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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는 각양각색의 가수들이 출연하여 무대를 빛냈습니다.





▲ 모바일 차트 1위에 오른' 2AM',
유희열의 토이와 인연이 깊은 '김연우'



▲ 가녀린 목소리와 전자음악이 돋보이는 '캐스커', 新여성 발라드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AB에비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연우와 2AM를 보며 추억에 잠겨봤더니 문득 1990년대 대중음악사가 떠오르더군요.

그들의 인맥을 쫓아 올라가볼까 합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김연우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룹은 '토이'입니다.

그는 토이(유희열)의 객원가수로 참가해서 주옥같은 곡들을 팬들에게 선사했죠. 특히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여전히 아름다운지>가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음은 안정되어 있고 굳건한 느낌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절한 노래에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유희열과 김연우는 서로 다른 해의 유재하가요제에서 각각 대상, 금상을 차지했던 대중음악인들입니다. 그리고 유희열을 떠올리면 김장훈과 이승환이 생각납니다. 김장훈은 유희열을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에 끌어들였고 유희열은 김장훈에게 히트곡 <난 남자다>라는 곡을 선사했죠.

또 유희열은 이승환의 <그대를 모릅니다>라는 노래의 작곡자입니다. 이승환은 유희열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에게서 곡을 받았는데, 오태호, 김광진, 김동률, 정석원, 김현철 등이 떠오르는군요. 이승환으로 연결되는 유희열과 김동률은 친분이 있어서 서로의 콘서트에 찾아가기도 한다지요.

김광진의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은 김장훈, 이승환, 이소라 등이 참여해서 불렀죠. 이소라는 본격적으로 알린 <그대 안의 블루>를 통해서는 김현철과의 교집합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김연우(객원가수)-유희열(그룹) 객원가수체제의 선배격인 공일오비는 윤종신-정석원의 라인을 탄생시켰는데, 공일오비는 토이 이상으로 객원가수를 많이 쓰기도 했었죠. 윤종신의 가수 초기에는 정석원(공일오비), 후기로 갈수록 유희열의 곡을 많이 불렀습니다.

또 공일오비와 무한궤도의 인연 속에서 신해철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해철은 초창기 김동률의 앨범 작업에도 많은 도움을 줬고, 초창기 공일오비 앨범에 객원가수로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여기서 과거 E.O.S의 김형중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앨범들 가운데에는 신해철이 프로듀싱한 적도 있고 윤상의 영향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4집의 경우에는 유희열의 도움을 받았죠. 윤상과 신해철은 <노땐스>라는 테크노 앨범을 공동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김동률과 이적은 <거위의 꿈>으로 유명한 '카니발'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낸 적이 있는데, 이적은 김진표와 한 그룹이었고, 김진표는 신해철이 빠진 넥스트 맴버와 결합하여 노바소닉을 결성했죠.

그런데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각기 교류하고 있었지만,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취향은 전체적으로 한 덩어리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가운데 '대영기획'이란 회사도 떠오르는군요. 위에 언급했던 가수들은 엘리트 느낌을 주는 발라드 주력의 가수들 혹은 자기 색이 분명한 라이브 무대의 실력파로 특징지어지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2AM을 통해 1990년대를 떠올려볼까요?

일단 2AM하면 JYP를 빼놓을 수 없겠죠. 원더걸스, 2AM, 2PM과 같은 인기그룹들은 박진영과 함께 하고 있는 가족들이죠.

그런데 JYP를 떠올리면 빼놓을 수 없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바로 김건모, 클론, 박미경이죠. 박진영은 무명일 때 김건모의 백댄서로 활동을 했었죠. 박미경은 긴 무명생활 끝에 김창환 사단을 만나면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높이면서 <이브의 경고>를 통해 전성기를 누렸는데, 개인적으로는 박진영과 호흡이 잘 맞는다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클론 역시 김건모의 백댄서 출신이었죠. 그런데 박진영, 박미경과 클론의 강원래가 1992년쯤 아주 잠시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던 사실 중 하나죠. 다만 그들은 성과가 좋지 않아 그룹 활동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모두 품었던 사람은 김창환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가수들 뿐만 아니라 신승훈, 엄정화, 노이즈, 홍경민도 김창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수들이죠. '김창환 사단'이란 말이 탄생한 것도 그가 발굴하거나 곡을 써준 가수들이 대거 히트를 치며 유명세를 탔기 때문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김창환 그리고 김창환 사단이죠.

