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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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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상층부를 재건축한 모습을 담은 옛 그림.(위 왼쪽) 돔 위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다. 물론 미너렛(첨탑)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슬람 사원이 된 이후로는 돔 위에 십자가가 없다.(위 오른쪽) 그러나 이 건물 내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하기아 소피아에는 위 왼쪽 그림에서처럼 십자가 모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아래 그림)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Mezquita.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창건한 사원. 후대의 통치자들이 확장을 거듭해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재정복 당한 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는 “어디에나 있는 건물을 짓자고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건물을 부수고 말았구나.”라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원의 중심부만 개조해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8일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던 쿠데타. 532년 1월 10일 정치적·종교적으로 대립하던 청색파(Factio Veneta)와 녹색파(Factio Prasina)간에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 응원 도중 싸움이 벌어져 주동자들이 사형을 언도받자 이들은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파가 연합해 ‘니카(승리)’를 외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에 편승해 황제의 반대파였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諫言)으로 피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반란군을 급습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저서로는 『전사(戰史)』『비사(祕史)』『건축기(建築記)』 등이 있다. 그는 『건축기』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또 이렇게 칭송했다. “이 대성당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원주 위로 치솟아오른 거대한 돔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습은 견고한 석조 건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려 우주를 덮고 있는 것 같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6개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극장), 영국의 스톤헨지(거석 기념물),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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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유수의 건축가이자 유력 언론의 칼럼니스트인 알리 에사드와 이스탄불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맺었다. 알리는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 서적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제목이『콘스탄티노플의 기념물』인 이 책은 독일 베를린에서 1855년에 간행된 서적을 100권 한정판으로 찍어낸  영인본이다. 일련 번호는 021/100. 세상에서 100권밖에 없는 책의 21번째 주인 자리를 내게 양도해 준 알리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은 특히 아야 소피아의 건축공학적 특징을 수준 높은 그림과 함께 mm 단위로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 조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판형이 신문(대판)보다도 커서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그림들은 2,3편에서 좀더 상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황제는 대성당에 가기 전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음 네 가지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군주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황제를 위해 목숨과 가정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의 허물을 사과하노라. 나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면 용서하기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성사와도 같은 황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대성당을 나온 황제는 황궁으로 가 거기에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도성 시민들이 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황제와 술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오스만의 역사가들은 “이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었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을 뿐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고 부인한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된 표현이다.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마지막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호전성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피정복자인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교도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말로써 보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은 피정복민들에게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신앙의 자유, 남녀 평등,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코란(2:256)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이슬람의 빠른 전파는 무력이나 강제적 개종보다는 오히려 관대와 포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고색창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1573년에 착공해 2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도리아, 이오니아, 고딕, 르네상스 등이 하모니를 이룬 고전 건축 양식의 집합체이다.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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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메로스 2010.11.19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말로 블로그판 <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
    그러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가 드물듯이
    과연 이 작업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아무튼 참 대단하십니다.

  2. 레드블랙 2010.11.20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가슴 안에서 거문고와 비파가 현을 강렬하게 긁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가 봅니다.

  3. 앙코르 2010.11.21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주마간산, 하지만 다음에 다시 탑승해 이스탄티노플 구석구석을 샅샅이 탐사해야지.

  4. 프로페셔널 2010.11.22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이는 깊게, 넓이는 넓게...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맛이 납니다.
    사진의 적절한 배치도 베리 굿!

  5. 동네주민 2010.11.22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저 웅장한 건축물을 매일 볼텐데...
    우리가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이런..벅찬 감동을 매일 느낄까요??

    매일 매일 느끼는 벅찬 감동이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것 같네요...

    우리 동네에는....??

  6. 포에버 2010.11.25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야, 아야, 아야! 그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화해와 공존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이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정말 숙연해집니다.

  7. Halil Arça 2010.12.08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ello,

    This is Mr. Arça, I received your post.
    Can you please send me your e-mail adress.
    halilarca@yahoo.com
    Thank you

  8. 2010.12.09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dddd 2011.02.28 0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성사도 성당이 무었때문에 부숴졌고
    그리스 본토인들은 얼마나 차별받았는데.....

  10. BlogIcon eatwithmeist 2012.12.18 04: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연구와 정성을 다해 작성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얻고 갑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살고, 터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을 알리고자 블로그를 열었는데..제 술탄아흐멧 관련 포스팅에 님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4
                              -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하는 종군 기자 리포트



   ‘술탄’이란 아이디를 쓰는 분이 나의 네이버 블로그에 두 개의 덧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 2편을 읽고 나서입니다. 몇 줄 발췌해 옮겨 보면….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누구도 이처럼 이스탄불을 철저히 뒤지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자 비잔틴 제국의 오욕인 1453년 5월 29일의 역사를 깊은 영혼과 가슴으로 파고들었던 이는 흔치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런 이름은 이 도시에 빠져들어 작은 돌길을 거닐며 지난 세월의 바람 소리와 155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성벽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바로 공존과 화해의 이름이다.

