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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진행형인 역사의 아이러니

경남 사천,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에서

김형오

설 연휴 마지막 날,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지(胎室祉)와 단종 태실지를 찾았다. 한파가 기승을 부렸지만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서 고향 고성 성묫길에 일부러 짬을 냈다.

예로부터 태(胎)는 태아의 생명줄이라 하여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 왕실은 태를 왕자나 공주의 몸처럼 귀하게 여겨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실(胎室)을 조성한 뒤 소중하게 모셨다. 태실이란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 깨끗이 씻은 태는 작고 홀쭉한 항아리(內壺)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한 뒤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더 큰 항아리(外壺)에 넣고 길일(吉日)을 가려 태실지에 묻었다. 국왕의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했으며 태실 주변에는 금표를 세워 접근을 제한하고 벌목‧채석‧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운 범위는 왕은 300보, 대군은 200보, 왕자와 공주는 100보였고 한다.

조선 왕실이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태를 풍수지리가 좋은 땅에 묻으면 좋은 기를 받아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고 국운이 흥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둘째,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들의 명당을 국유지로 만들어 태실로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싹을 자르자는 의도에서였다. 셋째, 왕릉을 도읍지 1백리 안팎에 모신 반면 태실은 팔도의 명당에 조성함으로써 왕조의 은덕을 백성들이 두루 누리게 한다는 통치 철학에서였다.

▲세종이 탄생한 지 22년 되던 해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조성된 세종대왕 태실지는 1975년 경상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태실비는 1734년(영조 10년)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높이 180cm, 너비 33cm, 두께 27cm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산 위에 있던 것이 이 자리로 옮겨졌다.

내가 찾은 사천시 곤명면 지역은 풍수지리가 빼어나 지관(地官)들은 물론 역대 왕실에서 관심이 깊던 명당이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 왕권 강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힘을 쓴 세종은 아끼던 원손(元孫)인 단종(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외아들)의 태실을 자신의 태실을 묻은 앞산에 안치하도록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논밭 한가운데 우거진 소나무 숲이 동그랗게 펼쳐져 있는 곳. 이곳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의 태실지이다. 태실로 정해진 명당들은 대개 이처럼 마당 한가운데에 무쇠솥을 엎어놓은 형상, 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 형상인 ‘돌혈(突穴)’이라고 한다.

교장을 지내고 교직에서 은퇴한 최남기 선생이 나와 동행해 안내 겸 해설을 맡아 해주셨다. 해박한 역사 지식에 풍수지리에도 밝아 나로서는 조금 생소했던 태실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 선생 견해에 따르면 풍수학 상으로는 오히려 세종보다도 단종의 태실지가 더 명당이란다.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이렇게 좋은 묏자리는 전국에 별로 없단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둘 다 지근거리인 명당에 태를 묻었지만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단종은 가장 슬프고 불행했던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니 말이다. (※단종에 관한 이야기는 내 책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장릉, 청령포 편>와 <이 아름다운 나라-사릉 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단종의 태실지는 풍수 대가들의 추천을 받아 세종이 직접 낙점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풍수의 역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종 태실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면 역사의 과녁을 만나게 될까.

과연 명당이란 명성에 걸맞게 단종의 태실지는 사방이 나지막한 원형 숲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배꼽 모양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거북 등처럼 도톰하게 언덕을 이룬 이런 땅을 풍수에서는 ‘돌혈(突穴)’이라 일컫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이 기의 흐름을 막아 기가 태실지에 몰려 있어야 명당의 조건에 부합한다.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 우리는 단종 태실지로 갔다.

 

▲1975년 경상남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된 단종 태실지. 태실비는 1734년(영조 10년)에 높이 170cm, 너비 51cm, 두께 21cm 규모로 조성되었다.

단종의 태를 언제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단종 태실지가 경북 성주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최남기 선생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사천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세종, 단종 태실 수개 및 표석 수립 의궤>에 따르면 곤양현(지금의 곤명면)의 태실지를 중수한 기록이 나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을 겪으며 왜적들에 의해 도굴되고 파괴됐던 태실지를 1601년(선조 34년) 일부 수리하고 1734년(영조 10년) 대대적으로 중수(重修)했다고 합니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비도 이때 세워졌습니다. 다만 성주 사람들이 단종 태실의 존재를 주장하는 걸 보면 성주에 있던 태실이 사천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태실을 처음 언제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작년 가을에는 성주 쪽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의궤도 확인하고 태실지도 둘러보고 갔습니다.”