대체로 전자 인맥들에 비해서 신승훈, 홍경민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흑인음악풍의 가수들 혹은 댄스가수들이 보다 눈에 많이 띄는 것 같군요.

(김창환은 '산울림'의 김창완과 다른 사람이죠.)




제가 즉석에서 나눠본 이 두 인맥들의 공통점은 그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싱어송라이터들이었다는 겁니다. 설령 곡을 많이 쓰지 않거나 노래만 부르는 가수일 지라도 각기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죠. 이들이 폭넓고 복잡한 교분이 형성되었던 이유는 각자의 개인적 친분 이상의 음악적 역량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0년대가 한국대중음악의 르네상스시대였던 이유도 이런 교류와 선의의 경쟁 덕택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당시 가수들은 지금 가수들에 비해 보다 뚜렷한 개성을 살린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정한 인기를 구축했던 가수들은 방송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도 음반판매를 통해 최소한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죠. 팬들도 음반을 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구요. 저도 소장하고 있는 수백장의 음반은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요즈음 가요판에서 '댄스음악 + 아이돌 스타'로의 편중이 심화되면서 19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싱어송라이터들이 대중음악을 주름잡았기 때문에 서로 곡을 주고 받고 프로듀싱도 같이 하는 등의 음악적 교류를 넓혀나갔던 것이죠. 그 속에서 발전이 있었구요.

현재 대부분 10대 후반 ~ 20대 초중반의 연령대의 가수들은 기획사가 짜놓은대로 활동하고 성장하다 보니 음악적(작사, 작곡, 편곡, 노래) 독창성이 떨어져 보입니다. 때로는 '댄서에 음악적인 부분을 이식한 것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음악이 과거의 것에 비해 마냥 뒤쳐졌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자기 색깔이 뚜렷한 뮤지션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보다 많이 제공되었으면 하는 거죠.




언젠가 대선배 가수인 최백호씨는 자신이 DJ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를 통해 "요즈음 가수들은 좋은 시스템에서 배우고 있어서 가창력은 연습이 잘 되어 있지만, 가수로서 자기 호흡, 자기 색깔이 부족해서 안타깝다."라고 이야기한 적 있는데 저 역시 공감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노래의 맛이 안 난다"라고 할 만한 가수들,
"정말 오랫 동안 사랑받을 노래다!"라고 느껴질 노래가 많지 않아 섭섭한 요즈음입니다.

(요즈음에도 좋은 노래들이 나오긴 하지만 쉽게 질린다고나 할까요?)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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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릴때는 2010.02.06 1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곡을 못 하면 가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입니다. 작곡은 못해도 작사정도는 해야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노래를 못해도 음반만 잘 내는군요.

  2. 우ㅡ왕;; 2010.03.18 0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그 고생좀 했을듯

  3. BlogIcon 김민희 2011.11.27 1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크고생할껏같아요.

SBS 가요대전, KBS 가요대축제, MBC 가요대제전

연말 시상식과 가요축제를 보면서 문득 "예전 가요계의 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변진섭, 이승철, 박남정, 현철, 주현미 vs 소녀시대, 다비치, 애프터스쿨, 카라, 브아걸, 티아라

 

1989년의 최고 인기가수들과 2009년을 대표하는 걸그룹들을 놓고 보니 격세지감이라 느낍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변했을 가요계도 많은 일들이 있었겠죠?

과연 20년 전의 가수들은 어떤 노래들을 불렀을까요?
1989년의 가요판은 누가 주도했을까요?
그 당시와 지금의 가요계 분위기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 양쪽의 공통점은 각각 1989년, 2009년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것. 그리고 <소녀시대>란 곡을 불렀다는 것

 
 

'남자가수-오빠부대' vs '걸그룹- 삼촌팬'

 

2009년 가요계의 가장 큰 특징은 '걸그룹의 강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과 몇 년전까지 '아이돌 스타'라고하면 미소년 그룹와 오빠부대를 떠올렸지만 2007년에 탄생한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걸그룹의 인기를 주도해 나간 후, 걸그룹은 유래 없는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게다가 원더걸스는 <노바디>를 앞세워 미국 빌보드 메인차트 100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걸그룹의 성장에는 삼촌팬들을 위시한 남성팬들의 증가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걸 느끼게 해 준 대표적인 사례가 소녀시대의 <Gee>입니다. 공개녹화장에서 소녀시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중 따라부르는 남자팬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여러분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Gee Gee Gee Gee~ Baby Baby Baby~"