  이 도시의 오랜 돌과 바람과 역사는 그들의 아픔과 사연을 온몸으로 읽어내려 준비된 한 인간에게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너무 기대된다. 이스탄티노플!!! 앞으로 나도 이 도시를 그 분의 저작권 허락을 받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1453년의 생생한 전투 장면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것도 너무 잘난체하는 전문가의 어려운 설명이 아니라, 제법 유명한 한 공직자의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으로 전해주는 묘미가 더하다.”

 

  아이디(술탄)를 클릭했더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 내가 터키로 떠나기 전 자문도 해주었던 이 교수로부터 그런 과분한 칭찬을 듣고 보니 힘이 불끈 나면서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나로선 벅차기만 한 이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기가 이제는 힘들어졌구나 싶어서입니다.

  정말입니다. 이희수 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이 아니었더라면 퇴근을 새벽 한 시 이후로까지 미루어가며 사진을 고르고 캡션을 다는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이름 지은 도시 ‘이스탄티노플’은 무제한 사용을 허가합니다. 한 푼의 저작권료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많이만 사용해 주십시오. 간혹 저작권자를 언급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누구라도 ‘이스탄티노플’을 이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시장(市長)도 없는 그 도시의 명예시민이 되는 겁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을 가리키며 강력한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창과 칼과 활과 도끼로 무장한 채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여덟 명의 호위병들은 술탄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파노라마 박물관 전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이 각자 자기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처음 소개하는 ‘사진 같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뒤에 또 언급하겠지만 ‘이스탄티노플’에 새로 생긴 세계 최대의 ‘파노라마 극장’에 있는 어마어마한 그림의 중요 장면들을 한 컷씩 설명하면서 세계사를 바꾼 1453년 5월 29일, 그 치열했던 전쟁의 현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내가 전사(戰士)가 되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고 죽여야만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의 그 무자비한 야성 본능이 실감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땀으로 목욕을 한 채 황성 옛터와 허물어진 성곽 사이를 걷고 또 걷던 나와 우리 일행들 모습이 그립게 떠오릅니다. 어쩌면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한 작전 지도를 만들려는 오스만의 병사들처럼 우리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과 그 주변을 샅샅이 탐사했습니다.


  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들이 여러분을 550여 년 전 격전의 현장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 육지 성곽 편의 마감 인사를 갈음합니다. 다음 편은 골든 혼 성곽으로 이어집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크게 세 군데입니다. 블라케르나에 황궁의 끝 부분에서 카리시우스 문까지, 거기서 성 로마노스 군문까지, 또 거기서 레기움 문 근처까지가 집중 포화를 받았습니다. 리쿠스 강을 중심으로 1킬로미터에 이르는 메소테이키온 성벽 지역은 그 중에서도 핵심부였습니다. 공격과 수비 모두 이곳에 집중되었습니다. 방어군 입장에서 가장 취약점이 많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술탄(메메드 2세)은 이곳 성벽 400미터 앞에 본진을 쳤고, 전투시에는 성벽 코앞까지 가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비잔틴군으로 하여금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인해전술로 밀어 부쳤습니다.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역시 이곳을 자기 무덤이라 생각하고 병사들과 한 몸이 되어 싸웠습니다. 파노라마 극장의 전투 장면들도 바로 여기를 중심 배경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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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화염의 위력인가. 보병과 기마병을 총동원해 온갖 무기를 앞세우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하는 오스만 투르크군 병사들에게 비잔틴군이 불 폭탄 세례를 퍼붓고 있다. 오스만 병사들과 함께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채 화형식(火刑式)을 당하고 있다.
창검을 들고 방패·갑옷·투구 등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유럽 및 아시아 지역에서 총동원되다시피 한) 오스만 정규군이다. 흰 두건을 쓴 정예 예니체리 부대들도 칼날을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내닫고 있다. 오른쪽으로 복장과 무기가 각양각색인 비정규군 바시바조우크(Bashi-bazouks)의 모습도 보인다. 그 뒤로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막사 수천 개가 비온 뒤 죽순 돋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막사와 투석기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것이 금각만(골든혼)이다.

