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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김형오 前 국회의장 


"동포에 대한 헌신·희생이 白凡정신… 정치인들에게 이게 안 보여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펴낸 김형오 前 국회의장

만난 사람=홍영식 논설위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인터뷰 장소로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을 선택했다. 그는 “정치지도자들은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는 백범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 솔선수범, 희생의 리더십을 실천한 위대한 혁명가입니다. 평생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 백범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합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백범의 차남 김신 전 교통부 장관(1922~2016)의 요청으로 2015년 7월부터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후 3년간 오롯이 백범의 일생을 좇아 그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는 “애국 열정의 휴머니스트를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든 날들”이라고 했다. 김 전 의장이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해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그 결과물이다. 김 전 의장이 ‘백범(白凡·평범한 사람)’을 대표해 물으면 김구 선생이 답하고, 김 전 의장이 추가 설명을 붙였다. 김 전 의장을 만나 엄혹한 시대에 맞서 몸을 던진 독립투쟁가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들어봤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백범에 관한 책을 펴내자고 제안했을 때는 좀 언짢게 생각했어요. 《술탄과 황제》(김 전 의장이 2012년 쓴 책)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니 나를 이용해 책 장사를 하려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봉사로 여기고 이 자리(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에 왔어요.(김 전 의장은 월급과 판공비 등을 일절 받지 않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를 야단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면서 혼잣말로 ‘요즘 젊은이들이 백범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이후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민이 컸습니다. 내가 책을 쓸 능력이 있는지, 이미 수많은 연구자가 백범 연구 결과물을 내놨는데 어떻게 차별화할지 고뇌의 시간을 보냈죠. 결국 ‘이 시대에 백범의 정신이 필요하겠구나, 한 번 해보자’고 결심하고 3년간 매달렸습니다.”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이 책이 제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릅니다. 탈고한 뒤 긴장이 풀렸는지 한 달 반을 편도선·기관지염으로 고생했어요. ‘제발 더 이상 책상에 앉아서 고생하지 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견뎌내고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책 제목이 독특합니다.

“백범일지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드물 겁니다. 백범이 살던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어느 시대나 젊은이들은 고뇌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죠.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와 투지가 필요합니다. 백범일지를 제대로 읽으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성세대도 백범일지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봉건적 세계관을 가졌던 백범이 혁명가로 변신한 정신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백범은 ‘상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입신양명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시대와 환경이 보통사람을 위대한 인생, 위대한 혁명가로 만들었어요. 백범의 올곧은 자세가 사상과 지향점을 키운 원동력입니다. 19세에 동학 접주가 돼 수천 명을 이끌기도 했지요. 그러나 준비 안 된 리더가 얼마나 무참하게 끝나는지 깨달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계몽운동을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자 감옥에 가고,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영글어지고 단단해졌습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외치면서 통합과 개화를 강조했습니다. ‘상놈 콤플렉스’에만 머물지 않고 성숙한 평등주의자로, 독립투쟁가로 나아갔습니다.”


▶백범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솔선수범입니다. 책임정신과 헌신, 이게 아주 남달랐던 거죠. 역경에 좌절하거나 온전히 타협해 주저앉는 스타일이 아니고, 극복하고 돌파해 나가면서 바르게 끌고 가려는 정신과 자세를 지녔습니다.”


▶백범은 치부조차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성공하면 자기를 미화하는 게 보통인데, 백범은 그러지 않았어요. 감옥에서 고초를 당할 때 ‘젊은 아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맛있는 사식을 넣어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까지 했다’는 내용까지 일지에 썼어요. 일지는 아들들이 보라고 쓴 일종의 유서입니다. 이런 것까지 글로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이지요. 험난한 도망자 생활을 할 때 도와준 처녀 뱃사공과의 러브 스토리를 일지에 남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범은 분열된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백범 리더십 중 가장 위대한 것은 투철한 애국심입니다.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바탕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게 임정을 끝까지 지킨 힘입니다.”


▶백범이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주도했습니다. 두 의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국내외 동포의 독립 투쟁을 가열시킨 촉매가 됐습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도 ‘한국과 합작해 대(對)일본 공동전선을 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백범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광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우리 스스로 광복에 힘을 보태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죠. 광복군이 참전했다면 광복 후 우리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갈 힘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전 여부는 곧 광복 후 외세 의존이냐, 탈피냐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안 거죠.” 


▶백범 리더십이 오늘날 우리 정치권과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백범은 생각과 말,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공인으로서 깨끗했습니다. 돌아가실 때 돈 한푼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리도 노린 적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면 서슴지 않고 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자유한국당은 희생과 헌신의 자세가 보이지 않고, 백범이 가지고 있던 애국심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당도 문재인 대통령 개인 인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국정을 주도하고 여당은 심부름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합니까.

“지지율은 뜬구름 같은 겁니다. 높은 지지율이 계속 유지될지는 장담 못 합니다. 걱정되는 것은 경제입니다. 경제 정책이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문제입니다. 근로시간 단축도, 최저임금 인상도 우리가 처한 경제상황과 따로 놉니다. 기업 및 노동자와 우리 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연구한 끝에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규제 문제입니다. 정부 자체가 규제 덩어리입니다. 규제 권한이 강화되면 관료는 옷 벗은 뒤 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기죠. 국회의 규제 입법도 심각합니다. 규제 입법하는 의원 이름을 공개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공공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래서 어떻게 기업이 투자를 하고 고용을 하겠습니까.” 


▶국회의원 20년 경력 중 10년 이상을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관련 상임위에서 활동해 원자력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값싼 전기료로 생산성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자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탈(脫)원전 정책으로 전기료가 오르면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바보 같은 짓입니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춘 1등 산업을 밟아버리는 겁니다. 신재생에너지로 감당하기는 아직 어림없습니다. 국가재앙 시대를 자초하고 있어요. 국가의 미래가 망가지고 있는 것 같아 처연한 심정이 듭니다.”



