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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4
                              -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하는 종군 기자 리포트



   ‘술탄’이란 아이디를 쓰는 분이 나의 네이버 블로그에 두 개의 덧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 2편을 읽고 나서입니다. 몇 줄 발췌해 옮겨 보면….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누구도 이처럼 이스탄불을 철저히 뒤지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자 비잔틴 제국의 오욕인 1453년 5월 29일의 역사를 깊은 영혼과 가슴으로 파고들었던 이는 흔치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런 이름은 이 도시에 빠져들어 작은 돌길을 거닐며 지난 세월의 바람 소리와 155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성벽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바로 공존과 화해의 이름이다.

  이 도시의 오랜 돌과 바람과 역사는 그들의 아픔과 사연을 온몸으로 읽어내려 준비된 한 인간에게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같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너무 기대된다. 이스탄티노플!!! 앞으로 나도 이 도시를 그 분의 저작권 허락을 받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1453년의 생생한 전투 장면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것도 너무 잘난체하는 전문가의 어려운 설명이 아니라, 제법 유명한 한 공직자의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으로 전해주는 묘미가 더하다.”

 

  아이디(술탄)를 클릭했더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 내가 터키로 떠나기 전 자문도 해주었던 이 교수로부터 그런 과분한 칭찬을 듣고 보니 힘이 불끈 나면서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나로선 벅차기만 한 이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기가 이제는 힘들어졌구나 싶어서입니다.

  정말입니다. 이희수 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이 아니었더라면 퇴근을 새벽 한 시 이후로까지 미루어가며 사진을 고르고 캡션을 다는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이름 지은 도시 ‘이스탄티노플’은 무제한 사용을 허가합니다. 한 푼의 저작권료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많이만 사용해 주십시오. 간혹 저작권자를 언급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누구라도 ‘이스탄티노플’을 이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시장(市長)도 없는 그 도시의 명예시민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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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를 탄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을 가리키며 강력한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창과 칼과 활과 도끼로 무장한 채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여덟 명의 호위병들은 술탄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파노라마 박물관 전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이 각자 자기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처음 소개하는 ‘사진 같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뒤에 또 언급하겠지만 ‘이스탄티노플’에 새로 생긴 세계 최대의 ‘파노라마 극장’에 있는 어마어마한 그림의 중요 장면들을 한 컷씩 설명하면서 세계사를 바꾼 1453년 5월 29일, 그 치열했던 전쟁의 현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내가 전사(戰士)가 되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고 죽여야만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의 그 무자비한 야성 본능이 실감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땀으로 목욕을 한 채 황성 옛터와 허물어진 성곽 사이를 걷고 또 걷던 나와 우리 일행들 모습이 그립게 떠오릅니다. 어쩌면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한 작전 지도를 만들려는 오스만의 병사들처럼 우리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과 그 주변을 샅샅이 탐사했습니다.


  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들이 여러분을 550여 년 전 격전의 현장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 육지 성곽 편의 마감 인사를 갈음합니다. 다음 편은 골든 혼 성곽으로 이어집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크게 세 군데입니다. 블라케르나에 황궁의 끝 부분에서 카리시우스 문까지, 거기서 성 로마노스 군문까지, 또 거기서 레기움 문 근처까지가 집중 포화를 받았습니다. 리쿠스 강을 중심으로 1킬로미터에 이르는 메소테이키온 성벽 지역은 그 중에서도 핵심부였습니다. 공격과 수비 모두 이곳에 집중되었습니다. 방어군 입장에서 가장 취약점이 많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술탄(메메드 2세)은 이곳 성벽 400미터 앞에 본진을 쳤고, 전투시에는 성벽 코앞까지 가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비잔틴군으로 하여금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인해전술로 밀어 부쳤습니다.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역시 이곳을 자기 무덤이라 생각하고 병사들과 한 몸이 되어 싸웠습니다. 파노라마 극장의 전투 장면들도 바로 여기를 중심 배경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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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화염의 위력인가. 보병과 기마병을 총동원해 온갖 무기를 앞세우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하는 오스만 투르크군 병사들에게 비잔틴군이 불 폭탄 세례를 퍼붓고 있다. 오스만 병사들과 함께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채 화형식(火刑式)을 당하고 있다.
창검을 들고 방패·갑옷·투구 등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유럽 및 아시아 지역에서 총동원되다시피 한) 오스만 정규군이다. 흰 두건을 쓴 정예 예니체리 부대들도 칼날을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내닫고 있다. 오른쪽으로 복장과 무기가 각양각색인 비정규군 바시바조우크(Bashi-bazouks)의 모습도 보인다. 그 뒤로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막사 수천 개가 비온 뒤 죽순 돋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막사와 투석기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것이 금각만(골든혼)이다.

