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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걷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



  <구름 위의 산책>이란 영화가 있습니다만, 그대 혹시 바다 위를 걸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걸어 보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말입니다. 물론 특수 신발을 신었다거나, 갑자기 내 눈 앞에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로 바다 위를 활보했던 걸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바다 위의 산책’은 아니었습니다. ‘1453년 당시에는 바다였던 곳’을 답사했던 거지요. 부연하자면, 나는 지금은 대부분 매립돼 육지로 변해 버린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을 탐사했습니다. 몇 장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말입니다.


  총 길이 약 9킬로미터. 마르마라 연안을 끼고 완만한 오목렌즈 형으로 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안 성벽은 한 겹이었으며, 그 성벽을 관통하는 11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요새화된 항구를 비롯해 작은 선착장들이 있어 물자도 실어 나르고 세찬 북풍 때문에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선박들의 피난처가 돼 주었습니다.

  성벽 둘레로는 급류가 흘러 상륙용 주정(소형 배)을 성벽 끝까지 갖다 대기가 어려웠으며, 암초와 모래톱 또한 마르마라 성벽의 든든한 방어물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453년 전까지만 해도 1000년 이상 외세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성문이 열린 적이 없는 천혜의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도성 모습. 오른쪽으로 방어용 쇠사슬을 쳐 놓은 골든혼(금각만)이 흐르고, 그 옆에 제노바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갈라타 지역 일부가 보인다. 그림이 증명해 주듯이 당시에는 아래쪽 마르마라 바다가 성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파도가 성벽으로 밀려와 부딪치는가 하면, 성문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이 예니카프를 통해 마르마라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1453년 당시에는 도성의 상류 지역인 메소테이키온에서 격전이 치열했던 만큼 리쿠스 강물에도 핏물이 진하게 섞여 바다로 흘러 내렸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어순을 바꾸어 벽해상전(碧海桑田)이라 해야 할까요? 저 그림 속에서 꿈틀대던 마르마라 바다의 일부분은 흙으로 메워져 지금은 공원과 해안 도로로 변해 있습니다. 옛 성곽들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많이 허물어지고, 도로와 철길이 놓이면서 상당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설픈 복원 공사로 미관을 해친 부분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보십시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들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작가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들이지만 이번에도 올리지 못한 사진이 수백 컷입니다.
  한
컷의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 바다 위를 걸어 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라면….



▲ 골든혼 입구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배나 자동차를 우회전하면 해안 성벽이 나타난다. 오른쪽 언덕 위로 톱카프 궁전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만만치 않은 수심인데도 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안전 요원이나 ‘수영 금지’ 팻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해안 성벽으로 접어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투르굿 레이스(Turgut Reis, 1485~1565)의 동상.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왼손을 지구의에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상 오른쪽 건너편 페라 신도시 앞바다에는 하얀색 크루즈선이 떠 있다.  

*16세기 오스만의 유명한 해군 제독.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군인이 되었다. 지중해 말타 섬 원정을 총지휘했으며, 그리스도교 선박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로 유럽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1551년에는 말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조 섬의 주민 6000여 명을 모두 리비아에 노예로 팔아 버린 일도 있었다. 코르시카 섬과 마요르카 섬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투르굿 레이스에서 레이스(Reis)는 성이 아니라 ‘제독’이란 뜻을 지닌 옛 터키어이다. 아시아계 유목 민족이 그러하듯이 터키도 예전에는 성(姓)이 없었다. 특정 인물 이름에 직함을 붙여 부르는 건 터키인들의 오랜 전통. 걸출한 제독들에게는 ‘레이스’란 칭호가 붙었다. 같은 이유로 장군이나 사령관에게는 파샤(Pasha), 중견급 군인이나 지방 장관에게는 베이(Bey)란 호칭이 따라 붙는다.