김형오 前 국회의장은…

 

언론인 출신 14~18대 국회의원… 정계 은퇴 뒤 '역사 소설' 작가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언론인 출신으로 14~18대 국회의원(5선)과 국회의장(18대)을 지낸 정계 원로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1978년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으로 부산 영도구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2012년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작가로 변신해 《술탄과 황제》라는 역사 소설을 펴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정치인 시절부터 통찰력 있는 식견과 균형된 시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쓰는 술탄과 황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등도 펴내며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1966년 경남고 졸업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75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75~1978년 동아일보 기자 △1992~2012년 14~18대 국회의원 △2006~2007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7~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2008~2010년 국회의장 △2013년~ 부산대 석좌교수 △2015년~ 한국경제신문 객원대기자 △2015년~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 


정리=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



[2018-07-16 한국경제]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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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의 위기는 爭頭때문…백범 爭足에서 답 찾아야”






자신을 버리면 어떤 연정도 가능

상대를 품는 백범 리더십 배워야

 

정치판 개혁을 넘어 근본틀 바꿔야
정치문화도 시민의식도 혁신대상 


“백범 김구 선생은 우파인가, 좌파인가. 보수 정치 위기의 상황에서 백범 선생에게 무얼 배워야 하나.”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란 책을 쓴 김형오 전 국회의장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첫 질문에 ‘둘 다 틀렸다’고 말했고, 두 번째 질문에는 ‘쟁족(爭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진 것 모두 버렸다면 해답 냈을것  


“온존(溫存)하고 쟁두(爭頭)하니까” 위기다. 자리를 지키고 모두 머리가 되려고만 하니 위기가 시작된다는 설명이다.  


김 전 의장은 “앉자마자 비대위원장 진짜 안 하느냐고 물었잖느냐. 왜 그런 질문이 나왔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정치인들은 다 ‘미 퍼스트(Me first)’한다. 그걸 기자도 알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처음 들어가서 문지기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더 높은 자리를 줬다. 그러자 화를 냈다”며 “평생을 발이 되고자 했다. 쟁족의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내 후배들 다 똑똑하다. 가진 것 모두 다 버렸다면 왜 위기에 대한 해답이 안 나왔겠느냐”고 설명했다. 


쟁족 정신이 없으니 생긴 폐단이 계파다. 계파가 없으면 힘이 없고 흔들린다. 쟁두하려 하니 날 받쳐줄 계파를 만든다. 이걸 바꿔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백범 선생은 상해에서 공산주의적 사고에 물든 사람과 대립각을 세웠으면서도 이후 과감하게 그들과 연정을 했다”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많은 파벌과 계파를 엮어 연합했다. 그릇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대의를 위한 일을 한 것”이라고 되짚었다. 


“그래서 백범 선생에게 그때 다들 ‘낭만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근데 백범 선생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따지지 않았다. 30여년간 일제와 투쟁할 때 많은 사람이 전향했다. 계파주의가 판을 쳤다. 공산파, 민족파가 다퉜다. 그래도 백범은 끝까지 임시정부를 품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책에서 백범 선생을 ‘우익세력’에 가깝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백범 선생이 공산계와 연정한 이유를 김 전 의장은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서라고 했다. 보수가 계파다툼으로 위기에 빠졌기에, 대의를 생각한다면 상대를 품고 가는 백범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소리다. 


김 전 의장은 “말은 쉽지만, 쟁족이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안다. ‘희생하겠다, 헌신하겠다’ 말하지만 속으론 챙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를 버리면 길은 생긴다. 일본강점기 때 백범 선생도 버렸다”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은 천당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복당ㆍ잔류파든, 새누리당에서 분화됐던 한국당ㆍ바른정당이든 야권의 차이점이 일본강점기 좌ㆍ우익의 그것보다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계파로 말미암아 머리 되려는 사심을 접으면 포용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는 “되풀이되는 온존이고 쟁두다. 비대위원장 안 한다 했으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기도 하다”며 “어떤 후배든 혁신하고자 할 때에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인 ‘법안·제도’에 대한 숙고 없어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으로 끝나는 개혁이 아니라, 근본을 바꿔야 한다는 소신이다.  


김 전 의장은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물갈이하라고 했더니, 다 물고기만 갈아버려선 안 된다. 물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인물이 들어와도 정치판이 그대로면 결국 과거의 문제만 되풀이한다는 교훈이다.  


바꿔야 할 세가지 판도 제시했다. 헌법으로 상징되는 제도와 정치문화, 시민의식이다.

정치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개헌을 필수이자 시작점으로 꼽았다. 김 전 의장은 “지금 헌법에는 권위주의적 장치가 있다. 민주헌법아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 같은 유신의 잔재가 있다. 이하 국회법, 정당법 모두 이를 따랐다”고 정치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을 촉구했다.


이를 따라줄 문화도 정착돼야 한다. 정치인들의 사고방식 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전 의장은 “엉뚱한 것으로 의사진행발언을 이어가는 형식논리가 계속된다. 그러니 연말만 되면 의장은 방망이 치느라 바쁘다”며 “정치권엔 지금 심의란 기능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 후배 의원이 법안을 찬성했기에 왜 찬성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기권이나 반대하면 기자들이 물어볼까 봐 그랬다고 했더라”며 정치 본연의 역활에 충실할 수 있는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단순한 법안 통과율, 또 각 정파간 기싸움이 전부인 지금의 정치 문화를, 법안과 제도에 대한 숙고와 심사 기능이라는 정치와 국회의 원 뜻으로 바꾸자는 조언이다. 


마지막으로 국민, 즉 유권자들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좋은 정치도 표가 오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이라는 오래된 폐단에 대해 김 전의장은 “역사로 말미암은 교육체계 때문에 그렇다”고 해석했다. 그는 “성리학 전통이 이어졌다. 이념은 목숨을 내놓고 지킬 신념이었다”며 “이후 한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가장 빈곤했던 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됐고, 장기집권 시대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그 사이 시민교육이 안 이뤄졌다. 급성장과 민주적 제도라는 양면이 순식간에 공존하니 중간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민주정치의 필수인 타협 없이, 정반(正反)만 있고, 이는 결국 유권자와 국민들의 낡은 인식과 관습이 만든 결과라는 비판이다. 그는 “목표 중심, 성향 중심이다. 지금 입시제도도 그렇지 않느냐”며 “나도 후배들에게 이를 가르치거나 바꾸지 못했다. 우리 세대도 다 잘못”이라고 반성했다.  


백범 ‘사상적 관점’서만 봐선 안돼 


계파가 없다고 하면 선명성을 의심받는다. 그래서 일부는 우파로 일부는 좌파로 파악한다. 내년 서거 70주년이 되는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지금의 논쟁이 그렇다.