* 그리스 화염 : 'Greek Fire'로 불리던 화염 방사기 방식의 불 폭탄.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탁월한 진가를 발휘했다. 이 전쟁 800년 전부터 사용되어 육상·해상·지하 땅굴전 등에서 위력을 나타냈다. 발화재는 지하 석유류에서 채취해 썼지만 정확한 제원(諸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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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彼我)조차 구별할 수 없는 아수라장 전쟁터. 공격에 나선 오스만 보병들의 등 뒤에서 대포는 무자비하게 작렬했다. 목숨은 도구에 불과할 뿐, 오로지 전진 또 전진이었다.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의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무너지는 성벽더미와 함께 두 제국의 병사들이 서로 뒤섞여 성 아래로 아득하게 추락하고 있다. 나뭇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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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죽느냐 죽이느냐, 무너뜨리느냐 지켜내느냐. 해자(垓子/垓字)는 이미 메워지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오스만 투르크군과 비잔틴 제국의 병사들이 외성벽을 사이에 둔 채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림 왼쪽 끝 가운데 성벽에는 대포알이 박혀 있다. (아직도 성벽 어딘가에 대포알이 박혀 있다는 파노라마 박물관장의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대포알을 찾아 얼마나 성곽을 헤매고 다녔던가?!) 주탑마저도 휑하게 구멍이 나 버렸다.
*공성탑(攻城塔)으로는 불길이 치솟고 하늘은 자욱한 포연(砲煙)으로 뒤덮였다. 정규군 뒤에서 출격 준비를 마친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함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제국의 수도로 군림했던 이 도시의 운명도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인가.

 

* 공성탑 : 오스만 투르크 쪽에서 비잔틴 제국의 성 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성벽 높이와 대등하게 만든 사다리 구조를 지닌 탑. 목재를 썼으므로 만들기 쉽고 옮기기 편했던 반면 튼튼하지 못하고 불에 잘 타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차례에 걸친 비자틴군의 기습으로 여러 대가 파괴되어 실제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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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5월 24일)이 뜬 뒤로 닷새가 지나 달이 **터키 국기 모양으로 기울어가던 5월 29일 새벽, 화염과 포연이 콘스탄티노플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캄캄했던 밤하늘이 대포와 그리스 화염 불기둥으로 인해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림 왼쪽 주탑 위는 거인 하산이 진두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가 콘스탄티노플 성에 올라가 최초로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을 꽂는 장면. 붉은색 오스만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쌍두 독수리가 그려진 비잔틴 국기는 성벽 아래로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주요 상업 기지로 삼고 있던 동맹국 베니스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도 이 순간 같은 운명을 맞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오스만 영웅은 비잔틴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온몸에 화살과 돌 세례를 받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고 만다. 승리에는 영웅적 희생이 따르는 법. 성벽 함락의 결정적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 보름달 : "보름달이 떠 있는 한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전이 당시 널리 전파돼 있었다. 이날(5월 24일)은 공교롭게도 월식까지 있었다.
** 터키 국기 : 터키 국기는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고 이는 오스만 투르크 군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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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성벽 사이로 정규군을 앞세운 최정예 예니체리군이 깃발을 나부끼며 물밀듯이 성 안으로 쳐들어가고 있다.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대포 소리와 뒤섞여 하늘을 찢어발길 것만 같다. 술탄(메메드 2세)은 첫 성곽 돌파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리고, 모든 병사들에게 3일간의 도성 약탈권을 보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른쪽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비잔틴의 상징인 독수리상도 곧 날개가 꺾인 채 추락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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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노라마 박물관에 그려진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 오스만 병사들이 발포 준비를 하고 있다. 거포는 포신 길이가 8미터 이상이었고 돌로 된 포탄은 600킬로그램을 넘는 무게였다.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한 술탄의 전략은 탁월했다. 헝가리는 당시 비잔틴 편이었고 우르반은 비잔틴 황제 밑에서 일했었다. 그러나 네 배의 급료와 충분한 대포 제작비를 지원하겠다는 술탄 쪽으로 기꺼이 몸을 팔았다. 우르반은 결국 전쟁터에서 죽고, 유럽의 강국 헝가리는 그 후 오스만에게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역사는 아이러니인가, 냉혹한 것인가.