* 그리스 화염 : 'Greek Fire'로 불리던 화염 방사기 방식의 불 폭탄.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탁월한 진가를 발휘했다. 이 전쟁 800년 전부터 사용되어 육상·해상·지하 땅굴전 등에서 위력을 나타냈다. 발화재는 지하 석유류에서 채취해 썼지만 정확한 제원(諸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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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彼我)조차 구별할 수 없는 아수라장 전쟁터. 공격에 나선 오스만 보병들의 등 뒤에서 대포는 무자비하게 작렬했다. 목숨은 도구에 불과할 뿐, 오로지 전진 또 전진이었다.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의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무너지는 성벽더미와 함께 두 제국의 병사들이 서로 뒤섞여 성 아래로 아득하게 추락하고 있다. 나뭇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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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죽느냐 죽이느냐, 무너뜨리느냐 지켜내느냐. 해자(垓子/垓字)는 이미 메워지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오스만 투르크군과 비잔틴 제국의 병사들이 외성벽을 사이에 둔 채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림 왼쪽 끝 가운데 성벽에는 대포알이 박혀 있다. (아직도 성벽 어딘가에 대포알이 박혀 있다는 파노라마 박물관장의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대포알을 찾아 얼마나 성곽을 헤매고 다녔던가?!) 주탑마저도 휑하게 구멍이 나 버렸다.
*공성탑(攻城塔)으로는 불길이 치솟고 하늘은 자욱한 포연(砲煙)으로 뒤덮였다. 정규군 뒤에서 출격 준비를 마친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제국의 수도로 군림했던 이 도시의 운명도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인가.

 

* 공성탑 : 오스만 투르크 쪽에서 비잔틴 제국의 성 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성벽 높이와 대등하게 만든 사다리 구조를 지닌 탑. 목재를 썼으므로 만들기 쉽고 옮기기 편했던 반면 튼튼하지 못하고 불에 잘 타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차례에 걸친 비자틴군의 기습으로 여러 대가 파괴되어 실제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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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5월 24일)이 뜬 뒤로 닷새가 지나 달이 **터키 국기 모양으로 기울어가던 5월 29일 새벽, 화염과 포연이 콘스탄티노플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캄캄했던 밤하늘이 대포와 그리스 화염 불기둥으로 인해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림 왼쪽 주탑 위는 거인 하산이 진두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가 콘스탄티노플 성에 올라가 최초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을 꽂는 장면. 붉은색 오스만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쌍두 독수리가 그려진 비잔틴 국기는 성벽 아래로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주요 상업 기지로 삼고 있던 동맹국 베니스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도 이 순간 같은 운명을 맞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오스만 영웅은 비잔틴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온몸에 화살과 돌 세례를 받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고 만다. 승리에는 영웅적 희생이 따르는 법. 성벽 함락의 결정적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 보름달 : "보름달이 떠 있는 한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전이 당시 널리 전파돼 있었다. 이날(5월 24일)은 공교롭게도 월식까지 있었다.
** 터키 국기 : 터키 국기는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고 이는 오스만 투르크 군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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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성벽 사이로 정규군을 앞세운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깃발을 나부끼며 물밀듯이 성 안으로 쳐들어가고 있다.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대포 소리와 뒤섞여 하늘을 찢어발길 것만 같다. 술탄(메메드 2세)은 첫 성곽 돌파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리고, 모든 병사들에게 3일간의 도성 약탈권을 보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른쪽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비잔틴의 상징인 독수리상도 곧 날개가 꺾인 채 추락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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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노라마 박물관에 그려진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 오스만 병사들이 발포 준비를 하고 있다. 거포는 포신 길이가 8미터 이상이었고 돌로 된 포탄은 600킬로그램을 넘는 무게였다.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한 술탄의 전략은 탁월했다. 헝가리는 당시 비잔틴 편이었고 우르반은 비잔틴 황제 밑에서 일했었다. 그러나 네 배의 급료와 충분한 대포 제작비를 지원하겠다는 술탄 쪽으로 기꺼이 몸을 팔았다. 우르반은 결국 전쟁터에서 죽고, 유럽의 강국 헝가리는 그 후 오스만에게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역사는 아이러니인가, 냉혹한 것인가.

* 우르반의 대포 : 우르반의 거포(巨砲)는 한 번에 세 발에서 일곱 발까지밖에는 쏘지 못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화약이 포신을 달구어 열도 식히고 대포를 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완책으로 거포와 함께 작은 대포들이 동원되어 성벽 파괴의 결정타 역할을 했다.


 

파노라마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맨 앞 페이지 왼쪽 아래에 박물관장과 함께 찍은 내 사진이 방문 소식과 함께 올라 있었다. 그날 나는 방명록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와 술탄 메메드 2세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 오늘도 위대한 터키 국민들에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파노라마 박물관은 지난해 1월 31일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60도 반원형의 파노라마 극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벽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그림 크기로도 세계 최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로는 그 전경(全景)을 한 컷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극장 측의 양해 아래 부분부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캡션 역시 마찬가지. 내가 읽고 겪고 보고 들은 지식은 물론 약간의 상상력까지 동원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임을 밝혀 둔다.