 

김 전 의장은 “백범 선생을 사상적으로 보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결국 한국정치의 병폐인 계파, 진영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며 “백범 선생은 정확히 말하면 우익도 좌익도 아니다. 우에선 좌로, 좌에선 우로 본다. 어느 쪽에서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백범 선생의 그릇을 한쪽 면에서만 보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백범의 민족 ‘우리끼리 민족’ 아니다 


“오로지 독립이란 대의였다. 그 아래에서 파벌이나 계파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도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백범 선생은 희생을 각오했기에 대통령이 될 생각도 없었다”고 전했다.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않으니, 계파에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전 의장은 “백범 선생의 민족주의를 서양의 내셔널리즘과 비교해선 안 된다”며 “선생이 말한 ‘민족’은 변질한 ‘우리 민족끼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미군 철수는 외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그것은 민족에 사상을 붙인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의 소원’에서 가닥이 잡힌 민족주의는 개방형 민족주의였다”며 “민족만 뭉치자는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는 것이다. 소위 ‘우리 민족끼리’와는 다른 것”이라고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때도 계파싸움이 잦았다. 밥 굶기를 밥 먹는 것처럼 했다. 그래서 싸웠던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데 10만원 떨어졌다면 다투는 건 당연했다”며 “그러나 잘 먹게 되면 10만원을 ‘네 것이다. 아니다, 네 것이다’로 해야 한다. 그때는 힘들어서 싸웠지만, 지금 그럴 필요는 없다”며 정치 문화의 바로잡기를 다시한 번 강조했다.  


최정호ㆍ홍태화 기자/th5@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2018-07-13 한국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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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상상력ㆍ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야당 부활의 관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출간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내년 백범 70주기, 일지 72주년

책임ㆍ헌신으로 살아온 그의 정신

여야 정치인 모두가 되새겨봤으면”

“자기 세력만 옳다는 논리로 갈등

지금의 진영정치로는 희망 없어

진영보다 가치 중시하는 정치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1일 오후 마포 사무실에서 가진 한국일보 이유식 고문과의 대담에서 "우리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백범의 희생과 헌신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며 “상상력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 야당 부활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2018-07-11(한국일보)


김형오 전 국회의장에게 요즘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지난 달 백범 서거 69주년에 즈음해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에 대한 세간이 관심이 높은데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비상대책위원장 물망에 끊임없이 오르내려서다.


그는 2010년 6월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 임기를 마친 후 야인으로 돌아와 정치보다는 저술에 몰두해 왔다. 그동안 내놓은 책만 해도 '술탄과 황제' 등 여러 권이지만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다. 이런 와중에 그는 틈틈이 정치원로서 후배 정치인들에게, 또 청와대를 향해 쓴소리(그는 바른소리라고 했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김 전 의장에게 저술가와 정치인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백범의 삶과 사상을 새롭게 해석한 그의 책이 나온 시점에, 새 리더십을 찾아 헤매는 한국당의 러브콜이 이어진 것이 참 묘하다. '벼랑에서 잡은 나뭇가지마저 놓아버리는' 백범의 결기가 지금 한국당에 꼭 필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했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명망가를 얼굴 마담 삼아 이 궁지만 넘겨보자는 잔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3년째 백범선생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그를 지난 11일 오후 마포 사무실에서 만나 왜 지금 백범을 다시 불러냈는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국당의 살 길은 뭔지 묻고 답했다.


-한문체로 된 백범일지를 한글로 풀어쓴 책이 1947년 처음 나온 뒤 지금까지 300종이 넘는 해석본이 다양한 내용과 형태로 출판됐다. 우리나라에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백범일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백범이 묻고 김구가 답하는 새로운 접근과 내용이라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 왜 하필 백범인가. 


“책 서문에 자세히 썼지만 이 나라가 거저 생긴 게 아니라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과 아픔으로 일군 나라라는 것을 동시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백범일지는 일기(日記)가 아니라 일지(逸志), 즉 소소한 이야기다. 아들에게 전하는 유서 형식으로 ‘못난 아비의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아비 대신 훌륭한 사람을 찾아 스승으로 섬기라’는 뜻과 함께 그의 지고지순한 국가관과 민족애, 헌신적인 삶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어떤 회고록이나 자서전도 이 책의 솔직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울림이 더 크다. 2015년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이후 효창원의 백범 묘소와 동상 앞에서 수없이 그와 대화한 결과물이다.”


-최근 정치상황이나 정치리더십, 특히 지방선거 참패 이후 혼란과 갈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유한국당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내년이면 백범 70주기이자 백범일지 출판 72주년이다. 평생을 책임과 헌신으로 살아온 백범의 정신과 자세를 오늘날 여야 정치인 모두가 되새겨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500년 전 그리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는 정치리더의 4대 덕목으로 지식과 소통, 애국심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백범이야말로 이런 덕목을 몸으로 실천했다. 특히 솔선수범에 근거한 애국심과 도덕성은 지금 우리 정치와 보수야당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제목을 단 이유 등 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했지만 이미 많은 언론이 다룬 내용이어서 화제를 돌렸다. 김구의 책임과 헌신 리더십을 이 시대가 요구한다면 그 자신도 그런 요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더구나 대혼란에 빠진 한국당은 그가 한때 몸담았고 국회의장의 명예까지 안겨줬던 정당의 후신 아닌가.


-한국당이 쇄신의 깃발을 들고 개과천선하겠다며 강호의 명의들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 차원의 비대위원장 후보를 마구잡이로 언급해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망신을 자초했다. 유력 후보로 계속 거론되고 구체적 제안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입장에서 이런 방만한 방식을 꼬집는다면.


“난 정계를 은퇴한 사람이고, 백범선생기념사업회를 마지막 봉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후배들이 나를 찾아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 혹은 메스를 쥐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원들의 일치된 각오와 자세, 즉 나를 버려서라도 변화를 수용하고 보수의 새 미래를 여는 밀알이 되겠다는 폭넓은 공감대를 먼저 만들어야한다고. 또 말로만 반성을 외치며 이회창이니 이국종이니 명망있는 얼굴마담을 쫓아다니는 것은 ‘낚싯대로 사자를 사냥하겠다’는 심보이니 그만두라고. 솔직히 말해 내가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아니다. 지금 날보고 비대위원장 맡으라고? 한마디로 턱없는 소리다.”


-한국당은 궤멸 수준의 패배를 당하고도 왜 감동을 주는 정치를 못하나. 시대착오적인 친박-비박 싸움을 거듭하며 네탓 타령만 하는 한국당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최근 한 토론회에서 한국당 중진들을 향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심정으로 깨끗이 던져라”고 했던데 어떤 맥락과 의도를 담은 충고인가.


