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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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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상층부를 재건축한 모습을 담은 옛 그림.(위 왼쪽) 돔 위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다. 물론 미너렛(첨탑)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슬람 사원이 된 이후로는 돔 위에 십자가가 없다.(위 오른쪽) 그러나 이 건물 내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하기아 소피아에는 위 왼쪽 그림에서처럼 십자가 모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아래 그림)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Mezquita.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창건한 사원. 후대의 통치자들이 확장을 거듭해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재정복 당한 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는 “어디에나 있는 건물을 짓자고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건물을 부수고 말았구나.”라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원의 중심부만 개조해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8일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던 쿠데타. 532년 1월 10일 정치적·종교적으로 대립하던 청색파(Factio Veneta)와 녹색파(Factio Prasina)간에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 응원 도중 싸움이 벌어져 주동자들이 사형을 언도받자 이들은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파가 연합해 ‘니카(승리)’를 외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에 편승해 황제의 반대파였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諫言)으로 피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반란군을 급습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저서로는 『전사(戰史)』『비사(祕史)』『건축기(建築記)』 등이 있다. 그는 『건축기』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또 이렇게 칭송했다. “이 대성당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원주 위로 치솟아오른 거대한 돔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습은 견고한 석조 건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려 우주를 덮고 있는 것 같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6개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극장), 영국의 스톤헨지(거석 기념물),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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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유수의 건축가이자 유력 언론의 칼럼니스트인 알리 에사드와 이스탄불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맺었다. 알리는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 서적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제목이『콘스탄티노플의 기념물』인 이 책은 독일 베를린에서 1855년에 간행된 서적을 100권 한정판으로 찍어낸  영인본이다. 일련 번호는 021/100. 세상에서 100권밖에 없는 책의 21번째 주인 자리를 내게 양도해 준 알리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은 특히 아야 소피아의 건축공학적 특징을 수준 높은 그림과 함께 mm 단위로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 조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판형이 신문(대판)보다도 커서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그림들은 2,3편에서 좀더 상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황제는 대성당에 가기 전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음 네 가지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군주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황제를 위해 목숨과 가정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의 허물을 사과하노라. 나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면 용서하기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성사와도 같은 황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대성당을 나온 황제는 황궁으로 가 거기에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도성 시민들이 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황제와 술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오스만의 역사가들은 “이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었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을 뿐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고 부인한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된 표현이다.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마지막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호전성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피정복자인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교도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말로써 보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은 피정복민들에게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신앙의 자유, 남녀 평등,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코란(2:256)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이슬람의 빠른 전파는 무력이나 강제적 개종보다는 오히려 관대와 포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고색창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1573년에 착공해 2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도리아, 이오니아, 고딕, 르네상스 등이 하모니를 이룬 고전 건축 양식의 집합체이다.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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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메로스 2010.11.19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말로 블로그판 <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
    그러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가 드물듯이
    과연 이 작업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아무튼 참 대단하십니다.

  2. 레드블랙 2010.11.20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가슴 안에서 거문고와 비파가 현을 강렬하게 긁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가 봅니다.

  3. 앙코르 2010.11.21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주마간산, 하지만 다음에 다시 탑승해 이스탄티노플 구석구석을 샅샅이 탐사해야지.

  4. 프로페셔널 2010.11.22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이는 깊게, 넓이는 넓게...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맛이 납니다.
    사진의 적절한 배치도 베리 굿!

  5. 동네주민 2010.11.22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저 웅장한 건축물을 매일 볼텐데...
    우리가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이런..벅찬 감동을 매일 느낄까요??

    매일 매일 느끼는 벅찬 감동이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것 같네요...

    우리 동네에는....??

  6. 포에버 2010.11.25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야, 아야, 아야! 그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화해와 공존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이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정말 숙연해집니다.

  7. Halil Arça 2010.12.08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ello,

    This is Mr. Arça, I received your post.
    Can you please send me your e-mail adress.
    halilarca@yahoo.com
    Thank you

  8. 2010.12.09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dddd 2011.02.28 0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성사도 성당이 무었때문에 부숴졌고
    그리스 본토인들은 얼마나 차별받았는데.....

  10. BlogIcon eatwithmeist 2012.12.18 04: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연구와 정성을 다해 작성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얻고 갑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살고, 터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을 알리고자 블로그를 열었는데..제 술탄아흐멧 관련 포스팅에 님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9
                              - 해상 전투의 현장에서


  2차 대전의 명장 *조지 스미스 패튼이 만약 정복자 메메드 2세를 평했더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패튼은 “군인이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하고 완전하며 거만한 자신감”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감,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완전무장한 신념의 사나이가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1885~1945년.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맹활약한 미국의 육군 장군. 북프랑스에서는 하루에 110킬로미터를 진격했을 만큼 저돌적인 작전과 무자비한 욕설로 유명했다. 멕시코 원정 당시에는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개선했다. 줄담배에 진주로 장식한 권총을 차고 호통과 엄격한 규율로 병사들을 통제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패튼은 늘 자신만만했다. 스스로를 연합군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굳게 믿었다. 패튼의 모토는 오직 진군뿐, 방어란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톱카프 궁전 전망대에서 찍은 바다 사진. 저기가 바로 내가 탐사할 해상 전투의 현장이다! 내 마음은 벌써 바다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저 하얀 배 위에 탑승해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우리는 바다에서, 해변에서, 상륙지 들판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적과 싸울 것이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동원한 총력전을 펼칠 거란 의미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술탄의 자세와 각오도 처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육상·해상·공중전(불화살과 대포알이 허공을 날아다녔으니까요)은 물론, 4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선 지하(도성 침투용 땅굴) 전투까지 치렀으니까 말입니다.

▲ 지대가 높아(해발 267미터) 도시 전체를 조감도처럼 실감나게 전망할 수 있는 참르자(소나무 언덕)에서 내려다본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 해협 위 오른쪽이 유럽이고 아래쪽이 아시아다. 왼쪽 소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아시아 연안 동네인 위스크다르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같은 제목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미국의 흑인 여가수 어사 키트가 터키어로 리메이크하는 등 국내외 여러 가수가 부르면서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위스크다르(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로 시작되는 노랫말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제목은 <캬팁>인데 ‘캬팁’은 하급 공무원을 일컫는 말.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공무원 총각을 사모하는 내용이 담긴 애틋한 연가이다. 노래하는 사람 기분에 따라 빠르게 부르면 흥이 나고 느리게 부르면 애잔한 곡조가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터키 전통 민요이다.

  육상 전투는 이미 서술했으니 오늘은 전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잠깐, 왜 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외교적인 배경을 더듬어 볼까요?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입니다. 1453년 전쟁에도 그 이면에는 정치적·외교적·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1780~1831년. 독일 태생으로 열두 살에 입대해 사관학교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으로 활약했으나 예나의 패전 이후 러시아군에 투항,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 진력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란 자신의 말을 증명 혹은 실천이라도 하듯 1815년 프로이센으로 복귀해 군사학자 및 참모장 등을 지냈지만 콜레라에 걸려 급사했다. 사후에 출간된 『전쟁론』은 이 분야의 손꼽히는 고전.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계속되는 정치적 행위이며 도구일 뿐”이라는 전쟁 철학을 갖고 있었다.

  황제 역시 비잔틴 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스만의 술탄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를 세우면서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고 제국의 목을 조여오자 유럽은 아연 긴장합니다. “아직 어린 술탄”이라는 느긋한 평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메메드 2세”로 인식이 급변합니다. 힘없는 황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에 매달립니다. 도성 시민과 성직자들이 굴욕감을 느끼며 반대하던 동서 교회의 통합마저도 받아들일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유럽 각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강 건너 불 보듯하는 안이한 상황 인식과 무관심, 각 나라를 연결하고 이끌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황제의 사절들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교황과 베니스의 미미하고도 형식적인 지원, 제노아 군인 주스티니아니가 이끌고 온 700명의 용병, 그게 전부였습니다.

▲ 카슴파샤 인근 수상 레스토랑에서 찍은 골든혼 풍경. 이 만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봉쇄 사슬이란 장애물을 선박의 육상 이동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돌파한 술탄의 해군과 비잔틴의 다국적 해군이 1453년 4월 28일, 드라마틱한 해상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콘스탄티노플 도성 시민들은 맞은편 언덕에서 전쟁에 패한 자국의 병사들이 공개 처형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보았으리라. 그날의 격전과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유람선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혼신의 힘을 쏟아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이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황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쩌면 1100년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매순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비장하게 맞섰습니다.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도 여러 차례의 항복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사는 대신 아름답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무두가 펼친 치열한 첩보전과 심리전 속에서 술탄은 현명하게도 비잔틴 쪽의 역정보, 허위 사실 등에 결코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이 지지부진할 거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육로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헝가리와는 동맹 조약을 맺어 예방 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에게도 압력을 넣어 그들이 비잔틴 제국을 돕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압력을 받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군의 선봉에 서서 도성을 공격했습니다. 술탄은 그렇게 힘의 외교로 이웃 나라들의 손발을 묶고, 스파이를 활용해 도성 안의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나와 함께 종군 기자가 되어 배를 타고 해상 전투, 그 격전의 현장으로 떠나 볼까요?

▲ 자, 이제 출항이다!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단단히 끼고 썼다. 이 선글라스를 통해 보면 마술처럼 1453년 당시의 해상 전투가 눈앞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배가 바다를 종횡 무진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하늘도 바다 빛깔이었지요. 그러나 육지에서 볼 때의 바다와 배 위에서의 바다는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훨씬 더 광활하게 다가왔습니다.

  3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고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흘러갑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바다의 윗물과 아랫물이 교차해 흐릅니다. 윗물은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아랫물은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그렇게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생성 이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빙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원래는 호수 상태였던 흑해의 얼음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표면을 침식시켜 생긴 해협이란 의견,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간에 급격한 지각 변동으로 깊은 틈이 벌어지며 생긴 해협이란 견해다.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기면 찢긴 부분은 들쑥날쑥하지만 맞대면 원래 모습이 되듯이, 해협 역시 들쑥날쑥 분리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보스포루스 물을 모두 빼낸 다음 양쪽 해안을 맞대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별할 때 반으로 쪼개어 둘이 하나씩 나눠 가졌던 연인들의 거울처럼….

  염도 높은 지중해 물(아랫물)과 염도 낮은 흑해 물(윗물)이 몸을 뒤섞으며 남북으로 서로 엇갈려 흐르기 때문일까요? 보스포루스는 유속이 매우 빠르고 물살이 거세어서 뱃길이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해풍도 모자를 빼앗아 갈 듯 세차게 불어 턱 끈을 단단히 조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급커브 길이 많고 안개도 짙게 끼어 이 지역에선 *해상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도 그런 사고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조선끼리 충돌해 폭발하면서 주위의 석유 저장고까지 폭발시켜 보스포루스 전체가 불타는 느낌이었던 일, 모터보트끼리 부딪쳐 승객 열세 명이 어두운 바다 속으로 사라진 일,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던 화물선이 보스포루스 해안에서 10미터쯤 육지로 올라가 단숨에 바닷가 목조 저택 두 채를 무너뜨리고는 세 명을 즉사시킨 뒤 3층 거실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온 일 등등.


▲ 크루즈 선장은 일반 관광객들의 유람 코스와는 사뭇 다른 내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고생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해상 전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그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더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 크루즈 선들의 출입 금지 구역까지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항해술이 노련한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고 물살이 뱃전으로 쳐들어올 때는 바닷가 출신인 나도 조금은 불안했다. 지금도 고마운 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선장이 해류와 해풍 등 주로 1453년 4월과 5월에 치러졌던 해상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댄 나에게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상세한 답변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해전 당시 술탄의 함대에 합류했더라면 혁혁한 공을 세웠을 것 같은 선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상 사고는 전쟁과 비교하면 견줄 바가 못 됩니다. 1453년에는 이 일대 바다가 온통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 해군과 전함은 모두 해양 도시 국가인 베니스의 차지였습니다. 베니스는 자국의 이익이 걸린  이 싸움에서 비잔틴 제국을 돕기 위해 자금 및 식량 지원과 함께 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 있던 베니스 선박들도 전함으로 개조되어 전력에 힘을 보탰습니다. 오스만 군의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혼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던 선박 수는 모두 26척이었습니다. 골든혼 해역, 특히 방재 구역의 지휘권은 제노아 공병 출신 바르톨로메오 솔리고가 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페라 지역을 관리하는 제노아 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에게 골든혼의 지휘권을 맡긴 것 같습니다.