* 우르반의 대포 : 우르반의 거포(巨砲)는 한 번에 세 발에서 일곱 발까지밖에는 쏘지 못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화약이 포신을 달구어 열도 식히고 대포를 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완책으로 거포와 함께 작은 대포들이 동원되어 성벽 파괴의 결정타 역할을 했다.


 

파노라마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맨 앞 페이지 왼쪽 아래에 박물관장과 함께 찍은 내 사진이 방문 소식과 함께 올라 있었다. 그날 나는 방명록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와 술탄 메메드 2세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 오늘도 위대한 터키 국민들에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파노라마 박물관은 지난해 1월 31일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60도 반원형의 파노라마 극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벽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그림 크기로도 세계 최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로는 그 전경(全景)을 한 컷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극장 측의 양해 아래 부분부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캡션 역시 마찬가지. 내가 읽고 겪고 보고 들은 지식은 물론 약간의 상상력까지 동원해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임을 밝혀 둔다.

▲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르반의 대포와 대포알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가장 큰 거포는 모두 소실되고 그보다 작은 대포들만 남았다. 그래도 이 대포는 무게가 자그마치 15톤(포신 길이 424센티미터, 구멍 지름 63센티미터)에 이른다. 내 몸 하나쯤은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이다. 대포알은 285킬로그램. 그러니 이보다 두 배 이상 더 크고 무거웠을 우르반의 거포는 어떠했을까. 이런 대·중·소 대포들로 49일 동안 쉬지 않고 포를 쏘아댔으니 제아무리 철옹성인들 온전할 수 있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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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박물관 대형 홀에서 감상한 오스만 군악대(메흐테르, Mehter)의 연주. 지축을 뒤흔드는 우렁찬 북과 피리 소리로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비잔틴 병사들을 주눅 들게 한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깃대를 들고 있는 두건 쓴 단원들은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있다.
오스만 군악대는 세계 전사(戰史) 상 최초로 등장한 군악대로서 현대 군악대의 효시이다. 서구 열강 군악대도 모두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군사 박물관에서 그 웅장한 연주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550여 년 전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비잔틴 제국 크고 작은 교회들의 종소리를 들었다. 시공을 초월해 한 쪽 귀로는 오스만 군악대 연주를, 다른 한 쪽 귀로는 비잔틴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대포를 쏘며 진격해 오면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종이란 종은 일제히 간절한 염원이 담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시 전황(戰況)을 기록한 그리스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 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오스만군의 대포 소리와 그보다 더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묻혀 버렸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물론 성 안의 시민들 또한 얼마나 위압감과 전율을 느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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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복원도를 참조해 다시 그린 그림. 황금문에서 제2군문(벨그라드카프) 사이의 3중 성벽을 입체적으로 재현했다. 1000년 넘게 아무도 뚫지 못했던 과학과 공학, 그리고 인간의 땀의 결정체이다. (아래의 성곽 사진들과 비교하면서 보기 바란다.)
그림에 표기된 수치에서 보듯이 스티븐 런치만과 시오노 나나미는 성곽 규모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외성벽의 높이(런치만 7.5m, 나나미 10m), 내성벽의 높이(런치만 12m, 나나미 17m), 내성벽 주탑의 높이(런치만 18m, 나나미 20m 이상)에서도 두 사람은 조금 엇갈린다. 런치만은 학자고 나나미는 작가다. 내 눈대중으로는 내성벽 주탑은 20m 이상 되어 보였다. 탑과 성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모양과 크기가 달랐다. 외성벽의 주탑과 내성벽의 주탑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 3중 성벽의 위용이 한 눈에 느껴진다. 지역에 따라 약 45~90m 간격으로 주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제는 외성을 전(前)방위로 해서 통로②에 전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정규군만도 8만 명에 육박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정규군·비정규군·외인부대·시민군까지 모두 합해도 채 7000명이 안 되는 병력으로 대항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성 주탑을 배수진으로 성곽의 모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열쇠를 황제에게 맡겼다. 들어온 이상은 못 나간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결사항전의 각오였다. 황제와 고위 관료, 주요 지휘관들은 말을 타고 통로를 누비고 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형에 따라 폭의 차이는 있지만 통로②는 런치만이 말한 것처럼 내 눈에도 12~18m는 족히 되어 보였다.