올해 1월에는 문화재청 소속 전문위원 다섯 명이 사천에 내려와 현지 조사를 하고 갔다. 위원들은 사천시청 문서고에 보관된 의궤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태실지가 있는 은사리에서 현장 조사를 벌였다. 조사를 마친 위원들은 이날 “우리나라 전체 25곳의 태실지 중 13곳은 이미 훼손되고 현재는 12곳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는 상태가 양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가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 지정될지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세종 태실지는 단종보다 높은 곳, 사람이 다니지 않아 꽤 미끄러운 산길을 10분 정도 걸어올라간 곳에 있었다. 꾸불꾸불 산을 내려오던 용이 한숨을 돌리면서 힘차게 비상하다가 딱 멈추어 봉우리를 이루어낸 돌혈, 이런 곳이야말로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의 필수품인 기(氣) 계측기를 꺼내든 최 선생의 설명은 계속된다.

“계측기를 작동시켜 보면 바로 이곳으로 기가 이렇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뒷산의 기가 급격히 돌혈 쪽으로 뻗어나야 좋은 형세인데 세종 태실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물이 흘러 기를 가두고 있어야 명당입니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감출 장(藏)에 얻을 득(得)자를 써 바람은 감추고 물은 얻는다는 뜻이다. 산으로 병풍을 친 경주 양동마을이 장풍(藏風)이라면, 물이 돌아나가는 안동 하회마을은 득수(得水)로 명당의 요건을 갖춘 곳이다. 최 선생은 풍수에서 더 중요한 건 바람보다 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설명을 듣다가 조금은 생뚱맞게 이런 생각을 했다. 최 선생은 세종보다 단종 태실지가 명당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단종 태실지는 장풍보다는 득수에, 세종 태실지는 득수보다는 장풍에 더 특장(特長)이 있는 것인가. 단종 태실지는 춥고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 오래 있을 수 없었던 반면 세종 태실지는 잔잔한 봄바람이 살랑거려 자리를 떠나기가 아쉬웠던 까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였던 1929년, 일제는 경향 각지에 있던 태실들을 모두 파헤쳐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이전한 뒤 원래 조선 왕실 창덕궁 소유였던 태실 자리는 아예 복원을 못하도록 모두 민간에 팔아 사유화시켜 버렸다. 한반도 명산과 요지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한 일과 다름없는 치졸하고 저열한 행위이다. 아무튼 명당으로 소문난 자리다 보니 당대의 권세가와 재력가들이 앞을 다투어 태실지를 사 들였다.

그 뒤 이 태실지들은 모두 사설 묘로 둔갑해 버렸다. 단종 태실지에는 유물이랄 것도 없이 거북비와 버섯 모양의 석조물, 단 두 점이 최씨 무덤 밑에 외롭고 초라하게 서 있다. 세종 태실지 역시 김해 허씨와 하동 정씨의 가족 묘만이 덩그러니 산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왕조 당시의 조형 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 상개연엽석, 지대석, 돌난간, 팔각대, 주춧돌 등의 석물은 원래 산봉우리에 있던 태실지에서 50m쯤 떨어진 산자락에 한데 모여 있다. 주객의 전도랄까. 그나마 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유물들을 한 군데로 모아 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태실 모습과 그 조형물, 관련 유물들.

자, 그렇다면 명당을 유택(幽宅)으로 삼았으니 그 당사자와 후손들은 출세하고 번성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당대를 영예롭게 살았거나 후세에 크게 자부할 만한 인물이 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종의 태를 묻었던 자리에는 우리나라 한 대기업과 관련 있는 인사의 묘가 조성되었고, 단종 태실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로 규정지은 사람이 묻혀 있다. 임금의 태실지에 조상을 묻었다고 해서 자손들이 흥하고 망하는 건 아닌 듯 싶다. 하물며 단종의 태실지도 세종이 손수 낙점했다지만 단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불운한 생애를 살지 않았는가. 태실지를 사들여 사묘로 만든 이의 비석에도 그 후손이 이런저런 직위를 지냈다고 쓰여 있으나 그리 대단한 벼슬은 아니었던 것 같다. 풍수는 결국 마음이고, 자기 할 나름인 것이다.