▲ 베니스의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과 기술자들. 제노아와 함께 오리엔트 무역을 양분하고 있던 당시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해 군사용 함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냈으므로 조선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베니스 선장인 알비소 디에도 역시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해 황제를 기쁘게 했습니다. 해군의 전투력과 항해술, 실전 경험만큼은 비잔틴이 오스만보다 우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위해 싸운 베니스 선장 출신 해군 제독. 4월 20일 해전 당시 야음을 틈타 골든혼의 쇠사슬을 살며시 풀고 요란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3척의 베니스 갤리선을 끌고 나와 오스만 군을 혼란스럽게 한 뒤 아군의 배들을 안전하게 골든혼 쪽으로 인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4월 28일 기습 공격전에선 총지휘를 맡아 베니스 갤리선 2척을 몰고 골든혼 안쪽으로 쳐들어갔지만 사전 기밀 누설로 실패, 근근이 목숨만 구해서 돌아왔다.


  때문에 술탄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퍼부어 해군력의 약세를 만회하려고 전함을 대폭 보강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발토글루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함대 1453년 3월 말경 마르마라 바다에 집결시켰습니다. 선박 수로는 비잔틴 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초 십자군이 그랬듯이 함대를 골든혼 안으로 들여보내 그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강한 봉쇄용 철제 사슬이었습니다. 이 쇠사슬은 그 전부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3단 갤리선, 2단 갤리선, 노 딸린 갤리선, 푸스테(기동력이 뛰어난 가볍고 긴 배), 파란다리아(운송용 바지선), 쌍돛배, 외돛배, 소형 연락선 등으로 구성. 선원과 노잡이는 용병이 대다수였지만 죄수와 노예들도 섞여 있었다. 해군의 전투력 보강을 위해 술탄은 1452년 겨울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적의 전함과 병참 기술도 필요하다면 즉각 도입했다. 함대의 총 규모는 140척부터 480척까지 문헌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다.



▲ 15세기와 16세기 무렵 지중해를 항해하던 군사용 선박.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에 커다란 삼각돛을 달아 속도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났다. 베니스는 전투용인 경(輕)갤리선과 수송용인 중(重)갤리선을 건조, 최강의 해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중해 각국에선 죄수를 강제 동원해 전투용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는 일이 오래도록 성행했다.

  1453년 4월 12일, 발토글루는 증원군인 흑해 함대가 도착하자마자 큰 배들을 쇠사슬이 막아선 골든혼 입구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대포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불 붙은 나뭇조각들이 비잔틴 배를 향해 날아가는 가운데 오스만 군 일부는 닻줄을 끊고 쇠갈고리와 사다리를 붙잡은 채 배에 기어오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각도가 엇나간 포탄도 비잔틴 군의 키 큰 갤리선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해군 제독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大公)의 증원 함대까지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군은 결집된 조직력으로 높이가 낮은 오스만 군의 배 안으로 창과 화살과 투석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발토글루는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종교 통합에 있어서는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비잔틴 제국의 종교 지도자. 하지만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 쪽 성곽 방어의 총책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도성 함락 이후 술탄이 중용하려 했지만 처자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이 패배에 모욕감을 느낀 술탄은 며칠 뒤 탄도가 높아진 개량 대포를 갈라타 곶 바로 건너편에 배치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첫 포탄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포탄이 갤리선에 명중해 배를 침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비잔틴 군의 배들은 페라 성벽을 보호막 삼아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오스만 군의 집요한 해상 공격은 비잔틴 군의 육상 방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육지 성벽에 투입됐던 수비군을 골든혼 방어를 위한 지원군으로 분산 배치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453년 4월 20일 아침, 교황이 무기와 식량을 가득 실어 보낸  제노아 갤리선들과 옥수수를 선적한 비잔틴 대형 수송선이 남풍을 타고 마르마라 해역으로 재빨리 접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술탄은 해군 제독 발토글루에게 배들을 나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임무를 완수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도 덧붙였습니다. 발토글루는 곧바로 대함대를 이끌고 몇 척 안 되는 만만한(?) 먹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해풍이 드센 거친 바다에서 단련된 비잔틴 군의 함대를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술탄의 해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4척에 불과한 기독교 군 함대에게 100척이 넘는 오스만 해군이 참패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요?

▲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그런 캡션과 함께 6편 맨 마지막에 올렸던 사진이다. 짐작했겠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격상 멀리서 명령만 내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술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함대가 고작 4척뿐인 적의 배를 앞에 두고 고전을 면치 못하자 속이 탄 술탄은 싸움에 가담이라도 할 것처럼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말의 다리가 허용하는 깊이까지 직접 말을 몰고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해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날의 바다는 보스포루스 해류와는 정반대로 역풍이 몰아쳐서 물살이 무척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을 조종하느라 애를 먹은 반면 비잔틴 해군의 배는 선체가 높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집중 공격을 하기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틴 배들은 오스만 배들을 줄곧 따돌리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아래 지점을 막 돌아 골든혼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배의 돛들이 힘을 잃었습니다. 물살의 한 지류가 남쪽의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급류하다가 여기서 만나 북쪽의 갈라타 해안 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입니다. 그런 만큼 물살의 끌어당기는 힘이 남풍 뒤엔 특별히 더 강해져 비잔틴 배들은 그만 거기에서 거미줄에 걸린 곤충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발토글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선박들로 비잔틴 배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서 쏘는 경(輕)대포로는 앙각(仰角-올려다본 각도)을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발토글루는 자신이 탄 3단 노 갤리선의 앞머리로 비잔틴 수송선의 선미루(船尾樓-배의 고물에 만들어 놓은 선루)를 들이받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 배들로 쳐들어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얼핏 비잔틴 배들이 수많은 오스만 배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상황은 딴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제노아의 해군 병사들이 물통으로는 불을 끄면서 도끼를 휘둘러 배에 올라오려는 적군의 손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습니다. 비장의 병기인 ‘그리스의 화염’(4편 참고) 또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오스만 군은 노 때문에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배들끼리 노가 서로 뒤엉키는가 하면 공격을 받아 부러져 나가는 노도 많았습니다.
  전투는 비잔틴 수송선을 둘러싸고 가장 불꽃이 튀었습니다. 3척의 제노아 갤리선은 수송선이 곤경에 빠지자 일제히 힘을 합해 수송선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마치 네 개의 웅장한 요새가 탑을 치켜올리고 오스만 함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모양새였습니다.
  오스만 배들은 선해전술(船海戰術)이라도 쓰듯이 막대한 타격을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해풍은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해가 지면서 돌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세찬 북풍이 휘몰아치자 비잔틴 배들은 돛을 한껏 팽창시키고는 오스만 배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골든혼 쪽으로 질주했습니다. 어둠도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피아조차 식별 못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비잔틴 배들은 아군의 엄호 아래 잠깐 열린 쇠사슬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해전은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비잔틴 군은  ‘적군은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낸 반면 우리는 며칠 뒤에 죽은 두세 명의 부상병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상당히 과장된 통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처절한 전투로 인해 그 일대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원군의 배들이 무사히 도착해 합류함으로써 비잔틴 군은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까지 늘리게 되었습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도 다시 지펴졌습니다.

▲ 해상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기본 개념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린 걸까? 아니면 바다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상태? 그래도 활과 화살, 창과 칼, 소총과 대포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전에서의 거듭된 패배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술탄은  *발토글루를 비겁자며 배신자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장 목을 베려 했지만 부하들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만은 살려 두고, 자신의 측근 함자 베이를 새로운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익히 아시다시피 배들을 육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6편 참고)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발토글루는 오스만의 해군 제독이 되어 기독교 군과 싸웠다. 아군의 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눈까지 심하게 다쳐가며 술탄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패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간신히 참수형을 면했으나 직책은 물론 사유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곤장까지 맞는 형벌을 받았다. 술탄에게 버림받은 뒤로는 무명인이 되어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지에 골든혼을 장악당할 위기에 처한 비잔틴 황제는 6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중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기습 작전 계획을 짭니다. 또 한 차례의 대규모 해상 전투가 이번에는 골든혼을 무대로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볼까요?

  최초의 예정일(디데이)보다 4일 늦은 4월 28일,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쯤 트레비사노가 직접 지휘를 맡은 베니스 갤리선 2척의 호위 아래 단단히 무장한 비잔틴 군의 대형 수송선 2척(한 척은 베니스 배, 다른 한 척은 제노아 배)이 페라 성벽의 보호 구역을 살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갤리선 후미로는 트레비존드에서 온 자코모 코코 선장이 이끄는 3척의 푸스테와 가연성 물질을 실은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적들의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순간이 다가왔다면서 행동 개시를 하려는 순간, 아뿔싸, 해안가에 묵묵히 있던 오스만의 대포가 잠든 바다를 깨우는 굉음과 함께 불을 뿜으면서 선제 공격을 해왔습니다. 동참하기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연기되는 사이에 기밀이 새나가 오히려 오스만의 역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페라의 탑에서 비치는 불빛을 조명탄 삼아 오스만의 대포들은 목표물을 조준해 줄기차게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돌격 대장 역할을 맡았던 코코 선장은 용맹무쌍하게 앞장서 싸우다가 포탄을 맞고 침몰한 푸스테와 장렬하게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트레비사노도 갤리선을 버리고 선원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해안까지 헤엄쳐 나온 비잔틴 병사들은 도성 시민들에게 잘 보일 만한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육로를 통한 선박의 골든혼 진입에 이은 이 해전의 승리로 그는 더욱 확고한 해상 통제와 더불어 성벽 돌파를 위한 강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원근법과 음영을 무시하고 그린 이슬람 세밀화. 화가가 달라도 화풍이 같아 누구 작품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쌍둥이 형제들처럼 닮은꼴이다. 범선이 육지로 달리는가 하면, 백마를 탄 술탄은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1페이지 그림책’을 해독이 까다로운 암호를 풀 듯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자유자재로 발동한다.

  전세는 점점 비잔틴 제국에 불리해져 갔습니다. 1453년 5월 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다리다 지쳐 베니스 함대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면서 쌍돛 범선 한 척을 오스만 해군 몰래 파견했습니다. 투르크군으로 위장한 12명의 자원병이 오스만 깃발을 꽂은 그 배를 타고 성공적으로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를 빠져 나와 북풍을 받으며 에게해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니스 함대는 아직 콘스탄티노플로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서 콘스탄티노플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탓입니다.
  에게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베니스 함대를 찾지 못하고 그들이 곧 나타날 조짐도 발견 못한 쌍돛 범선 선장은 선원들에게 어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자체 토론 끝에 그들은 만장일치로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죽든 살든 황제에게로 돌아가 탐색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신하된 자들의 도리요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떠난 지 20일 만인 5월 23일, 이 무명의 용사들은 이미 오스만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을는지도 모를 콘스탄티노플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서 위험을 무릅쓴 채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도성 안에서 황제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특수 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쌍돛 범선이 절망적인 소식만을 가득 싣고 귀항하자 이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천년 성벽과 성모 마리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 마르마라 해는 남쪽 지중해와 북쪽 흑해 사이의 내해(內海), 바다 안에 있는 바다(Sea in Sea)이다. 연안에는 아홉 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왕자 섬’이라 불린다. 여러 종류의 배들이 흑해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폭이 좁고 안개가 자주 끼어 선박끼리 충돌하는 일이 많아 이를 막으려고 시간을 정해 교대로 일방통행시키기 때문이다. 낮에는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로 가는 배들이, 밤에는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로 가는 배들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해 항해를 한다.

