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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 수도원 교회(카리예 박물관)에서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②
Chora Church (Kariye Müzesi : Kariye Museum)



1편을 쓴 지 거의 12개월 만에 2편을 낸다. 무던히도 게으른 내 자신을 질책하며 기다려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와 사과를 드린다. 본 편에서는 코라교회가 자랑하는 세기적 미술품, 즉 비잔티움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에 대한 본격 설명을 드리려고 한다. 1부에서 설명했지만, 간단히 서두를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원래 코라교회는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성벽 바깥에 세워진 복합 수도원이었다. ‘시골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aviour in Chora)’ 또  ‘야외에 있는 거룩한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Redeemer in the Fields)’라는 뜻이다. 내 책 «술탄과 황제»에 자세히 설명한 5세기 초에 건립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육지성벽(QR코드 17) 안으로 들어오게 됐지만 ‘교외∙시골(chora)’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본당 건물은 마리아 두카이나(Maria Dukaina,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장모)가 1077~1081년 사이에 십자가형 구조로 재건축한 것이다. 그 후 12세기 초 지진 등으로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는데, 이삭 콤네누스(Isaac Comnenus, 알렉시우스의 3남)가 재건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증개축은 테오도르 메토키테스(Theodore Metochites : 1260~1332)가 라틴제국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한 기념으로 안드로니쿠스 2세의 명령을 받아 이루어졌다. 원래의 건물에 지름 7m의 대형 돔을 올리고 궁륭(vault) 일부와 안쪽 나르텍스(narthex)를 개조하고, 또 서쪽에 바깥 나르텍스를 덧붙이고 남쪽에 영묘로 사용할 보조 교회당인 ‘파레클레시온(parecclesion)’을 증축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모자이크 성화와 프레스코 성화를 완성한 것이다. 오스만 시대 빛과 공기의 순환을 위해 창문을 넓힌 것 외에는 현재 건물은 모두 그 때의 것이다.


메토키테스는 뛰어난 학식과 교양으로 황제(안드로니쿠스 2세)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 하다가 60세가 되던 1320년에는 권력서열 제2위인 재상에 올랐다. 바로 이때 그가 코라교회를 재건했다. 그러나 권력과 명예는 끝이 있는 법, 1328년 황제는 자신의 조카인 '안드로니쿠스 3세(Ανδρόνικος Γʹ Παλαιολόγος, Andronikos III Palaiologos : 1328~1341년까지 재위)'에 의해 쫓겨났다. 이와 함께 메토키테스의 영광도 끝났으며,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트라케 지방으로 추방됐다. 하지만 추방을 풀어 달라는 간곡한 탄원서를 새로운 황제에게 계속 올린 덕분에, 2년 뒤(1330년)에 자신이 세웠던 코라교회에 평수도사 자격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제국은 교회를 세운 사람에게 노후에 그 교회의 수도사로 들어가 최후를 마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메토키테스도 이 전통에 따라 코라 성당의 부속 수도원으로 돌아가 2년 후인 1332년 3월 13일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코라교회의 페라클레시온에 안치됐다.


후술하겠지만 코라교회의 모자이크가 완성된 14세기를 흔히 비잔티움 제국의 르네상스로 일컫는다. 한때 이교도 냄새가 난다고 외면 받던 인간을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가치관이 이때 되살아났으며, 바로 이것이 한 세기 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20~25년간 완성된 모자이크를 제작한 예술가가 누구인지는 유감스럽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잔티움 르네상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만들어진 코라교회의 성화는 고대 그리스 회화나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 원근법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드러나며, 일부 그림에는 인체의 해부학적 사실주의가 표현되어 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약 50년 뒤인 오스만 튀르크의 바예지드 2세 때 총리인 알리 파샤(Atık Ali Paşa)는 코라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하여 카리예 자미(Kariye Camii)가 되었다.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회칠로 덮였고, 또 잦은 지진으로 작품에 손상이 갔다. 그러다가 1948년 미국 비잔티움 연구소와 덤바튼 오크스 비잔티움 연구회의 토마스 위트모어와 폴 언더우드가 후원 및 복원 작업에 착수하여 이후로 모스크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앱스(apse)의 미흐랍(mihrab)과 바깥에 있는 19세기의 미나렛(minaret)은 남아 있다. 현재 코라교회는 박물관(Kariye Müzesi)으로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코라교회를 관람할 때는 순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신도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부터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느낄 수 있도록 성화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누구에게 봉헌된 것이고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야 성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코라교회는 하기아 소피아(아야소피아 박물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초기에 건설되고 9세기 이후 성화가 복원된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건물 내부 전체가 비잔티움 후기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정교한 대석, 대형 모자이크로 장식된 하기아 소피아에 비한다면 코라교회는 소박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내부를 꽉 채운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를 마주하는 순간 호흡이 멎을 것 같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술성과 영성에 당신은 압도되고 말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후기 비잔티움 예술의 진면목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코라교회로 안내하도록 하겠다.


현재는 교회의 뒤쪽으로 입구가 나 있어 일단 들어가서는 본래 교회의 입구(정문쪽 입구)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교회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성화들로 채워져 있고, 오른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화들로 채워져 있다. 성화들은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장면을 설명하는 글들이 적혀 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공간 전체에 많은 그림을 배치하였기에 시간 순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쪽 저쪽으로 오가면서 발품을 팔아야 한다.


코라교회는 현재 남아 있는 다른 비잔티움 교회에 비해 크지 않다(742.5㎡). 교회는 크게 출입구인 나르텍스(narthex), 본당(nave/naos), 부속 교회 (parecclesion) 이렇게 3구역으로 나뉜다. [그림1]







[그림1]


정문으로 들어서면 맨 처음 나오는 공간이 바깥쪽 나르텍스(outer narthex)인데, 폭 4m 길이 23m의 횡단 복도이다. 이곳에서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로 들어가는 문 위에 비잔티움 후광을 한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삼위일체와 양성론 표시를 하고 있는 모자이크가 있다. 예수의 눈동자가 보는 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예수의 좌우 눈∙귀의 높이와 형태가 다르다. 바로 비잔티움시대 미술 기법으로 감상자가 어디에 있든 예수와 눈을 마주치게 하는 기법이다. 예수의 양 옆에는 “ἡ Χώρα τῶν ζώντων(Land of the Living, hē Chōra tōn zōntōn)*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그림 2]. 그 반대편인 외부 출입구 위에는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성모 마리아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양 손 위에는 “ἡ Χώρα τοῦ Ἀχωρήτου(as the Container of the Uncontainable, hē Chōra tou Achōrētou)**라는 명문이 있고 그 양 옆에는 두 천사가 경배하고 있다[그림 3]. 이 두 성화는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임을 나타낸다.


* 산 사람들의 나라, 곧 ‘천국’을 의미함. 시편 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 담겨지지 않는 자의 땅 또는 담을 수 없는 자의 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땅’을 의미함.


[그림 2]                                                                 [그림 3]




                          [그림 4]


안쪽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본당(nave)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나오는데, 그 위에 이 교회를 중건한 메토키테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교회를 바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4]. 그는 황실의 고급관리들만 쓸 수 있었던 황금색과 흰색 줄무늬가 있는 큰 모자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옆에는 “Ό Κτητώρ Λογοθέτηϛ τοῦ γενικοῦ Θεόδωρος Μετοχίτης(창건자이며 보물창고의 로고테테스(λογοθέτης, Logothete)인 테오도르 메토키테스)”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왼손으로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손짓을 하며 앉아 있다. 예수의 양쪽에는 안쪽 나르텍스 출입구에 있는 성화와 마찬가지로 “ἡ Χώρα τῶν ζώντων(이 코라 톤 존톤 : 살아 있는 자들의 땅)”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1. 성모 호데게트리아


본당(Nave)
메토키테스 모자이크 아래에 있는 본당 출입문 양편으로 왼편에는 사도 베드로가 오른편에는 사도 바울의 모자이크가 있다. 베드로는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그림 5], 바울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보내고 있다[그림 6]. 두 그림 모두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인체 비율과 색감이 뚜렷하고 벽감(니치)에 배치도 잘 되어 있다.