 

오빠부대의 소프라노급 환호성과는 다른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군대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이 광경은 이제 음악방송 녹화장에서도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1989년 가요계를 주도했던 3인방. 변진섭, 이승철, 박남정


2009년에 걸그룹이 가요계를 휩쓸었다면 20년 전의 대중음악은 어땠을까요? 1989년의 가요계 판도는 올해의 양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양수경, 이선희, 이상은 등 여자 가수들이 있었지만, 남자 가수들의 위세가 대단했죠.

1989년의 초반을 장식한 것은 변진섭이었습니다.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를 히트 치며 가요계를 주도해 나갔죠. 그 당시 경쟁곡은 조성모와 이승환의 리메이크 하기도 했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이었습니다. 박남정의 기역자 춤으로 유명한 <널 그리며>와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도 인기를 끌었죠.

5월 전후로부터 이승철의 대활약이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최다 음반 판매고를 올린 그는 <마지막 나의 모습>,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앞세워서 연중 흥행 돌풍을 이어갔습니다. 마약 스캔들이 터지고 방송 불가 등의 핸디캡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조용필도 10집을 발표했으나 역시 스캔들이 터지면서 칩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것이 가요계의 군웅할거시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신인 가수들이 치고 나갈 틈새가 더 커졌기 때문이죠.


▲ 조용필(좌)이 스캔들로 주춤한 사이 <여름날의 추억>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이정석(우)


늦여름 이후로 이정석의 <여름날의 추억>, 황치훈의 <추억 속의 그대>가 크게 유행한 노래가 되었고, 이후 김흥국을 지금에까지 있게 해 준 최대히트곡 <호랑나비>가 후반기에 등장했습니다. 그의 호랑나비춤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죠. 

 
이렇게 남자가수들의 강세가 이어지는 데에는 오빠부대의 공로가 컸습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원조격인 조용필, 이승철의 팬클럽이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메세지, 인터넷 카페가 없던 시기에 팬레터는 가수와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죠



'발라드' vs '댄스음악'

 

2009년 가요계의 뒤흔든 장르는 댄스음악입니다.

 

걸그룹들이 펼치는 춤과 노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 걸그룹들은 단순히 음악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영입 0순위의 고객들이죠. 그들이 보여주는 춤을 비롯한 다양한 장기는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비록 '아이돌 스타', '댄스음악', '걸그룹'으로의 획일화가 우려된다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2000년대 이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추이가 바뀐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함께 올해 걸그룹의 강세를 말해주는 애프터스쿨, 티아라


이에 비해 1989년은 지금처럼 비디오형 가수보다는 오디오형 가수가 좀 더 강세였죠.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와 같이 춤-노래에 모두 능한 가수들도 있었지만, 발라드의 강세를 뒤집을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발라드 가수들이 인기를 끌면서 화보 촬영 등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갔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주류 매체가 되면서 시청각에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에는 TV 못지 않게 라디오가 강세였던 시기였죠. 일부 잡지에서는 작사가, 작곡가 등의 순위를 따로 올리기도 했었구요.


▲ 이선희, 이지연과 함께 1989년을 빛낸 여자가수들. 춤짱인 김완선, <DDD>의 김혜림, 탤런트 출신 가수 지예



 '솔로' vs '그룹'

1990년대 초중반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음악을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린 시조격이었다면, HOT, 젝스키스 등의 남자아이돌 그룹은 본격적으로 정착화시킨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9년부터 걸그룹의 강세가 눈에 띄는 가운데, 남성그룹에서 여성그룹으로의 이동이 있었을 뿐,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아이돌 댄스그룹'의 위세는 더욱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물론 2000년대의 남녀 솔로가수들도 자기 영역을 구축하며 꾸준한 인기를 차지하고 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의 대중음악 경향과 비교해본다면 상대적으로 그룹이 대세라고 하겠습니다.