▲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가장 큰 거포는 모두 소실되고 그보다 작은 대포들만 남았다. 그래도 이 대포는 무게가 자그마치 15톤(포신 길이 424센티미터, 구멍 지름 63센티미터)에 이른다. 내 몸 하나쯤은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이다. 대포알은 285킬로그램. 그러니 이보다 두 배 이상 더 크고 무거웠을 우르반의 거포는 어떠했을까. 이런 대·중·소 대포들로 49일 동안 쉬지 않고 포를 쏘아댔으니 제아무리 철옹성인들 온전할 수 있었으랴
.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군사 박물관 대형 홀에서 감상한 오스만 군악대(메흐테르, Mehter)의 연주. 지축을 뒤흔드는 우렁찬 북과 피리 소리로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비잔틴 병사들을 주눅 들게 한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깃대를 들고 있는 두건 쓴 단원들은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오스만 군악대는 세계 전사(戰史) 상 최초로 등장한 군악대로서 현대 군악대의 효시이다. 서구 열강 군악대도 모두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군사 박물관에서 그 웅장한 연주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550여 년 전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비잔틴 제국 크고 작은 교회들의 종소리를 들었다. 시공을 초월해 한 쪽 귀로는 오스만 군악대 연주를, 다른 한 쪽 귀로는 비잔틴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대포를 쏘며 진격해 오면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종이란 종은 일제히 간절한 염원이 담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시 전황(戰況)을 기록한 그리스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 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오스만군의 대포 소리와 그보다 더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묻혀 버렸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물론 성 안의 시민들 또한 얼마나 위압감과 전율을 느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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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복원도를 참조해 다시 그린 그림. 황금문에서 제2군문(벨그라드카프) 사이의 3중 성벽을 입체적으로 재현했다. 1000년 넘게 아무도 뚫지 못했던 과학과 공학, 그리고 인간의 땀의 결정체이다. (아래의 성곽 사진들과 비교하면서 보기 바란다.)
그림에 표기된 수치에서 보듯이 스티븐 런치만과 시오노 나나미는 성곽 규모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외성벽의 높이(런치만 7.5m, 나나미 10m), 내성벽의 높이(런치만 12m, 나나미 17m), 내성벽 주탑의 높이(런치만 18m, 나나미 20m 이상)에서도 두 사람은 조금 엇갈린다. 런치만은 학자고 나나미는 작가다. 내 눈대중으로는 내성벽 주탑은 20m 이상 되어 보였다. 탑과 성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모양과 크기가 달랐다. 외성벽의 주탑과 내성벽의 주탑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 3중 성벽의 위용이 한 눈에 느껴진다. 지역에 따라 약 45~90m 간격으로 주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제는 외성을 전(前)방위로 해서 통로②에 전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정규군만도 8만 명에 육박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정규군·비정규군·외인부대·시민군까지 모두 합해도 채 7000명이 안 되는 병력으로 대항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성 주탑을 배수진으로 성곽의 모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열쇠를 황제에게 맡겼다. 들어온 이상은 못 나간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결사항전의 각오였다. 황제와 고위 관료, 주요 지휘관들은 말을 타고 통로를 누비고 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형에 따라 폭의 차이는 있지만 통로②는 런치만이 말한 것처럼 내 눈에도 12~18m는 족히 되어 보였다.

* 정규군만도 8만 명 : 8만 명 설은 런치만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쟁에 총동원된 투르크군의 병력을 20만 혹은 30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투입된 병력 총규모를 16만 정도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내성벽.
이 성이 어떻게 1500년 그 오랜 세월을 버텨 왔는가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성벽을 눈여겨 보라. 맨 밑에는 잔돌, 그 위엔 흙, 그 위엔 벽돌, 벽돌과 벽돌 사이엔 또 흙, 그런 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에 강력한 접착제가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도 1500년은 너끈히 버텨낼 것 같지 않은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5~90m의 간격을 두고 주탑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는 제2군문 입구이다. 이 늠름한 3중 성벽 구조의 위용을 보라. 감히 범접할 수 있겠는가. 오른쪽 내성의 주탑들은 파괴된 모습이지만 군문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끝자락에서 본 성벽의 주탑 모습. 여기도 오스만군의 집중 공격이 퍼부어진 곳, 바꾸어 말하면 비잔틴군 방어의 최일선 중 하나였다. 부서진 주탑 너머로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과 멀리 갈라타 지역이 보인다.