[그림 5]                                                                  [그림 6]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 신도들이 예배하는 본당이 나온다. 본당의 성화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세 점의 성화만이 남아있다. 지성소 오른편에는 성경을 펼쳐 든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다[그림 7]. 왼손에 든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라고 쓰여 있다. 왼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이 있다[그림 8]. 성모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 길을 가리키는 여인) 이콘이다. 그림 속의 테오토코스(Theotokos : 신의 어머니∙성모)는 한 손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구원자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두 그림 모두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림 7]                                                                  [그림 8]


호데게트리아는 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72쪽에서 언급한 누가복음의 저자인 성 누가가 그렸다는 호데게트리아 성화에서 이미지를 따온 모자이크다. 틈만 나면 카리예 박물관을 찾은 것은 이 호데게트리아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호데게트리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QR코드 8 참고). 성모 마리아의 머리와 양 어깨에 수놓인 별은 예수를 낳기 전과 후 모두 동정녀임을 나타낸다. 비잔티움 전승에 따르면 이 이콘은 <누가복음> 저자인 성 누가에 의해 최초로 그려졌으며, 성모가 초상을 보고 "이 그림과 함께 언제나 나의 축복이 있으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콘이 모셔진 곳에서는 수많은 기적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 순례자들에 의해 러시아에까지 전해졌다. 복사본 또한 신비한 이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책 237쪽의 각주 81 및 ①편 설명 참고)

[그림 9]


본당 입구 위에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聖母永眠,Koimesis, Dormition of the Virgin)’을 그린 성화가 있다[그림 9]. 그림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침대에 누워 있고 후광을 한 베드로∙바울 등 사제, 전도사, 초기 주교가 성모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 위에 성모 마리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아기를 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육체는 남았지만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천국으로 가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영성(영혼)을 표현하는 비잔티움인들의 예술 방식이 정결하다.



2. 코라 교회의 모자이크 성화


마리아의 생애 -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 왼편
본당에서 다시 안쪽 나르텍스로 나와 모자이크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안쪽 나르텍스에는 두 개의 돔이 있다. 본당으로 통하는 중앙 홀(세 번째 방)을 기준으로 왼편의 돔은 지름이 3.40m로, 열여섯 개의 홈과 다섯 개의 창이 있다. 돔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Theotokos : 신의 어머니)가 있고, 방사선으로 퍼져 나가는 각 홈에는 다윗 왕부터 시작되는 마리아의 조상 16명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창문이 나 있는 돔의 맨 아래쪽에는 마리아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11명의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10]. 오른편의 돔은 지름이 3.74m로, 중심 원에 예수 그리스도(Pantocrator : 전능자)가 있고, 24개의 홈에는 아담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조상 24명을 그려 넣었고, 그 아래에는 9개의 창이 있다. 이 창 사이에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11].


* 다윗(David) 이후의 조상들은 솔로몬(Slolmon), 르호보암(Rehoboam), 아비야(Abijah), 아사(Asa), 여호사밧(Jehoshaphat), 요람(Jehoram), 웃시야(Uzziah), 요담(Jotham), 아하스(Ahaz), 히스기야(Hezekiah), 므낫세(Manasseh), 아몬(Amon), 요시야(Josiah), 여고냐(Jeconiah), 스알디엘(Shealtiel) 이고, 그 아래 그려진 구약의 인물들은 하나냐(Hananiah), 아사랴(Azariah), 미사엘(Mishael), 다니엘(Daniel), 여호수아(Johua), 모세(Moses), 아론(Aron), 훌(Hur), 사무엘(Samuel), 욥(Job), 멜기세덱(Melchizedek)이다.


** 돔의 홈에는 아담(Adam), 셋(Seth), 노아(Noa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라멕(Lamech), 셈(Shem), 야벳(Japheth), 아르박삿(Arphaxad), 셀라(Shelah), 에벨(Eber), 스룩(Serug), 나홀(Nahor), 사라(Sarah), 아브라함(Abraham), 이삭(Isaac), 야곱(Jacob), 벨렉(Peleg), 르우(Reu), 므두셀라(Methuselah), 에녹(Enoch), 에노스(Enosh), 아벨(Abel)이라는 24명의 초상이, 그 애래 창문 사이에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인 르우벤(Reuben), 시므온(Simeon), 레위(Levi), 유다(Judah), 스불론(Zebulun), 잇사갈(Issachar), 단(Dan), 갓(Gad), 아셀(Asher), 납달리(Naphtali), 요셉(Joseph), 벤야민(Benjamin)이 그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요셉과 벤야민은 라헬(Rachel)이 낳은 자식이고, 단과 납달리는 빌하(Bilhah)가, 갓과 아셀은 실바(Zilpah)가 낳았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레아(Leah)가 낳았다.


 

[그림 10]                                                         [그림 11]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가 있는 돔의 아래, 본당 벽 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방에는 마리아의 생애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내용은 야곱 복음서에서 따온 것들로 정통 복음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물론 현재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성화에 대한 설명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됨을 미리 밝혀 둔다.


*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Joachim)과 안나(Anne)는 둘 다 유다 지파의 후손이다. 이들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돌고 아이가 없었다. 봉헌 축제 때 요아킴은 성전에 가서 봉헌을 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이런 수치를 당한 요아킴은 산으로 올라가 40일 동안 밤낮으로 아이를 달라고 기도한다. 축제의 마지막 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안나 앞에 천사가 나타나 딸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마리아라고 지으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준다. 이에 대한 증거로 예루살렘의 황금문 앞에서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천사는 떠난다. 한편 요아킴은 기도를 끝내고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친 뒤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다가 황금 문 앞에서 안나를 만난다. 그리고 예언대로 안나는 딸을 낳는다. 마리아가 6개월이 되었을 때, 일곱 걸음을 걷고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와 안기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다. 마리아가 세 살이 되자, 요아킴은 아이를 얻으면 성전에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마리아를 성전에 바쳤다. 이때 마리아를 받아 준 제사장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였다. 그 뒤 마리아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천사가 가져다 주는 빵만 먹으며 자란다. 그런던 어느 날, 제사장이 다윗 가문의 소녀들 중에서 누가 황금실과 고급 린넨과 비단으로 아름다운 천을 짤 것인지를 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마리아가 선택되었다. 마침내 마리아가 열다섯 살이 되어 결혼할 때가 되자 사가랴는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열두 명의 구혼자들의 지팡이를 놓고 기도한 후 돌려 주었다. 요셉이 지팡이를 돌려 받을 때 지팡이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나와 그의 머리 위를 맴돌더니 동시에 그의 지팡이에서 푸른 싹이 돋아났다. 요셉이 마리아의 배우자임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요셉은 “나는 이미 결혼하여 아들 넷이 있고, 나이도 많아 저 처녀의 남편이 될 수 없다.”고 했으나 자카리아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요셉을 설득했다. 어쩔 수 없이 요셉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요셉의 집에 머물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물가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난다. 천사는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 아래, 펜던티브(Pendentive : 둥근 지붕과 네모난 벽 사이를 잇는 삼각형 모양의 공간)에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성전에 봉헌하러 간 요아킴(Joachim)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나 많이 파괴었다[그림 12].  요아킴과 사가랴(Zacharias∙자카리아)가 예물시비하는 장면, 사가랴가 세례 요한을 낳는 장면은 지워졌다.