* 정규군만도 8만 명 : 8만 명 설은 런치만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쟁에 총동원된 투르크군의 병력을 20만 혹은 30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투입된 병력 총규모를 16만 정도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 성 로마노스 군문에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내성벽.
이 성이 어떻게 1500년 그 오랜 세월을 버텨 왔는가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성벽을 눈여겨 보라. 맨 밑에는 잔돌, 그 위엔 흙, 그 위엔 벽돌, 벽돌과 벽돌 사이엔 또 흙, 그런 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에 강력한 접착제가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도 1500년은 너끈히 버텨낼 것 같지 않은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5~90m의 간격을 두고 주탑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는 제2군문 입구이다. 이 늠름한 3중 성벽 구조의 위용을 보라. 감히 범접할 수 있겠는가. 오른쪽 내성의 주탑들은 파괴된 모습이지만 군문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끝자락에서 본 성벽의 주탑 모습. 여기도 오스만군의 집중 공격이 퍼부어진 곳, 바꾸어 말하면 비잔틴군 방어의 최일선 중 하나였다. 부서진 주탑 너머로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과 멀리 갈라타 지역이 보인다.


▲ 방어용 주탑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아군끼리의 소통과 왕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1453년 당시에는 이 사진에서 보이는 보호 철책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 해자가 있던 자리. 지금은 메워져 밭으로 변해 있다. 해자는 육지 성벽 전체에 걸쳐 팠다. 수심이 깊은 곳은 20m에 이르렀지만, 어떤 곳(예 : 블라케르나에 지역)은 물은 흐르지 않고 구덩이만 파둔 곳도 있었다. 성으로 진격해야 하는 공격군 입장에서는 우선 해자 통과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오스만군은 기를 쓰고 해자를 메운 반면, 비잔틴군은 다시 파내는 데 전력을 쏟았다. 채우고 비우기의 연속이었다. 오스만군은 참호를 만들고 도성 침투용 지하 터널(땅굴)을 뚫느라 파낸 흙을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해자를 메우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면 비잔틴군은 밤중에 몰래 그 위치에 그리스 화염과 폭약을 설치해 폭파시켰다. 그러는 사이 두 제국의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심히 밭을 갈고 있는 저 농부는 그런 해자의 아픈 역사와 기구한 사연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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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자가 있던 자리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하수로(배수관). 성벽 복원도의 빨간 동그라미 친 부분을 참고할 것.