“요술방망이를 가진 누군가 와서 금나와라 뚝딱 식으로 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중진들이 앞장서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것이다. 국민의 엄중한 심판은 복도에서 무릎 꿇는 참회 코스프레로 해소될 사안이 아니다. 혁신비대위가 필요한 위기상황이라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반성과 살을 내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한국당이 지금 그런가. 다음 총선까지 아직 2년 가까이 남았으니 이번 국면만 잘 모면하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회주의적 현실도피적 행태가 더 판을 치는 형국 아닌가. 기득권을 누려온 중진들이 한국당의 존폐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정치의 앞날을 내다보는 큰 눈을 가져야 답이 보인다. 불출마든 퇴진이든 죽을 각오로 임하면 반드시 살 길이 보이는 법이다.”


-같은 자리에서 초ㆍ재선들의 무사안일을 책망하며 “더 이상 위아래 눈치보지 말고 어떻게 몸을 던질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달라”고 주문했다. 당부하고 싶은 실천의 내용이 뭔가.


“2016년 4ㆍ13 총선에서 200석 운운하던 새누리당이 민주당에 밀려 2당으로 몰락한 직후 초선 대상 연찬회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당지도부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청와대의 공천 전횡으로 보수정당 사상 최악의 패배를 맛보는 동안 누구 하나 쓴소리한 적이 있느냐’고 질책하며 초선들이 앞장서 사나흘 철야토론하며 뼛속까지 반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후 어떻게 됐는가. 뭐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초선들부터 무리지어 친박 행세를 일삼고 취미삼아 정치를 하지 않았나. 낡고 늙은 이념에 물든 당 대표가 막말과 기행으로 당을 말아먹어도 차기 공천을 좇아 각자도생하지 않았는가. 박근혜 정부의 불행은 나이먹은 늙은이든, 애 늙은이든 잿밥에만 눈이 어두워 한국당을 농단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상력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피가 보수야당 부활의 관건이다.”


-보수야당의 몰락을 초래한 배경에는 보수정당이 안보와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너무 쉽게 정치를 해온 것도 있다고 본다. 보수세력이 시대와 세대가 바뀌고 사회의 의제와 가치가 변하는 것에 유연하고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우리 세상이 계속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문제를 외면했다는 뜻이다. 선배 정치인들도 반성해야 하지 않나.


“3김 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우리 정치의 패턴은 보수 정치체제와 계보정치다. 그 계보정치가 지금은 진영정치로 퇴화했다. 자기세력만 옳다는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갈등의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선배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한 결과지만, 이런 타성에 젖으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은 공멸이다. 보수정치 차원이 아니다. 이제야 말로 진영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 같은 보수가, 진보 같은 진보가 나와 한국 정치가 가야할 길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보수나 진보가 보다 분명한 개념을 세워야 한다. 완전히 바꿔야 할 계기를 국민들이 6ㆍ13에 메시지를 준 거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도 동시에 준 메시지라 본다."


-보수진영이 사람과 자원을 키우기보다 수십 년 동안 곳간에 있는 것만 빼먹으며 기득권만 누리다가 고립무원의 거지꼴 신세가 됐다. 1960년대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쇠락하던 미국 보수를 다시 세우고 레이건 시대에 꽃피운 ‘헤리티지 재단’ 같은 싱크탱크나 보수 아카데미를 통한 지속적인 인력충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장 새 기구를 만들기 어렵다면 당 산하의 여의도연구소를 활용할 수도 있다. 나는 정당이 국민 혈세인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것을 오래 전부터 반대해왔다. 민간 후원금이나 당비로 운영되는 게 옳다. 다만 정책을 연구하는 조직이나 싱크탱크에는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찬성한다. 당 외곽이나 대학 등에 보수의 이념과 전통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재단이나 아카데미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지가 그룹도 중요하다."


-영국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 일본 자민당의 사례에서 한국당이 벤치마킹할 부분이 있겠는가.


"보수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80년대 초 영국 보수당 등의 역사와 사례를 분석한 소책자를 낸 적 있다. '시대정신에 민감한 개혁과 끊임없는 자기 수혈'을 결론으로 적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흔히 보수라고 하면 퇴행과 정체, 기득권을 연상하는데, 안정적 개혁과 인재 존중이야말로 보수의 참모습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한국당은 보수가 아니라 남은 몇 푼에 집착하는 수구적 집단이다. 그라운드 제로까지 내려가 고민하고 공부하며 집을 다시 지어야 한다. 2020년 21대 총선까지 남은 1년 반 남짓한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찬란한 부활도 가능하고 참혹한 폭망도 가능하다."


-다시 한번 묻자. 한국당 비대위원장 맡는 것도 책임과 헌신인데.


"소를 물가까지 끌고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먼저 내 몫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익집단엔 관심이 없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com 정리=변한나(논설위원실)



[2018-07-13 한국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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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김형오 국회의장 


한국당, 물갈이 하랬더니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꾸려 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살신성인의 자세와 희생·책임의 정신이 아쉽습니다.”

 

김형오(71) 전 국회의장은 지난 9자유한국당이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는 각오로 임할 때 필사즉생의 여지도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 전 의장은 이날 서울 마포구 개인연구실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백범이 평생 마음에 새긴 경구 중 하나가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며 그 잡은 손마저 놓아버려야 장부라는 말이라며 지금 선거하면 한국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하는 처절한 각오와 심정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9일 서울 마포구 개인연구실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자유한국당의 수습 움직임과 관련해 한국 정치사는 물갈이를 하라는 민심의 심판에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꾼 사례가 허다하다제도와 정치문화(행태), 행위자 모두 바꿔야 정치판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서상배 선임기자

 

김 전 의장은 6·13 지방선거 직후 한 토론회에서 한국당 참패 이유로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계파 이익 챙기느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은 죄 집권여당에 제대로 싸우지도, 대안 제시도 못한 죄 교만과 오만,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국민을 짜증 나게 한 죄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죄 희망과 비전을 등한시한 죄 7가지를 꼽았다. 촌철살인 같은 정리에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후보를 찍은 지지자는 물론 등을 돌린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한국당의 혁신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김 전 의장을 찾아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의 식견과 경륜, 리더십, 무엇보다 망해가는 보수정당에 대한 애정을 갖춘 인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매번 나는 아니다며 에둘러 고사의 뜻을 나타냈다고 했다. 왜일까. ‘정치 현안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김 전 의장을 백범(18791949) 서거 69주기에 맞춰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아르테)를 핑계로 만났다.