                              [그림 12]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편에는 회당 출입을 거절당한 뒤, 상심한 마리아의 아버지 요아킴이 광야로 가서 자신에게도 아이를 달라고 40일 동안 기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3].


그리고 돔 바로 아래에 위치한 벽에는 천사가 안나에게 성모 마리아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있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무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고, 새끼는 부리를 벌려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안나의 옷차림이나 집안에 있는 하인 등은 마리아의 집안이 부유했음을 나타낸다. 흘러내리는 물은 아기 없는 부부생활을 비유한다[그림 14].


      [그림 13]                                          [그림 14] 


옆방으로 가는 통로의 벽에는 예루살렘의 황금 문 앞에서 요아킴과 안나(Anne)가 만나 서로 포옹하며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그림 15]. 그들은 아기를 주신다면 신앙심 깊은 아이로 키우고, 성전에 바치겠다고 서약하고 양 두 마리를 바친다(일반적으로 희생제물은 한 마리). 그 오른편에는 마리아의 탄생 장면이 나온다. 안나는 산파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고, 세 친구들은 선물을 주고 있다. 하녀들은 부채를 흔들고 요람과 아기 목욕을 준비하고 있다. 요아킴은 문 입구에 서서 이 장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수줍은 것 같기도 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다[그림 16].


              [그림 15]                                  [그림 16]


마리아의 탄생 장면 옆에는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성화가 있고[그림 5], 그 위에는 생후 여섯 달 된 마리아가 일곱 걸음을 떼는 장면이 보인다. 엄마(안나)는 마리아가 더러운 흙을 밟지 않을까 얼른 안으려 한다. 하인의 붉은 베일이 바람에 날려 후광처럼 원을 그리고 있다[그림 17].




[그림17]


이 방의 천장 한편에는 마리아가 성전에서 사제들로부터 축복을 받는 장면이 있다. 요아킴은 한 살 된 딸 마리아를 안고 사제 세 명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그림 18]. 반대편에는 마리아의 부모가 마리아를 껴안고 쓰다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9]. 가족의 사랑과 행복 속에서 자란 마리아이다. 이중 구조의 건축학적 요소가 그림의 깊이를 더해주고, 공작 두 마리가 존엄성과 정결성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장면들을 고개를 위로 올리면 한 눈에 볼 수 있다[그림 20].

   

 [그림 18]                                                       [그림 19]


                        [그림 20]


본당 출입문 오른쪽 사도 바울의 성화[그림 6] 위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빵을 가져다 주는 장면이 있다[그림 21]. 이렇게 마리아는 성전에서 천사가 주는 빵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제단 위는 대학자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마리아를 그곳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 세 번째 방의 천장에는 요아킴과 안나가 세 살 된 마리아를 성전에 바치는 장면이 행렬을 이룬다[그림 22]. 이 그림의 윗부분 성전 입구에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마리아를 맞이하고, 그의 머리 위쪽으로 제단에 앉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빵을 가져다 주는 다른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23]. 마리아는 3~12세까지 성전 수종녀(attendant)로 머물렀다. 여자 아이들이 횃불을 들고 마리아를 맞이하고 있다. 이들 역시 성전에서 수종드는 아이들이다[그림 24]. 천장의 모자이크들은 빈 공간 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고개를 들면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비잔티움인들의 예술성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과 찬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림 21]                                [그림 22] 

   

[그림 23]                                                        [그림 24]

 

메토키테스가 성당을 바치는 그림 맞은 편에는 마리아가 사가랴로부터 성전에 쓰일 장막을 만들 자주색 실타래를 받는 장면이 있다. 지성소를 가리는 장막을 만드는 일은 아주 신성한 일이었다. 성전의 다른 성직자들은 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마리아 뒤로는 여섯 명의 처녀들이 서 있다[그림 25].

    

          [그림 25]                                                       [그림 26]


그 그림의 오른쪽에는 사가랴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리아에게서 여성성이 나타나면 성전을 떠나야 한다. 마리아가 결혼할 때가 온 것이다. 다음날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다윗 왕가의 자손 중 12명의 남자를 선발하도록 한다. 사가랴는 그들의 지팡이를 제단에 놓도록 하고, 마리아가 누구에게 선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를 구하고 있다[그림 26]. 그 옆에는 사가랴가 잡고 있는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아나오는 장면이 있다. 사가랴는 왼손을 마리아의 머리에 얹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으며 그 앞에 요셉이 당황하며 서 있다. 그 뒤에는 나머지 열한 명의 구혼자들이 서 있다[그림 27]. 야곱 복음서에는 비둘기가 요셉 머리 위를 돌았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 모자이크에 비둘기는 없다. 하지만 유럽의 교회 그림에는 이 장면에 비둘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27]


두 번째 방으로 가는 복도에는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장면이 있다. 요셉과 함께 있는 사람은 전처의 아들 중 하나인 제임스이고, 요셉은 마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돌아 보고 있다[그림 28]. 다시 마리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이 나오면, 이 방의 서쪽 벽에는 뒤돌아 선 마리아에게 손을 흔드는 요셉이 보인다. 목수일을 하는 요셉은 지방으로 가 6개월 간 집을 비워야 했다. 아쉬운 작별은 하는 요셉과   그의 오른쪽에는 요셉의 큰 아들 제임스가 이미 길을 떠나고 있다[그림 29]. 돔 아래 북서쪽 모서리 펜던티브에는 마리아가 우물가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 소식을 듣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누가복음 1:26~38)* [그림 30].


* 누가복음 1:26-38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림 28]                                  [그림 29] 

 

                                  [그림 30]



마리아의 잉태와 예수의 탄생 - 바깥 나르텍스(Outer Narthex)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모자이크는 바깥쪽 나르텍스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바깥쪽 나르텍스의 모자이크 역시 첫 번째 방 구석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림의 진행 방향은 대부분 오른쪽이다.


이 방의 북쪽 구석 반원에는 작은 나무 아래 요셉이 잠들어 있고, 그 위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임신했으므로 아내로 취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말을 전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다. 요셉은 자신이 없는 사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헤어지려고 했으나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마태복음 1:20~25). 천사 옆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누가복음 1:39~45). 그 옆에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Augustus)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마리아와 요셉이 그려져 있다. 앞에 선 젊은이는 요셉의 아들 가운데 하나고 요셉은 마리아를 태운 당나귀 뒤에서 따라간다(누가복음 2:1~5) [그림 31].

 

             [그림 31]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에 있는 벽을 보면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시리아 왕 구레뇨(퀴레니우스, Cyrenius)가 황금 보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관리들이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다. 구레뇨 앞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서 있고, 요셉의 뒤에는 그의 아들 네 명이 서 있다. 마리아는 만삭으로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이다[그림 32]. 조사원이 배부른 마리아에게 아기 아버지가 누구냐 묻고, 요셉이 '나'라고 하면서 다가선다. 이 작품은 코라교회 모자이크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1:9의 인체비율로 머리가 무척 작게 표현되었다. BC 4C 경 풍미했던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미술에 차용되었다.