▲세종대왕 태실비를 쓰다듬으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 있는 최남기 선생. 추운 날씨인데도 열정적인 해설을 들려준 최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원래 있던 태실은 멀리 서삼릉으로 옮겨 갔고 지금은 다른 성씨들이 묻혀 있는 이 태실지는 과연 문화재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갑자기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 시대 최고의 명당인지라 산세는 수려하고 경관이 빼어났다. 죽은 이들을 위한 명당(明堂)이 산 사람들 눈에는 명소(名所) 혹은 명승(名勝)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진다. “명당은 땅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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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인드 2012.02.01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당은 마음에 있다...
    명언이십니다.

  2. BlogIcon choijinsang 2012.02.01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당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있다..."...

 

‘문화 선진국 코리아’를 세계에 알리다
-G20 정상회의의 문화 외교적 성과

 

  “외국에 나가면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곤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니까요. 국제회의를 박물관에서 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봅니다. 예컨대 오는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한번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다면 어떨까요? 그게 여의치 않다면 정상들과 동행한 퍼스트레이디들을 박물관으로 초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남부럽지 않은 문화유산을 지닌 나라니까요.” (『…이 아름다운 나라』 103쪽에서)


올해 4월에 펴낸 내 책(『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그 제안은 이루어졌다. 11월 11일, G20 정상회의의 첫 공식 행사인 환영 리셉션과 업무 만찬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것이다. 이 자리에는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의 수장, 재무장관 등 140여 명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각 나라의 귀빈들이 공식 환영식장인 으뜸 홀을 지나 리셉션 장소로 들어서는 동안 ‘역사의 길’이라 불리는 이동 통로에선 빗살무늬토기·백제금동대향로 등 10여 점의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자태를 뽐내며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머물게 했다.

'역사의 길'에 배치된 문화재 일부

출처: 헤럴드 경제

세계 최고의 프리미엄 포럼인 G20 정상회의가 거둔 성과는 가치로 환산하기가 벅찰 정도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첫 의장국으로서 새로운 트렌드와 리더십을 제시했고,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켰다. ‘서울 액션 플랜’이 담긴 선언문 채택으로 경제 문제 대응에 국제적인 공조를 이루게 되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논의를 주도했다. ‘위기 극복’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 성장’으로 컨셉트가 진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즈니스 서밋’을 출범시킨 것 또한 한국의 창의성이 빛을 발한 사례였다. 무엇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행사를 원활하게 치러냄으로써 향후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신 코리아 프리미엄을 누리게 될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한국의 기적’이란 타이틀로 코리아의 저력에 찬사를 보냈다.


나는 여기서 특별히 문화 외교적 측면에서 거둔 성과에 주목하려고 한다. ‘한국문화의 재발견’이란 평가가 나올 만큼 G20 정상회의는 ‘문화 선진국 코리아’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행사였다. 한글·한옥·한식·한복의 우수성이 집중 홍보되었다. 우선 그 첫 테이프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끊지 않았는가.

국립중앙박물관 만찬장

출처: 헤럴드 경제

같은 시각, 각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은 서울 용산에 있는 리움미술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세 가지 메뉴 중 한 가지를 선택해 만찬을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자리를 옮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연주로 쇼팽과 리스트 등을 만났다. 콘서트홀에는 고(故) 백남준 선생의 걸작 <나의 파우스트-자서전>을 비롯한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영부인 김윤옥 여사는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연구해 쓴 요리책 『한식 이야기』를 선물했다. 보쌈·김치찌개 등 갖가지 한국 음식이 레시피와 함께 소개된 책이다.

배우자 환영리셉션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11일 오후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의 배우자 환영리셉션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2010.11.11 seephoto@yna.co.kr



다음 날인 11월 12일에도 각 나라의 정상들이 코엑스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 퍼스트레이디들은 ‘대한민국 공부’에 나섰다. 창덕궁과 한국가구박물관 등에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아시아 3대 정원’ 중 하나인 창덕궁을 찾은 영부인들은 후원(비원)과 부용지·규장각을 거쳐 옛 왕실의 쉼터였던 영화당에서 가야금·해금·대금 합주로 <영산회상>을 감상했다. 사대부 집을 본떠 지은 연경당에서는 한복 패션쇼를 관람하며 우리 옷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서울 창덕궁 한복패션쇼. 안중열 기자(정경뉴스)