  *비잔틴 시대에 왕족이나 고관, 사제들의 유배지로 쓰이던 섬들.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원들도 이곳에 많이 지어졌다. 1453년 당시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앞두고 발토글루를 보내 이 섬들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섬이었던 프린키포만의 수비대원 30명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혀 도륙되었다. 섬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려 갔다. 19세기 후반부터 이 섬들은  휴양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아홉 개의 섬 중 네 개는 무인도다. 섬 안에서는 차량 운행이 금지돼 있어 천연의 아름다움과 정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내가 ‘종군 기자’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넘치는 의욕에서 나온 말입니다. 550여 년 전 해상 전투의 현장을 생중계하듯이 전달할 능력이 내겐 없습니다. 다만 나는 책에서 읽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되새기면서 해풍의 방향과 전투 지점, 물살의 흐름과 세기 등을 가늠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미진한 부분은 눈 밝은 독자들이 사진들을 보면서 헤아려 주리라고 믿습니다.
  (해상 전투 편에서 언급한 함대의 규모와 전쟁의 양상 및 결과 등은 영국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과 작가 로저 크롤리, 터키 역사학 교수 페리둔 에메젠과 마흐뭇 바자르의 저서 및 견해를 종합한 다음 내 탐사 경험을 덧붙여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혀 둡니다.)

▲ 돌마바흐체 황궁. 19세기 중엽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을 따라 길게 지은 바닷가 궁전으로 건물 길이가 600미터에 달한다. 발토글루가 지휘하는 해군 본부가 바로 이 위치(당시 지명은 *디플로키온)에 있었다.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이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그가 서거한 시각인 오전 9시 5분에 바늘이 멈춰 서 있다. 요즘 내 시계도 돌마바흐체의 시계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 바늘이 머물러 있다.

  *바다가 조용하고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Diplokion, 터키어로는 Çifte Sütun, 영어로는 Double Columns이다. 이는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이중 기둥’이란 뜻을 담고 있다. 1422년에 제작된 부온델몬테의 콘스탄티노플 설계도에는 지금의 탁심 광장과 마츠카 사이의 계곡을 흐르고 있던 하천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닷물을 정밀 분석해 본다면 혹시 아직도 미량이나마 전쟁의 잔해인 피의 성분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자 황혼 물든 저녁 바다가 갑자기 핏빛으로 보였습니다.


▲ 해안 성벽 바로 앞에 있는 마르마라 바다로 물놀이를 즐기러 나온 청소년들. 지금 이들은 방학 기간이다. 오스만과 비잔틴 전사의 후예들답게 늠름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인다. 수심이 꽤 깊고 가까이로 선박들이 지나가는 바다에서 튜브나 구명 조끼도 없이 헤엄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또 어느 순간 나는 저 깊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2만 마리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1991년 11월 15일에 일어났던 기막힌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날 루마니아에서 구입한 2만 마리가 넘는 양을 싣고 보스포루스를 지나던 레바논 선박이 러시아로 밀을 싣고 가던 필리핀 화물선과 충돌해 양들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몇 마리 빼고는 모두 파티 대교(보스포루스 제2대교) 밑 어두운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한동안은 또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자동차들이 유행처럼 파티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더군요.


▲ 유럽(왼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왕복 6차선 도로가 나 있다. 총길이는 1560미터, 양 교각 사이 거리는 1074미터, 다리의 폭은 33.4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이다. 교각 오른쪽으로 오르타쾨이 모스크(빨간 동그라미 안)가 보인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이다.

  이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바다에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숱한 사건과 비극적인 사연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밑바닥에는 온갖 것들이 해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뼈, 창검과 소총, 대포와 대포알, 녹슨 훈장과 계급장, 부서진 선박과 자동차의 쇳조각들 등등….

▲ 여기는 골든혼 입구. 갈라타타워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다. 나는 골든혼 저 끝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선장은 항해 금지 구역이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배가 선장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놀이동산 바이킹과는 전혀 다른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다시 보스포루스로 향해야 했다. 보스포루스에서는 배를 세워 놓으면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남쪽으로 떠내려 가지만, 골든혼 일대는 다르다. 어떤 해역에서는 바람이 정지하면 배가 오도가도 못한 채 발이 묶인다고 한다. 런치만의 책에 나오는, 조류가 한데 얽혀 배들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해상 전투 현장을 탐사하고 돌아와 관련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선명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다!
전쟁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오스만에 첩보를 제공하는 스파이도 적지 않았다. 물론 비잔틴을 위해 싸운 제노아인도 많았다. 700명의 용병을 거느리고 맹활약한 제노아의 명문가 출신 주스티니아니, 골든혼 봉쇄 사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제노아인 공병 솔리고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바닷속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을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을 올렸습니다. 저녁 노을이 바다로 스며들어 번지고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바다가 내 눈에는 위령제를 위해 불을 밝힌 수많은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마침 바람도 강하게 불면서 바다 표면과 맞부딪치며 장송곡 같은 마찰음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 바다위로 안개가 마치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종군 기자들의 수첩 맨 마지막 줄에는 아마도 애도사 혹은 추도사가 적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에 표시돼 있는 파란 색깔 바다 부분은 거의 다 크루즈 선을 타고 탐사했다고 보면 된다. 단 지금은 흙이나 시멘트로 메워진 해자 부분은 빼고 말이다.

P.S.
  요즘 국회는 연중 가장 바쁘게 돌아갑니다. 국정감사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은 상임위가 없는 국회의장으로서 이 기간을 이용해 ‘희망 탐방’을 떠났던 나도 올해는 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국감을 치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는 해외 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9편은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미리 써 둔 다음 남미 국감 도중에 이메일을 통해 마지막 교정을 보고, 10월 13일, 블로그에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육지 성벽과 해안 성벽, 루멜리 히사르와 해상 전투 등 직접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매듭짓게 됩니다.

  10편부터는 약 7회 분량으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해 몇몇 모스크와 박물관, 우르반의 대포, 술탄과 황제의 약전(略傳) 및 리더십 비교 등을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그 동안 내 이스탄티노플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아래 한 장의 사진으로 잠깐의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마르마라 바다 위에서 바라본 아야소피아(빨간 동그라미 안)와 그 일대. 10편과 11편, 12편에서는 교회에서 모스크로, 다시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아야 소피아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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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펄프픽션 2010.10.13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편 대서사시를 읽고 난 느낌입니다.
    블로그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길면서도 알찬 포스팅인 것 같습니다. 강추!!

  2. 쏘시오 2010.10.13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대 100의 전투에서 4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숫자지만 100을 너끈히 이겨습니다. 전투력은 숫자에 비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골든 혼 해전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선을 물리친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승리를 결정하는 요인은 단순한 양이 아닌가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군도 현대화, 정예화에 박차를 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북의 100만 대군에 대칭돼 60만 대군이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군부 엘리트, 즉 직업군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군, 이제 정말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입니다. 값싼 인력(징병제)에 취해 인적자원을 낭비하지 말고 언젠가 모병제가 될 때를 대비해 하나씩 하나씩 정예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3. 엠파이어 2010.10.14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신을 읽고 나서 무릎을 쳤습니다.
    역시 이런 열정과 집착이 있어야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4. 보헤미안 2010.10.14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로이보다 더 멋진 역사적 대 서사시!! 이스탄티노플
    러브라인 살짝 깔면 불멸의 영화 한편 탄생하겠군요.
    공격하는자와 방어하는자의 입장이라 그런지 어쩌면 술탄과 콘스탄티누스의 성향또한 이렇게 반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영웅은 어떤 배우자를 두고 있었을지도 궁금하구요.
    건장한 짐승남들로 예니체리 부대원들을 캐스팅하고, (음 근데4편의 예니체리 자료를 보면 긴팔에 긴바지라 근육구경은 못할듯 하네요. 아쉽~~)
    발토글루와 함자베이, 자가노스 파샤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라 박진감 넘치는 영상들이 머릿속에 자동상영됩니다.

  5. 배가본드 2010.10.15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드라마틱한 소재가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할리우드 감독들도 편협된 서양 사학자들의 시각을 못 벗어난 걸까요?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굴욕과 패배의 역사라서?

  6. 오노 야스마로 2010.10.15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서기>를 쓸 때가 생각나는군요...나는 백제의 후손이지만, 일본 땅에 터를 잡은 사람. 이왕지사,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일본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주체성을 위해, 난 <일본서기>를 써야했지요...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터키의 역사는 흥미진진 그 자체로군요. 이번 연재물로 한국과 터키의 역사가 오작교 위로 오가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사요나라 아나따~~

  7. 레퀴엠 2010.10.16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만 마리 양들이 빠져 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그 전에 죽은 영혼들까지 호명하며 위령제를 지내 주듯
    글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읽어내기에도 만만찮은 글을
    멋진 사진과 함께 탄탄하게 써 올린 분의 열정이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8. 마린보이 2010.10.22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도시가 되었다.
    누가 그 향기와 빛깔에 걸맞은 이름을 불러주랴.
    글 쓰기란 역시 의미 찾기이다.

  9. 롱롱타임 2010.10.24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도 수월치 않은 긴 글이지만 쓴 사람 성의를 헤아려 끝까지 읽다.
    결론은 시간이 아껍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의 노력과 마음씀이 여러 사람을 즐겁게, 이롭게 한다.

  10. 거석이 2010.10.26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따 뭘 이러코롬 길게 쓴다요
    좀 짤뚱짤뚱 단편으로 해주셔도 괜찮을터인디
    지처럼 가방끈 짧은넘은 끝꺼정 읽다가 앞에 내용 다까묵습니더
    ㅎㅎㅎ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전쟁의 전초 기지 루멜리 히사르

  그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언어나 문자를 통한 공식 선언만 생략되었을 뿐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는지도 모릅니다.

▲ 루멜리 히사르 입구에서. 증명사진처럼 돼 버렸지만 나로선 두 번째 방문이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니 참 편하고 좋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 양 옆에 매달린 갓등도 제법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에 수문장이 지켜 서 있었겠지?

  *145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고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곳에 모으며 뭔가를 준비하던 오스만의 군사들이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요새를 새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유럽의 성’이란 뜻)가 그 주인공입니다.

  *강성했던 비잔틴 제국은 점점 쇠락하여 15세기 무렵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일부에만 통치력이 미칠 정도로 왜소해져 있었다. 100만을 헤아리던 도성의 인구도 5만 명이 채 안 되게 줄어들어 있었다. 반면 오스만 투르크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한 뒤 비잔틴의 남은 영토를 잠식해 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육지 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 바다 위 유람선에서 바라본 루멜리 히사르의 전경. 장엄하고도 웅장하다. 성벽 길이는 250여 미터, 높이는 15~33미터, 두께는 3~6.5미터에 이른다. 3개의 큰 성탑과 9개의 작은 탑을 공격과 수비에 모두 유리한 구조로 연결해 놓았다. 술탄 메메드 2세가 직접 설계 및 감독을 맡아 5000명에 이르는 인부와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지었다고 한다. 술탄은 하릴 파샤, 자가노스 파샤, 사루자 파샤 등 세 명의 중신이 분담해 책임지고 공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경쟁을 유발해 공사의 완성도와 진척 속도를 높였다. 성탑의 이름도 축성한 신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요즘으로 치면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기능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제노아와 베니스 상인들을 비롯해 아라비아·아르메니아·유대인 등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해상 무역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투르크의 눈치를 살펴가며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알라신도 부수지 못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수호신처럼 의지한 채 말입니다. 다행히 오스만의 전임 술탄 무라드 2세는 통치 기간 중 1422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포위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이후 경제적 이득만 취할 뿐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는 않았습니다.

▲ 루멜리 히사르의 늠름한 위용.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에는 아나돌루 히사르가 자리해 있다. 왼쪽으로 해협을 길게 가로지른 다리는 보스포루스 제2대교인 *파티 대교. 정복자(파티) 술탄 메메드 2세를 기념해 이름을 붙였다. 옛날 같았으면 바다와 가까운 주탑 위에서 대포알이 저 흰 배를 겨누고 날아갔으리라.