 

       [그림 32]


계속 오른쪽으로 가면 건물 안쪽 벽에 예수의 탄생 장면을 그린 모자이크를 만난다.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석관 모양의 구유에는 소와 염소가 머리를 내밀고 있고, 하늘에서 성령이 강림하고, 그 앞에 성모 마리아가 누워 있다. 마리아의 발치에는 요셉이 앉아 있는데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들판의 목자들에게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이 보이고, 마리아 위에는 천사들이 찬양하고 있다(마태복음 1:18~25, 누가복음 2:1~34) [그림 33].

 

     [그림 33]


이야기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지면서 모자이크는 오른편의 나르텍스로 계속 이어진다. 세 번째 방인 중앙홀을 건너 네 번째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건물 안쪽 벽 위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별을 따라오는 장면과 헤롯 왕(헤로데 안티파스, Herod Antipas)을 알현하는 장면(마태복음 2:1~12)이 있다[그림 34].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 그리고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여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간다.

 

    [그림 34]


다섯 번째 방의 벽에는 움푹 파인 공간인 니치(nitch)가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무덤으로도 쓰이던 공간이다. 이 방의 안쪽 벽에는 한 병정의 호위를 받고 있는 헤롯 왕이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해 사제와 서기들을 심문하는 장면의 일부가 남아 있다[그림 35]. 이곳에서 다음 방으로 가는 통로에는 두 개의 원주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림 35]                      [그림 36]


여섯 번째 방은 보조 교회당(parecclesion)으로 가는 입구인데 상당히 넓다. 이곳에도 한때 팔라이올로구스 왕가의 무덤으로 쓰였던 니치가 있다. 이방의 남쪽 벽에는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림이 있다[그림 36]. 시계 방향으로 이어진 바깥 벽들에는 두 살 이하 어린 아기들을 빼앗아 죽이는 군인들, 손에 칼을 들고 아기를 찾는 군인들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37, 38].

    

      [그림 37]                                          [그림 38]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려면 원주 기둥을 지나 다시 다섯 번째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 헤롯 왕의 심문 모자이크 건너편, 이 방의 바깥쪽 벽에는 아기가 살해당해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있다[그림 39]. 다시 네 번째 방으로 건너가면 엘리사벳이 아기 세례 요한을 안고 칼을 든 군인을 피해 동굴로 피하는 장면이 있다[그림 40].    



[그림 39]                                                        [그림 40]


이후의 이야기는 중앙홀을 지나 다시 왼편 나르텍스 두 번째 방으로 돌아가야 이어진다. 성경에 의하면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이 죽었으니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요셉은 헤롯의 뒤를 이어 아들 아켈라오(Herod Archelaus)가 왕이 된 것을 알고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천사의 지시로 나사렛으로 가게 된다. 이 방에는 이집트에서 보낸 4년 동안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나사렛으로 향하는 예수 가족이 그려져 있다(마태복음 2:19~23). 맨 왼쪽에 꿈을 꾸는 요셉이 보이고, 중앙에는 예수 가족이 여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앙증맞은 아기 예수가 요셉의 목에 목마를 타고 있으며 그 뒤를 마리아가 따르고 있다. 그림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도시가 나사렛이다[그림 41].



[그림 41]


다시 첫 번째 방으로 돌아가면 예수의 가족이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맨 앞에 요셉이 가고 바로 뒤에 열 두 살이 된 예수 그리스도는 황금 십자가 후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맨 뒤에 성모 마리아가 뒤따른다(누가복음 2:41~47)  [그림 42].

 

[그림 42]

 


          [그림 43]

 


[그림 44]


두 번째 방으로 건너가면, 둥근 천장에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을 그린 성화가 나온다.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성화이다. 가운데를 흐르는 요단강을 기준으로 예수는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감히 예수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세례 요한이 서 있다(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 [그림 43]. 그 반대편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는 장면(마태복음 4:1~11, 마가복음 1:12~13, 누가복음 4:1~13)이 글씨와 함께 그려져 있다*[그림 44, 45]. 아래(*) 성경 말씀의 핵심을 모두 검은색 글씨로 장식하는 이 모자이크 기법 역시 르네상스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림 45]

 

 

 

* 마태복음 4:1-11 :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바깥 나르텍스의 정문 오른쪽 펜던티브에는 젊은이가 희생 제물로 바칠 양을 잡는 장면이 있다[그림 46].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면 안쪽 나르텍스로 가는 출입문 왼편 펜던티브에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장면(요한복음 2:1~12)이 그려져 있다[그림 47]. 출입문 오른편 펜던티브와 바깥 나르텍스의 정문 왼편 펜던티브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마태복음 14:15~21, 마가복음 6:30~44,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4)이[그림 48, 49] 묘사되어 있다.

 

[그림 46]                                                                 [그림 47]

 

[그림 48]                                                     [그림 49]


여섯 번째 방에서 예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헤롯의 영아학살명령 그림 오른쪽 구석에는 예수가 우물에서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장면(요한복음 4:3~40)이 있다[그림 50]. 아래쪽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음향효과를 내기 위한 장치로 동서남북으로 몇 군데 있다. 벽 안에는 다른 곳과 달리 공명을 일으키도록 암포라 항아리를 설치했다. 남쪽 벽 위에는 예수가 가버나움(Capernaum)의 베데스다(Bethseida) 연못에서 중풍환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이 사실감 있게 보인다(마태복음 9:1~8, 마가복음 2:1~12, 누가복음 5:17~26)  [그림 51].

   

         [그림 50]                               [그림 51]



기적을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 - 안쪽 나르텍스(Inner Narthex) 오른편
여섯 번째 방에서 바깥쪽 나르텍스 모자이크 감상은 끝난다. 이 방은 부속 교회당으로 연결되지만, 좀 더 일관성 있게 성화를 감상하려면 다시 오른편에 있는 안쪽 나르텍스로 가서 모자이크를 먼저 보는 것이 좋다.

 

     

[그림 52]     

                          

 

      [그림 53]                                      [그림 54]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가 그려진 돔 아래 본당 쪽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위쪽에 위치한 예수를 향해 두 손을 벌려 무엇인가를 간청하는 듯한데, 이런 자세를 그리스어로 데이시스(Δέησις, Deesis)라고 한다. 데이시스는 교회 건축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특히 '아야소피아 박물관(하기아 소피아 성당)' 2층 남쪽에 있는 데이시스 모자이크는 후기 비잔티움 예술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데이시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281쪽이나 QR코드 3을 참고하면 된다.


마리아의 뒤쪽 아래에는 왕관을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코라교회를 두 번째로 증축한 알렉시우스 1세의 아들인 ‘이삭 콤네누스(Isaac Comnenus)’이다[그림 53]. 그는 원래 코라교회에 자신의 무덤을 준비했지만, 나중에 트라케 지방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다가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쪽에도 두 손을 벌리고 있는 한 여인이 보이는데, 이 여자 옆에는 ‘가장 위대한 왕 안드로니쿠스(Andronicus)의 자매, 몽골의 숙녀 멜라네 수녀’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그림 54]. 멜라네(Melanie Comnenus)는 미카엘 8세(Michael VIII Palaeologus, 1259~1282년까지 재위)의 서녀로, 1265년 몽골 ‘일 한국’의 아바카 칸(Abaqa Khan)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런데 1282년에 칸이 죽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수녀가 되었다(QR코드 10 참고). 나라를 위해 정략결혼을 마다하지 않은 그녀를 기려서 비잔티움 인들은 기꺼이 교회를 헌당했다. 코라교회에서 골든혼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이 공주를 기념하는 몽골교회(Church of Saint Mary of the Mongols, Kanlı Kilise)가 자리잡고 있다. 설립 이래 지금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스탄불의 몇 안 되는 교회이다.
 