 

▲ 투르굿 레이스의 동상 옆 망루 성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문자들. 테오필로스 황제(829~842년)가 이 성벽을 새로 지었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테오필로스는 9세기 무렵 아랍 함대들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을 보강했다. 이 망루 성벽 복원을 위해 역사학도(해안 성벽 전공) 니사가 관여하는 협회에서 유네스코에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 출입문인가, 경비용 혹은 감시용 문인가. 비잔틴 양식의 아치형 문이 아랫부분은 지하로 절반 이상 매몰된 채 시커먼 속을 내보이고 있다. 지표면의 융기로 땅이 솟아오른 데다가 매립까지 더해진 걸 감안하면 실제 높이는 만만치 않았으리라.


*부콜레온 황궁(Boukoleon Palace)으로 통하는 바다 쪽 수문의 원형 복원도.
   우리가 찍은 아래 관련 사진들과 비교해가며 보기 바란다.

*네아 바실리카 교회 옆, 히포드롬(원형 이륜마차 경기장) 바로 뒤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궁전. 아야 소피아와 매우 가까워 콘스탄틴 대제를 비롯한 비잔틴 황제들이 이곳에 머문 적이 많았다. 부콜레온(Boukoleon)이란 이름은 이 궁전을 지키고 있는 황소(Bull)와 사자(Lion)를 닮은 동물 조각상(붉은 사각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터키 정부가 그리스와의 우호 관계를 고려해 최근 일부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판에 고고학 박물관의 감독 아래 이 궁전과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연결되는 해안 쪽 문. 궁전을 수호하던 동물 조각상은 사라지고 물결이 넘실대던 바다는 매립으로 메워져 해안도로(케네디 대로)가 나고 해안선은 그만큼 멀어졌다. 배들이 다니던 바다를 지금은 자동차들이 달린다. 매끈했던 대리석 벽면에서는 거미줄처럼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쪽 문 내부. 카메라로 얼굴이 가려진 저 사나이는 누구인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이다. 이번 어드벤처에 기꺼이 동행해 프로 수준의 사진으로 맹활약했지만 “촬영 감독은 원래 스크린에 안 비치는 법”이라며 한사코 블로그에 등장하길 사양했다. 그런 그의 사진 찍는 모습을 내 디카에 담았다.


▲ 비잔틴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부콜레온 황궁 성벽의 맨 윗부분. 저 꼭대기에서도 무화과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두고 가지를 땅으로 향한 채 물구나무서서 자란다. 터키는 기후와 토양 모두 무화과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무화과나무(Fig-tree)를 인지르(Incir)라고 부른다. 하도 이 나무를 많이 보아서 나는 이 도시를   ‘인지르 시티(Incir City)’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주신() 바쿠스가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다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이스탄티노플은 문명과 문화 모두 다산성(多産性)인 도시이다.


◀ 아흐르카프(외양간 문) 주변. 오랜 옛날부터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 등대는 비잔틴 시대의 등대도, 오스만 시대의 등대도 아니다. 공화국 이후에 다시 지어진 현대식 등대이다. 달그림자마저 얼어붙었을 1453년 5월의 어느 날 밤을 등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서 마르마라 해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으로  *1군 사령부가 바라다 보인다.





*위스크다르 남쪽 마르마라 해 연안에 세워진 오스만 시대의 건물로 독일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크림전쟁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군 시설이라서 민간인 출입은 금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나이팅게일 기념관이 있다.


 

▲ 해안 성벽 안쪽. 성벽의 윗부분은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활을 쏘기 위해 만든 네모난 구멍은 안쪽이 넓은 반면 바깥쪽은 좁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유리하게 하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아치(Arch) 모양이지만 보다 전문적인 건축 용어로는 *니치(Niche)라고 일컫는다.

*장식을 목적으로 두꺼운 벽면을 파서 만든 움푹한 대(臺)로 보통 그 윗부분이 반(半)돔형이다. ‘벽감(壁龕)’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곳에 꽃병 등을 놓거나 아예 이 부분을 장식용 분수(噴水)로 만들기도 했다. 아치와 니치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벽이 없이 움푹 뚫려 있으면 아치, 움푹 들어가 있지만 벽으로 막혀 있으면 니치이다.