  *원래 이름은 파티 술탄 메메드 대교로 1988년 여름에 개통되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 양단에 세워진 교각 거리는 1090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 대교의 폭은 39미터로 왕복 8차선 도로이다.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차량 통행료가 무료이나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들어올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무라드 2세의 급사로 1451년, 그의 열아홉 살난 아들 메메드 2세가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루멜리 히사르는 말하자면 그 정복을 위한 상징 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이 이 도시는 ‘모든 세계 정복의 열쇠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심장부’인 보스포루스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메메드 2세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의 술탄 재위 기간을 갖고 있다. 1444~1446년, 1451~1481년. 전임 술탄인 무라드 2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1444년, 고작 열두 살인 아들 메메드 2세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하고 은퇴했다. 하지만 내각과 군대가 거만하고 고집 센 소년 지도자에게 불만이 많은 데다가 유럽 국경 지대의 분란이 끊이지 않아 여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그리고는 5년 뒤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메메드 2세는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완공일이 8월 31일이라니 겨우 넉 달 반 만에 그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구축한 셈입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은 루멜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 두 개의 거센 손아귀에 의해 목을 움켜잡힌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마주보고 있는 두 성에 군대와 대포를 배치함으로써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보급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강력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입니다.

  * 보스포루스는 터키어로 보그하즈. 동음이의어로서 ‘목구멍’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당시 투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보그하즈 케센’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날’ 또는 ‘목구멍의 칼날’이란 살벌한 뜻이다.

  ** Anadolu Hisar, ‘아시아의 성’이란 뜻으로 메메드 2세의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가 139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지은 요새. 바예지드는 당시만 해도 비잔틴 황제의 승인 아래 이 성을 지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루멜리 히사르를 신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의의 뜻으로 도성 안에 있던 600명가량의 투르크 인들을 붙잡아 감금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모두 석방했다.

▲ 원근법과 건물 구도를 무시하고 그린 두 요새 그림. 위쪽 성채가 아나돌루 히사르, 아래쪽 성채는 루멜리 히사르이다. 각각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650여 미터) 동쪽과 서쪽 연안에 마주보고 서 있다.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루멜리 히사르의 규모가 훨씬 더 크고 높다.

▲ 루멜리 히사르에서 찍은 아나돌루 히사르의 원경(遠景). 아시아와 유럽이 이 좁은 해협(650미터~3.6킬로미터)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다. 주탑 위로 빨간색 터키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두 성채의 크기가 그것을 지은 두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의 서로 다른 야망의 크기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 앞 바닷가에 네모와 세모의 조합으로 건축된 집들이 마치 레고로 지은 듯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으로 하여금 요새 앞에 멈추어 검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배는 침몰시킨다면서 위협적인 대포 3문을 바다와 가장 가깝게 지은 탑에 배치시켰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나는 지금 루멜리 히사르의 스케치풍 그림과 요새의 구조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본문과 캡션에 이미 설명해 놓은 내용이지만 영문 표지판 내용이 궁금하다면 비록 내 몸으로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영어 공부 삼아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11월 초 흑해에서 출항한 두 척의 베니스 선박이 정지 명령을 거부했다가 대포의 공격을 받았으나 용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2주 후 똑같은 시도를 하던 세 번째 선박은 포탄에 맞아 침몰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참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삽시간에 공포의 바닷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점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주탑의 내부. 나선형 회전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지하까지 합해 6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왼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배치되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탑 안으로 비쳐든 햇살이 훌륭한 조명기사 역할을 해주어 멋진 예술 사진이 만들어졌다.

  우리 일행은 그 살벌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주변 풍경, 그리고 요새는 난생 처음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저 우뚝 솟은 루멜리 히사르 성 위에서 대포알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성 안쪽에 1452년 당시와 그 이후 실전에 사용되었던 오스만의 대포들을 진열해 놓았다.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공격했던 큰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거포는 성벽 위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발포하면 그 반동으로 성벽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 섹시한 대포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영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묘한 모양의 대포알이 돌기둥 위에 놓여 있다. 가운데에 홈을 파 놓은 까닭은 아마도 밧줄에 묶어 성벽 위로 끌어올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쏘던 대포 발사대 구멍. 지금은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나뭇잎 저편은 바다이다. 내부 벽이 화염의 흔적인 듯 그을음으로 까맣게 덮여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여기도 안쪽 구멍이 넓고 바깥쪽 구멍은 좁은 형태이다. 그러니까 방어와 공격 모두를 유리하게 만든 구조이다.

  실제로 우리는 루멜리 히사르의 가장 높은 성탑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대포와 화살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쏘았는지 실감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난간도 없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험한 보람이 있었지요. 전망이 탁 트인 보스포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 밑은 비록 아찔했지만 술탄이 왜 여기에 요새를 구축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그 무시무시했던 루멜리 히사르가 박물관 겸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5편에서 소개한 갈라타 타워도 오랜 기간 군사용 감시탑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 보스포루스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거세다. 바다 표면에 울퉁불퉁 주름이 잡혀 있다. 대포알이 배를 스치기만 해도 전복될 것 같은 느낌이다. 큰 대포알이라면 배 근처에만 떨어져도 선박이 요동을 쳤을 것 같다. 중견 작가 한승원씨의 「그 바다, 끓며 넘치며」라는 해양 소설 제목이 문득 생각난다. 저 멀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평화롭던 학교 교실은 포로수용소가 되고 운동장은 적들의 제식 훈련장이 되고 극장은 야전 병원이 되는 경우는 우리도 이미 60년 전에 겪지 않았습니까.

▲ 스탠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루멜리 히사르는 요즘 종종 야외 공연장 및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한여름 밤에는 터키의 톱스타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축제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의 전초 기지였으며 그 뒤 포로수용소 역할도 했던 이곳이 이제는 평화의 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역사는,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의 전쟁에 관한 격언 중 음미할 만한 몇 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와도 맥락이 닿는 금언들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로마 격언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아돌프 히틀러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맨토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단어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윈스턴 처칠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이승만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다.”-칼 폰 클라우제비츠


▲ 루멜리 히사르의 야경.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동화의 나라 같은 느낌이다. 왠지 오늘 밤 저 성 안에서는 환상적인 공연과 함께 연인들의 로맨스가 무르익고 있을 것만 같다. 아래사진 왼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시시각각으로 빛깔을 달리 하며 ‘이스탄티노플’의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많은 격언들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위력, 자주국방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주변 국가, 이해 당사국들과의 신뢰 및 우호 협력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함을 이어지는 다음 편(9편)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양이 보스포루스를 곱게 물들였다. 이스탄티노플의 부유층이 자가용처럼 이용하는 요트로 보이는 이 배는 해 저무는 바다를 미끄러져 보금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바다, 1452년과 1453년, 그땐 결코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9편에서는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그 당시 격렬했던 해상 전투의 현장으로 배를 몰고 가 볼 생각이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는 15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대 지도를 쓸까 하다가 비록 축적과 원근감은 애매하지만 바다 모양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어 등장시켜 보았다. 왼쪽 육지 성벽 옆 해자 모양도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아래는 마르마라 바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사이를 흐르는 건 골든혼이다. 오른쪽 위의 해협이 바로 보스포루스이다. 보스포루스 왼쪽 연안은 유럽, 오른쪽 연안은 아시아다. 따라서 루멜리 히사르(왼쪽 동그라미)와 아나돌루 히사르(오른쪽 동그라미)는 대략 저 위치쯤에 있었을 것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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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와바다 2010.10.06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뷰티풀!
    이스탄티노플,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반할 수밖에 없는 도시입니다.

  2. 조나단 2010.10.06 0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망명하고픈 도시!

  3. 술취한 술탄 2010.10.06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봉박두 기다리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로 이야기가 흘러가는군요.
    본문에서 말했듯이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승리에 취한 오스만군의 모습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다음편 부터는 본격적인 해상전투가 그려질 예정이라니 더욱더 이스탄티노플에 빠져들것만 같습니다.

  4. BlogIcon 너서미 2010.10.06 1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길고 잘 기획된 시리즈물을 블로그로 볼 수 있다는 건
    독자들에겐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것들은 책 외에는 볼 수 없는데 말이죠.
    더구나 블로그에서 깊은 조사에 의한 컨텐츠가 드문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5. BlogIcon 술에물탄 2010.10.06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벌써 8편이 올라왔군요.
    야경도 참 아름답고,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짓는 장소라는 점이 신비(?)스럽네요.
    그리고 그곳의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성벽들..
    참 매력적이네요.

    잘보고 갑니다~

  6. 쏘시오 2010.10.06 1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에게 목젖같은 저 콘스탄티노플성은 '목엣 가시'나 다름없을 것이다. 반드시 빼놓아야 음식을 마음껏 삼킬 수 있는...
    한 때 오리엔트를 지배하던 비잔틴의 말년이 너무나 초라하다. 천년제국이 저렇게
    옹색하게 줄어들 때가지 역대 황제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나...
    비잔틴 최후의 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7. 히데요시 2010.10.06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순신은 적장이나,존경할만 하오. 후세 누군가는 <칼의 노래>라는 소설로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뭐니뭐니해도 이순신의 뛰어남은 그의 지혜(기획력)와 추진력일 것이오. 8편으로 이어지는 이스탄불 시리즈에서 상세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어서 좋소이다. but, 비유 또는 알레고리,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의 연결 또는 21세기 현재와의 구체적 연관성 등이 나타나있다면 가독성이 엄청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당시의 터키-임진왜란 당시 조선- 21세기 한국>의 멋들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외다. 잘 읽고가오."

  8. 두륜 2010.10.06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2년 술탄 메머드2세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단 4개월만에 지었다는 "루멜리 히사르 요새" 그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네요...
    치열했던 전쟁의 전초기지로써 아픈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동화같은 "이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자리잡아 우리에게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게 해 주니 참 아이러니 하네요...
    "치열한 전쟁속의 종군기자"라....^^
    9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9. 코렐리 엄 2010.10.06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 단 두차례의 방문에 이런 작품이 나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또 주말에 즉시 현장사진 장소대로 방문해 의장님 체취를 느껴 볼까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끊임없이 열정을 다해 생생한 역사재현 및 어디에도 없었던 지식전수해 주심에 감동입니다.
    참, 지적해 달라 하신부분,보스포로스 제2교는 왕복 8차선입니다. 제1교는 6차선이고요,또 석양의 보스포로스 사진에 등장한 어선은 세일용 34피트 요트로 보입니다.
    엄청난 감동으로 연일 펼쳐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지식과 경륜과 부드럽고 날카롭고 부담없는 필체에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터키에서 인사올립니다. 꾸벅.

    • 호야 2010.10.07 1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지 사정에 밝은 엄 전무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두 가지 오류, 곧바로 수정해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성원에 힘이 불끈 솟는군요.
      새치를 뽑듯이, 앞으로도 팩트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 주기 바랍니다.

  10. 대물 2010.10.07 0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섹시한 대포알? 그 사진과 캡션 읽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의장님은 역시 유머를 아시는 분입니다.

  11. 전자돌이 2010.10.07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균 일주일에 한번꼴로 올라오는 이스탄티노플 시리즈를 접하면서
    대학생때 교양 수업 듣던 기분이 나더라구요.
    한 열대여섯편 정도 쓰시면 정말 한학기 강의분량이네요 ㅋㅋ
    호야교수님 시험문제는 어떻게 내실 계획이신가요? ^^

    • 팽돌이 2010.10.09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국감으로 외통위 소속인 호야 교수님이 해외 공관 국정감사를 나가신 걸로 압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휴강?
      중간고사 대비해 열심히 복습이나 해야겠습니다.

    • 아나돌이 2010.10.09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긴급 입수! 이스탄티노플 중간고사 주관식 예상 문제!!!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루멜리 히사르 맞은편
      아시아 쪽 보스포루스 연안에 있던 요새 이름은?"
      제 아이디(아나돌이)에 힌트가 있습니다.

    • 사과나무 2010.10.14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먼저 답해도 되나요?ㅋㅋ
      정답은 '아나돌루 히사르'입니다!

  12. 거석이 2010.10.26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미 거시기 민망한 사진이 있구먼유
    워째 의장님 이미지랑 영..

    • 거시기 2010.10.27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시기란 무엇이냐.
      크게(巨) 보이는(示) 그릇(器)이란 뜻입니다.
      대물(大物)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런 점잖은 유머는 오히려
      블로그의 품격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바다 위를 걷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



  <구름 위의 산책>이란 영화가 있습니다만, 그대 혹시 바다 위를 걸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걸어 보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말입니다. 물론 특수 신발을 신었다거나, 갑자기 내 눈 앞에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로 바다 위를 활보했던 걸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바다 위의 산책’은 아니었습니다. ‘1453년 당시에는 바다였던 곳’을 답사했던 거지요. 부연하자면, 나는 지금은 대부분 매립돼 육지로 변해 버린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을 탐사했습니다. 몇 장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말입니다.