이 방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곱 가지 치유의 기적들이 그려져 있다. 이 모자이크들은 데이시스 모자이크를 기준으로 하여 시계방향으로 살펴보겠다. 데이시스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이 혈우병을 치료받는 기적(마태복음 9:18~26,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이[그림 55], 그 옆에는 오그라든 손을 가진 청년을 치유하는 기적(마태복음 12:9~14, 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이 그려져 있다[그림 56]. 이어 부속 교회당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는 아치가 나오고, 그 옆에는 나병환자를 고치는 기적(마태복음 8:1~4, 마가복음 1:40~45, 누가복음 5:12~16)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57]. 그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장님이자 벙어리인 청년을 고친 기적(마태복음 12:22~26, 마가복음 3:20~30, 누가복음 11:14~23, 12:10)이[그림 58], 그 옆의 반원형 벽에는 각종 병이 든 자들을 치유한 기적(마태복음 15:29~30)이 그려져 있다[그림 59][그림 62 하]. 오른편 펜던티브에는 여리고에서 두 명의 장님을 고친 기적(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 10:46~52, 누가복음 18:35~43)이[그림 60], 뒤를 돌아 데이시스 왼편 펜던티브에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마태복음 8:14~15,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장 38~39)하는 장면이 나온다[그림 61]. 좁은 공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코라교회의 특장이기도 하다. 

    

[그림 55]

 [그림 56]                                                    [그림 57]

 

 

[그림 58] 

 

 

[그림 59]                                     

 

[그림 60]                                                     [그림 61]

 

[그림 62]



3. 죽은 자들을 위한 방 : 파레클레시온


이 방의 출입구를 통해 나가 왼편에 있는 두 개의 원주 기둥을 지나면 ‘파레클레시온(Παρεκκλήσιον, Parecclesion)’으로 들어가게 된다. 파레클레시온은 그리스말로 교회에 붙은 ‘부속 교회’라는 의미인데, 코라교회의 파레클레시온은 메토키테스가 가족과 친지들의 영묘로 쓰기 위해 본당 남쪽에 덧붙여 지은 건물이다. 원래 무덤으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어서 석관을 놓을 니치가 좌우로 두 개씩, 모두 네 개가 있다. 코라교회에는 바깥 나르텍스의 맨 남쪽 끝에 위치한 두 개의 방과, 안쪽 나르텍스의 북쪽 끝에 위치한 두 개의 방에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 왕가의 석관을 안치해 두었던 니치들이 있다.


코라교회의 본당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면, 파레클레시온은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화들은 죽음과 최후의 심판, 부활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림 63]                            

 

     [그림 64]                                                    [그림 65]


본당의 성화들이 모두 모자이크인데 비해 파레클레시온의 성화는 첫 번째 방 오른쪽에 위치한 니치의 아치[그림 63]에 있는 미카엘 토미케스(Michael Tornikes) [그림 64]와 그의 부인의 초상[그림 65]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레스코화*다. 이곳에는 수많은 성자들이 그려져 있지만 정교회 신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와 관련된 중요한 프레스코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Fresco a fresco :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며 완성하는 회화이다. 기원전부터 로마인들에 의해 그려져 왔고,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절정기를 맞는다. "젖어 있는"이란 뜻 그대로 마르기 전에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와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대작들이다.

 

[그림 66]                                                   [그림 67]

파레클레시온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 기둥이 서 있는 현관에 해당되는 아치에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Sennacherib : BC 705~681년까지 재위)의 군대와 싸우는  천사들의 모습[그림 66]과 신의 축복을 받은 영혼들과 저주를 받은 영혼들의 모습, 제단에 바칠 봉헌물을 들고 가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려져 있다[그림 67].

 

 

                      [그림 68]


첫 번째 방으로 들어서면 자연 채광을 위해 열 두 개의 창을 낸 큰 돔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돔의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그 주위를 열 두 명의 천사가 둘러싸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비잔티움 제국의 궁전 관리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가지고 있다[그림 68]. 돔 아래 네 귀퉁이의 펜던티브에는 유명한 찬송가 작가 네 명이 각각 그려져 있다[그림 69~72].

 

 

 [그림 69] 성 코즈마스                                     [그림 70] 성 요셉      

 

[그림 71] 성 테오파네스                                  [그림 72] 성 요아네스

 

    

 

 

[그림 73]                                                         [그림 74]

돔의 왼쪽, 즉 북쪽 벽의 아치 왼쪽에는 벧엘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그려져 있고[그림 73], 오른쪽에는 불타는 관목 숲 앞에 있는 모세에게 모습을 드러낸 여호와가 등장한다. 모세는 맨발인데 이는 그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땅임을 나타낸다(출애굽기 3:1~5) [그림 74]. 지성소 쪽의 아치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남쪽에는 솔로몬 왕의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궤(聖櫃)를 설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75, 76]. 

 

[그림 75]                                                    [그림 76]


그리고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 사이의 아치 왼쪽에는 관목 숲 속에 서 있는 모세의 모습이, 오른쪽에는 성 초막을 지고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그림 77, 78]. 오른쪽 벽의 니치는 메토키테스의 친구이자 재상까지 지냈던 미카엘 토미케스의 석관이 놓였던 자리고, 그 건너편의 니치는 메토키테스의 석관이 놓였던 자리다.

 

   [그림 77]                                            [그림 78]


파레클레시온 두 번째 방의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가운데 둥근 천장에는 한 천사가 달팽이 모양의 우주를 떠받들고 있고[그림 79], 예수 그리스도가 가운데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하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왼쪽에는 세례 요한이 '데이시스(간청)' 자세로 있고, 좌우 벤치에는 열 두 명의 사도가 여섯 명씩 앉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예수는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거부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핏빛 강물이 섬뜩한 느낌을 준다[그림 80].

 

 [그림 79]                                                      [그림 80]

 

 

또 북쪽의 반원형 공간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천국의 문에는 6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Seraph) 천사가 문을 지키고 있고, 왼쪽에는  천국의 문을 열쇠로 열고 있는 베드로가 있는데 그의 뒤에는 선택 받은 자들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은 강도가 십자가를 진 채 환영의 몸짓을 하고 있고 그 뒤로 성모 마리아가 반만 남아 있다[그림 82]. 왼쪽 펜던티브에는 영혼을 건지는 천사의 모습[그림 81], 오른쪽 펜던티브에는 거지 나사로를 안고 있는 아브라함이 그려져 있다[그림 83].


  

                      [그림 81] 

 

 

 [그림 82]    

 

 

                             [그림  83]


반대쪽 벽 왼쪽에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죄들의 모습이[그림 84], 오른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궤를 운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85].  특히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육체 묘사는 해부학적 사실주의가 돋보인다. 두 번째 방 양 쪽 벽면에도 석관을 놓았던 니치가 남아 있다.

    

 [그림 84]                                                     [그림 85]


두 번째 방과 지성소를 나누는 아치의 가운데에 미카엘 대천사가 그려져 있다. 그 왼쪽에는 과부의 아들을 살린 기적(누가복음 7:11~17)이[그림 86], 오른쪽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기적(마태복음 9:18~26,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이 그려져 있다[그림 87].

     

[그림 86]                                                         [그림 87]


지성소의 왼쪽 아래 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그림 88], 지성소의 벽과 천장을 잇는 반원 공간에는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지성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이며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예수는 오른손으로는 아담을, 왼손으로는 하와를 석관에서 끌어내고 있는데 역동적이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좌우에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와 의인들이 부활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의 발 밑에는 꽁꽁 묶인 죽음의 신 타나토스(Θάνατος, Thanatos)를 배치하고 검은 바탕에 부서진 문 조각들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예수가 부활해서 죽음의 세계가 정복되었음을 나타낸다[그림 89]. 코라교회(카리예 박물관)를 대표하는 프레스코화의 명품이다.