▲ 부서진 외성벽 주탑을 지나 내성벽 주탑 쪽으로 가고 있는 아베크족.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탑 꼭대기에 올라 비잔틴군과 오스만군 간에 오가던 살육의 화살이 아니라 연인 앞에서 사랑의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해보이는 건 아닐까.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4편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종합편이므로 1, 2, 3편 탐사 경로를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군사 박물관(탁심 광장에서 북쪽으로 1km 거리)과 1453 파노라마 박물관(톱카프역 바로 뒷편)이 추가되었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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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독자 2010.09.08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읽고사진들을보면서
    이스탄티노플
    그도시의매력에
    점점빠져들고있습니다

  2. 피플 2010.09.08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우물에서의 은어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 물속을 헤엄치는 은어를 반짝이는 총알에 비유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의 시를 떠올려보면 , 이스탄불을 구석구석 탐사한 일행의 모습이 은어를 닮아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두륜 2010.09.08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감상평을 남길만한 지식은 없지만 가슴으로 느낄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 겠네요...
    "이스탄티노플"의 명예 시민으로서....^^

  4. BlogIcon 너서미 2010.09.08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이스탄불에 갔을 적에
    다리 하나를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것만큼이나 이 땅을 둔 각축전도 치열했더군요.
    이번 포스팅을 보니 보다 더 실감납니다.

  5. 오디세이 2010.09.09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 극장 그림들과 그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필자의 글솜씨가 압권입니다.
    이스탄티노플,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6. 이우종 2010.09.09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타는 탐구욕 과 활활 끓고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감히 시늉이라도 해볼까 하고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 기대해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

    • 호야 2010.09.0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려 감사합니다 이스탄티노플이란 내가 명명한 도시에 스스로 빠져서 공무 틈틈이 시간내어 전심전력하고 있소 대작 수작소리는 못듣겠지만 힘들여 쓰는 역작인것 만은 분명하오 아직도 쓰고 싶은 게 하 많이 남았으니 건강 챙겨가며 하겠습니다

  7. 중독 2010.09.30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그랗게 생긴 대포알을 보니 대포알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쩜 저렇게 동그랗고 예쁘게 만들었죠?
    대포 한번 쏘고 다시 주워다 쏘지는 못했을텐데.
    전쟁동안 쉼없이 대포를 쏘았다니, 대포알 갖고 다니기도 엄청 힘들었겠어요.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하는데, 동그랗게 대포알을 만든 석공(?석공이 만들었겠죠?)의 딸도 예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ㅋㅋ 아들이 잘생겼으려나?

  8. BlogIcon BlueMiR 2012.02.10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보고 갑니다~
    그림좀 몇개 퍼가겠습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3
                     - 3중 성벽 어딘가에 박혀 있을 대포알을 찾아서

 

▲황금문(알튼카프)! 황제의 대관식 또는 전쟁 승리의 개선문 등 의식용으로 사용했던 비잔틴 제국의 자존심. 이 문을 통해 옛 황궁까지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길(‘승리의 길’)이 나 있다.
마르마라 해를 끼고 세워졌던 성벽은 끝 부분에서 작은 비상문을 꼭짓점 삼아 육지 쪽 3중 성벽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육상에 세워진 제1군문인 황금문을 성 바깥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성문과 외성 쪽 출입구를 보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여기저기 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내성 쪽은 사진 찍을 곳이 마땅찮아 정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공원묘지를 헤치며 들어갔지만 나무들로 뒤엉켜 있어 돌아 나왔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역사학도인 니사가 건네준 프린트물 속의 황금문.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2중 성문과 입구의 화려한 모습을 아쉬운 대로 상상할 수 있다. 쌍두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치켜든 채 준마를 타고 저 문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개선(凱旋)했을 비잔틴 황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그림 ①②와 위 사진 ①②는 동일 건물. 전면(全面)을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흰 대리석 수백 장으로 장식한 황금문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황금이 어디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황금문을 지나서 우뚝 솟아 있는 내성벽의 주탑. 무화과나무들이 발돋움을 하며 성 안을 넘겨다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위풍당당한 주탑에는 키가 한참 못 미친다.