출처: 정경뉴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한국가구박물관에서는 우리 전통가구의 매력과 실용성에 빠져들었다. 10여 채로 이루어진 박물관에 전시된 2000여 점의 전통가구들을 둘러본 다음 한식으로 오찬을 즐겼다. 비무장 지대에서 생산된 철원 쌀로 밥을 짓고 횡성 한우, 완도 전복, 고흥 유자, 공주 밤, 가평 잣, 남해 멸치, 영덕 대게 등 8도 특산품으로 정성껏 차린 식탁이었다. 구절판과 신선로 등 궁중 음식이 눈·코·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물론 김치도 빠지지 않았다. 그릇에도 신경을 써 중요무형문화재인 이봉주·김선익 선생에게 제작을 맡긴 방짜 유기 등을 사용했다.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이처럼 효과적인 홍보 기회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
캐나다 총리 부인 로린 하퍼 여사는 오후의 ‘자유 시간’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난타>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G20 서울 정상회의 참가국 정상 부인들이 12일 창덕궁에서 한복 패션쇼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인도네시아 대통령 부인 크리스티아니 헤라와티 여사, OECD 사무총장 부인 룰루 구리아 여사, 터키 총리 부인 에미네 에르도안 여사, 김윤옥 여사, 인도 총리 부인 구르샤란 카우르 여사, 유엔 사무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에티오피아 총리 부인 아제브 메스핀 여사. 뒷줄 왼쪽부터 베트남 총리 부인 쩐타인끼엠 여사, 캐나다 총리 부인 로린 하퍼 여사, 싱가포르 총리 부인 허징 여사, EU 상임의장 부인 헤이르트라위반롬푀위 여사, 남아공 대통령 약혼녀 글로리아 본기 은게마, 멕시코 대통령 부인 마르가리타 사발라 고메스 델 캄포 여사, 말라위 대통령 부인 칼리스타 무타리카 여사. [연합뉴스]

출처: 연합뉴스

창덕궁과 리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연작으로 펴낸 내 책(『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이 아름다운 나라』)에도 상세하게 소개해 놓은 곳들이라서 더욱 반가웠다. 마치 내가 각국의 퍼스트레이디들과 함께 고궁과 미술관 등을 둘러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세련되고 품격 높은 문화 마케팅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무엇보다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사실상 우리나라에 돌려주기로 양국 정상 간에 극적인 합의를 했다는 뉴스였다.
 

외규장각 도서(SBS 자료화면)

출처: SBS뉴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이 책들에는 한국인의 영혼과 역사가 담겨 있으므로 조건 없이 돌려주어야 한다”는 철학적 견해를 펼쳐가며 반대 의견을 잠재웠다고 한다. 프랑스 국내법상 ‘영구’란 표현이 배제되고 5년마다 한 번씩 갱신해야 하는 대여 형식이지만, 그래도 내용적으로는 반환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는 진전된 결정이다. 이 문제는 특별히 내가 2년 전 국회의장으로서 프랑스 상원의장을 만나 강력하게 협조를 부탁했던 내용이라서 감회가 남달랐다. 미흡한 감이 없지 않지만 프랑스 국내 사정과 우리의 실리를 적절한 선에서 절충해 얻어 낸 외교적 성과로 평가하고 싶다.

*1782년 정조가 규장각을 4곳으로 확충하면서 지정한 강화행궁 안의 별고였던 외규장각 안에 보관해 오던 왕실 관련 자료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들 중 사료적 가치가 높은 340여 권의 책을 약탈해 갔다. 경희궁 건축 사료 등 이본이 없는 유일본이 30여 권 포함돼 있다.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 기였던 정조 때 정리된 것들이 많아 그림과 글자 모두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일제 강점기에 가져갔던 규장각 도서들도 모두 돌아오게 되었다. 국내에는 없는 유일본(6종 28책)도 포함해서다.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11월 14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조의궤와 규장각 반출 도서 등 150종 1205책의 반환에 합의했다. 이 또한 G20 정상회의가 낳은 또 하나의 문화적 성과이다.