 

 

                                  [그림 88]



[그림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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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형오 전 의장  "文정부 성패, 진영논리 극복에 달려"


한·터키 수교 60주년 행사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 기조 발표
"보수진영, 이대로 가다간 존재 무의미해져…철저히 죽어야 회생 가능"


터키 국영방송과 인터뷰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이달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터키 국영 테레테(TRT)방송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앙카라=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지금 보수니 진보니 이런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은 '진영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수명'이 언제 끝날지 몰라요."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학술 교류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에 참석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70)은 보수의 위기 타개책에 관한 질문에 답답함부터 토로했다.


그는 일정의 종착점인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이달 24일 열린 심포지엄에서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인문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서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2세'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표를 했다. 

기조연설 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에서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2017.7.24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발표 이튿날인 25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사회 전반이 극심한 진영논리에 매몰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당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과 조직, 직능이 '어느 것이 더 정당하고 우리 사회에 이로운가'보다는 '어느 쪽이 우리편이냐'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면서 "이래서는 한국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성공하려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직후 정무직 인사를 보면서 새 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하나 싶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영논리를 답습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도 "아직은 기대를 품고 있다"고 했다.

20여 년 몸담은 보수진영에 대해 "지금처럼 계속하다가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필패하고,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며 쓴소리를 쏟아내고 "철저히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현장 설명 듣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왼쪽 첫번째)이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이언 호더 발굴단장으로부터 유적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5선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치인은 비위 혐의나 경쟁력 상실로 떠밀려 정치판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많다. 김 전 의장은 그러한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지역구에 뚜렷한 경쟁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전부터 저술가로서 제2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 "너무 늦기 전에 결단했다"고 2년 전 불출마 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다는 김 전 의장은 다음 책의 소재 후보로 1683년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빈 공성전'을 꼽았다. 또 전쟁사다.

"로맨스를 쓰기에는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경험이 일천하니까…"

tree@yna.co.kr 



[2017-07-26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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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 기조 발표문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 2세”

-『술탄과 황제』를 통해 본 역사성과 지도력-

 

 

 

김형오 (전 국회의장, 현 부산대 석좌교수)

   

한국과 터키는 1957년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에 기조 발표자로 초대를 받아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 심포지움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17.7.24


수교를 한 해도, 60년이 지난 금년도 한국은 닭의 해입니다. 오스만 터키의 전장(戰場) 군영에서 새벽 기상을 알렸던 호자데데(Hoza Dede: 수탉 영감)처럼 닭은 새벽을 깨우는 길조(吉鳥: 좋은 징조를 주는 새)입니다. 파티 술탄 메흐메드(Fatih Sultan Mehmet; Mehmed the Conqueror)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1453년은 한국의 닭의 해에 해당되며,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 최고의 국경일인 광복절도 닭의 해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닭의 해에 수교 60돌을 맞은 한국과 터키, 두 나라에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와 터키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2009년 1월, 꼭 8년 6개월 전 한국의 국회의장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하는 길에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서 메흐메드 2세를 만났습니다. 쇠사슬 방책으로 골든 혼(the Golden Horn; Haliç) 항구 진입이 봉쇄되자 수많은 배를 이끌고 산을 넘어간 스물한 살 청년 술탄! 누구도 상상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항구를 점령해 천년 제국 비잔티움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 이 청년 술탄에 대한 관심이 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앙카라에서 터키의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회의원들을 만났을 때도 정복자 메흐메드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림 1: 배를 끌고 산을 넘다]

 

귀국 후 내 책상 위에는 터키 관련 서적 수십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중 콘스탄티노플 정복 관련 책자는 번역서 단 한 권(스티븐 런치만; Steven Runciman,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뿐이었는데, 바쁜 국회의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짬 날 때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을 통해 1453년 정복 전쟁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틈만 나면 짬을 내어 이스탄불을 방문해 격전의 현장인 성벽을 수없이 답사했습니다. 대학 도서관과 연구소·박물관을 찾았고, 유수 대학의 교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못다한 질문과 궁금증은

이메일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림 2: 성벽 앞의 필자]                             [2-1: 복원된 성벽]

  

‘이스탄불 정복전쟁’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높아질수록 작가로서의 모험이 곁들인 새로운 길과 정치인으로서의 명예로운 길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은 정계 은퇴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전적으로 여기에 매달리며, 이스탄불로 떠나 두 달간 장기 체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메흐메드 2세를 알게 된 지 4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2년 늦은 가을, 드디어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술탄과 황제』입니다. 책은 나오자마자 언론과 평단 그리고 서점가의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호평과 찬사 속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과 수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책 관련 자료 어디에도 나의 정치 경력은 넣지 않았습니다. 일반 소설도 교양서도 아닌, 아마추어 작가가 쓴 한국과 아무 관련 없는 560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가 4만 권 넘게 팔린 것은 한국 출판사상 지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메흐메드 2세는 어떻게 난공불락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까요?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역발상으로 배를 끌고 험난한 갈라타 언덕을 넘어간 창조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며 치밀한 행동가였습니다. 선대 술탄들이 모두 공략에 실패한 천년 성벽을 뚫기 위해 그는 규모와 성능 면에서 세계 최대‧최고의 대포를 개발했습니다.  

                                         [그림 3: 우르반의 대포]

그밖에도 공성탑 건설, 땅굴 공격 등 첨단 기기와 과학 기술을 총동원해 지 상‧지하‧해상‧공중에서 다양한 전술 전 략을 펼쳤습니다. 육군 중심국이었지 만 해군을 보강하여 장차 지중해 제해 권 장악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군사 조직을 비정규 용병(바쉬보주크), 지방 민병군(아잡), 정규군(아시아군‧유럽군), 정예군(예니체리) 등으로 다원화·체계화하고 보병과 기병의 역할 분담 등을 통해 공격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정복 이후 200년 이상 터키가 유럽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 것도 메흐메드 2세의 업적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메흐메드 2세는 술탄에서 강등되어 왕자로 돌아가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능한 스승들을 모셔 심신을 단련하는가 하면, 직접 전투에 참가해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술탄에 다시 즉위하자마자 서방 각국과 일시적 휴전 조약을 맺는 등 평화 외교를 펼쳐 비잔티움을 비롯, 서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습니다. 헝가리 섭정 후냐디(야노슈 후냐디: Janos Hunyadi)의 발을 묶어놓고, 앙숙 관계였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상호 견제시키기도 했습니다. 배후 안정을 위해 동부 카라만(Karaman ; Karaman Beyliği)과는 정복 전쟁 대신 평화 조약을 맺고, 선친 무라드 2세의 미망인이었던 마라(Mara Brankovic)를 귀환시켜 그녀의 친정 아버지인 세르비아 왕의 환심을 샀습니다.