  총 길이 약 9킬로미터. 마르마라 연안을 끼고 완만한 오목렌즈 형으로 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안 성벽은 한 겹이었으며, 그 성벽을 관통하는 11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요새화된 항구를 비롯해 작은 선착장들이 있어 물자도 실어 나르고 세찬 북풍 때문에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선박들의 피난처가 돼 주었습니다.

  성벽 둘레로는 급류가 흘러 상륙용 주정(소형 배)을 성벽 끝까지 갖다 대기가 어려웠으며, 암초와 모래톱 또한 마르마라 성벽의 든든한 방어물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453년 전까지만 해도 1000년 이상 외세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성문이 열린 적이 없는 천혜의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도성 모습. 오른쪽으로 방어용 쇠사슬을 쳐 놓은 골든혼(금각만)이 흐르고, 그 옆에 제노바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갈라타 지역 일부가 보인다. 그림이 증명해 주듯이 당시에는 아래쪽 마르마라 바다가 성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파도가 성벽으로 밀려와 부딪치는가 하면, 성문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이 예니카프를 통해 마르마라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1453년 당시에는 도성의 상류 지역인 메소테이키온에서 격전이 치열했던 만큼 리쿠스 강물에도 핏물이 진하게 섞여 바다로 흘러 내렸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어순을 바꾸어 벽해상전(碧海桑田)이라 해야 할까요? 저 그림 속에서 꿈틀대던 마르마라 바다의 일부분은 흙으로 메워져 지금은 공원과 해안 도로로 변해 있습니다. 옛 성곽들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많이 허물어지고, 도로와 철길이 놓이면서 상당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설픈 복원 공사로 미관을 해친 부분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보십시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들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작가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들이지만 이번에도 올리지 못한 사진이 수백 컷입니다.
  한
컷의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 바다 위를 걸어 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라면….



▲ 골든혼 입구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배나 자동차를 우회전하면 해안 성벽이 나타난다. 오른쪽 언덕 위로 톱카프 궁전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만만치 않은 수심인데도 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안전 요원이나 ‘수영 금지’ 팻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해안 성벽으로 접어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투르굿 레이스(Turgut Reis, 1485~1565)의 동상.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왼손을 지구의에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상 오른쪽 건너편 페라 신도시 앞바다에는 하얀색 크루즈선이 떠 있다.  

*16세기 오스만의 유명한 해군 제독.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군인이 되었다. 지중해 말타 섬 원정을 총지휘했으며, 그리스도교 선박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로 유럽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1551년에는 말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조 섬의 주민 6000여 명을 모두 리비아에 노예로 팔아 버린 일도 있었다. 코르시카 섬과 마요르카 섬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투르굿 레이스에서 레이스(Reis)는 성이 아니라 ‘제독’이란 뜻을 지닌 옛 터키어이다. 아시아계 유목 민족이 그러하듯이 터키도 예전에는 성(姓)이 없었다. 특정 인물 이름에 직함을 붙여 부르는 건 터키인들의 오랜 전통. 걸출한 제독들에게는 ‘레이스’란 칭호가 붙었다. 같은 이유로 장군이나 사령관에게는 파샤(Pasha), 중견급 군인이나 지방 장관에게는 베이(Bey)란 호칭이 따라 붙는다.


 

▲ 투르굿 레이스의 동상 옆 망루 성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문자들. 테오필로스 황제(829~842년)가 이 성벽을 새로 지었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테오필로스는 9세기 무렵 아랍 함대들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을 보강했다. 이 망루 성벽 복원을 위해 역사학도(해안 성벽 전공) 니사가 관여하는 협회에서 유네스코에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 출입문인가, 경비용 혹은 감시용 문인가. 비잔틴 양식의 아치형 문이 아랫부분은 지하로 절반 이상 매몰된 채 시커먼 속을 내보이고 있다. 지표면의 융기로 땅이 솟아오른 데다가 매립까지 더해진 걸 감안하면 실제 높이는 만만치 않았으리라.


*부콜레온 황궁(Boukoleon Palace)으로 통하는 바다 쪽 수문의 원형 복원도.
   우리가 찍은 아래 관련 사진들과 비교해가며 보기 바란다.

*네아 바실리카 교회 옆, 히포드롬(원형 이륜마차 경기장) 바로 뒤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궁전. 아야 소피아와 매우 가까워 콘스탄틴 대제를 비롯한 비잔틴 황제들이 이곳에 머문 적이 많았다. 부콜레온(Boukoleon)이란 이름은 이 궁전을 지키고 있는 황소(Bull)와 사자(Lion)를 닮은 동물 조각상(붉은 사각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터키 정부가 그리스와의 우호 관계를 고려해 최근 일부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판에 고고학 박물관의 감독 아래 이 궁전과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연결되는 해안 쪽 문. 궁전을 수호하던 동물 조각상은 사라지고 물결이 넘실대던 바다는 매립으로 메워져 해안도로(케네디 대로)가 나고 해안선은 그만큼 멀어졌다. 배들이 다니던 바다를 지금은 자동차들이 달린다. 매끈했던 대리석 벽면에서는 거미줄처럼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쪽 문 내부. 카메라로 얼굴이 가려진 저 사나이는 누구인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이다. 이번 어드벤처에 기꺼이 동행해 프로 수준의 사진으로 맹활약했지만 “촬영 감독은 원래 스크린에 안 비치는 법”이라며 한사코 블로그에 등장하길 사양했다. 그런 그의 사진 찍는 모습을 내 디카에 담았다.


▲ 비잔틴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부콜레온 황궁 성벽의 맨 윗부분. 저 꼭대기에서도 무화과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두고 가지를 땅으로 향한 채 물구나무서서 자란다. 터키는 기후와 토양 모두 무화과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무화과나무(Fig-tree)를 인지르(Incir)라고 부른다. 하도 이 나무를 많이 보아서 나는 이 도시를   ‘인지르 시티(Incir City)’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주신() 바쿠스가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다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이스탄티노플은 문명과 문화 모두 다산성(多産性)인 도시이다.


◀ 아흐르카프(외양간 문) 주변. 오랜 옛날부터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 등대는 비잔틴 시대의 등대도, 오스만 시대의 등대도 아니다. 공화국 이후에 다시 지어진 현대식 등대이다. 달그림자마저 얼어붙었을 1453년 5월의 어느 날 밤을 등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서 마르마라 해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으로  *1군 사령부가 바라다 보인다.





*위스크다르 남쪽 마르마라 해 연안에 세워진 오스만 시대의 건물로 독일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크림전쟁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군 시설이라서 민간인 출입은 금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나이팅게일 기념관이 있다.


 

▲ 해안 성벽 안쪽. 성벽의 윗부분은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활을 쏘기 위해 만든 네모난 구멍은 안쪽이 넓은 반면 바깥쪽은 좁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유리하게 하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아치(Arch) 모양이지만 보다 전문적인 건축 용어로는 *니치(Niche)라고 일컫는다.

*장식을 목적으로 두꺼운 벽면을 파서 만든 움푹한 대(臺)로 보통 그 윗부분이 반(半)돔형이다. ‘벽감(壁龕)’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곳에 꽃병 등을 놓거나 아예 이 부분을 장식용 분수(噴水)로 만들기도 했다. 아치와 니치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벽이 없이 움푹 뚫려 있으면 아치, 움푹 들어가 있지만 벽으로 막혀 있으면 니치이다.



▲ 성벽의 높이를 짐작해 보자. 단 옛날에 비해 대지가 융기하고 해안이 매립됐음을 감안해야 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깊이까지 헤아린다면 결코 만만하게 볼 높이가 아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들이차고 남풍이 거세게 불고 암초까지 많았으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려는 세력들도 마르마라 해안 성벽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 내었다고 한다. 다만 강한 바닷바람(海風)에 실려온 염분으로 인해 육지 성벽이나 골든혼 쪽 성벽보다 보수 및 보강 공사를 더 자주 해야 했다.



▲ 어느 것이 먼저 무너질까? 1500년을 버텨온 성벽 틈새에 판잣집이 위태위태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즉석에서 그런 사진 캡션이 떠올랐다. 차틀라드카프 인근에는 이런 식의 건축물들과 성벽들이 흔했다. 그래서 일행 중 사진 애호가인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해도 못 들은 척 경쟁하다시피 셔터를 눌러댔다.


▲ 인간이 살고 있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허름하게 지어진 목조 가옥의 2층 처마 밑에서 빨래가 마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문득 멀리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그림을 바로 위 사진과 비교해 보라. 앞 성벽은 모양이며 구조가 위 사진 속의 성벽과 똑같다. 동일한 성벽이다. 그래픽으로 표현한 대리석 건물은 부콜레온 황궁 벽의 운형 복원도. 높이만 놓고 보더라도 그 위용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다.




▲ 이스탄티노플에선 피사체 모두가 예술 작품,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조각가, 어떤 화가가 이토록 아름답고 운치 있는 풍경을 빚어낼 수 있으랴. 오랜 세월, 비와 눈과 바람과 햇살이 합작해 빚은 천혜의 예술 작품 앞에선 오른쪽 인공으로 지은 건축물마저 불협화음이 아니라 차라리 조화롭게 느껴진다. 역설의 미학이랄까.


▲ 누가 저 고색창연한 성벽 위에 액자를 걸고 두 장의 현대식 건물 사진을 끼워 넣었을까?
눈이 잠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저 사진틀 모양 성벽들은 원래는 왼쪽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재질은 물론 대리석이다.(아래 그림 붉은 표시 부분 참고)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


▲ 성곽 끝자락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자세로 마치 1500년 전부터 거기 존재해온 것처럼 대리석 기둥을 받치고 집 한 채가 있다.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와 이 사진을 아치 기둥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보기 바란다.



▲ 황궁 터 앞은 옛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매립이 되고 그 자리에 도로와 공원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공원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폐선은 놀이터로 둔갑했다. 블루 모스크의 상징인 여섯 개의 첨탑(미너렛)이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구름 낀 하늘에 시를 적고 있다.



▲ 주말이나 휴일은 새(까마귀?)들의 잔칫날이다. 마르마라 해변 공원에서 새들이 행락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뒷설거지하고 있다. 비둘기도 아닌데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 터키 판 서낭당? 우리나라나 몽골․위구르 등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위에 매달린 실을 마르마라 해안 성벽 옆에서 보았다. 이 도시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통역사 이경숙씨에 따르면, 터키 시골에 가면 이따금 볼 수 있지만 이스탄불에서는 처음 본단다.
이경숙씨의 말, “의장님 따라 다니면서 모르던 것 새로 알고, 잘못 알고 있던 것 바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아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도시가 생긴 이래 남들이 안 다닌 곳들만 골라 다닌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여행자일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여태껏 쌓인 피로가 씻은 듯이 풀리면서 내딛는 발걸음에 다시 새 힘이 솟았다.


▲ 지도에게 길을 묻다. 거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니사가 준비해 온 1930년대 지도를 펼친 채 들여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해안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두 미녀의 눈길이 열심히 쫓고 있다. 나중에는 지도가 나달나달해졌다. 여백과 귀퉁이도 내가 써 놓은 메모로 가득 찼다.


▲ 옛 항구 자리를 찾아가던 길에 들른 카드르가 마을에서. 이 동네엔 오스만 시대의 전통 가옥들이 많았다. 기독교 문화권인 그리스 건축 양식이 창문이 굉장히 크고 돌출된 스타일인 반면,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집안에 있는 여자들이 밖에서 잘 안 보이도록 작은 창문에 창살을 달고 담을 높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 주차장으로 변한 항구. 혹시 흔적이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카드르가 앞 항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지도를 들고 이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항구는 온데 간데 없고 항구 끝자락 성벽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옛날에 배들이 정박해 있었을 법한 곳이 지금은 매립돼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 역시 이 나라 사람들은 ‘꼬레리’(한국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비잔틴 시대 해안 성벽 최대의 항구(?)를 찾아서 또 육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니카프 근처, 해저 터널과 연결되는 지하철 터미널 작업을 하고 있는 공사 현장은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우리에겐 특별히 문이 개방되었다. 여기가 바로 엘레우테리오스 항구가 있던 자리. 리쿠스 강물이 마르마라 바닷물과 몸을 섞던 최하류이기도 하다. 토목 공사 과정에서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어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 국립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도 가졌다.