▲ 방어용 주탑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아군끼리의 소통과 왕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1453년 당시에는 이 사진에서 보이는 보호 철책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 해자가 있던 자리. 지금은 메워져 밭으로 변해 있다. 해자는 육지 성벽 전체에 걸쳐 팠다. 수심이 깊은 곳은 20m에 이르렀지만, 어떤 곳(예 : 블라케르나에 지역)은 물은 흐르지 않고 구덩이만 파둔 곳도 있었다. 성으로 진격해야 하는 공격군 입장에서는 우선 해자 통과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오스만군은 기를 쓰고 해자를 메운 반면, 비잔틴군은 다시 파내는 데 전력을 쏟았다. 채우고 비우기의 연속이었다. 오스만군은 참호를 만들고 도성 침투용 지하 터널(땅굴)을 뚫느라 파낸 흙을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해자를 메우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면 비잔틴군은 밤중에 몰래 그 위치에 그리스 화염과 폭약을 설치해 폭파시켰다. 그러는 사이 두 제국의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심히 밭을 갈고 있는 저 농부는 그런 해자의 아픈 역사와 기구한 사연을 알고 있을까.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해자가 있던 자리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하수로(배수관). 성벽 복원도의 빨간 동그라미 친 부분을 참고할 것.


▲ 부서진 외성벽 주탑을 지나 내성벽 주탑 쪽으로 가고 있는 아베크족.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탑 꼭대기에 올라 비잔틴군과 오스만군 간에 오가던 살육의 화살이 아니라 연인 앞에서 사랑의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해보이는 건 아닐까.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4편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종합편이므로 1, 2, 3편 탐사 경로를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군사 박물관(탁심 광장에서 북쪽으로 1km 거리)과 1453 파노라마 박물관(톱카프역 바로 뒷편)이 추가되었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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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독자 2010.09.08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읽고사진들을보면서
    이스탄티노플
    그도시의매력에
    점점빠져들고있습니다

  2. 피플 2010.09.08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우물에서의 은어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 물속을 헤엄치는 은어를 반짝이는 총알에 비유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의 시를 떠올려보면 , 이스탄불을 구석구석 탐사한 일행의 모습이 은어를 닮아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두륜 2010.09.08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감상평을 남길만한 지식은 없지만 가슴으로 느낄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 겠네요...
    "이스탄티노플"의 명예 시민으로서....^^

  4. BlogIcon 너서미 2010.09.08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이스탄불에 갔을 적에
    다리 하나를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것만큼이나 이 땅을 둔 각축전도 치열했더군요.
    이번 포스팅을 보니 보다 더 실감납니다.

  5. 오디세이 2010.09.09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 극장 그림들과 그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필자의 글솜씨가 압권입니다.
    이스탄티노플,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6. 이우종 2010.09.09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타는 탐구욕 과 활활 끓고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감히 시늉이라도 해볼까 하고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 기대해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

    • 호야 2010.09.0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려 감사합니다 이스탄티노플이란 내가 명명한 도시에 스스로 빠져서 공무 틈틈이 시간내어 전심전력하고 있소 대작 수작소리는 못듣겠지만 힘들여 쓰는 역작인것 만은 분명하오 아직도 쓰고 싶은 게 하 많이 남았으니 건강 챙겨가며 하겠습니다

  7. 중독 2010.09.30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그랗게 생긴 대포알을 보니 대포알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쩜 저렇게 동그랗고 예쁘게 만들었죠?
    대포 한번 쏘고 다시 주워다 쏘지는 못했을텐데.
    전쟁동안 쉼없이 대포를 쏘았다니, 대포알 갖고 다니기도 엄청 힘들었겠어요.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하는데, 동그랗게 대포알을 만든 석공(?석공이 만들었겠죠?)의 딸도 예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ㅋㅋ 아들이 잘생겼으려나?

  8. BlogIcon BlueMiR 2012.02.10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보고 갑니다~
    그림좀 몇개 퍼가겠습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3
                     - 3중 성벽 어딘가에 박혀 있을 대포알을 찾아서

 