▲ 인기스타 최수종과 <내 아픔 아시시는 당신께>를 부른 조하문은 처남-매부지간


이에 비해 1989년 무렵에는 그룹보다는 솔로에 집중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룹으로 가요 차트에 이름을 올린 가수라면 소방차, 무한궤도(신해철)였고, 얼마 후 그들도 해체의 수순을 밟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죠. 그리고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던 시기여서 그룹보다는 솔로가 보다 이점이 있었습니다.

1989년의 대중가요는 양질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던 때였는데, 이 시기가 지나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등장하여 가요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그러면서 솔로와 그룹의 형태도 좀 더 다양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룹에 따라서는 객원가수가 앨범의 타이틀 곡을 부르기도 했죠. 

1989년에는 이전의 시대까지 지배해오던 판에서 벗어나 신인급 솔로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가요계에 태풍이 되자 가요계 내에서도 양질의 발전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국민들이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문화적 욕구가 조금씩 꿈틀대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1989년과 1988년에 다크호스로 돌풍을 일으킨 주역 <호랑나비>의 김흥국과 <담다디>의 이상은


과거 연말 가요시상식을 떠올리며


1990년대 중반까지 연말 TV 가요대상은 시대 분위기에 비해 보수적이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에 비해 출연빈도, 노래가 방송에 나간 회수 그리고 음반판매량에서도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주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곡이나 가수들이 연말 시상식에서는 외면 받은 측면이 있었죠.
 

특히 KBS는 좀 더 보수적인 경향을 띄었습니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휩쓸었지만, 대상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죠. 그리고 KBS에서 댄스음악으로서 대상을 처음 수상한 곡은 1995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고, 댄스그룹으로서 첫 가요대상은 1998년 <빛>을 부른 HOT였습니다.


▲ 이승환과 신해철은 헤어스타일 빼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네요


1990년대 초반까지 매주 방영된 가요프로그램과는 달리 연말 가요시상식에서는 트로트와 비트로트로 나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리고 트로트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어드밴티지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도 그러했습니다. 변진섭, 이정석, 이승철, 황치훈, 김흥국와 같은 가수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는 주현미가, KBS에서는 현철이 각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물론 이승철은 후반기에 마약 사건이 터지면서 방송 출연에 타격을 받았죠.)


▲ 진행자로 유명했던 임백천은 <마음에 쓰는 편지>라는 곡을 불렀죠.
그는 이경규와 <일밤>을 같이 진행한 바도 있고,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속은 적도 있었죠. "얼레리꼴레리~"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트로트의 위상이 달라지고 가요계의 인기 주도층이 10~20대쪽으로 쏠리자, 트로트가 연말시상식에 설 자리가 매우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MBC의 경우에는 1998년부터 4년간 10대가수가요제를 30대 이하-이상을 나누어서 시상하기도 했었습니다. 이후 가요시상식에 대한 과열 양상과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시상식은 폐지가 되고 가요축제 형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연말 가요시상식은 흥행성에 있어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각종 시상식이 그 의미가 퇴색되어감에 따라 회의론도 커졌습니다. 상에 대한 기준이 일관되고 명확하지 않는 이상, 연말에 상을 놓고 겨루는 가요프로그램에 대한 명분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연말 가요프로그램은 평소에 보았던 가수들의 재탕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이벤트와 실험을 통해 신선한 음악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건 1989년과 2009년의 가요계 분위기를 비교해봤는데,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데뷔 3년차 이하급의 신예 가수들이 가요계를 주도했다는 것이죠.


< 사진 출처 : 포토뮤직 >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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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펨께 2009.12.31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도 세대차인지 아시는 분은 조용필과 어디선가 들은 서태지씨 밖에 없는것 같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새해에는 더욱 행운이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 BlogIcon 칸타타~ 2009.12.31 0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1989년은 저도 학생시절이죠.
      예전과 요즈음의 가요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아무튼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좋은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

  2. BlogIcon Phoebe 2009.12.31 0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9년은 고등 학교 갓 졸업한 뽀송뽀송한 아가씨였어요.ㅎㅎㅎ
    옛날 분들 오랜만에 사진으로 보네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3. BlogIcon 반광선 2009.12.31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9년도..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ㅋㅋㅋㅋㅋㅋ