▲성곽 탐사를 하던 도중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백라이트와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벨그라드카프(제2군문)를 통과하고 있다. 성문 안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둘러보고 싶은 성곽은 아직도 여럿이건만…. 갑자기 마음과 발길이 조급해졌다.


▲까마득한 성벽 위를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 저렇게 한적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길 위에선 자연스럽게 손잡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다. 페가에 문(실리브리카프) 근처 어디쯤에서 마주친 풍경이다.

 


▲내성과 외성․해자가 있던 자리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밭을 일군 부분이 해자가 있던 곳.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일하는 틈틈이 허리를 펴고 고개 들어 성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면 피로가 금방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창살과 자물쇠로 가로막힌 내성과 외성 사이 공간도 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티븐 런치만의 책(147페이지)에 따르면, 높이가 약 12미터인 내성벽(주탑 높이는 18미터)과 7.5미터 가량의 높이를 지닌 외성벽 사이에는 폭 12~18미터에 이르는 통로가 나 있었다.


▲페가에 문 안쪽 마을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떼들. 양들은 보기와는 달리 심보가 고약해서 겨울에는 남들 추우라고 떨어져 자고, 여름에는 남들 더우라고 붙어서 지낸다는데, 정말인가? 불볕더위인데도 하나같이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이 양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복원된 모습이지만 3중 성벽의 위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1천 년 동안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성벽 아니던가.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대를 타고 오르는 토마토 줄기에도 올망졸망 토마토들이 매달려 있다.


▲노점 좌판 위에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야채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당근‧가지‧고추‧토마토‧배추(?)…. 아마도 해자를 메운 밭에서 수확한 것들이겠지? 이런 재료들로 식탁을 차리면 몸 안의 피가 한결 정갈해질 것만 같다.


▲아름답지 않은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까지 개운해지는 이런 풍경들이 ‘이스탄티노플’에는 도처에 널려 있다. 셔터를 누르면 ‘그림 같은 사진’이 나온다. 고도(古都)의 실체를 느끼기 위해 찾는 이는 우리 말고는 없는 것일까.


▲2중 성문 맨 안쪽 성문 벽에 매달아 놓은 대포알. 저 정도 크기라면 1453년 전쟁 당시에는 작은 대포알에 속했으리라. 성문 통과 가능 높이는 2.5미터이고 폭은 2.9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그 옆에 세워져 있다.


▲아랍어로 표기된 글자라서 해독을 못하는 게 아쉬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정확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서 보았던 성벽에 박힌 대포알 아닌가?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도 열심히 성곽을 탐사하는 우리 일행에게 현지인들이 한 곳을 가리키며 자꾸 저 안으로 들어가 보라 한다. 그래, 가 보자! 눈에 잘 안 띄는 벽과 벽 사이를 지나 30미터쯤 걸어가자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반 지하 석굴(?)이 나타났다. 내성에 딱 붙어 있는 조그만 교회다. 출입구 옆에는 걸인들이 잠자리로 삼아 몸을 눕힌 듯 더러운 소파 위에 천 조각이 어지럽다. 이 문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어둠침침한 반 지하 공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浮彫)물들. 비잔틴 교회인 모양이다. 눈높이에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휴대하고 간 랜턴과 집시 풍의 사내가 빌려준 촛불을 켜들고 구석구석 발밑을 비추어가며 대리석 석곽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내는 촛불 값으로 건네준 5터키리라(우리 돈으로 4,5천 원)를 받아 들고는 횡재했다는 듯이 신바람이 나서 맥주를 사 마시러 갔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파괴된 주탑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부 구조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막힌 아치형 구조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주탑의 뒤쪽(안쪽)임을 말해 준다.