▲황금문(알튼카프)! 황제의 대관식 또는 전쟁 승리의 개선문 등 의식용으로 사용했던 비잔틴 제국의 자존심. 이 문을 통해 옛 황궁까지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길(‘승리의 길’)이 나 있다.
마르마라 해를 끼고 세워졌던 성벽은 끝 부분에서 작은 비상문을 꼭짓점 삼아 육지 쪽 3중 성벽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육상에 세워진 제1군문인 황금문을 성 바깥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성문과 외성 쪽 출입구를 보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여기저기 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내성 쪽은 사진 찍을 곳이 마땅찮아 정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공원묘지를 헤치며 들어갔지만 나무들로 뒤엉켜 있어 돌아 나왔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역사학도인 니사가 건네준 프린트물 속의 황금문.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2중 성문과 입구의 화려한 모습을 아쉬운 대로 상상할 수 있다. 쌍두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치켜든 채 준마를 타고 저 문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개선(凱旋)했을 비잔틴 황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그림 ①②와 위 사진 ①②는 동일 건물. 전면(全面)을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흰 대리석 수백 장으로 장식한 황금문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황금이 어디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황금문을 지나서 우뚝 솟아 있는 내성벽의 주탑. 무화과나무들이 발돋움을 하며 성 안을 넘겨다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위풍당당한 주탑에는 키가 한참 못 미친다.


▲성곽 탐사를 하던 도중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백라이트와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벨그라드카프(제2군문)를 통과하고 있다. 성문 안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둘러보고 싶은 성곽은 아직도 여럿이건만…. 갑자기 마음과 발길이 조급해졌다.


▲까마득한 성벽 위를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 저렇게 한적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길 위에선 자연스럽게 손잡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다. 페가에 문(실리브리카프) 근처 어디쯤에서 마주친 풍경이다.

 


▲내성과 외성․해자가 있던 자리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밭을 일군 부분이 해자가 있던 곳.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일하는 틈틈이 허리를 펴고 고개 들어 성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면 피로가 금방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창살과 자물쇠로 가로막힌 내성과 외성 사이 공간도 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7페이지)에 따르면, 높이가 약 12미터인 내성벽(주탑 높이는 18미터)과 7.5미터 가량의 높이를 지닌 외성벽 사이에는 폭 12~18미터에 이르는 통로가 나 있었다.


▲페가에 문 안쪽 마을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떼들. 양들은 보기와는 달리 심보가 고약해서 겨울에는 남들 추우라고 떨어져 자고, 여름에는 남들 더우라고 붙어서 지낸다는데, 정말인가? 불볕더위인데도 하나같이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이 양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복원된 모습이지만 3중 성벽의 위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1천 년 동안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성벽 아니던가.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대를 타고 오르는 토마토 줄기에도 올망졸망 토마토들이 매달려 있다.


▲노점 좌판 위에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야채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당근‧가지‧고추‧토마토‧배추(?)…. 아마도 해자를 메운 밭에서 수확한 것들이겠지? 이런 재료들로 식탁을 차리면 몸 안의 피가 한결 정갈해질 것만 같다.


▲아름답지 않은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까지 개운해지는 이런 풍경들이 ‘이스탄티노플’에는 도처에 널려 있다. 셔터를 누르면 ‘그림 같은 사진’이 나온다. 고도(古都)의 실체를 느끼기 위해 찾는 이는 우리 말고는 없는 것일까.


▲2중 성문 맨 안쪽 성문 벽에 매달아 놓은 대포알. 저 정도 크기라면 1453년 전쟁 당시에는 작은 대포알에 속했으리라. 성문 통과 가능 높이는 2.5미터이고 폭은 2.9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그 옆에 세워져 있다.


▲아랍어로 표기된 글자라서 해독을 못하는 게 아쉬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정확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서 보았던 성벽에 박힌 대포알 아닌가?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도 열심히 성곽을 탐사하는 우리 일행에게 현지인들이 한 곳을 가리키며 자꾸 저 안으로 들어가 보라 한다. 그래, 가 보자! 눈에 잘 안 띄는 벽과 벽 사이를 지나 30미터쯤 걸어가자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반 지하 석굴(?)이 나타났다. 내성에 딱 붙어 있는 조그만 교회다. 출입구 옆에는 걸인들이 잠자리로 삼아 몸을 눕힌 듯 더러운 소파 위에 천 조각이 어지럽다. 이 문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어둠침침한 반 지하 공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浮彫)물들. 비잔틴 교회인 모양이다. 눈높이에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휴대하고 간 랜턴과 집시 풍의 사내가 빌려준 촛불을 켜들고 구석구석 발밑을 비추어가며 대리석 석곽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내는 촛불 값으로 건네준 5터키리라(우리 돈으로 4,5천 원)를 받아 들고는 횡재했다는 듯이 신바람이 나서 맥주를 사 마시러 갔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파괴된 주탑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부 구조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막힌 아치형 구조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주탑의 뒤쪽(안쪽)임을 말해 준다.