▲ 성벽의 높이를 짐작해 보자. 단 옛날에 비해 대지가 융기하고 해안이 매립됐음을 감안해야 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깊이까지 헤아린다면 결코 만만하게 볼 높이가 아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들이차고 남풍이 거세게 불고 암초까지 많았으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려는 세력들도 마르마라 해안 성벽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 내었다고 한다. 다만 강한 바닷바람(海風)에 실려온 염분으로 인해 육지 성벽이나 골든혼 쪽 성벽보다 보수 및 보강 공사를 더 자주 해야 했다.



▲ 어느 것이 먼저 무너질까? 1500년을 버텨온 성벽 틈새에 판잣집이 위태위태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즉석에서 그런 사진 캡션이 떠올랐다. 차틀라드카프 인근에는 이런 식의 건축물들과 성벽들이 흔했다. 그래서 일행 중 사진 애호가인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해도 못 들은 척 경쟁하다시피 셔터를 눌러댔다.


▲ 인간이 살고 있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허름하게 지어진 목조 가옥의 2층 처마 밑에서 빨래가 마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문득 멀리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그림을 바로 위 사진과 비교해 보라. 앞 성벽은 모양이며 구조가 위 사진 속의 성벽과 똑같다. 동일한 성벽이다. 그래픽으로 표현한 대리석 건물은 부콜레온 황궁 벽의 운형 복원도. 높이만 놓고 보더라도 그 위용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다.




▲ 이스탄티노플에선 피사체 모두가 예술 작품,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조각가, 어떤 화가가 이토록 아름답고 운치 있는 풍경을 빚어낼 수 있으랴. 오랜 세월, 비와 눈과 바람과 햇살이 합작해 빚은 천혜의 예술 작품 앞에선 오른쪽 인공으로 지은 건축물마저 불협화음이 아니라 차라리 조화롭게 느껴진다. 역설의 미학이랄까.


▲ 누가 저 고색창연한 성벽 위에 액자를 걸고 두 장의 현대식 건물 사진을 끼워 넣었을까?
눈이 잠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저 사진틀 모양 성벽들은 원래는 왼쪽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재질은 물론 대리석이다.(아래 그림 붉은 표시 부분 참고)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


▲ 성곽 끝자락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자세로 마치 1500년 전부터 거기 존재해온 것처럼 대리석 기둥을 받치고 집 한 채가 있다.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와 이 사진을 아치 기둥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보기 바란다.



▲ 황궁 터 앞은 옛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매립이 되고 그 자리에 도로와 공원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공원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폐선은 놀이터로 둔갑했다. 블루 모스크의 상징인 여섯 개의 첨탑(미너렛)이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구름 낀 하늘에 시를 적고 있다.



▲ 주말이나 휴일은 새(까마귀?)들의 잔칫날이다. 마르마라 해변 공원에서 새들이 행락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뒷설거지하고 있다. 비둘기도 아닌데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 터키 판 서낭당? 우리나라나 몽골․위구르 등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위에 매달린 실을 마르마라 해안 성벽 옆에서 보았다. 이 도시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통역사 이경숙씨에 따르면, 터키 시골에 가면 이따금 볼 수 있지만 이스탄불에서는 처음 본단다.
이경숙씨의 말, “의장님 따라 다니면서 모르던 것 새로 알고, 잘못 알고 있던 것 바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아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도시가 생긴 이래 남들이 안 다닌 곳들만 골라 다닌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여행자일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여태껏 쌓인 피로가 씻은 듯이 풀리면서 내딛는 발걸음에 다시 새 힘이 솟았다.


▲ 지도에게 길을 묻다. 거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니사가 준비해 온 1930년대 지도를 펼친 채 들여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해안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두 미녀의 눈길이 열심히 쫓고 있다. 나중에는 지도가 나달나달해졌다. 여백과 귀퉁이도 내가 써 놓은 메모로 가득 찼다.


