥을 잡고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서 우리 일행에게도 한 번 해보라고 권유한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인지 기둥에는 윤기가 흐른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유형문화재 제191호)가 봉안되어 있다. 마곡사 옛 스님의 솜씨라는데 그림의 크기도 수준도 보통이 아니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대웅보전은 마곡사의 건물 중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16세기 말 축조되었다고 한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金生, 771~?)의 글씨라는데 증명할 길은 없다.

대웅보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 옛 부처님 나시기 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 의젓한 동그라미 하나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으니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 어찌 가섭이 전하리.
本來非皂白(본래비조백)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으니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도다.

대웅보전 주련

                      마곡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내부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는 일행

마곡사의 중심 불전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을 본 후, 백범당(白凡堂)으로 향했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있을 당시 생활했던 공간은 원래 심검당(尋劍堂)이었으나, 선생을 기려 호를 따 백범당으로 별도 배치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과 친필 휘호 ‘행복(幸福)’, ‘양심건국(良心建國)’ 등이 걸려 있고, 옆에는 김구 선생이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았을 때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백 범 당                                          백범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

심검당은 현재 오층석탑의 오른편, 대광보전 가기 전에 있다. ‘ㄷ’자형 건물인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정면 건물로만 보인다. 마곡사에 여러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서 측면 건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 어느 방에 백범이 기거했을 것이다. 영·정조 시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년)의 심검당(尋劍堂) 글씨가 오른쪽에,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년)의 마곡사(麻谷寺) 글씨는 왼쪽에 나란히 걸려 있다. 해강의 ‘마곡사’ 글씨가 이 절의 로고인 듯 여기저기 해강의 글씨로 표지를 해두었다. 해강의 글씨는 드물게도 대나무 그림이 배경을 이룬다. 삼일만세운동 때 명월관(明月館) 주인(?)인 죽농 안순환(竹儂 安淳煥, 1871~1942년)의 그림이다. 교수들과 함께 가니 의외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된다. 김구 연구 전문가들로서 한문과 한국 근현대사에 해박하여, 나 같은 사람의 수준을 올려 주기에 딱 좋은 여정이 되었다.

‘칼’은 백범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칼’을 씻고자 찾아온 그를 ‘칼을 찾는 집(尋劍堂)’이 맞이한다. 물질의 칼이 아닌 마음의 칼을 찾으라는 뜻이리라. 심검당 글씨는 마음을 씻을 칼을 찾는 이의 마음을 칼같이 차갑게 하는 듯하다. 옆의 부드러운 마곡사 글씨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마곡사 편액                                                    심검당 편액

백범당부터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범 명상길이 시작된다. 마곡천(麻谷川)을 따라 걷다가 만난 곳은 김구 선생이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삭발터. 젊은 나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과 고초를 다 겪은 그였지만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도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며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 곡 천                                               백범 김구선생 삭발터 

마곡천을 건너 산행을 시작했다. 산 속의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마곡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하다는 군왕대(君王垈)였다. 우리는 지기를 느껴보기 위해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강한 기운 덕분일까? 땅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선의 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년)도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김구 선생도 이곳에 올라 땅의 기운을 느끼며, 조국과 우리 민족의 힘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지 않았을까?

                     군왕대로 올라가는 길                                군왕대의 지기를 느껴보았다.

군왕대를 뒤로 하고 마애불(磨崖佛)이 있다는 백련암(白蓮庵)으로 향했다. 백련암으로 가던 길에 영산전(靈山殿)과 매화당(梅花堂)에 들렀다. 영산전에도 군왕대와 마찬가지로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명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마곡사에 은거할 때의 일이다. 세조는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로 행차했으나, 김시습은 미리 알고 마곡사를 떠난다. 세조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타고 온 가마를 두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사용했던 가마는 현재 마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영산전의 옆에는 매화당(梅花堂)이 자리하고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매화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禪房)이지만 한때 호신술로 유명했던 매화당 권법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라고 한다.

                              영 산 전                                            세조의 친필 영산전 현판

영산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 허공이 큰 깨달음 속에서 생겨난 것이
如海一漚發(여해일구발)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 듯하니
有漏微塵國(유루미진국) 티끌같이 수없는 중생의 세계도
皆依空所生(개의공소생) 모두 허공을 의지하여 생겨났도다
漚滅空本無(구멸공본무) 물거품이 소멸하듯 허공도 본래 없거늘
況復諸三有(황부제삼유) 하물며 다시 삼제가 있을 수 있을까?

영산전 주련

백련암을 찾아 가는 도중에 “백범이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백련암에는 백범의 흔적은 없고 바로 뒤의 마애불만 보았다. 안내자도 설명도 없어 조성연도조차 불확실한 수수한 마애불은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 볼 뿐이다.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다. 웬일인가 싶었더니 스님이 가리킨다. “저 송림(松林) 좀 보세요. 주지 스님이 이리로 올라가라 했는데 우리는 내려갑니다.” 과연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자랑할 만한 숲이요, 공기의 질이 다른 것 같다.

                              백 련 암                                                 백련암 마애불 앞에서

마곡사 순례를 마친 후,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과 차담을 잠시 나누었다. 원경스님으로부터 김구 선생에게 있어 마곡사, 마곡사에 있어 김구 선생의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차담 후, 오늘의 답사를 정리하고 ‘백범의 길’ 집필에 대한 방향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본격적으로 가졌다. 앞으로의 답사와 조사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특히 아직 우리가 찾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자료 수집에 전 국민이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형오 협회장과 원경스님                                     원경스님과의 차담

첫날의 모든 일정을 마친 후, 각자의 방사로 돌아가 개인시간을 가졌다. 밤 10시,태화산(泰華山)의 맑은 공기와 선선한 바람이 방 안을 감돌고, 마곡사의 은은한 범종 소리가 귓전에 남는다. 일정을 함께 한 교수 한 분이 말했다. “이렇게 빠듯한 일정을 자로 잰 듯이 지키면서 마음 편히 온종일 보내 본 행사는 근래 처음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국에 뿌려진 백범의 발자취를 더듬는 이 쉽지 않은 일이 결코 어려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기분으로 잠이 들 수 있었다.

                                                        범종루의 동정각
 

[1부 마침.]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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