G20 정상회의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거대한 국제 행사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세계무대의 주역으로서 새로운 2막, 3막, 4막…을 올려야 한다. ‘경제’와 함께 ‘문화’라는 키워드가 쌍두마차를 이루어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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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망원경 2010.11.15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견지명이 탁월하십니다.
    우리 문화의 향기가 세계를 움직이는 리더들 가슴에
    짙은 무늬를 남겼을 것 같습니다.

  2. 아름다운우리옷 2010.11.16 0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스트레이디들에게 한복을 입혀 사진을 찍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자기가 입은 한복은 선물로 주고 말이다.
    물론 이번에 불참한 미셸 오바마와 카를라 부루니가 모델 역할을 해주었더라면
    보그나 엘르 같은 세계적인 패션지들도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 도쿠리 2010.11.18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여 ㅋㅋ 한번 보고싶네여

    • 시리우스 2010.11.18 0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최국의 전통의상을 입는 이벤트는 APEC회의 마지막날 하고 있습니다. 허나 APEC은 아시아지역 국가들의 행사라 미주, 구주 쪽 정상들의 한복입은 모습을 볼 기회가 없는게 아쉽습니다.

  3. 블루펜슬 2010.11.17 0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런 식의 접근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매체들이 경제 성과만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
    문화라는 키워드로 G20을 결산한 시도가 신선해 보입니다.

  4. 책 로스트 이휘소(ㅜㅜ) 2010.11.17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휘소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계(이휘소의 한국인 제자였던 강주상이 옳은 점이 있음,책 이휘소평전)

    소립자 물리학계 천재학자 이휘소(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서(편지)를 이휘소에게 보냈고 1977년에 일본에서 어머니에게 친서를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말했으나 분실했고 복사본은 이휘소가 갖고 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음)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벤자민 리는 경기고 2학년 때 대입검정을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입학.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1956년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를 수석졸업, 1958년 피츠버그대학 석사,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이학박사를 받고, 28세로 이 대학 정교수가 된다. 이후 뉴욕주립대학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학 이론물리학교수 겸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 연구부장 등을 맡는다.

    그는 특히 1960년대 SU(6) 군이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1970년대 쿼크와 참 이론(참 쿼크가 이론적으로 존재하며 참(c) 쿼크의 질량을 계산)으로 명성을 높였으며, 게이지장 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 독보적인 기여를 한다. 1972년 발표된 게이지장 이론은 그의 가장 훌륭한 공로로 1979년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살람은 이를 거의 완벽한 이론이라고 극찬한다.

    1974년 9월(약 한 달동안) 이휘소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서울대에 AID교육차관 타당성조사차 20년 만에 귀국한다. 이때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 국가안보위협을 상기시키며 그의 귀국을 요청한다. 핵무기개발에 참여하고 싶지 않던 그는 대통령의 제의를 사양하지만, 강대국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국의 신세에 고민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개발 집념 1977년 3월 이휘소는 다시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받는다. 주한미군 1만7천여명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급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이휘소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일기에 담는다.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조국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원리를 제공한다면,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죽는다! 내가 죽어 조국을 살릴 수 있다.…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소서.”

    마침내 이휘소는 친분있는 외과의사를 찾아가 미사일·핵무기 제조원리를 따로 정리·축소해 만든 기밀문서를 내민다. 그의 다리 살 속에 소독된 종이가 넣어졌다. 5월 20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도쿄를 방문, 그날밤 비밀리에 청와대에 도착해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전달한다.

    1977년 6월16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가족과 함께 자가용으로 집을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자 트럭 몇 대가 그의 차에 따라붙었다. 일리노이주에 가까운 케와네시 근처(고속도로)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와 가족이 탄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차 앞머리가 처참히 부서지고 가족 모두 정신을 잃는다. 가족들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이휘소는 사망하고 만다.

    이휘소가 한국에게 미사일 및 핵 제조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후,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한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정부에 ‘인권탄압중지, 긴급조치 즉각해제, 독자적 핵개발추진 즉시중지’ 등을 압박한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자기들은 이미 다 만들어놓고 남의 나라에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라고 반발한다. 이런 한미대립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사일·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78년 8월 26일 한 군사기지에서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이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국의 일부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 핵무기개발은 시간문제였다. 미국은 보다 강력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숨까지 내놓은 이휘소를 생각하면 박 대통령은 더더욱 멈출 수 없었다......