▲ 옛 항구 자리를 찾아가던 길에 들른 카드르가 마을에서. 이 동네엔 오스만 시대의 전통 가옥들이 많았다. 기독교 문화권인 그리스 건축 양식이 창문이 굉장히 크고 돌출된 스타일인 반면,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집안에 있는 여자들이 밖에서 잘 안 보이도록 작은 창문에 창살을 달고 담을 높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 주차장으로 변한 항구. 혹시 흔적이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카드르가 앞 항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지도를 들고 이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항구는 온데 간데 없고 항구 끝자락 성벽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옛날에 배들이 정박해 있었을 법한 곳이 지금은 매립돼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 역시 이 나라 사람들은 ‘꼬레리’(한국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비잔틴 시대 해안 성벽 최대의 항구(?)를 찾아서 또 육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니카프 근처, 해저 터널과 연결되는 지하철 터미널 작업을 하고 있는 공사 현장은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우리에겐 특별히 문이 개방되었다. 여기가 바로 엘레우테리오스 항구가 있던 자리. 리쿠스 강물이 마르마라 바닷물과 몸을 섞던 최하류이기도 하다. 토목 공사 과정에서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어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 국립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도 가졌다.


특종 사진!?

▲ 출입은 특별히 허용됐지만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공식 발표 전이라서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했다. 하지만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기사(騎士? 技士?)는 ‘기사 정신’을 발휘해 눈치껏 셔터를 눌렀다. 특종 사진!? 흰 천막을 씌운 부분은 비잔틴 시대의 상선 22척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던 자리들. 파헤쳐진 발굴 현장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무토막들이 여기가 바로 옛 항구 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 옆은 *오르한 왕자와 그가 이끄는 투르크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오스만의 왕자. 술탄 쉴레이만의 손자이자 무라드 2세의 먼 사촌이다. 1453년 당시 마르마라 해에서 상륙한 극소수의 오스만 병사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술탄에게 잡히면 목이 달아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오르한과 그의 부하들은 투르크 군과 대항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르한은 정교회 수도복을 빌려 입고 변장한 채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혀 동료 죄수의 밀고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 바다 성벽 안쪽.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아치형 비잔틴 양식이 뚜렷하다. 여기저기에 동네 개들이 실례를 해놓아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1453년 당시 프사마티아와 스투디온 등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에 있던 지역은 그곳 방위군들이 육지 성벽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오스만의 함자 베이 함대에게 항복해 교회를 비롯한 주민들이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돈을 걷어 포로로 잡힌 다른 지역 주민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구해 주는 의리를 발휘했다.


▲ 바다 성벽 바깥쪽. 해안 성벽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성벽 바로 앞이 바다다. 1453년 당시에는 해안 성벽 모두가 이런 모습이었을 테니 적들이 감히 상륙할 엄두를 냈겠는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성벽 안팎 모두 야외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변 정리만 잘하면 관광 명소가 되는 건 금방일 것 같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그 옛날 영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 그리고 자갈이 뒤섞여 퇴적된 모습이지만 550여 년 전에는 온통 바다였던 곳이다. 위치는 제라파샤 병원 건너편. 택시 기사에게 그렇게 말하면 데려다 준다.


▲ 바다 성벽 끝자락에 있는 주탑. 성벽 꼭대기는 복원된 모습이 역력하다. 바로 앞은 마르마라 해와 육지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니치 양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 드디어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가 끝났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꺾어지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시작된다. 해안 성벽 탐사는 무엇보다도 길 건너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자동차들이 야생마처럼 내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때론 교통 법규 위반까지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 오, 아름다운 정원! 육지 성벽은 이렇게 운치 있는 공원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멋진 곳을 찾은 사람은 우리뿐이다. 이미 해안 성벽 이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탐사도 하고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2․3․4편에도 소개한 지역이지만 이 날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해질녘까지 대포알을 찾아 3중 성벽 구석구석을 헤매고 또 헤매었다.