특종 사진!?

▲ 출입은 특별히 허용됐지만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공식 발표 전이라서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했다. 하지만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기사(騎士? 技士?)는 ‘기사 정신’을 발휘해 눈치껏 셔터를 눌렀다. 특종 사진!? 흰 천막을 씌운 부분은 비잔틴 시대의 상선 22척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던 자리들. 파헤쳐진 발굴 현장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무토막들이 여기가 바로 옛 항구 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 옆은 *오르한 왕자와 그가 이끄는 투르크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오스만의 왕자. 술탄 쉴레이만의 손자이자 무라드 2세의 먼 사촌이다. 1453년 당시 마르마라 해에서 상륙한 극소수의 오스만 병사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술탄에게 잡히면 목이 달아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오르한과 그의 부하들은 투르크 군과 대항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르한은 정교회 수도복을 빌려 입고 변장한 채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혀 동료 죄수의 밀고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 바다 성벽 안쪽.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아치형 비잔틴 양식이 뚜렷하다. 여기저기에 동네 개들이 실례를 해놓아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1453년 당시 프사마티아와 스투디온 등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에 있던 지역은 그곳 방위군들이 육지 성벽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오스만의 함자 베이 함대에게 항복해 교회를 비롯한 주민들이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돈을 걷어 포로로 잡힌 다른 지역 주민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구해 주는 의리를 발휘했다.


▲ 바다 성벽 바깥쪽. 해안 성벽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성벽 바로 앞이 바다다. 1453년 당시에는 해안 성벽 모두가 이런 모습이었을 테니 적들이 감히 상륙할 엄두를 냈겠는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성벽 안팎 모두 야외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변 정리만 잘하면 관광 명소가 되는 건 금방일 것 같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그 옛날 영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 그리고 자갈이 뒤섞여 퇴적된 모습이지만 550여 년 전에는 온통 바다였던 곳이다. 위치는 제라파샤 병원 건너편. 택시 기사에게 그렇게 말하면 데려다 준다.


▲ 바다 성벽 끝자락에 있는 주탑. 성벽 꼭대기는 복원된 모습이 역력하다. 바로 앞은 마르마라 해와 육지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니치 양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 드디어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가 끝났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꺾어지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시작된다. 해안 성벽 탐사는 무엇보다도 길 건너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자동차들이 야생마처럼 내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때론 교통 법규 위반까지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 오, 아름다운 정원! 육지 성벽은 이렇게 운치 있는 공원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멋진 곳을 찾은 사람은 우리뿐이다. 이미 해안 성벽 이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탐사도 하고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2․3․4편에도 소개한 지역이지만 이 날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해질녘까지 대포알을 찾아 3중 성벽 구석구석을 헤매고 또 헤매었다.


▲ 황금문 앞 풀밭 위에서.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마치고 점심 식사 뒤 오후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통역을 해준 이경숙씨, 열과 성을 바쳐 성벽 탐사에 동행하며 내 물음표를 지워 준 니사 양에게 내 등 뒤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을 바치고 싶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7편은 마르마라 해안 성벽(세라글리오 곶부터 비상문까지/붉은 사각형 표시)을 탐사한 내용이다. 거리는 약 9킬로미터. 매립된 지역이 너무 많고 넓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바다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답사를 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S.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아이디 ‘중독’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구절입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다음 편(7편)을 지금 올리지만 중독님을 비롯한 6편 독자들은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9편으로 미루고, 7편에는 다른 이야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구성을 약간 달리 하면서 이야기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8편에 올릴 내용을 한 컷의 사진과 함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시작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찍은 바다 사진. 저 해협 양쪽에는 1453년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요새가 두 곳 있었다. 아나돌리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각각 아시아 쪽과 유럽 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위협하며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두 요새 이야기가 8편에서 펼쳐진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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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존과 발전 2010.10.01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풍스럽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먼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티나게 복원된 흔적들이 아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유지/보수를 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의 흐름만이 복원된 성곽의 흔적을 덮어줄 수 있을것 같네요

  2. 오스만 2010.10.01 1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원더풀, 뷰티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만국기처럼 다채로운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3. 두륜 2010.10.01 15: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정과 노력에 매번 놀랍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대단 하시네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
    멋진 말이 아닐수 없네요...
    다음에 시간이 흐른뒤 외국의 명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지금 의장님처럼 꿈이 현실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이라고
    소개한다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요?

  4. 술취한술탄 2010.10.01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도 가본적없는 이스탄티노플
    의장님덕에 3박4일정도 이스탄티노플 여행을 다녀온듯합니다.
    해박한지식과 격조높은 안목 다음편 기대할께요.
    더불어 말씀드리면 여행중 즐겼던 음식이나 에피소드도 올려주셨음 좋겠는데

  5. 박찬용 2010.10.01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제가 마르마라 해안을 다니는듯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생생한 현장감으로 제가 곳곳을 돌아 다닌듯
    감동과 여행후의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한편한편의 글들을 읽으며 너무도 재미있는 산교육을 받는 느낌...

    늘 불타는 열정으로 한국의 산하와 역사를 쓰다듬어 주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힘드시겠지만 책으로도 만들어 주신다면 더많은 사람들이 더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 됩니다
    8편이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글들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요

  6. 가을바람 2010.10.01 1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과 사진을 보면서 내내 제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7. 술에술탄 2010.10.03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군요.
    터키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수여해야 할 듯.

  8. 중독 2010.10.03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에 나와 바닷바람 맞으며 성벽을 따라 걷고, 성안으로 들어와 건축문화관람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도시락 먹고... 주말 나들이 하고 가는 기분입니다. 나들이하러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9. 수몰 주민 2010.10.10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 위를 걷다, 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예전 어느 시인의 '물 밑을 걷기'란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몰된 어느 마을에 얽힌 첫사랑과의 추억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바다 위를 걷든 물 밑을 걷든 옛 기억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든,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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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마리의 황소가 끄는 수레에 초대형 대포를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오스만 군사들. 백마를 탄 술탄의 양 옆에서 장총을 든 예니체리가 호위를 하고 있다.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는 들꽃들이 곧 닥쳐올 비잔틴 시민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2009년 1월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스만 투르크 군이 배를 끌고 산(언덕)을 넘어갔다는 생뚱맞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통역 실수려니 생각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그거야 뭔가 어수선하고 중구난방인 상황에선 엉뚱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해 세계 전쟁사를 바꾼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니, 경이롭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1453년에  엄연히 있었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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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양군의 배치도. 흰 두건을 쓰고 백마를 탄 술탄(왼쪽 위)은 우르반의 대포를 앞세우고 메소테이키온 성벽 맞은편 400미터 지점인 리쿠스 계곡에 황금빛 막사를 설치했으며, 황제는 그에 정면으로 맞서 성벽 바로 안쪽에 비잔틴 정규군과 함께 포진했다. 육지와 바다 모두 술탄의 병사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잘려나간 지역까지 감안하면 오스만 군은 우선 수적(數的)으로 비잔틴 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골든혼을 가로질러 선박의 침입을 봉쇄했던 방어 철책(위 그림 오른쪽 상단 및 아래 사진 참고)을 직접 보고 난 뒤로는 술탄이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넘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엄청난 굵기의 쇠사슬을 보자 비로소 1453년 전쟁 당시의 분위기가 눈에 잡힐 듯 실감이 났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나는 21세의 청년 술탄(메메드 2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매료되었습니다. 나중엔 술탄과 그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에 매몰되다시피 해서 틈만 나면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적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여야 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청년 술탄과 그의 야심찬 정복 전쟁, 콘스탄티노플의 결사항전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마음을 차분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처절했던 당시 상황에 지금 국회를 비교할 순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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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453년 당시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방어용 쇠사슬(컬러 사진).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400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연결 고리 간격이 18인치에 이르는 이 거대한 쇠사슬이 도시 주변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당시에 찍은 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증명해 준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의 동쪽 끝 지점. 왼쪽 끝에 톱카프 궁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신시가지(페라 지역)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골든혼으로 접어든다. 골든혼 입구 성채 아래 에우게니오스 성 탑과 페라 방파제 위의 탑 사이에 연결돼 있던 쇠사슬은 거기 어디쯤 위치해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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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과 성벽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놓아두고 이 대형 선박들은 왜 산(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보다가 나는 문득 내 책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알카에다 지도자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혹시 술탄의 이 기발한 역발상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맞닥뜨렸던 난관을 돌파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을 통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운다.”란 말도 있듯이….

*“사우디의 숙원 사업이었던 메카에서 타이프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 하지만 험준한 바위산 위로 무거운 건설 장비를 옮길 도리가 없어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 모하메드 빈 라덴은 불도저·포크레인 등의 중장비를 분해해 낙타 등에 싣고 현장까지 옮긴 뒤 재조립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사우디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 또한 발상의 전환이 낳은 창조적 아이디어지요.”(『이 아름다운 나라』 162쪽)


  일부 문헌에는 메메드 2세의 참모로 일한 이탈리아 사람(성명 미상)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 자체가 애매하고 불분명한데다가 만약 그랬다 해도 그것은 *평지 이동이었습니다. 술탄의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요. 술탄은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산등성이와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 넘어갔습니다. 20층 빌딩 높이와 맞먹는 험한 비탈길을 바다(0미터)에서부터 끌고 간다니, 감히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21세의 청년 술탄은 해냈습니다. 비상한 두뇌와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4월 22일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가 배를 끌고 간 본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 대대적인 거사를 위해 술탄은 **4월 21일부터 보스포루스 해변 쪽과 골든혼 안에 있는 카슴파샤 지역에 걸쳐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육로 뱃길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포병 부대에게 간간이 페라 지역을 향해 대포를 쏘라고 지시합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눈길과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서 상상력을 차단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란 작전이자 위장 전술입니다.

 

*베니스 인들이 롬바르디아 전투에서 소함대 전체를 바퀴 달린 받침대에 싣고 포 강(아디제 강)에서 가르다 호수까지 이동한 일.
**4월 21일은 육지 성벽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이 계획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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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천외하고 전무후무한 작전! 백마를 탄 술탄의 독려를 받으며 드디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해안가로 끌어올려진 배들은 그 순간부터 마치 거대한 수레로 변신한 듯 힘센 황소들에 의해 경사진 언덕을 끌려 올라갔다. 가파르고 험한 길에선 도열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이 황소들을 도왔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산으로 가는 건지, 산이 바다로 변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장관(壯觀)’이란 말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술탄은 출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언덕을 오르는 배들에게 돛을 드높이 올리고 노잡이들을 승선시켜 노를 앞뒤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뱃머리에서는 악사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연주했습니다. 놀이동산 바이킹도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순간 무색해졌을 것입니다. 독심술이 뛰어났던 걸까요. 술탄은 그렇게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을 카니발처럼 치르게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배들이 골든혼을 향해 언덕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더 세차고 무서운 기세로 배들을 바다에 밀어 넣었습니다. 무려 70척이나 되는 크고 작은 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맞추어 골든혼으로 철석철석 내려왔습니다. 그걸 본 비잔틴 인들은 아연실색하면서 공포와 전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리전 효과까지 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군의 사기는 하늘로 솟구친 반면 비잔틴 진영의 분위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크고 수많은 배들을 술탄은 *무슨 재주로 이동시켰을까요.