지도를 통해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전문가들을 초빙해 정보를 얻고, 공격 목표인 삼중 성벽을 직접 사전 답사도 했습니다. 수송로와 지원군 차단을 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ı)를 세우고 철저한 봉쇄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림4: 루멜리 히사르]

아랍·러시아 등 강국의 수많은 침략과 오스만 선대 영웅들의 여섯 차례 공격에도 버텨냈던 콘스탄티 노플이 21세의 청년 술탄에게 정 복되는 비결 아닌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셋째, 국론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전쟁‧전승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모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실적 보상과 출세의 사다리를 제공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해 성전(聖戰:Jihad)과 정전(正戰: Justice War)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현상 유지를 원하는 화평파 세력도 참전시켜 토론과 담판을 통해 반대 의견을 제압했습니다. 정복 후 여세를 몰아 정적이었던 할릴 파샤(Halil Chandarlı Paşa)를 제거하고 부족‧호족 등 기득권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종‧종교‧지역·신분을 불문하고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세계 제국으로 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넷째는 리더십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승리의 핵심 요인인지도 모릅니다. 메흐메드 2세는 늘 최전방에서 말을 몰며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해상 전투가 치열할 때는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직접 말을 타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림 5: 말 타고 물에 뛰어든 술탄]

타고난 승부사였습니다. 한 번의 실패 뒤에는 반드시 역전의 비책을 던져 더 확실한 승리를 일구어냅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야영하는 솔선수범 형 지도자였습니다. 실전 같은 훈련, 훈련 같은 실전을 했습니다. 신상필벌 에도 엄격했습니다. 패배자는 결코 용 납하지 않았습니다. 전리품은 약속 대 로 처리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신뢰를 얻었습니다. 군기 또한 엄중했습니다. “튀르크군 1만 명의 행군보다 기독교 군대 100명이 움직이는 소리가 더 시끄럽다”라는, 15세기 한 프랑스 여행가(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Bertrandon de la Broquiere)의 목격담이 그 사실을 실감나게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당대 최고의 헌신과 열정의 지도자 중에서 파티 술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책이 나온 후 나는 이스탄불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몇 차례 더 방문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결심이 섰습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38쇄를 거듭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을 더는 찍어내지 말도록 출판사에 요청하고, 두 달 안에 개정판 원고를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 6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림6: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한 페이지도 전작과 같은 곳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뜯 어 고쳤기 때문입니다. 전작(초판본)의 정신과 뼈대는 그 대로 살리되 사실상 새 책으로 쓰려니 재주가 부족한 저 로서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체제도 바꾸고 문 장·표현도 고치고, 일부는 삭제하고 상당 부분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터키 측 자료들을 요긴하게 활용(특히 페리둔 에메전 교수의 근작: Feridun Emercen, 『Fetih ve Kıyamet 1453』 등)했습니다. 

새 책 역시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언론에서도 크게 리뷰를 해주었습니다. 작년 연말 촛불 시위, 태극기 집회 속에서도 책을 읽어준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초판에 이어 개정판까지 구입해 꼼꼼히 대조해가며 읽었다는 독자도 인터넷을 통해 적잖이 만납니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왜 책으로 쓰려 했고,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 한 걸까요.  

첫째,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한 문명의 축적 위에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그 계기로 보고자 했습니다. 문명 대 문명의 충돌은 보통 승자의 패자에 대한 보복‧파괴‧멸절(滅絶)로 이어졌지만, 오스만은 포용과 공존‧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지도자의 역량과 철학에 의해 문명 파괴가 아닌 문명 승화(Sublimation of Civilization)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나아가 서구적 편견 없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터키 문명, 그 중에서도 동시대 세계사의 한 축으로 취급돼야 할 오스만의 역정(力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림 7: 메흐메드 2세 초상]

둘째, 가장 결정적 시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 그 중에서도 두려움과 대적해야만 하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살펴보고 자 했습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자질, 생 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의 선택과 결단 등을 술탄과 황제의 입장이 되어 파고들었습니다. 솔선수범‧진두 지휘‧신상필벌로 요약되는 승리자 메흐메드 2세는 ‘달리는 리더십’으로 규정했고, 우유부단하지만 끝까 지 모든 책임을 싸안고 가는 콘스탄티누스 11세를 통해서는 ‘눈물의 리더십’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가냘픈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필자로서는 그 나약한 치부를 들추어내기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덧바름으로써 한 단계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역사를 통해 오늘과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국가의 존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은 출발합니다. 국가가 당면한 최고의 위기, 가장 긴박한 순간인 전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오늘날 심각한 안보 위기와 혼란스런 국제 정치 속에서 한국과 한국민은 어떻게 살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560년 전 아득히 멀리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의 흥망성쇠를 통해 역사의 생생한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과 터키, 67년 전 그들은 한반도에서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고 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또 그 후손들이 오늘 각자의 나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나아가 번영·번성하려면? 국가가 존재해온 이후 끊임없이 계속돼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양국은 위대한 선조들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메흐메드 2 세의 헌신과 열정을 가슴에 새긴다면 험난한 파도도 담대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역사의 새벽을 깨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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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격돌한 술탄·황제… 다시 쓴 문명 충돌의 역사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 김형오 지음 | 21세기북스 | 488쪽 | 2만8000원



    "(초판을 낸 뒤) 20여권의 책을 새로 샀다. 페리둔 에메젠 교수의 근작을 터키어 전공자 세 분에게 의뢰해 완역하다시피 한 다음 꼼꼼히 살폈고, 네덜란드에서 발간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생존자 7명의 증언록을 해부하듯이 읽어나갔다." 성벽을 때리는 대포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아비규환의 참혹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이 책은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격돌하는 전쟁기(記)다. 천년을 지속한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을 대표하는 튀르크의 침공 앞에서 최후의 숨을 몰아쉰다. 국회의장을 지낸 저자가 이 문명 충돌의 전쟁에 대한 정밀화 같은 책을 낸 것이 4년 전. 그는 이번에 전면 개정판을 출간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명멸을 거듭한 국가 사회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교훈을 수없이 얻고, 또 쉽게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유석재 기자




    [2016-11-05 조선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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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사오삼 2016.11.06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분과 감동 속에 술탄과 황제의 마지막 장을 덮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더 깊어진 개정판, 설렘과 기대감을 갖고 예스24에 주문했습니다.

    2. BlogIcon 유근준 2017.09.20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한 저술에 몇 군데 옥의 티가 발견되어 교정을 올립니다.

      1. 101쪽 아래에서 2번째 줄 '轉求'를 '傳求'로
      2. 123쪽 아래에서 2번째 줄 'Basillica'를 'Basilica'로
      3. 153쪽 아래에서 5~6번째 '서로 마가'를 '서로가'로
      4. 237쪽 각주 아래에서 3번째 줄 "고말했"을 "고 말했"으로
      5. 243쪽 위에서 7번째 불 '백번 천 번'을 '백 번 천 번' 또는 '백번 천번'으로
      6. 99쪽 각주 아래에서 2번째 줄 "'해협의 칼날(Strait-Blocker)' 또는 '목구멍의 칼날(Throat-Cutter)'"을 '해협의 차단기(Strait-blocker) 또는 '목구멍의 칼날(Throat-cutter)'"로의 변경을 검토하심이 어떠실까요? 왜냐하면 '칼날'이라는 동어반복이 신경쓰이고 하이픈(-) 뒤의 글자는 소문자로 하심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책 속으로] 동로마 최후의 날 빛난 두 군주의 품격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김형오 지음, 21세기북스
    504쪽, 2만8000원


    1453년 5월29일에 대한 미시사다. 동서문명의 교차로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함락되고 동로마로도 불렸던 비잔티움 제국(330~1453)이 1123년 만에 명맥이 끊어진 날이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1432~1481, 재위 1444~1446, 1451~1481)가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1405~1453, 재위 1449~1453)가 버티고 있는 천년 고도를 점령하기 위해 50여 일간 벌인 사생결단의 기록이 세밀화처럼 묘사된다. 비잔티움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벽돌 삼아 군주의 리더십 비교라는 건축물을 지었다. 이 책은 2012년 출간된 『술탄과 황제』의 개정증보판이다. 지은이(김형오 : 전 국회의장)는 “초판은 주로 서양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면 개정판에는 터키 사료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균형잡힌 시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한 독특한 형식은 여전하다.