▲ 황금문 앞 풀밭 위에서.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마치고 점심 식사 뒤 오후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통역을 해준 이경숙씨, 열과 성을 바쳐 성벽 탐사에 동행하며 내 물음표를 지워 준 니사 양에게 내 등 뒤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을 바치고 싶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7편은 마르마라 해안 성벽(세라글리오 곶부터 비상문까지/붉은 사각형 표시)을 탐사한 내용이다. 거리는 약 9킬로미터. 매립된 지역이 너무 많고 넓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바다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답사를 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S.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아이디 ‘중독’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구절입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다음 편(7편)을 지금 올리지만 중독님을 비롯한 6편 독자들은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9편으로 미루고, 7편에는 다른 이야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구성을 약간 달리 하면서 이야기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8편에 올릴 내용을 한 컷의 사진과 함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시작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찍은 바다 사진. 저 해협 양쪽에는 1453년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요새가 두 곳 있었다. 아나돌리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각각 아시아 쪽과 유럽 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위협하며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두 요새 이야기가 8편에서 펼쳐진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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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존과 발전 2010.10.01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풍스럽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먼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티나게 복원된 흔적들이 아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유지/보수를 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의 흐름만이 복원된 성곽의 흔적을 덮어줄 수 있을것 같네요

  2. 오스만 2010.10.01 1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원더풀, 뷰티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만국기처럼 다채로운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3. 두륜 2010.10.01 15: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정과 노력에 매번 놀랍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대단 하시네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
    멋진 말이 아닐수 없네요...
    다음에 시간이 흐른뒤 외국의 명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지금 의장님처럼 꿈이 현실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이라고
    소개한다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요?

  4. 술취한술탄 2010.10.01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도 가본적없는 이스탄티노플
    의장님덕에 3박4일정도 이스탄티노플 여행을 다녀온듯합니다.
    해박한지식과 격조높은 안목 다음편 기대할께요.
    더불어 말씀드리면 여행중 즐겼던 음식이나 에피소드도 올려주셨음 좋겠는데

  5. 박찬용 2010.10.01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제가 마르마라 해안을 다니는듯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생생한 현장감으로 제가 곳곳을 돌아 다닌듯
    감동과 여행후의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한편한편의 글들을 읽으며 너무도 재미있는 산교육을 받는 느낌...

    늘 불타는 열정으로 한국의 산하와 역사를 쓰다듬어 주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힘드시겠지만 책으로도 만들어 주신다면 더많은 사람들이 더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 됩니다
    8편이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글들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요

  6. 가을바람 2010.10.01 1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과 사진을 보면서 내내 제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7. 술에술탄 2010.10.03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군요.
    터키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수여해야 할 듯.

  8. 중독 2010.10.03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에 나와 바닷바람 맞으며 성벽을 따라 걷고, 성안으로 들어와 건축문화관람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도시락 먹고... 주말 나들이 하고 가는 기분입니다. 나들이하러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9. 수몰 주민 2010.10.10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 위를 걷다, 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예전 어느 시인의 '물 밑을 걷기'란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몰된 어느 마을에 얽힌 첫사랑과의 추억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바다 위를 걷든 물 밑을 걷든 옛 기억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든,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든 말입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
                              - 지도에는 없는 도시를 가다

  그대 혹시 이런 이름의 도시를 아시나요? 이스탄티노플(Istantinople).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아무리 찾아 봐도, 지명 사전을 열심히 뒤져 봐도, 네이버 지식 검색에 입력을 해봐도 결코 나오지 않는 도시. 그러면서도 왠지 익숙한 그 이름, 이스탄티노플. 이 도시가 지금으로부터 550여 년 전으로 나의 시계와 발걸음을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탄티노플은 다름 아닌 이스탄불(Istanbul)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합성어, 바로 내가 창안하고 개념 짓고 명명(命名)한 도시입니다. 절묘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게도 이스탄불의 ‘불’과 콘스탄티노플의 ‘콘’, 그렇게 한 글자씩만 떼어낸 다음 조합하면 이스탄티노플이란 단어가 탄생하니 말입니다.

▲ 한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 차양 넓은 모자를 방패삼아 쓰고 격전지 성곽 순례에 나섰다. 마치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내 옆에 있는 ‘미녀 삼총사’는 왼쪽부터 해안 성곽을 전공하는 역사학도 니사, 터키어가 유창한 현지 통역사 이경숙씨, 이스탄불 총영사관 정은경 박사이다.)


  언어유희로 웃어넘기거나 폄하할 일이 아닙니다. 터키의 경제수도 격인 이스탄불은 실제로 그 도시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와 문화가 발길 닿는 곳마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현재의 이스탄불과 과거의 콘스탄티노플이 공존하는 도시랄까요.