    박정희정부 핵무기개발 추진 결정적 자료 드러나(주간조선 2010년 1월18일(2089호)에서)
    2010년 1월 오원철 경제수석이 1972년 9월 8일 작성한 보고서중 일부가 국가기록원 정보공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2급비밀문서로 분류된 이 문서들에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 개발방향’ ‘우라늄탄두와 플루토늄탄두에 대한 장단점 비교’ 등 개괄내용과 함께 ‘우리나라 기술수준에 맞춰 플루토늄탄을 개발한다’는 잠정결론이 담겨져 있다. 이 문서들은 박정희정부 당시 핵무기개발이 추진됐다는 결정적 근거자료이다.

    그러나 오원철 전 수석은 당시 연구진들이 작성한 핵무기 기술개발 관련 핵심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현재 국가기록원에도 남아있지 않아 실종상태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중이던 핵무기 관련 보안문서 봉투가 외부로 유출됐다는 것이다. 담당자였던 오원철 전 수석은 이 문서를 봉인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넘겼고, 이것은 나중에 전두환 신군부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몇 년전에 개정판을 내고 최근에 2010년판(개정판)을 냈는데 소설(작가의 말이 있음)이 맞죠. 참고로 1026이라는 책이 최근에 출판되었죠.
    이휘소 박사는 1978년에 귀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우리과학 100년이라는 책과 이휘소 상,중,하(2002년)등등에 나왔죠.(이휘소 하권에 이휘소의 어머니와 저자가 대화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편지 얘기) 1977년 6월당시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등에 이휘소 박사의 사망 기사와 조선일보의 1977년 7월5일자에 후속기사(교통사고 경위가 명확하게 조사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에게 질의했으나 모른다고 답변)가 나왔죠.

    고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에서도 최형섭 박사가 이휘소 박사로부터 우리나라로 귀국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정리할 것(대학교수와 페르미연구소의 이론물리 연구부장을?)이 있어서 아직은 귀국할 때가 아니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죠.

  5. 피알맨 2010.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세기는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리드합니다.
    문화 마인드를 갖춘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김형오의 행복편지


창덕궁에 있는

‘세종대왕의 앵두나무’를 아시나요?



안녕하세요? <행복이 가득한 집> 독자 여러분. 김형오입니다.


지난 4월, 아내와 함께 창덕궁 나들이를 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것은 다들 잘 아시죠?


잠시 일상을 접고 집밖으로 나서면 새롭게 만나게 되는 사람이나 예기치 못한 뜻밖의 상황으로 일상과는 다른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 준비나 계획 없는 즉흥나들이가 더 묘미있다고도 하죠. 하지만 고궁같은 문화 유적이나 박물관을 갈 때는 미리 공부를 하고 가야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을 뿐더러 더욱이 함께 간 아이들에게 설명도 해주고…, 그 정도는 되어야 앞서가는 부모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준비할 수도 있다지만 저처럼 앞서 다녀온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창덕궁에 대한 느낌과 몇 가지 정보를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간 날은 나들이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습니다. ‘고향의 봄’이란 동요 가사처럼 4월 중순의 창덕궁은 ‘울긋불긋 꽃 대궐’을 차리고 있었지요. 신록이 한창 자태를 뽐내는 때라서 나뭇잎들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은 햇살이 아내의 이마에서 연두빛깔로 연하게 일렁이고 있었고, 제 마음도 연둣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습니다.