*오스만군은 먼저 페라 지역 뒤 야산의 가시덤불과 야생 포도밭을 갈아엎고 길을 내었다. 그 다음 길 위에 목재를 깔고 마찰을 줄이기 위해 표면에 돼지기름을 발랐다. 바퀴 달린 받침대가 바다 위의 배를 동여매면 도르래가 배를 해안가로 끌어 올렸다. 이 배들은 한 척 한 척씩 끌고 갈 황소들과 연결시켰다. 황소 옆에선 수십 명의 병사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런치만은 ‘바퀴 달린 받침대’란 표현을 썼지만 다른 책들엔 그냥 ‘받침대’로 나와 있다. 앞 그림은 바퀴가 없는 반면 아래 그림은 바퀴를 단 채 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의 『해외 여행』에 수록된 1455년 작품. 한 폭의 그림 안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전쟁 당시의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복합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담고 있다. ‘1페이지짜리 그림책’이라고나 할까.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표지도 이 그림 일부로 장식되어 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배를 이동시킨 육로가 애매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스탄불 현지에서 만난 학자와 전문가들조차 배의 정확한 이동 경로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나는 그러나 그 경로를 내 나름대로 유추 혹은 규명해 보려고 단지 지도 몇 장만 들고서 며칠 동안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자동차와 도보로 4~5차례나 그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메메드 2세('파티'; 정복자)와 텔레파시라도 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페라팰리스 호텔 앞에서 마치 특파원이라도 된 듯 내 녹음기 안에 탐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런치만의 책(168쪽)에는 술탄이 여기서 200미터 위쪽인 영국 영사관 앞에서 왼쪽으로 꺾인 경로를 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술탄이 이 페라 호텔 옆길로 배를 끌고 왔을 것 같았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 페이지에서)
여기서 잠깐, 택시(Taxi)는 터키에서도 탁시(Taksi)로 표기한다. 탁시 뒤에 m자 하나를 붙이면 탁심(Taksim), 내가 서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스탄불의 명동’ 격인 번화가 이름이 된다. “탁심에 가려고 탁시를 잡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다.


▲ 혹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황소 발자국이나 수레바퀴 자국을 찾는 심정으로 나는 며칠을 두고 몇 번이나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3층 건물을 가로질러 쳐놓은 빨랫줄 위에서 옷가지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빨래를 널고 걷는 일에도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 이 도시에서는 축구장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다. 문득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과 터키의 3·4위전이 떠올랐다. 터키 사람들은 굉장히 축구를 좋아한다. 혹시 이 축구장을 닦고 스탠드를 올리는 과정에서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그 옛날의 돼지기름 먹인 통나무가 나온 것은 아닐는지…. 나는 바로 이 옆길(테페바쉬)로 배가 지나갔다고 믿는다.


  ‘바로 이 길이다!’ 싶은 곳에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지만 답은 매번 ‘역시나’였습니다. 그러던 중 술탄과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요. 내가 애초 생각했던 이 길(테페바쉬)로 ‘배가 내려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노라고 몇몇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더군요. 더위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사학자(런치만), 작가(나나미), 현지 교수(페리둔) 모두 주장이 다른데 나도 내 견해를 주장해 보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4의 길’로 갔습니다. 현지인들이 믿고 있는 그 길로! (약도 별첨)

▲ 지도를 파는 가게에도 몇 군데 들렀다. 페라 지역 일대가 상세하게 담긴 축척이 큰 지도를 몇 장 샀지만 그것도 선박의 이동 경로 탐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한 것 같은 이런 걸출한 인물의 기념비적인 행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선박의 이동 경로를 찾아 헤매는 길에 만난 이정표들. 저 화살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과 마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조금은 허황된 생각마저도 드는 거였다. 내가 집착이 깊었나 보다.


  이스탄불대학교 역사학과장인 페리둔(Feridun M Emecen) 교수는 3가지 경로를 그 가능성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런치만의 경로(톱하네→카슴파샤 설), 두 번째(돌마바흐체→카슴파샤 설)와 세 번째는 그보다 이동 반경을 조금씩 더 넓혀 놓은 경로입니다. 페리둔 교수는 그 중 3안이 자기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것이란 견해입니다.


▲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는 1453년 전쟁을 전공하고 책도 낸 이 분야의 중견 학자. 연구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지만 그래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배의 이동 경로도 그 중 하나. 페리둔 교수는 스티븐 런치만의 추정(1안)보다 선박의 이동 거리를 확대한 2안과 3안을 제시했다. 1안<2안<3안 중 그의 견해는 3안이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이동이 쉽고 사전에 적에게 노출도 덜 되는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 의견은 런치만 쪽에 더 가깝다. 거침없는 술탄의 성격과 이런저런 기록, 그리고 내가 직접 탐사해 본 결과를 종합해 내린 입장이다. 페리둔 교수와는 이메일을 통해 아직도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답답함을 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그 사이에 이미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도시 계획으로 길들도 변경된 그 지역에서 550여 년 전의 흔적을 찾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막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축구장을 건설중인 테페바쉬란 마을과 *페라팰리스 호텔 주변 등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이동 경로는 맨 끝에 부록으로 처리했습니다.)

  *세계적인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 호텔 411호실에 묵으며 명작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배를 골든혼 바다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술탄은 다음 작전으로 *부교(浮橋)를 설치합니다. 부교 옆에는 튼튼하고 널찍한 받침대를 두어 거기서 블라케르나에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식량과 무기 등의 물자와 병력도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습니다. 기동력이 훨씬 빨라졌습니다. 

  *술탄은 골든혼에 있는 배들의 엄호 아래 도시 성벽 바로 위쪽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 적국인 그리스 인들이 쓰던 1000여 개의 와인통을 세로로 나란히 쌍으로 묶은 다음 그 위에 두꺼운 널빤지를 고정시켜 사람과 물자 그리고 수레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섯 사람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다닐 만한 넉넉한 너비였다. (로저 크롤리,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대공격』 166쪽 참고) 일부 주장에 따르면 부교 위에 단단한 받침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성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고 한다.


 

◀ 육지 성벽 조금 못 미친 지점, 골든혼 연안 성벽에 걸려 있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의 현판. 술탄 메메드 2세가 1453년 4월 23일 월요일, 카슴파샤 지역에서 이 부근까지 골든혼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놓아 성을 공격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부교가 여기보다 육지 성벽 쪽으로 좀 더 올라간 지점에 가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5편 지도의 부교 위치 참고)




  부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엇갈립니다.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선 육지 성벽이 끝나고 골든혼 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아래 지점에 현판을 세워 두었지만 그건 술탄의 치적을 알리기 위한 것일 뿐, 부교의 위치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이스탄불정복자협회 사무실에서 회장단과 함께. 이 단체는 말하자면 ‘정복자 술탄의 팬클럽’이다. 전쟁과 관련해 성벽을 비롯한 기념될 만한 곳에 10여 개의 현판과 원기둥을 설치해 놓은 것도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들도 나의 물음표를 속 시원히 지워주지 못했다. 헤어질 때 나는 메메드 2세의 초상이 새겨진 금빛 배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마치 정복자협회의 홍보대사라도 된 듯이 이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날까지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아무튼 배가 언덕을 넘고 골든혼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이면서 다이내믹한 육상 전투와 스릴 넘치는 해상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 갈라타 타워에서 바라본 골든혼과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두 개의 터키 국기가 나부끼고 있는 숲 사이로 우뚝 솟은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마르마라 해가 마치 하늘인 양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중앙 탑 오른쪽 사원은 쉴레마니예 모스크. 지금은 평화롭게 유람선이 떠다니지만 1453년엔 이 좁은 만(灣)에서 격렬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었다.


▲ 베니스의 조선소와 건조 중인 선박 그림. 당시 제노바와 쌍벽을 이루며 콘스탄티노플을 동방 무역의 주요 기지로 삼고 있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한 호위 함대를 만드느라 조선 산업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항해술과 해상 전투 경험 역시 풍부했지만, 비좁은 골든혼 안에서 치른 *오스만 군과의 해전은 사전에 기밀이 새어나감으로써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그 동안 해상전에서만큼은 우위를 점했던 황제 군은 이 뼈아픈 패배로 골든혼에서의 해상 주도권마저 상실하고 만다.

*술탄의 배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해 옴으로써 골든혼 봉쇄 사슬이 무용지물이 되자 황제는 즉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작전을 짠다. 하지만 이 계획은 동참키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미루어지는 바람에 기밀이 새어나가 오히려 오스만 군의 역공을 당하고 만다. 결과는 참패.


  「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지음)이란 동화처럼 과거를, 역사를 사진 찍어 주는 카메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든혼 주변과 페라 지역을 탐사하면서 그런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불분명한 것들이 많고 책마다, 또 학자마다 견해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힘은 상상력에 있는 것. 내가 수집한 팩트와 정보에 상상력을 가미해 내 나름대로 역사를 재구성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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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콘스탄티노플 지도.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한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급속히 번성해진 모습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지도 맨 아래쪽에 오스만 가지부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왕조 12대 술탄의 얼굴을 동그라미 안에 차례로 그려 넣은 것. 오른쪽 첫 번째가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초상이다.(파란색 사각형)


  한가위 전에 한 편을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6편을 힘겹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7편은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아래 그림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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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탄티노플’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 TIP=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탐구 학습 코너 ##

  국내에서 그 동안 배의 육지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존 자료는 런치만과 나나미의 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나미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런치만의 설명 역시 애매했습니다.

  현지에서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를 만나 이 부분만 놓고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웬걸요, 혼란만 보탰을 뿐입니다. 교수는 이때껏 통설처럼 여겨져 온 톱하네 설(1)을 부정하고 돌마바흐체 설(2)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훨씬 더 먼 길로 돌아가는 제3 가설까지 거론했습니다.(페리둔 교수는 톱하네가 언덕이 너무 가팔라 현실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3설의 구체적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나는 ‘이스탄티노플’을 떠나던 날도 풀리지 않는 화두를 짊어진 수도승처럼 다시 시간을 짜내어 이 지역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골목길, 좁은 길, 일방통행 길. 참 복잡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시간마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정복자 메메드가 배를 끌고 간 길이 이곳인가요?”

  드디어 한 동네(테페바쉬)에서 가뭄에 단비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그렇게 들었어요.”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그 길을 다시 갔습니다. 런치만의 영국 대사관 설을 뒤집고 페라 관광호텔 설을 새로 제기하기도 하면서 그 거리를 헤맸습니다. 결국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귀국 비행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이스탄불과 계속 연락을 취해가며 뭔가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직전 또 하나의 번역본이 입수되었습니다. 바로 페리둔 교수의 제자인 바자르(Mahmut Ak-Fahameddin Baʂar) 교수가 근간한 터키어 원본(『Istanbul’un Fetih Gnlĝ』-이스탄불 함락 일지)을 우리말로 옮긴 자료입니다.

  야호!(호야?) 바로 내가 주장하였던 배들의 이동 경로가 그 책에 그대로 제시돼 있었습니다. 특종(?)을 놓친 아쉬움과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진작 손에 넣었더라면 그런 생고생은 하지 않았으련만….

  이왕 수고한 것. 그 책은 지도 없이 큰 방향만 나와 있으므로 나는 좀 더 친절하게 내가 생각하는 배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지도로 표시해 서비스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톱하네(대포알 공장)부터 쿰바라치 언덕길, 아스말르 메스지드, 테페바쉬, 카슴파샤 등과 골든혼 연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골든혼 봉쇄 사슬이라는 방어벽을 만난 술탄이 함대를 이끌고 언덕을 넘어 바다로 간 경로이다. 톱하네에서 카슴파샤로 이어지는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제기하고 바자르 교수가 뒷받침한 노선이다.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길인데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켰다. 2설(초록색)과 3설은 그보다 좀 더 위쪽(3설은 지도 밖)으로 선이 그어진다.

P.S.
  6편을 올리고 나서 아이디 ‘술탄’님(한양대 이희수 교수)이 네이버 블로그에 덧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편마다 이어지는 술탄님의 뜨거운 관심과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메일로 보내주신 제3안 스캔 사진도 잘 받았습니다. 터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라면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겠군요. 페리둔 교수의 3안은 베식타쉬(돌마바흐체보다 더 위쪽, 초기 해군 집결지)→옥메이다니(에윱 모스크 맞은편 지역, 골든혼 거의 끝 쪽)였습니다. 하지만 술탄님 말씀대로 ‘역사적 사실이란 정확한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내 견해를 포함한 이 모든 주장에 의미두고 싶습니다.
  이스탄불대학 페리둔 교수와 동문수학한 사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페리둔 교수에게도 술탄님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골든혼 내해에 배를 내린 시점’은 내가 잠깐 착오한 것 같습니다. 런치만 책(169쪽)에 ‘4월 23일 일요일’로 되어 있지만 요일 계산을 해보니 ‘4월 22일 일요일’이라야 맞습니다. 다른 문헌을 보아도 4월 22일이 정설인 것 같아 내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이동 함선의 수는 40척부터 80척까지 견해가 다양해 그 중 런치만의 추정(70척 가량)을 따랐음을 밝혀 드립니다.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는 내가 읽어 본 책들이 대부분 이 설에 입각해 서술돼 있었습니다. 술탄님 지적대로 ‘밤을 이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술탄(메메드 2세)의 성격상 ‘적들에게 시각적인 공포와 전율을 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말입니다.