  잘 아시다시피 동서양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은 민족·인종·지역·종교·문화가 얽히고설킨 곳입니다. 아시아 내륙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최종점입니다.


  나는 지난 8월 초순 나의 휴가를 온통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3일은 그 유명한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 소피아 성당)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하였고, 또 3일은 배낭을 멘 채 1500년 된 성곽을 뙤약볕 아래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었습니다.


▲ 어디선가 본 듯 눈에 익은 꽃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입성하는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저 하얗고 빨갛게 피어난 꽃들에 그 당시 숨진 병사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닐는지….


  아야 소피아는 온종일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해마다 이 도시를 찾는 2700만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나 다름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일행처럼 사흘 내내 아야 소피아의 1․2층은 물론 부속 건물들과 외벽, 지하실까지 보물찾기하듯이 뒤지고 살펴본 이는 드물 것입니다. 게다가 그 건물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전문가(하산 박사)를 만나 열정적 토론을 한 이틀 반은 이 위대한 건축물의 숨소리, 눈물 자국마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 성곽 위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모습.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야 소피아에서 나는 1453년으로 돌아가 황제의 간절한 기도와 술탄의 장엄한 연설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소리들은 관광객들이 쏟아내는 소음 가운데서 들릴 듯 말 듯 나를 애태웠습니다.


  “도시를 세운 이(콘스탄티누스 1세)가 도시를 망하게 한다(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설과 *
선지자 모하메드의 예언대로 메메드 2세(모하메드 또는 마호멧의 터키 식 이름)가 정복자(‘파티’, Fatih)가 되는 이런 역사는 우연인가요, 필연인가요.


  *“한 쪽은 육지이고 다른 두 면은 바다로 된 도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삭의 7만 아들이 그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심판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 대포? 노! 성 아래에서 성 위로 물건을 들어올리기 위한 장치였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제대로 머물러 있지 않지만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획기적인 대 사건…. 이슬람 세력(오스만 투르크)이 기독교 세력(비잔틴 제국)을 포위한 채 총공격을 감행한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은 세계 전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투였습니다. 동원 가능한 인력은 물론 모든 역량과 지혜가 총집결되었습니다. 육전·해전·지하전이었고, 또한 외교전·첩보전·심리전이었습니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이 전쟁을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계기로도 작용했습니다. 아시아계이면서 이슬람 신앙을 지닌 오스만 세력이 유럽에 속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이 기념비적인 사건은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동안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서양인들로서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패배와 굴욕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잔인하고도 처절했던 사생결단의 전쟁이었지만, 정복 이후 오스만은 비교적 관대하게 기독교 문화를 포용했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500년 가까이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큰 의미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건만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덜 알려져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역사학자도 아닌 나를 ‘1453년’에 심취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9세기 성벽(왼쪽)과 12세기 성벽(오른쪽)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을 지키던 성벽이다. 물론 보수 및 복원의 손길을 거친 모습이다.

  2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성곽은 3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개 면은 바다와 만(마르마라해와 골든혼)에 접해 있고, 한 개 면은 육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육지 부분은 3중 성벽으로서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로마 제국을 1000년 넘게 지켜 준 난공불락의 철옹성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입니다.

▲ 짧게는 40미터, 길게는 90미터 간격으로 방어용 타워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면 톱니바퀴 모양이다.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병정놀이하는 아이처럼 성곽의 앞과 뒤를 가로지르고 성벽의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포탄 자국과 혈흔을 더듬었습니다. 총공격을 독려하는 술탄(메메드 2세)의 우렁찬 목소리와 죽음으로 성을 지키려는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습니다.

  

▲ 통상 성곽 앞에는 군데군데 묘지가 조성돼 있다. 묘지는 성곽 터를 측정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그 도시에 머문 기간은 너무나 짧고 한편으로는 길었습니다. 순간과 영원 사이를 오고간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그 도시를 생각하면 어떤 때는 열 권의 책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가 또 어느 때는 한 줄의 글조차 감히 적어내기가 막막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두 번은 짧게, 한 번은 조금 길게 그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두 번의 방문 이후 나는 그만 그 도시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뛰고 설레는 도시가 돼 버렸습니다. 도서관을 뒤져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영문 혹은 터키어로 된 책자도 구해 보았습니다.