▲내성 안쪽 풍경. 돌로 된 성벽과 나무로 지은 가옥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들의 저 강인한 생명력!


▲레기움 문(메블라나카프) 위 석벽 틈 사이로 잡초가 둥지를 틀고 있다. 석벽에 새겨진 글씨는 로마자 표기라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석벽 맨 위 앞머리의 글자가 ‘콘스탄티누스’로 시작되고 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


▲콘스탄티노플 전쟁 당시의 병사들이 총검으로 무장을 했듯이 나는 녹음기‧지도‧카메라를 늘 탐사에 지참했다. 등에 멘 배낭에는 또 다른 ‘비밀 병기’들이 숨어 있다.


▲무너질락 말락 위태롭게만 보이는 성벽 아래 풀밭에서 이 도성의 시민인 듯한 한 사내가 길게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1500년을 지탱해 온 난공불락의 성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야 있겠느냐는 듯이….


▲레기움 문에서 톱카프(성 로마노스 시민문)를 향해 가는 길. 어느새 날이 저물어 성벽 위 조명등에 불이 들어왔다. 오른쪽 하늘로는 포물선을 그리며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비잔틴 제국 깃발에 그려져 있던 쌍두 독수리의 환생은 아니겠지? 성벽 너머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1453년 당시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탑을 관통한 저 구멍은 혹시 대포가 뚫고 지나간 자국? 성벽에 혹시 박혀 있을지도 모를 대포알을 찾는 사람처럼 우리 일행은 성곽 이곳저곳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톱카프로 가기 직전에 만난 외성벽의 모습.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철골로 버팀대를 세워 놓았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저만치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미너렛(첨탑)이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3편에서는 육지와 바다(마르마라 해)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는 비상문부터 톱카프 직전(갈색 사각형 부분)까지를 사진에 담았다. 1편과 2편이 지도상으로 볼 때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탐사한 기록이라면, 3편은 지도 맨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탐사한 내용이다.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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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것이궁금하다 2010.09.02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혼이 지는 성벽 너머로
    사라진 두 남녀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미스터리 이스탄티노플

  2. 알밥 2010.09.03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될 만큼 생생한 사진에 감탄 또 감탄...잘 보고 갑니다....
    감사!!

  3. 아프선프 2010.09.03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명록에 답변해주셈~~

  4. 콜럼버스 2010.09.04 1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참 기발한 조어입니다.
    어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매우 적절한 용어랄까요?
    신생어 사전에 등록될 것 같습니다.

  5. 두륜 2010.09.06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 여행이 대단히 인상 깊으셨나 보네요.....

  6. 불국사 2010.09.09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여... 터키하면 지난 월드컵 축구, 한국전쟁참전 등 정서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운나라... 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우리경제와도 직접적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의장님의 글을 보면서 바로옆 나라처럼 자세히 재미있게 소개해 주시니 지금 제가 세월을 거슬러 그곳에 있는 느낌입니다. 사진중에 가방매고 모자쓴 뒷모습이 의장님이죠? 뒷모습은 학생같네요. 5탄도 빨리 올려주세욧!!!! 기다립니다.

  7. 비잔티움 2010.09.09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콘스탄불? 앞에게 낫네요... 그이름 바로 지은거예요? 아님 오래 고민해서 지은건가요? 암튼 기발한 상상!!!

  8.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대하지만 섬세하며 복잡하지만 알기쉽게 풀어쓴, 1453년 성벽의 흙내음과 골든혼의 바다내음, 그리고 대포소리와 화약냄새가 아련히 느껴지는 생생한 포스팅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부중인데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9. 옴니버스 2010.11.18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곽을 따라 함께 걷고 난 듯 다리가 저릿저릿한 느낌이군요.
    멋진 가상 체험 공간입니다.

  10. 리얼리스트 2010.11.23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땀냄새 물씬 풍기는 리얼 포스팅!
    인문학의 향기에 젖어들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