  4. BlogIcon 악랄가츠 2009.12.31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초등학교도 가기 전이예요! ㅎㅎㅎㅎ
    당시에는 아이돌은 커녕, 그룹가수도 극소수였는데 ㅎㅎㅎ
    너무 어려서인지 기억이 날듯 말듯 해요! ㅎㅎㅎ

  5. 민君 2012.05.25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엄청 촌스럽네요 흥국이 아져씨도 젊고 89년이면 국민학이였네연 지금은 30대 아져씨 ... 나이가 드니 이 나이에 사랑 타령으로 가사가 떡칠된 노래 부르기도 거시기하고 이렇게 점점 노인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ㅋ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의 '덩크 슛', 'Jerry Jerry Go Go'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

▲ '루시드 폴'에 이어 유희열 스케치북에서는 엄친아가 또 등장했군요.

이 곡을 만든 사람이 '김광진'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군데?"라며 물음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중 '마법의 성'은 단순히 유명세를 넘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곡이 됐는데도 말이죠.

원래 김광진은 TV에 자주 나오지 않은 가수입니다. 그는 요즈음 아이돌가수처럼 쇼, 예능 등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인지도 차이가 큰 대중음악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합니다.
 

▲ 매일경제 '글로벌 금융주펀드 이젠 봄날 오나' (2009.5.8)
→ 지난 11월 11일 기준으로 김광진의 '더클래식' 펀드의 3년간 수익률 역시 58.6%로 1위 

 
김광진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경제기사에서 많이 봤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모 자산운용사 현역 투자전략가로서 3년 연속 투자수익률 1위의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죠. 그 효자 펀드 이름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더 클래식'이었습니다.

게다가 김광진은 숱한 명곡을 쏟아낸 싱어송라이터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회사 20대 여직원조차 그가 가수라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존심이 상해서 꼭 음반 발표를 하겠노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며 농담조로 이야기했었죠.

그리고 자신의 콘서트에 회사 직원들을 초청했지만, 그가 명곡을 쏟아낸 싱어송라이터임을 몰라본 탓에 직원용으로 좋은 자리를 잡아줬는데도 오지 않은 일도 있었고, 유명 음악프로에 출연한다고 하니 일부 직원들은 "거기에 누가 나오나요?"라는 엉뚱한 질문도 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편차가 큰 가수이다 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김광진은 30~40대 고객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면 기본으로 2곡은 부른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 경제투데이 [증권가 사람들]‘마법의 성’ 김광진 본부장 펀드에도 마법 걸어 (2009.12.3)


사실 그는 엄친아입니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데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자신을 포함한 7남매가 어릴 적부터 한 가지씩 악기는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가족음악회를 열기도 했답니다. 더불어 그는 장학퀴즈에서도 주장원에 오르며 일찍이 유명세를 과시하기도 했죠.

그러나 그의 음악인생이 처음부터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각종 가요제에서 내리 탈락한데다 음반사를 돌아다니며 오디션을 보고 데모 테잎을 돌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돈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음악 대신 학업을 택하기로 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 무렵 자신이 작곡한 노래들이 방송매체를 통해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알음알음으로 전해져 불리었다고 합니다. 

평소 김광진의 곡에 관심이 있었던 한동준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때 탄생한 곡이 바로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였죠.

그렇게 곡을 쓰기 시작하자 그의 회고처럼 쓰는 곡마다 인기를 얻으며 일약 '히트곡 제조기'에 이르렀죠.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의 '덩크 슛'과 같은 명곡들이 그것을 증명해줬습니다.

이후 결성한 <더 클래식>의 타이틀 곡 '마법의 성'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과거 M 방송사의 9시 시그널 직전에 나오는 S그룹의 광고 음악이 '마법의 성'이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의 말에 따르자면 조관우의 '늪'이 뜨기 전까지 어느 가요 프로에서 6주 연속 1위를 달렸다고 하니, '마법의 성'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동네 방네 가는 곳마다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죠.


■ '마법의 성'이 탄생할 당시 에피소드

어느 날 김광진이 잠자리에 들면서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부인이 곡을 완성하고 잤으면 좋겠다고 권했고, 그래서 30분만에 곡이 탄생했습니다. 그는 이 곡을 가지고 지인의 공연에 가서 편한 마음으로 불렀는데, 공연이 끝난 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자유롭게~"라고 부르는 걸 보곤 히트의 예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법의 성'을 부른 백동우, 미성의 소년에서 훌쩍 성장했군요
.