▲ 성 안에서 만난 천진난만한 아이들. ‘꼬레’(한국)에서 온 ‘꼬레리(한국 사람)’인 걸 알고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런 아이들만 보면 외손자·외손녀가 생각나서 덥석 안아주고 싶어진다. 

  국회의장 직을 마치자마자 나는 이 도시 방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대표에 출마하라는 주변의 권유와 스스로의 유혹도 뿌리친 채 배낭을 꾸렸습니다. 녹음기와 카메라와 지도는 소중한 탐사 자원이었습니다. 현지의 명망 높은 학자들을 만나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귀중한 자료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4명의 단출한 ‘역사 탐방대’가 5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헤집고 누비고 다녔습니다. 문명과 문명, 그 충돌의 현장에서 많은 물음표들이 지워졌고 새로운 물음표들이 생성되었습니다.


▲ 최후의 날 당시의 황궁 터.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중 비잔틴 양식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스탄불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을 더 많이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의 미묘한 국민감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이 나에게 하등의 고려 요소나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느낀 역사적 전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열망으로 길을 떠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550여 년 전의 치열했던 전투로 세계사는 바뀌었습니다. 한 제국은 사라지고 또 한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터키는 독립전쟁(1919~1923년)을 거쳐 공화국으로 거듭났습니다.


▲ 황궁이 끝나고 삼중 성벽이 시작되는 곳. 방어용 탑이 망루라 해도 좋을 만큼 높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망원경으로 본 듯 느껴지던 것들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니 현미경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너진 성곽 더미에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에서 두 제국의 실체를 느꼈습니다. 나에게는 두 제국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울림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심금을 두드리는 이 웅대무비의 교향곡을 나는 연주할 능력도 해석할 재주도 없습니다. 다만 보고 들었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느낀 ‘이스탄티노플’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소명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는 오직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입각할 것입니다. 때로는 즐거운 상상력도 동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과 상상력 부족으로 본의 아닌 왜곡이나 의미가 잘못 전달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고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것을 오로지 진실의 창을 통해 보려 했던 나의 신념이 부디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는지, 생생한 기억들이 희석되지 않을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오류를 발견하거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이 있다면 서슴없는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카리시우스(에디르네카프) 성문 진입로. 여기를 통과하면 당시 성사도 교회(지금의 파티 자미. 자미(Camii)는 모스크, 곧 이슬람 사원을 의미한다)로 이어지던 메인 로드가 펼쳐졌다. 내 옆에 있는 아가씨는 박사 과정 역사학도 니사.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내 어드벤처에 앞장서 동행해 주었다.

  우선은 이 블로그에 짬짬이 간단한 캡션과 함께 사진으로 ‘이스탄티노플’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훗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 위한 워밍업 삼아서 말입니다. 최대한 편안하고 부담 없이 써나가려고 합니다. 영화로 치면 예고편일 수도 있고 시놉시스일 수도 있는 그런 작업입니다.

▲ 매실? 노! 한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투르크 전사의 후예인지도 모를 중년의 사내가 뱃가죽을 늘어뜨린 채 무딘 칼로 호두 껍데기를 벗겨내고 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현주소라기엔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허물어졌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격전지 성곽을 탐방한 사진 몇 컷으로 여러분과의 만남을 매듭짓겠습니다.

▲ 이중 성벽이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난공불락 철옹성도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는가.

▲ 제법 근사한 사진이 나왔다. 옛 성곽에선 누구나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된다. 구도를 어설프게 잡아도 피사체 스스로가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작품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 허물어진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뾰족 탑이 보인다. 어느 사원인지는 이름을 잊었다. 이런 사원들이 수 백 개를 헤아리니까. 