 

김 전 의장은 백범 선생의 차남 김신 장군(19222016)의 요청으로 20157월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의 부제는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이다. 백범이 1947년 펴낸 회고록·자서전 백범일지를 토대로 백범(白凡·평범한 사람)이 질문(Q)하면 김구 선생이 답(A)하고 김 전 의장이 추가 설명을 보태는(+) 형식이다.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은 직후 요즘 같은 세상이야말로 백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 아닌가요?”라는 출판사 대표 말에 용기를 내 내리 3년을 집필에 매달렸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가 피로 쓰여진 책이라고 부를 만큼 김구 선생의 삶이 여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라고 강조했다. 김구 선생이 엄혹한 시대상황에 맞서 온몸을 던지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한 초지일관된 삶을 산 분이라고 소개했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의 사상에 대해선 투철한 국가관과 불타는 동포애, 민족 중심의 평화주의라며 백범만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관된 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20세기 독립투사의 삶과 정신, 자세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김 전 의장은 혼돈·혼미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영웅을 그리워하지만 더 이상의 영웅은 나올 수 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 개개인 모두가 스스로 영웅이 돼야 하는 시대, 특정 지도자가 끌어가는 게 아닌 우리 모두가 영웅적 자질과 품성을 갖고 영웅적 행동을 해야 하는 시대라며 김구 선생의 책임감과 희생, 헌신이 21세기 현대사회 영웅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대개 보수진영은 해방 이후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진보진영은 김구 선생을 꼽는다.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전신) 출신 국회의장으로서 백범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이번에 책까지 낸 까닭은.

 

김구 선생 같은 분을 보수, 진보와 같은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좀 시정이 돼야 할 것 같다. 백범이라는 사람의 일생일대 올곧은 삶을 당시와 오늘날 상황에 비춰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가 기본이 돼야 한다. 내가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 엄혹한 상황 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온몸을 던져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초지일관된 삶을 사셨을까 하는 점이다. 김구 선생의 삶과 정신을 무슨 이념이나 사상에 따라 세분화하는 것은 조금 사치스럽고 한가하다는 느낌이 든다.”

  



기자 출신으로 그간 술탄과 황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등 많은 책을 냈다. 이번 책도 술술 쓰셨겠다.

 

기념사업협회장 직을 맡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술탄과 황제를 펴낸 출판사 대표가 김구 선생에 관한 기획안을 갖고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백범 전문가도 아니고, 명색이 백범기념사업협회장인데 당신에게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대표가 요즘 같은 시대에 김구 선생을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라. 마음이 흔들려 틈만 나면 선생 묘소를 찾아가고 백범일지를 들춰가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되물었다. 결국 선생의 민족사랑이나 리더십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 책을 쓰게 됐다.”

 

예비독자들, 특히 젊은세대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 집안과의 극적인 만남, 김구 선생의 멘토고능선과의 교유, 애절한 가족사 등 많고 많다. 그중 백미는 백범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이다. 이 나라가 거저 생긴 나라가 아니라 우리 선열들의 피로 이뤄진 나라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신들의 뜨거운 애국혼에 나 스스로 글을 쓰면서 울기도 했다. 오늘날 고뇌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자세,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자유한국당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래도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를 이끌어온 한 축인데 요즘 보면 비판을 넘어 조롱거리로 전락한 느낌이다. 의장도 한국당의 7가지 죄로 알려진 강연도 하시고 한국당 비대위원장 제안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다.

 

그날 강연의 핵심은 한국당 비판이라기보다는 이 나라 정치판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사실 더 (세게) 이야기하려다가 그래도 전에 몸담았던 곳인데, 너무 짓밟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차마 더 하지 못했다. 이번에 기념사업협회장 맡으면서 다시는 정치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다짐을 했다. 이런 전제하에 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자면 요즘은 정치가 사라진 것 같다. 정치라는 게 없다. 가만히 보면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자기들 선거(총선)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물갈이를 하랬더니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꾸려는 꼴이다.”



 

정치판을 갈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다른 야당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여야 하나씩만 지적하자면 여당한테서는 국정주도 정당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앞장서 문제를 제기하고 (정책을) 이끌어나간 게 뭐가 있으며 청와대의 무리한 정책추진에 대해 제동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야당은 제발 국회 보이콧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틈만 나면 (요즘은 국회 본청 앞 계단인 것 같지만) 국회 바깥으로 뛰쳐나가는데 가관이다. 국회에서 36개월 치열하게 싸우고 토론한 적 있는가. ‘일하는 국회 좀 만들어달라는 대통령·정부 비판에 일하는 국회는 정부 입맛대로 법률안을 통과시켜주는 게 아니다고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는 야당 모습을 봤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권에 몸담은 지 30년이 넘었다. 나이로는 종심(從心·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이다. 정치권이나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조선 세종대왕이 재위 7년 어전회의에서 했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위국지도(爲國之道) 막여시신(莫如示信)’.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께 우리를 믿어달라고 호소하기에 앞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나이 얘긴데, 일흔이 되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 공자 같은 성인군자뿐이다. 나 같은 사람은 70이 아니라 80이 되어도 법도에 어긋날지, 괜찮을지 항상 경계하고 삼가며 살아가야 한다. 됐제?”

 

대담=송민섭 정치부 차장

 

정리=이우중 기자 stsong@segye.com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경남 고성(71) 부산 경남고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석사, 경남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5(14~18)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부산대 석좌교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2018-07-11 세계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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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답식으로 서술한 김구의 삶·사상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 김형오 엮음 / 아르테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백범일지를 문답식 구성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지난 3년간 매일 효창원 백범 묘소와 백범 좌상을 마주하며 김구의 삶과 사상, 시대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책은 그 결과물로 전문 연구가가 아닌 보통사람의 마음으로 김구의 생애와 생각을 진솔하게 바라본다. ‘보통사람을 가리키는 김구의 호 백범(白凡)처럼, ‘보통사람들의 질문에 김구가 직접 답하는 Q & A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 저자가 시대 상황 등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김구의 인간적인 모습도 조명한다. 김 전 의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백범은 더욱 그리운 이름, 절실해지는 얼굴이다. 늘 푸르게 깨어 있고 서늘하게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이라며 이 책은 그런 선생과 백범일지에 바치는 헌사라고 밝혔다.

 

저자는 김구를 무작정 존경하거나 따르기보다는 배워야 할 점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을 구분해 삶의 귀감으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412, 19800.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2018-06-29 문화일보] 기사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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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현식 2018.06.30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입장엔 테러리스트 맞구만....
    안중근도 테러리스트고
    따질려면 전주이씨 종친회를 욕해야지.....
    나라 팔아 먹고 그렇게 됐으니....