▲내성 안쪽 풍경. 돌로 된 성벽과 나무로 지은 가옥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들의 저 강인한 생명력!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 위 석벽 틈 사이로 잡초가 둥지를 틀고 있다. 석벽에 새겨진 글씨는 로마자 표기라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석벽 맨 위 앞머리의 글자가 ‘콘스탄티누스’로 시작되고 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병사들이 총검으로 무장을 했듯이 나는 녹음기‧지도‧카메라를 늘 탐사에 지참했다. 등에 멘 배낭에는 또 다른 ‘비밀 병기’들이 숨어 있다.


▲무너질락 말락 위태롭게만 보이는 성벽 아래 풀밭에서 이 도성의 시민인 듯한 한 사내가 길게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1500년을 지탱해 온 난공불락의 성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야 있겠느냐는 듯이….


▲레기움 문에서 톱카프(성 로마노스 시민문)를 향해 가는 길. 어느새 날이 저물어 성벽 위 조명등에 불이 들어왔다. 오른쪽 하늘로는 포물선을 그리며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비잔틴 제국 깃발에 그려져 있던 쌍두 독수리의 환생은 아니겠지? 성벽 너머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1453년 당시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탑을 관통한 저 구멍은 혹시 대포가 뚫고 지나간 자국? 성벽에 혹시 박혀 있을지도 모를 대포알을 찾는 사람처럼 우리 일행은 성곽 이곳저곳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톱카프로 가기 직전에 만난 외성벽의 모습.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철골로 버팀대를 세워 놓았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저만치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미너렛(첨탑)이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3편에서는 육지와 바다(마르마라 해)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는 비상문부터 톱카프 직전(갈색 사각형 부분)까지를 사진에 담았다. 1편과 2편이 지도상으로 볼 때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탐사한 기록이라면, 3편은 지도 맨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탐사한 내용이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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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것이궁금하다 2010.09.02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혼이 지는 성벽 너머로
    사라진 두 남녀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미스터리 이스탄티노플

  2. 알밥 2010.09.03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될 만큼 생생한 사진에 감탄 또 감탄...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아프선프 2010.09.03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명록에 답변해주셈~~

  4. 콜럼버스 2010.09.04 1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참 기발한 조어입니다.
    어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매우 적절한 용어랄까요?
    신생어 사전에 등록될 것 같습니다.

  5. 두륜 2010.09.06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 여행이 대단히 인상 깊으셨나 보네요.....

  6. 불국사 2010.09.09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여... 터키하면 지난 월드컵 축구, 한국전쟁참전 등 정서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운나라... 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우리경제와도 직접적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의장님의 글을 보면서 바로옆 나라처럼 자세히 재미있게 소개해 주시니 지금 제가 세월을 거슬러 그곳에 있는 느낌입니다. 사진중에 가방매고 모자쓴 뒷모습이 의장님이죠? 뒷모습은 학생같네요. 5탄도 빨리 올려주세욧!!!! 기다립니다.

  7. 비잔티움 2010.09.09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콘스탄불? 앞에게 낫네요... 그이름 바로 지은거예요? 아님 오래 고민해서 지은건가요? 암튼 기발한 상상!!!

  8.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대하지만 섬세하며 복잡하지만 알기쉽게 풀어쓴, 1453년 성벽의 흙내음과 골든혼의 바다내음, 그리고 대포소리와 화약냄새가 아련히 느껴지는 생생한 포스팅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부중인데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9. 옴니버스 2010.11.18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곽을 따라 함께 걷고 난 듯 다리가 저릿저릿한 느낌이군요.
    멋진 가상 체험 공간입니다.

  10. 리얼리스트 2010.11.23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땀냄새 물씬 풍기는 리얼 포스팅!
    인문학의 향기에 젖어들게 하는구나.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2
                              - 타임머신 타고 550여년 전으로

▲ 작열하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지대가 낮은 격전지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멀리 성곽 위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에서 유래한 현대 터키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성 로마노스 군문(제 5군문) 앞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 성로마노스 군문 입구 석벽에는 비잔틴 시대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음직한데 해독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 저 허물어진 성벽은 아마도 세월의 탓이겠지만, 1453년 당시 치열했던 격전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도 저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 격전지 성벽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리라. 한 쌍의 청춘남녀가 이 더운 날 몸을 밀착시킨 채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을 향해 올라가는 길. 성 안쪽의 풍경이다. 그 옛날 먼지를 일으키며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말들이 달렸을 길이 지금은 아스팔트로 바뀌어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 외성 위를 탐사하고 있다. 우뚝 솟은 건 내성의 주탑이다. 인도와 풀밭으로 바뀐 오른쪽엔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성곽의 안과 밖 그리고 위를 입체적으로 탐사했다. 사흘 내내 이런 식으로 다녔지만 성곽 탐사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술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모습.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 함락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스물한 살 술탄이 예니체리 군단의 삼엄한 호위 아래 대신들과 장군들, 이슬람교 고승들까지 거느리고 카리시우스 성문(에디르네카프)을 지나고 있다. 술탄의 행선지는 아야 소피아. 말발굽 아래로 피를 흘리며 어지럽게 쓰러진 비잔틴 병사들의 시신이 처참했던 전투 상황을 웅변해 준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 ‘이스탄불 정복자 협회’에서 톱카프 성문 벽에 부착해 놓은 안내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내 네이버 블로그에 이런 해석을 달아 놓았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정복자 파티의 군대는 대포를 쏘아 부서진 이 근처의 공백을 통해 이스탄불로 진입하였다."
톱카프는 ‘대포·포탄(톱)이 지나간 문(카프)’이란 뜻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펼쳐진 곳 중 하나이다.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켜내려는 자들의 결사항전, 그 현장에 서자 나도 자못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 톱카프 성문 앞 분위기. 복원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성벽의 엄청난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왼쪽 벽에 화살표와 함께 파란색 페인트 글씨로 쓴 "WC"는 낙서인가, 화장실 안내문인가.