참, 언제부터인가 고궁에 들어서면 꼭 전각(殿閣)의 뒷면이나 옆면을 챙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대개 화려한 전각 앞면에서 받은 설렘 가득한 감흥이 뒷면이나 옆면을 보면서 차분한 감흥으로 정리되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 ‘다각적 감상’이라고 하는데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만 필요한 게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방법입니다. 독자여러분도 ‘다각적 감상’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넓은 창덕궁을 좁은 지면에 일일이 다 소개할 순 없고, 우선 대조전(大造殿)으로 여러분을 안내하렵니다. 자 잘 따라오세요. 대조전은 한자 그대로 크게 만든다, 위대한 창조,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공간입니다. 성군의 자질을 갖춘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이름이지요. 왕비가 거주하며 왕실의 대를 이어가던 곳으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궁 밖에서 대조전 뜰까지 가려면 적어도 5개 이상의 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구중궁궐(九重宮闕)이란 말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대조전은 중앙에 6칸 대청을 두고 그 좌우로 4칸씩의 온돌방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임금님 내외가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때면 그 양 옆 여덟 개의 방에서는 여덟 명의 상궁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군요. 자객의 침입을 막고,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나요? 역시 왕과 왕비는 보통사람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조전 왼쪽으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면 수라간이 나옵니다. 창문 너머로 내부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일제 오븐과 타일을 바른 벽, 수도 시설 등이 보입니다. 국내 최초의 현대식 부엌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연료로는 숯을 사용했다더군요. 임금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 할 때 뿐만아니라 온돌을 덥히는 데도 나무가 아닌 숯을 썼다고 하니, 하루에 필요한 숯이 만만치 않은 양이었을텐데 그 숯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여러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답은 구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과 후궁인 경빈 김씨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낙선재(樂善齋)도 퍽 인상 깊었습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헌종은 왕비를 맞았으나 그녀는 후사 없이 요절하고, 그래서 두 번째 왕비를 간택하는 행사를 열고 조선 8도에 13세부터 17세까지 사대부 집안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립니다.


원래 왕은 왕비후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지만, 호기심 많은 헌종은 왕실 어르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종 심사 때 몰래 신부감을 살폈다고 합니다. 헌종은 은근히 한 여인을 맘에 두고 그녀가 간택되길 바랐지만 왕실 어르신들은 다른 여인을 왕비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왕비로부터도 3년이 지나도록 후손이 없자 대가 끊길까 걱정한 왕실에서는 후궁을 맞게 됩니다. 그 후궁이 바로 헌종이 첫눈에 반했던 그 여인, 경빈 김씨였지요.


헌종은 경빈 김씨를 낙선재에 살게 하면서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년 뒤 23살 나이로 헌종은 자식도 없이 승하하고 맙니다. 경빈 김씨와의 아름다운 사랑도 막을 내립니다. 경빈 김씨는 77세까지 살았다더군요.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 ‘오래도록 즐거운 문’이란 뜻인데 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그런 바람과는 달리 행복은 너무나 짧았으니 말입니다. 낙선재의 꽃담에는 장수를 뜻하는 거북과 다산을 의미하는 포도 등의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그런 소망도 헛된 꿈이 되고 말았지요. 조선시대에 가장 큰 집이 궁궐이었지만 그곳이 가장<행복이 가득한 집>이었을까하는 상념에 잠기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 대답은 독자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창덕궁 정원에서는 앵두나무가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효자였던 문종이 앵두를 유난히 좋아했던 아버지 세종을 위해 손수 정원에 심었다고 합니다. 바로 효심 깊은 ‘세종대왕의 앵두나무’입니다.


여기서 잠깐, 정보 하나를 귀띔해 드릴까요? 올해 6월 중순쯤 창덕궁에서는 궁궐 과실 맛보기 행사가 열릴 예정이랍니다. 앵두와 오디가 익는 철에 맞추어 관람객들을 위해 마련하는 이벤트라는군요. 저도 시간만 허락된다면 외손자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참여하고 싶습니다. 입술과 손가락을 앵두와 오디 빛깔로 물들인 외손자에게 세종대왕의 얘기를 들려주며 함께 걷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흐뭇합니다.


600여년 이라는 세월의 길이와 역사의 깊이만큼이나 영욕이 명멸했던 공간 창덕궁. 아이들에게 전각과 풍경 뒤에 깃든 역사의 한 자락을 얘기해 준다면 생생한 산교육이 되지 않을까요? 꼭 창덕궁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6월에는 고궁이나 유적지를 자녀와 함께 찾아가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되새겨 보는 추억하나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화창한 봄날, 창덕궁을 나서며 문득 역사 소설이라도 한 편 써 보고 싶다는 작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창덕궁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며 정원을 거닐었을 여러 임금님들, 그 분들이 했을 고민과 사색이 지금의 제 마음과 그리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김형오


1947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학원 졸업 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14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999년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얼마 전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생각의 나무)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그밖에 <돌담집 파도 소리> 등 다수의 문집이 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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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문형식 2010.02.08 1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자 발견 : 대게 화려한 전각 앞면에서 받은 설레임 기득한

    誤字
    1) 대게(x) - 대개(0)
    2) 설레임(x) - 설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