<2018-06-29 부산일보>

[잠깐 읽기]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 (강원·충청·전라·경상 편)/김상기 외



김구 선생을 찾아서


백태현 기자

 

백범 연구자들이 권역을 나눠 김구의 흔적과 체취가 서려 있는 곳을 찾아 그의 인생 역정을 더듬은 전기이자 답사기가 나왔다. 강원·충청·전라·경상 지역을 다루는 2권에서는 무주와 김천에 남은 흔적을 통해 유완무, 이시발, 성태영 등이 김구를 민족 지사로 키우기 위해 비밀리에 회동을 벌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김구가 '애기 접주'라는 칭호로 불리며 활약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피신하게 된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속세로 돌아온 사연도 소개된다. 특히 환국 후 한국독립당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작한 지방 순회의 길은 그가 젊었을 적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보은의 길로 이어지는데, 순천 보성 함평 김제 전주가 그 지역들이다.

부산 전재민수용소, 충무공시비, 촉석루 등 항일 정신이 깃든 장소를 방문한 김구의 발걸음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다룬 1권은 별권으로 출간됐다. 김상기 신복룡 도진순 한규무 김용달 지음/아르테/292/25000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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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광주일보>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백범의 길 (1·2)

행동하는 이상주의자·꿈꾸는 리얼리스트 김구의 삶

김명섭 외 지음



백범 선생 서거 70주기,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투옥 생활 서대문감옥·동학 활동하다 마곡사 피신 이야기 등

역사·정치 분야 전문가가 김구 발자취 찾아 떠난 여행기

 

 

김구가 인천감옥에서 탈옥해 수십 일 동안 은거했던 보성 쇠실마을에 있는 김광언 가옥.

 

우리가 그토록 장소에 주목한 것은 역사가에게는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은 영감을 준다. 탐방객들 사이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하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고 느끼기에, 우리는 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도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서문 중에서)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서거 7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억압과 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김구는 독립운동의 대표이자 상징이었다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확산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평화국면이 전개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 분단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민족의 문지기가 되고자 했던 백범 김구는 “18세에 붓을 던진이후 시종 유랑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던 그의 발길은 조국의 산하 구석구석에 미쳤고 중국 대륙에까지 이어졌다.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역사와 정치 분야 전문가들이 김구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역사 여행기 백범의 길’(2)을 펴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김명섭 연세대 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김상기 충남대 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등 관련 전문가 10인이 필자로 참여했다. ‘조국의 산하를 걷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책은 행동하는 이상주의자이며 꿈꾸는 리얼리스트였던 김구의 전기이자 답사기이다. 서울·경기·인천을 아우르는 1권과 강원·충청·전라·경상을 포괄하는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곳곳에서 백정범부(白丁凡夫·평범한 백성)의 삶을 지향하고 민족의 독립에 헌신했던 인간 김구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발간사에서 멀고도 험난한 노정이었다. 길도, 안내인도, 등불도 없었다. 백범은 스스로 길을 내고 등불을 밝히며 고단한 발걸음을 내디뎠다우리는 그 길을 되밟기로 했다. 발자취를 더듬고 흔적을 헤아리며 백범의 숨결과 체혼을 느끼려 했다고 밝혔다


1권에서는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김구의 흔적을 다루었다. 서울 근교와 투옥생활을 했던 인천감옥과 서대문감옥도 살폈다. 김구의 삶에서 1945년 환국 이후의 시기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맞게 된 미소 양국의 대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대의를 이루지 못했다.


2권에서는 동학에 심취해 활약하다가 마곡사 등으로 피신했던 이야기, 도움을 받았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보은의 길 등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여정을 담았다. 순천, 보성, 함평, 김제, 전주에서의 여정이 그러한 내용이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한둘이 아니지만, 필자는 이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 40여 일 남짓 머물다 떠나는 생면부지 낯선 타지인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붓 주머니를 이별의 선물로 건네준 선씨 부부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22세 꽃다운 나이 때 만난 동갑내기들이 48년이 지난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장면이 떠올라서다.” (‘보성 김광언 가옥-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소설가인 박성천기자는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에 출강중이며 소설집 메스를 드는 시간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광주일보 기사 ☞ 바로가기 클릭



<2018-06-29 한겨레>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 백범 김구 선생의 70주기인 내년을 앞두고 기념사업협회의 기획으로, 신복룡, 도진순 등 8명의 정치·역사학자들이 전국을 다니며 백범의 흔적을 쫓은 답사기가 두 권의 책으로 나왔다. 김형오 협회장(전 국회의장)<백범일지>를 문답식으로 풀어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도 함께 출간됐다. /아르테·각 권 2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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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영남일보>


남북 평화 모드재조명되는 백범 선생의 삶과 사상



김구 선생 관련 다양한 책 잇단 출간

지난 26일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일이었다. 남북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시기에 자주 독립을 주장했던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출판계에서도 김구 선생을 주제로 한 책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김구 백범일지 나의 소원 자서전’(부크크)은 백범 김구 탄생 142주년을 기념해 나온 책이다. 김구 선생이 직접 쓴 백범일지가 담겨 있다. 김구 선생의 어릴 적 이야기와 기구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다. 3·1운동 이야기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는 나의 소원역시 볼 수 있다.

 

역사학자 박성순이 쓴 김구 선생이 얘기한 깨어있는 시민’(백두문화재연구원)은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독립운동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김구 선생의 애국정신, 민주주의 정신, 계몽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구 선생의 삶을 통해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아르테)는 김형오가 쓴 책으로 백범일지를 문답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평범한 백성이란 뜻이다. ‘보통 사람을 말한다. 이 책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김구 선생을 바라본다. ‘어떻게 삶,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백범은 왜 백범인가등 백범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탈옥수 시절, 끝으로 광복을 맞은 시절까지 백범의 일대기를 6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했다.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아르테)<>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펴낸 책이다. 김구 선생과 관련한 역사학계와 정치학계 연구자 8명이 참여했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국 팔도에 숨어 있는 백범의 흔적을 찾고 있다. 19세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노해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후 인천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한 이야기와 한국독립당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방 순회 길을 다녔던 이야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유승진기자 ysj194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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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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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고문·굶주림에 흔들렸던 백범, 위대한 투사도 보통사람이었다

 

 

서화동 기자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김형오 지음 / 아르테 / 41219800


악형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깃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난다. (중략) 사람의 마음을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백범 김구의 초상화 /한경DB

 

김구 선생(1876~1949)백범일지(白凡逸志)’에 남긴 절절한 고백이다. 19111월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를 모두 잡아들인 안악사건으로 전격 체포된 백범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과 굶주림, 회유에 시달렸다. 매에 장사가 있으랴. 고문에 못 이겨 정신줄을 놓은 사이 제자 이름을 말해버린 뒤엔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고 했다. 1947년 처음 국내에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국민애독서가 된 것은 조국 독립에 평생을 바친 백범의 위대한 삶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치부마저 숨기지 않은 진솔함 때문이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쓴 백범 가상 인터뷰다. 선생의 호 백범은 평범한 백성, 즉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책 제목의 백범은 선생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다. 저자는 백범일지를 완전히 해부하다시피 해 보통 사람들의 질문에 선생이 답하는 형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60개의 질문과 답, 여기에 저자의 해설을 덧붙여 비범한 혁명가이자 진솔한 인간이었던 백범의 삶을 보여준다. 기자 출신답게 쉽고 간결한 문체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황해도 시골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숟가락을 엿과 바꿔 먹은 개구쟁이 일화부터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렸으나 결국 실패했던 청년기의 좌절과 경험, 명성황후 시해를 복수하려고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뒤의 옥살이와 탈옥, 유랑, 농촌계몽운동, 임시정부를 이끌며 분투했던 중국 망명 시절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책 전체에 담겨 있다.  