    술탄은 광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8만의 오스만군은 체계적으로 공격전에 투입됐다. 1악장에선 비정규군인 아잡과 바쉬보주크를 먼저 보내 적에게 타격을 줬다. 유럽 기독교 지역 출신이 태반인 이 부대는 급여를 받기 위해 지원한 용병으로 이뤄졌다. 이들의 뒤로는 용병들의 퇴각을 막기 위한 독전대가 배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허름한 장비의 보병 뒤로 뛰어난 무장을 갖춘 비밀경찰인 NKVD(내무인민위원회) 부대를 배치해 후퇴하는 병사를 사살한 잔학극의 원형이다. 2악장으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모집한 아나톨리아군과 유럽 지역에서 데려온 루멜리군이 투입됐다. 경쟁관계인 두 부대는 죽기살기로 싸웠다. 마지막 3악장에선 술탄 근위대인 최정예 예니체리가 나섰다. 정복지 기독교인 가정에서 어린이를 데려와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교육해 군인으로 기른 엘리트 부대다.

                      정복자 술탄 메흐메드 2세의 초상화. 이슬람 학자풍 의상·터번을 애용했다.

                          [사진 21세기북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서 술탄은 군인들에게 최고의 보상과 명예를 약속했다.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의 과학적 용병술이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술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건설한 하기야소피아 교회 내부를 파괴하고 있던 병사를 쫓아내고 이를 반달리즘으로부터 구한 일이다. 병사들에게 보상으로 허용했던 약탈기간도 줄였다. 제국은 말 위에서만 통치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나라를 잃은 군주가 어떻게 최후를 맞아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그는 군주임을 나타내는 모든 표식을 버렸다. 한 명의 병사가 된 그는 말에 박차를 가해 오스만군의 한복판으로 돌격했다. 곁을 지키던 부하들도 최후를 함께했다. 이들은 목숨으로 명예를 지켰다. 술탄과 황제의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긴다.



    [S BOX] 안에서 무너진 비잔티움, 황제의 동생까지 적과 내통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나라에 외교란 무의미한 연명치료일 뿐이다. 비잔티움이 이를 잘 말해준다. 몰락 직전의 비잔티움은 오스만튀르크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술탄이 원정에 나서면 군대까지 제공해야 했다. 황제 요한네스 5세는 술탄이 소아시아의 잔존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는 토벌전을 벌이자 병력을 보내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 마누엘을 술탄 무라드 1세의 궁전에 볼모로 보내기까지 했다. 비잔티움의 정체성은 열정의 기독교 신앙도, 로마의 영광도 아니었다. 오로지 생존이었다.

    심지어 황족 분쟁으로 차기 황제를 결정하지 못하자 술탄에게 지명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황제의 동생 데메트리오스는 1442년 오스만 군대를 빌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기까지 했다. 무너지는 나라는 안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법이다. 비잔티움 몰락의 교훈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2016-11-05 중앙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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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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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클라우제비츠 2016.11.06 1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기꺼이 다시 읽겠습니다.

    2016-11-30 한국경제


    [책마을] 1453년 비잔티움 최후의 날…

                두 군주의 사생결단 '난중일기'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김형오 지음 / 21세기북스 / 504쪽│2만8000원 


    1453년 5월29일, 백마를 타고 성벽이 무너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술탄 메흐메드 2세. 오스만 궁정화가 파우스토조나로의 그림. 21세기북스 제공


    “패자(敗者)의 역사는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격언이다. 대부분 역사의 붓은 이긴 자의 손에 쥐어지기 때문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사진)은 지난달 말 출간한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에서 이 같은 ‘전가의 보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책은 2012년 출간한 《술탄과 황제》의 전면 개정판이다. 지난해까지 38쇄를 찍은 스테디셀러를 ‘뼈대만 남기고 다 바꿨다’고 할 만큼 다시 썼다.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서 “국지적·미시적인 수정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며 “인체로 치면 피부 이식뿐만 아니라 성형과 정형도 동시에 하고 싶었다”고 했다. 가장 중점을 둔 건 박진감과 정확성이다. 초판 3장에서 자신이 쓴 정복 전쟁 해설 부분을 빼는 대신 균형을 지키기 위해 서구 측 기록뿐만 아니라 터키 쪽 역사 기록도 더욱 많이 살펴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각종 그림과 지도, 연표 등 다양한 부록을 실었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부록의 QR코드도 별도로 마련했다. QR코드는 독자들을 1453년 당시의 현장으로 이끄는 ‘타임머신’이다. 


    저자는 섣불리 심판자나 변사로 나서지 않는다. 그저 독자들이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관찰자일 뿐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에서 공격자와 방어자로 맞섰던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와 비잔티움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책에서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각각 군주로서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몸을 던진 인물들일 뿐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구분도 없다. 

    메흐메드 2세와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각각 공격과 항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리더십을 드러낸다. 메흐메드 2세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들기 위해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그대들 앞에는 현생의 전리품과 내세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며 “그러나 만약 탈영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새의 날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내 응징의 칼날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상과 헌신을 추구한다. 그는 신하들에게 “신앙과 조국, 하느님의 대리자인 황제, 가족과 벗들을 위해 싸운다”며 “다시 한번 신앙의 동지로서, 의기투합한 형제로서 여러분의 의무를 다해주길 부탁한다”고 명한다.

    책의 분량은 많지만 구성은 단순하다. 프롤로그와 1부, 2부, 에필로그가 전부다. 하지만 단출한 짜임 속에 내용은 알차고도 체계적으로 들어가 있다. 1부는 1453년 5월29일부터 1453년 6월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밀히 묘사하며 옛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이뤄진 새 제국의 탄생을 논한다.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어떻게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중심으로 변모시켜 나가는지, 정적들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등을 중심으로 논한다.


    압권은 2부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창조한 팩션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성을 강력히 수비하며 황제로서의 책임과 인간적 불안을 처절히 묘사한 일기,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바다와 산을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드 2세의 비망록을 한 편씩 나란히 배치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남긴 일기에, 메흐메드 2세는 비망록으로 답했다.



    저자는 전쟁의 처절한 현장에서 부딪친 두 군주의 고뇌를 관찰자적 시각을 지키며 담담하고도 냉정하게 전한다. 그는 “이 글은 동서 문명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에서 종군기자가 된 심경으로 써 내려간 54일간의 격전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전쟁의 주역이었던 오스만의 술탄과 비잔티움의 황제, 두 제국의 리더십에 대한 치열한 탐구”라고 밝혔다. 

    저자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을 더해 만든 합성어 ‘이스탄티노플’에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이스탄불의 전신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라며 “현재의 이스탄불과 과거의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내가 개념 짓고 명명한 이스탄티노플”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전쟁도, 걸출한 인물도, 문명도 멀리 바라보면 기나긴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일부에 불과한 사실과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역사를 창조하고, 무너뜨리고, 또다시 세운다는 역설을 함께 알려준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는 오스만제국과 유럽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오스만 제국의 중흥은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계기의 하나였다. 역사에서 영원불멸한 존재는 없다. 책 표지에 꽃향기를 맡는 모습의 메흐메드 2세와 아마 현존 유일일지도 모를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초상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16-11-03 한국경제 - 책마을]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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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에술탄 2016.11.06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격전의 현장으로 책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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