한때 곡만 쓰면 히트하던 그였지만, 방송에 출연한 뒤 다시 참패를 맛봤습니다.  얼굴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가 TV 화면에 등장하자 팬들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음반 판매량이 급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가수를 통해 히트 친 자신의 곡을 모아 앨범을 발매했는데 그 역시 자신이 음악활동 하면서 가장 팔리지 않은 앨범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아무리 잘 쓰여진 노래라도 그 곡마다 주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수라는 건 한 번 가수면 영원히 가수인 것 같아요. 약간은 해병대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음반이라도 한 번 냈다하면 별 활동이 없어도 가수라고 불리는 것 같아요."

▲ 김광진 4집 솔베이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그는 낮에는 투자전략가로, 밤에는 대중음악인으로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잘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고 나자 오히려 잘 안 풀렸다며, 겸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가수의 대표곡이 아닌 김광진의 곡 중에서는 국민가요 '마법의 성', '편지', '송가', 'hero'를 좋아합니다. '송가'는 저에겐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곡이어서 애착이 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가 꼭 소개하고 싶은 곡은 '편지'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편지'의 사연과 함께 뮤직비디오를 띄웁니다.

 

< '편지'의 드라마와 같은 사연 >

(김광진의 여친을 '그녀', 그녀와 선 본 남자는 '갑'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유복하지 않았던 김광진은 사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쪽 부모님의 거센 반대로 결국 그녀는 선을 보게 됐죠.

그런데 선을 보러 나온 갑 역시 괜찮은 남자였다고 합니다.
몇 차례 만남이 있던 중 우연히 김광진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김광진은 괴로운 마음에 그녀와 선 본 갑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갑과 이야기를 거듭하다 보니
그가 괜찮은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된 김광진은
이 남자면 그녀를 잘 살게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갑에게 김광진은
자신의 유학경험을 조언해줬고
갑 역시 김광진의 인품을 좋아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습니다.
김광진 입장에서는 사랑했던 여자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녀와 선을 본 갑 역시 여친과 함께 유학가자는 제의를 했던 상황이었죠.
때문에 그녀 역시 좋은 두 남자를 두고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죠.

그녀의 결정을 기다린 갑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외국을 떠나면서 한 장의 편지를 남깁니다.

"이 편지를 받은 뒤, 답장을 보내준다면,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이 편지를 끝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그 편지는 갑이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된 김광진은
아내가 받은 그 편지를 토대로 가사를 써주길 부탁했고

그 가사를 넣은 곡을 발표하게 된 곡이 바로 '편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부인이 된 그녀는 왜 갑이 아닌 김광진을 택했을까요?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갑은 자신이 곁에 없어도 후에 다른 좋은 여자를 만날 것 같았지만
김광진은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고 합니다.

'편지'는 이런 사연만큼이나 참 아름다운 곡입니다.
아내와의 삼각관계를 두고
아내가 작사하고 남편이 작곡한 이색적인 매력이 있는 노래입니다.




<참고 >
'편지'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인물은 3명입니다.
우선 주인공인 김광진, 주인공의 애인역의 전혜진 그리고 유희열.
이 뮤직비디오에 나온 전혜진은 실제로는 영화배우 이선균의 부인입니다.
그리고 유희열은 뮤직비디오 중간쯤에 나오는데,
지금의 짧은 머리와는 다른~ 살짝 어색한 모습입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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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법의성 2009.12.19 0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지란 노래가 그렇게 씌여진 것이군요. 첨 알았습니다.

  2. K 2009.12.19 06: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광진과 김광민을 헸갈려왔네여.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 BlogIcon 칸타타~ 2009.12.19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ㅎ
      종종 헛깔려하시는 분들 계십니다.
      김광민, 김광진 곡을 쓰는 분들인데
      김광민은 피아니스트이고, 김광진은 가수이죠.

      김광민은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고
      김광진은 음악을 좋아하는 증권업계 종사자죠.

  3. sopie 2009.12.19 0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클래식이란 이름
    모처럼 들어보는것 같습네여.
    가수가 요즈음 뭐하나햇더니
    펀드계에 있었구나.

  4. 여우비 2009.12.19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편지의주인공이 김광진인줄 알고있었네요.
    그반대였구나.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