  아래 지도는 술탄님이 보내 준 터키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입니다. 교과서에 표시된 경로(분홍 선) 외에 내 블로그에 서술된 1안(빨간 선)·2안(초록 선)·3안(파란 선)도 참고삼아 표시해 놓았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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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의 상상력과 추진력, 무엇보다 자신이 반드시 해낼 것이라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걸까요? 술탄 위인전이 있다면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21살이라..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어 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관심갖고 지켜보겠습니다!!

    • 호야 2010.09.28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렇습니다 술탄은 상상력 추진력 게다가 '근거있는 자신감'(이말 참 마음에 듭니다)의 사나이지요. 사실 이스탄불 떠나기 전엔 21세 청년 술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주로 서방쪽 견해에 접하고 갔는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더군요 현지에도 자료 귀한건 마찬가지지만 현장에 서면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더군요.
      여러분들이 댓글 달아주시니 이 작업이 힘들어도 계속할 용기가 납니다 계속 관심 바랍니다 김형오

  2. 헛제삿밥 2010.09.21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이 포스팅 모아서 터키 여행가면 든든할 것 같네요...문화유산답사기+ 지도 가 한 방에 해결될 듯...잘 봤습니다. 감사~~

  3. 트라이앵글 문 2010.09.21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이번 한가위에는 삼각형 달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트라이앵글 문.
    이스탄티노플을 닮은 그런 달 말입니다.

  4. 우주아이 2010.09.24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추석 전에 또 한 편 올렸을 줄이야
    이스란티노플엔 명적도 없나요
    잘 보고 갑니다

  5. 중독 2010.09.27 0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능력자 술탄이 너무 멋있어서 술탄의 팬클럽에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며...
    그리고 이렇게 빨리 이스탄티노플의 기행문이 올려질 수 있다니...
    의장님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 분이신 것 같습니다.
    (*제일 많이 바쁜 사람이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다. -비네-)

  6. BlogIcon 술에물탄 2010.09.30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봉쇄사슬에 막혀 배를 육지로 끌다니...
    배를 끌던 소와 인부(?)들이 불쌍하네요..
    현대의 공중전을 봤다면 엄청 부러워했겠네요.ㅋㅋ

    • 꽃거지 2010.09.30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술에물탄님 센스가 넘쳐나시네요.
      기대안한곳에서 빵 터지고 갑니다.

  7. 두륜 2010.09.30 1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 전쟁의 결정적인 향방을 가른 술탄처럼...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2차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든 것처럼...
    모든 일에는 어떻게 진행 될것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고비(분수령)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장님께서 "이스탄티노플"을 연재하시고 난 다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글도 재미 있지만 글 쓴이에 대한 관심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장님께서도 이 글의 연재를 분수령으로 삼아 지금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승화시켜 보다 멋진 정치 지도자가 되길 기원 합니다...
    앞으로 큰 정치인의 행보를 "이스탄티노플"의 이야기와 함께 기대하겠습니다...

  8. 온새미로 2010.09.30 2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자께서 하신 말씀으로 논어(옹야편)에 나옵니다.
    아는 노릇은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공자의 예술론은 '시경(詩經) 삼백 편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에 간사한 생각이 없다(思無邪)는 구절 그것이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야 참된 예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지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학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는 노릇을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시리즈들을 읽으며 공자님 말씀이 떠오른것은,
    형오님도 단순히 콘스탄티노플 전쟁에 대한 사료만 챙기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9. 고슴도치 2010.09.30 2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재를 생명만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전통보존 의식이 투철해서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이 정확하고 풍부할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10. 兼太(けんた) 2010.10.01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에 관한 자료를 찾는중이었다.
    여기는 구글에서 검색하다 오게 되었다.
    우선 사진과 그림 설명만 보며 해석하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니
    운이 좋게도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라 읽을 수 있었다.
    韓国語を日本語 に訳すのはとても難しい..
    何よりも前々から学びたかったから.
    一生懸命勉強して後で 형오と話をもっと上手にできたら嬉しいな.
    おめにかかって嬉しいです.

    • 호야 2010.10.04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日本人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러나 저는 貴下의 韓國語만큼 日本語 實力이 不足해 不得已 한글로 답글을 남깁니다. "韓國語 熱心히 배워 나와 對話하겠다"는 말씀에 깊은 感銘을 받았습니다. 1453年 Constantinople 戰爭에 대해 意見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내 Homepage에 글 남겨 주셔셔 感謝드립니다. 金炯旿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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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플 2010.09.15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2. 한가위 2010.09.16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한가위 이후에도 기대할게요
    명절 잘 보내세요

  3. BlogIcon 김화자 2010.09.18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 처럼 넉넉하시고 풍요로 우신 추석 명절 되십시요.
    행복 하시고 따듯하신 한가위 되시길 기원 합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4. 세레나데 김 2010.09.26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연립 주택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 웃었습니다.
    어라, 다시 들어가 보니 그새 사라졌네요.
    신비스런 그녀를
    <이스탄티 걸>이란 이름으로 불러 봅니다.

  5. 소나티네 2010.09.27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이스탄티걸이 또 고개를 쏘옥~~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는 그만큼 잔상을 많이 남깁니다

  6. BlogIcon 스압 2010.09.30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에 지은 집에 사는 이들은 기분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우리집 벽이 수백년전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니!!'
    집에 값비싼 골동품 하나씩은 기본이겠네요. 부럽다. 돈 떨어지면 조금씩 팔아도...ㅋㅋㅋ

  7. 유한새 2010.09.30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기의 철옹성에 무혈입성이라...!!

  8. 만국기 2010.10.12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탁월한 역사 기행문입니다.

  9. 형오투어 2010.10.12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퓨터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스탄티노플,
    그 가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정말 끝내 줍니다.
    착륙하고 싶지 않네요.

  10. BlogIcon silk flowers 2010.10.18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역사의 도시군여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2
                              - 타임머신 타고 550여년 전으로

▲ 작열하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지대가 낮은 격전지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멀리 성곽 위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에서 유래한 현대 터키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성 로마노스 군문(제 5군문) 앞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 성로마노스 군문 입구 석벽에는 비잔틴 시대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음직한데 해독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 저 허물어진 성벽은 아마도 세월의 탓이겠지만, 1453년 당시 치열했던 격전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도 저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 격전지 성벽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리라. 한 쌍의 청춘남녀가 이 더운 날 몸을 밀착시킨 채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을 향해 올라가는 길. 성 안쪽의 풍경이다. 그 옛날 먼지를 일으키며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말들이 달렸을 길이 지금은 아스팔트로 바뀌어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 외성 위를 탐사하고 있다. 우뚝 솟은 건 내성의 주탑이다. 인도와 풀밭으로 바뀐 오른쪽엔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성곽의 안과 밖 그리고 위를 입체적으로 탐사했다. 사흘 내내 이런 식으로 다녔지만 성곽 탐사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술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모습.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 함락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스물한 살 술탄이 예니체리 군단의 삼엄한 호위 아래 대신들과 장군들, 이슬람교 고승들까지 거느리고 카리시우스 성문(에디르네카프)을 지나고 있다. 술탄의 행선지는 아야 소피아. 말발굽 아래로 피를 흘리며 어지럽게 쓰러진 비잔틴 병사들의 시신이 처참했던 전투 상황을 웅변해 준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 ‘이스탄불 정복자 협회’에서 톱카프 성문 벽에 부착해 놓은 안내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내 네이버 블로그에 이런 해석을 달아 놓았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정복자 파티의 군대는 대포를 쏘아 부서진 이 근처의 공백을 통해 이스탄불로 진입하였다."
톱카프는 ‘대포·포탄(톱)이 지나간 문(카프)’이란 뜻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펼쳐진 곳 중 하나이다. 무너뜨리려는 자들과 지켜내려는 자들의 결사항전, 그 현장에 서자 나도 자못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 톱카프 성문 앞 분위기. 복원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성벽의 엄청난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왼쪽 벽에 화살표와 함께 파란색 페인트 글씨로 쓴 "WC"는 낙서인가, 화장실 안내문인가.


▲ 톱카프에서 제 4군문을 지나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을 향해 가는 길. 복원된 성벽 모습이 감동을 반감시킨다.


 

▲ 성곽 탐사 도중 날이 저물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십자가가 세워진 뾰족 지붕 아래서 은은한 종소리가 부드럽게 발목을 잡으며 이제 그만 쉼표의 시간을 가지라고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행군을 멈추기가 아쉬웠다.

 

▲ 마르마라해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왼쪽 끝은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가운데는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이다. 해변에 서 있던 비잔틴 시대의 등대는 현대식 등대로 바뀌어 있다. 내가 탄 배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끝나고 마르마라해가 시작되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등대 오른쪽으로 해안 성벽이 보인다. 해안 성벽 탐사와 아야 소피아 이야기는 다음에 또 사진과 함께 소개할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 전경. 이 도시에 있는 수백 개의 모스크 가운데서 블루 모스크는 첫눈에 알아보기가 가장 쉬운 이슬람 사원이다. 6개의 첨탑(미너렛)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유일한 모스크니까. 마르마라 바다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때 블루 모스크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해냈다.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갤리선 선장이 된 심정으로 유람선을 타고 해상 전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서 읽은 해상 전투 상황을 조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가며 더듬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카리시오스문 일대▶제 5군문▶성 로마노스 시민문▶제 4군문 일대(분홍색 사각형 부분) 아야소피아▶블루모스크▶등대(분홍색 삼각형 부분)
를 사진에 담았다. 블루 모스크·아야 소피아·등대가 담긴 사진은 마르마라 바다 위 유람선에서 찍은 전경이다.
* 하늘색 사각형 부분은 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에 소개한 탐방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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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킬리만자로의 표범 2010.08.30 1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이 시원해지는 사진과 재기발랄한 캡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입니다.

  2. 페이스북 2010.08.30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오노 나나미 책 표지에 써 있는 글귀가 새삼 떠오릅니다.
    "국가의 적은 안팎에 있다.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 주는 것은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방위력
    그리고 상대 국가와의 우호 관계이다."
    대한민국의 일부 철부지 젊은이들,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입니다.

  3. 돌솥밥 2010.08.31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가 참 많은 감동을 지닌 나라 혹은 관광지라는 걸 사진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만큼 굴곡이 많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우리나라도 다 허물어버리지만말고 좀 보존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 다 남겨서 교훈으로 삼는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좋은 사진 잘 보고 갑니다. 땡스!!

  4. 인디아나고 2010.08.31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드벤처 무비
    주인공이 되신 것 갈군요
    이스탄티노플
    3탄도 기대됩니다

  5. BlogIcon 전자돌이 2010.08.31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사진은 인디아나존스 같아요 ^^) 점점더 흥미진진해 지는군요!

  6. 유근준 2010.08.31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의 인간에 대한 순수함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양과 열정이 정말 부럽습니다.

  7. BlogIcon crys1964 2010.09.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트위터로 의장님을 안 후 이제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알면서 좀 더 의장님을 알게 되네요. 기자생활을 하셔서 탐사활동에 더 관심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타고난 학구열이 강하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감동 받았구요. 앞으로도 의장님의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8. 두륜 2010.09.06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더운 날씨에 유적을 땀 흘려가며 둘러 보시는 모습이 인상 깊네요...
    여행 하시는 동안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으신것 같습니다...
    무한부득(無汗不得) 땀 흘리지 아니하면 얻을 것이 없다....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 좋습니다...

  9. 두바퀴 2010.10.17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저 먼 시간과 공간으로 날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이 시리즈가 끝날 때쯤에는 저도 뭔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느낌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