 

인상 깊은 것은 백범의 인간적인 면모다. 백범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차례의 투옥으로 어머니와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느라 모진 고생을 견뎌야 했다. 번번이 혼사가 깨져 서른이 넘어서야 결혼했지만 망명생활을 하느라 가족과 함께 산 세월은 짧기만 했다. 그나마 같이 살 때도 두 아들에게 아버지는 잠깐씩 다녀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대신 그에겐 임시정부의 동지와 식구들로 구성된 대가족이 있었다.



  

이들을 먹여살리며 독립을 준비하는 일을 백범은 달팽이의 등껍질처럼 지고 살았다. 하지만 백범은 단 한 번도 이를 탓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월세도 못낼 만큼 가난에 쪼들렸지만 백범의 몸엔 60만원이라는 천문학적 현상금이 붙었다.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는 돈이었다. ‘움직이는 복권신세가 된 백범을 고발한 한인은 없었다. 저자는 백범은 그들에게 현상금 60만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백범은 또한 결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나이, 지역, 출신 성분도 따지지 않았다. 19311월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부장과 거류민단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찾아와 젊은 날 일본으로 건너가 여기저기 떠돌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됐는데 상해에 가정부(假政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말의 절반은 일본어인 데다 행동거지도 일본인과 비슷했다. 가정부는 임시정부를 폄하해 부르던 말이었다. 다들 미심쩍어했지만 백범은 그와 우국담론을 나누며 의기투합했다. 그 청년이 바로 철혈남아이봉창 의사였다.

 

저자는 열린 마음과 애국 열정, 삿됨이 없는 정의감이 백범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한 길로 가게 했다엄혹한 임시정부 시절,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에서 수많은 애국자와 투사는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고 평했다.  

 

백범일지 마지막에서 밝힌 대로 백범의 평생 소원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그래서 백범에겐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복음이 아니라 비보였다. 일지에서 백범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했다. 향후 전개될 통일정부 수립 과정에서 외세 영향력이 커지고 우리 정부의 발언권이 약해질 것을 걱정해서였다. 주변 강국들의 영향력이 여전한 지금의 한반도를 보며 백범은 뭐라고 할까. 책을 읽는 내내 울컥한 마음을 진정하기가 어렵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2018-06-29 한국경제]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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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조선일보 : 최경운·이슬비의 뉴스 저격




"조국 앞에선 좌익도 우익도 없다통합의 끈 놓지않았던 게 白凡정신"




조선일보 최경운 기자 이슬비 기자




오늘의 주제: 金九 선생 서거 69주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김형오 국회의장에 물었다

 

 

내년(201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임정(臨政)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다. '임정 100주년-백범 서거 70주년'을 한 해 앞두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는 백범 기리기 사업에 나섰다.

 

백범 서거 69주기 날인 지난 26일에 즈음해 백범의 광복 후 국내 행적을 기록한 '백범의 길'을 펴냈다. 다음 달엔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행적을 좇아 중국 답사를 한다.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온갖 고난 속에서 임정을 이끈 백범 정신은 조국 독립과 자유를 향한 희생과 헌신의 여정"이라며 "백범의 순수한 애민, 애족, 애국의 열정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최근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해 풀어낸 책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출판사 아르테)를 펴냈다. 저자인 김 회장을 만나 백범의 삶이 갖는 의미를 짚어봤다.

 

백범이 독립투쟁에 나선 정신적 기반이 궁금하다.

 

"백범의 일생을 관통한 저항 정신은 어릴 적 양반의 핍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상놈 신세 벗겠다는 '면천(免賤)' 의식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망국을 겪은 백범은 '상놈 콤플렉스'에 머물지 않았다. 훗날 백범은 양반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기보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며 통합과 개화를 강조했다. 저항하되 정신적으로 성숙한 평등주의자, 그것이 그를 독립투쟁으로 이끌었고, 수많은 분파와 갈등이 내재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지도자로까지 끌어올렸다."

 

봉건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백범이 어떻게 혁명가가 됐나.

 

"백범은 17(1892) 때 양반이 되려고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당시 과거장은 대작(代作), 대필(代筆)이 다반사인 난장판이었다. 백범도 남이 대신 짓고 써준 답안지를, 그것도 효도하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이름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낙방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세상을 보고 개벽을 꿈꾸며 이듬해 동학(東學)에 입교했지만 우국충정과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백범은 이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격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죽인 '치하포 사건'(1896)으로 인천감옥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한다. 감옥에서 백범은 개화에 눈을 뜬다. 고종의 어명으로 사형 집행을 면한 그는 이후 탈옥해 방랑하다가 기독교에 귀의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김 회장은 "백범의 표현을 빌리면 상하이 임정 시절이 '죽자꾸나 시대'였다면 충칭(重慶) 임정 시절은 '죽어가는 시대'였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김 회장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백범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김 회장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백범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백범이 임정의 지도자가 됐을 때 상황은 어땠나.

 

"백범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청사 문지기를 자청했다. 그런 백범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긴다. 하지만 임정은 시작부터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과 국무총리 이동휘 세력의 사상이 달라 갈등을 빚었다. 민주주의 세력과 공산혁명 세력의 대립이었다. 1921년 이승만이 상하이로 부임해 집무를 시작하자 이동휘는 총리직을 사직했고, 이승만도 결국 넉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다. 임정은 허울만 남은 채 좌·우익 갈등을 겪었다. 백범이 국무령에 취임하기 직전 2년 동안 6명이 국무령을 맡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백범은 1926년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해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던 임정의 국무령에 취임했다. 당시 임정은 국무령이 내각을 이끄는 체제였다(백범은 1940년 임정 주석에 취임한다). 재정 상황도 최악이어서 독립운동 자금은커녕 청사 운영비조차 막막했다. 192069000달러였던 임정 수입은 19271445달러, 1928975달러로 줄었다. 임정이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조직한 연통제가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된 탓이었다. 백범은 임정이 가진 권총 네 자루 중 두 자루를 팔아 운영비로 쓰기도 했다. 잠은 청사 빈방에서 자고 동포들 집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

 

침체한 임정의 독립투쟁이 되살아난 계기는 무엇이었나.