▲ 톱카프에서 제 4군문을 지나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을 향해 가는 길. 복원된 성벽 모습이 감동을 반감시킨다.


 

▲ 성곽 탐사 도중 날이 저물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십자가가 세워진 뾰족 지붕 아래서 은은한 종소리가 부드럽게 발목을 잡으며 이제 그만 쉼표의 시간을 가지라고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행군을 멈추기가 아쉬웠다.

 

▲ 마르마라해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왼쪽 끝은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가운데는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이다. 해변에 서 있던 비잔틴 시대의 등대는 현대식 등대로 바뀌어 있다. 내가 탄 배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끝나고 마르마라해가 시작되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등대 오른쪽으로 해안 성벽이 보인다. 해안 성벽 탐사와 아야 소피아 이야기는 다음에 또 사진과 함께 소개할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 전경. 이 도시에 있는 수백 개의 모스크 가운데서 블루 모스크는 첫눈에 알아보기가 가장 쉬운 이슬람 사원이다. 6개의 첨탑(미너렛)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유일한 모스크니까. 마르마라 바다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때 블루 모스크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해냈다.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갤리선 선장이 된 심정으로 유람선을 타고 해상 전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서 읽은 해상 전투 상황을 조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가며 더듬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카리시오스문 일대▶제 5군문▶성 로마노스 시민문▶제 4군문 일대(분홍색 사각형 부분) 아야소피아▶블루모스크▶등대(분홍색 삼각형 부분)
를 사진에 담았다. 블루 모스크·아야 소피아·등대가 담긴 사진은 마르마라 바다 위 유람선에서 찍은 전경이다.
* 하늘색 사각형 부분은 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에 소개한 탐방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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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킬리만자로의 표범 2010.08.30 1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이 시원해지는 사진과 재기발랄한 캡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입니다.

  2. 페이스북 2010.08.30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오노 나나미 책 표지에 써 있는 글귀가 새삼 떠오릅니다.
    "국가의 적은 안팎에 있다.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 주는 것은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방위력
    그리고 상대 국가와의 우호 관계이다."
    대한민국의 일부 철부지 젊은이들,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입니다.

  3. 돌솥밥 2010.08.31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가 참 많은 감동을 지닌 나라 혹은 관광지라는 걸 사진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만큼 굴곡이 많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우리나라도 다 허물어버리지만말고 좀 보존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 다 남겨서 교훈으로 삼는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좋은 사진 잘 보고 갑니다. 땡스!!

  4. 인디아나고 2010.08.31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드벤처 무비
    주인공이 되신 것 갈군요
    이스탄티노플
    3탄도 기대됩니다

  5. BlogIcon 전자돌이 2010.08.31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사진은 인디아나존스 같아요 ^^) 점점더 흥미진진해 지는군요!

  6. 유근준 2010.08.31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의 인간에 대한 순수함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양과 열정이 정말 부럽습니다.

  7. BlogIcon crys1964 2010.09.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트위터로 의장님을 안 후 이제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알면서 좀 더 의장님을 알게 되네요. 기자생활을 하셔서 탐사활동에 더 관심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타고난 학구열이 강하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감동 받았구요. 앞으로도 의장님의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8. 두륜 2010.09.06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더운 날씨에 유적을 땀 흘려가며 둘러 보시는 모습이 인상 깊네요...
    여행 하시는 동안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으신것 같습니다...
    무한부득(無汗不得) 땀 흘리지 아니하면 얻을 것이 없다....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 좋습니다...

  9. 두바퀴 2010.10.17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저 먼 시간과 공간으로 날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이 시리즈가 끝날 때쯤에는 저도 뭔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느낌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