※일러두기=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전체 성곽 중 골든혼(할리치, 금각만)이 끝나는 지점에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까지의 성곽 중 일부를 탐사한 기록입니다. (답사 지도의 하늘색 표시부분)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성곽 탐방로의 극히 일부분임을 밝힙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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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케밥 2010.08.25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생해서 좋군요. 사진 좀 많이 올려주시면 더욱 좋을 듯....여행정보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터키 소식 기대할게요...감사합니다!!

  2. 파묵 2010.08.25 16: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멋진 조어면서 그 의미도 적절한 합성어입니다.
    저도 한번 흉내내볼까요?
    터키(Turkey)는 턴키(Turn Key), 즉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나라입니다.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그랬듯이
    지금의 터키 공화국 또한 향후 세계 정세의 물길을 좌우할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3. 파샤파샤 2010.08.25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과 멋진 사진!
    이스탄티노플,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집니다.

  4. 배가본드 2010.08.26 0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생애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나도 이스탄불이 아닌
    이스탄티노플에 다녀오고 싶어진다.

  5. 국밥 2010.08.26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고계신 모자가 인상적이네요..매우 활동적인 분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트레킹신발에 모자를 쓰고 배낭을 매고 계신 모습이 한층 젊어보이십니다. 좋은 정보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감사~~

  6. 천년의 미소 2010.08.26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두번의 짧은 방문으로, 청년 술탄 메메드의 열정과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간절한 기도를 재연해내는 상상력으로 위대한 우리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구현해내기를 바랍니다.

  7. 이스마엘 2010.08.27 0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네이버 검색해도 정말 안 나오는지
    검색창에 입력해 보았습니다.
    나오던데요.
    하지만 그건 이 블로그에 쓴 글 단 한 편에만 등장하더군요.
    고유명사로 특허 출원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상표 등록인가.

  8. 두륜 2010.08.27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인 콘스탄티누스와 도시라는 뜻의 라틴어 "폴리스" 가 합쳐저 콘스탄티노폴리스 라는 도시가 생겼죠..... 여기서 유래한 도시명 "콘스탄티토플" .... 의원님께서 명명하신 "이스탄티노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으로 사라진 비잔티움의 옛 영화와 발자취가 느껴지는 듯 하네요....

  9. 페이스북 2010.08.29 1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공미(?)가 팍팍 풍기는 성벽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세월의 나이테까지 되살리기가 쉽지야 않겠지만
    복원 작업이 너무 무성의하게 이루어진 느낌입니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모조 전문가들을 동원했더라면
    좀 더 근사한 작품이 나왔을 텐데 말입니다.

  10. 유근준 2010.08.31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격조와 재미를 함께하는 김형오의 필체에 멋진 사진들이 곁들여져 흥미진진한 기행 앞으로 책으로 엮어지면 더욱 볼 만하리라 기대됩니다.

  11. 이우종 2010.09.09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우종
    좀 늦게나마 사이트에 접하게됐군요. 앞으로 전개될 이스탄틴노플의 이야기가
    벌써 궁금해집니다. 마음이 앞서 달리네요. 맛깔난 필치로 새로이 탄생할 역사의 이야기를 빨리 접허고 싶은 마음에 글을 짧게 줄여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12. 조르바 2010.09.09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정말 네이버 쳐 봐도 이 블로그에서밖엔 사용을 안 했네요.
    이어령 교수가 명명한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보다
    더 환상적인 조어 솜씨입니다요.

  13. 도성 시민 2010.10.09 1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이스탄티노플 도성 시민으로 등록했습니다.
    번성기 한때 인구 1백만을 껑충 뛰어넘는
    1000만 시민의 이스탄티노플 도성을 만들어 봅시다!

  14. 칼칼칼칼 2010.10.12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날 위에서 번뜩이는 술탄의 카리스마.
    칼에는 칼로 맞서는 황제의 신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했으나
    칼집은 피냄새를 맡고 싶어한다.

  15. 크리에이터 2010.10.31 0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로는 한 도시가 어느 집념어린 사람의 열정과 창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거나 재창조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느낍니다.
    김형오의 이스틴티노플, 정말 기대만발입니다.

  16. 앙코르 2010.11.21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매력적인 도시로 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