 

"백범이 조직한 애국단의 두 청년,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벌인 의거(義擧)이다. 두 청년이 연이어 일으킨 의거는 일제의 이간계(離間計)로 악화했던 중국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을 되돌려놨다. 두 의거는 백범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다. 이봉창 의사의 경우 신원과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주변의 우려가 컸지만 백범은 겉모습이나 나이, 지역, 출신을 따지지 않고 믿고 썼다. 백범은 애국 열정으로 독립투사를 길렀고, 그들은 기꺼이 조국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과 감시가 옥죄어와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이르는 5000의 피란길에 오른다.


임정 국무위원들 -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조국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왼쪽 사진). 오른쪽은 백범 선생이 1935년 중국 자싱(嘉興)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백범은 60세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병조·김구·조성환·차리석·이시영·이동녕·조완구 선생.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100여 명의 임정 대가족을 광복 때까지 이끈 리더십의 비결은 뭔가.

 

"남녀노소가 뒤섞인 피란 행렬은 더디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백범일지' 어디에도 임정 식구들에 대한 불평은 없다. 오히려 대열에 합류한 이들에게 고마워하고 미처 동행하지 못한 이들에게 미안해한다. 아무리 멀고 힘들고 버거워도 등에서 임정을 내려놓거나 팽개치지 않은 것, 그것이 백범의 리더십이다."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남·(南南) 갈등을 겪고 있는데.

 

"백범은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조국을 갈망했다. 이를 위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대를 끊임없이 촉구했고 끝까지 좌·우익을 통합하기 위해 분투했다. '통합''연대'의 백범 정신을 지금 되살려야 한다."

 

우리나라 지도층은 백범에게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

 

"백범은 임정 국무령과 주석을 맡은 지도자였다. 그런데 그 자리는 백범이 원해서나 바라서 한 게 아니었다.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백범이었기에 맡겼을 뿐이다. 특히 우리 정치인들은 백범의 희생과 헌신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임정 대가족의 피란길本紙, 내달초 그들의 발자취 따라간다

 

1919413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 지역에 둥지를 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4·29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피란길에 오른다.

 

백범이 이끈 피란 행렬에 동행한 이는 100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다. 그 시절 백범은 일제(日帝)를 피해 중국 도시와 산하를 떠돌아다니는 달팽이 신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피란길 지도


상하이를 탈출한 임정은 인근 저장성 항저우(杭州)로 이동했다가 1935년부터 자싱(嘉興), 전장(鎭江),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1937년 일제가 난징을 점령하자 임정 대가족은 다시 이삿짐을 쌌다. 창사(長沙)로 옮겼으나 일본의 공습이 본격화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창사를 떠나 기차로 피란 가는 임정 대가족은 일본군의 공습 때문에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임정 일행은 남부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이 광저우로 진격함에 따라 다시 함락 하루 전날인 19381020일 광저우를 탈출해야 했다. 40일 만에 류저우(柳州)에 안착했다가 몇 차례 더 피란 끝에 19409월 충칭(重慶)에 정착했고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피란길은 가혹했다. 동행한 일행 가운데 피란길에 병사(病死)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본지는 다음 달 초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와 공동으로 임정 대가족의 행적을 따라 광저우~류저우 피란길 답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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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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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동아일보] 인터뷰


김형오 “백범, 치부조차 모두 드러낸 인간적 투사”



69주기 추모식에 ‘백범 묻다…’ 책 헌정

김형오 前 국회의장의 김구 예찬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7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백범일지에는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숱한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간곡한 뜻이 담겨 있다”며 “이는 두 아들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전하는 당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 나라가 거저 생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으로 일구어졌는지를 지금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白凡) 김구 선생 제69주기 추모식에서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라는 책 한 권이 영정에 헌정됐다. 저자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현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장·사진). 


김 전 의장은 27일 “백범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며 “좀 더 친숙하고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백범을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한 책. 보통사람들이 백범에게 가진 의문과 지적을 왜 그때 그렇게 했는지 백범이 직접 답하고, 여기에 저자가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제목의 ‘백범’은 백정과 범부, 즉 평범한 백성을 의미한다. 백범이 답하는 부분은 백범일지를 토대로 했다. 



김 전 의장은 “처음 책을 의뢰받았을 때는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해도 되는지 고민이 많았다”며 “위대한 보통사람의 삶을 짧은 글에 잘 담을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공부를 시작했고, 출간된 백범일지가 300여종이 넘어 다양하게 각색·편집된  관련 서적 수십 권을 놓고 씨름하느라 출간까지 3년여가 걸렸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를 공부하면서 치부조차 솔직하게 드러낸 백범의 인간됨에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백범이 일지에서 “감옥에서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있을 때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면 젊은 아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사식을 넣어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까지 났다”는 고백까지 했었다는 것. 김 전 의장은 “백범을 냉정한 투사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한편으로는 보통사람이면 밝히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과 생각까지도 숨김없이 고백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백범 가족과 동아일보의 인연도 소개했다. 백범은 일지에서 ‘1925년 상해에서 두 손자를 키우시던 어머니는 내 짐을 덜어주려고 네 살배기 막내 신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셨다. (…) 내가 노자를 조금밖에 못 챙겨드려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여비가 떨어졌다. 어머니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셨다. 그러자 지국에선 상해 소식과 어머니의 딱한 형편을 기사로 읽었다며 서울행 차표와 여비를 드렸고,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한다’고 적었다. 


김 전 의장은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었지만 일제의 보도통제로 국내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할 때 동아일보만 호외를 네 번이나 발행하고 이 의사 사진과 집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추모식에서는 ‘백범 묻다…’ 외에 기념사업협회 차원에서 출간한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국내편)’도 헌정됐다. 백범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거쳤던 장소와 사건들을 일일이 답사해 정리한 것이다. 김 전 의장은 “내년은 백범 추모 70주기,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라며 “내년에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백범이 중국에서 활동한 지역을 중심으로 2부를 낼 계획이며, 3부는 북한 지역의 노정을 담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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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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