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로그 | 미디어로그 | 방명록  

[인터뷰] 김형오 전 의장  "文정부 성패, 진영논리 극복에 달려"


한·터키 수교 60주년 행사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 기조 발표
"보수진영, 이대로 가다간 존재 무의미해져…철저히 죽어야 회생 가능"


터키 국영방송과 인터뷰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이달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터키 국영 테레테(TRT)방송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앙카라=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지금 보수니 진보니 이런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은 '진영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수명'이 언제 끝날지 몰라요."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학술 교류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에 참석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70)은 보수의 위기 타개책에 관한 질문에 답답함부터 토로했다.


그는 일정의 종착점인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이달 24일 열린 심포지엄에서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인문서 '술탄과 황제' 저자로서 '역사의 새벽을 깨운 메흐메드2세'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표를 했다. 

기조연설 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앙카라<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4일 오후(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한ㆍ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학술ㆍ문화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에서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2017.7.24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발표 이튿날인 25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사회 전반이 극심한 진영논리에 매몰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당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과 조직, 직능이 '어느 것이 더 정당하고 우리 사회에 이로운가'보다는 '어느 쪽이 우리편이냐'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면서 "이래서는 한국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성공하려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직후 정무직 인사를 보면서 새 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하나 싶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영논리를 답습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도 "아직은 기대를 품고 있다"고 했다.

20여 년 몸담은 보수진영에 대해 "지금처럼 계속하다가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필패하고,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며 쓴소리를 쏟아내고 "철저히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현장 설명 듣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차탈회이위크<터키>=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김형오 전 국회의장(왼쪽 첫번째)이 21일 오후 터키 차탈회이위크 신석기시대 유물 발굴현장에서 이언 호더 발굴단장으로부터 유적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오스만왕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다룬 '술탄과 황제' 저자다. 2017.7.21 chc@yna.co.kr


김 전 의장은 5선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치인은 비위 혐의나 경쟁력 상실로 떠밀려 정치판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많다. 김 전 의장은 그러한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지역구에 뚜렷한 경쟁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전부터 저술가로서 제2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 "너무 늦기 전에 결단했다"고 2년 전 불출마 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다는 김 전 의장은 다음 책의 소재 후보로 1683년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빈 공성전'을 꼽았다. 또 전쟁사다.

"로맨스를 쓰기에는 나이도 있고, 무엇보다 경험이 일천하니까…"

tree@yna.co.kr 



[2017-07-26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   클릭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심포지엄: 축사]

 

 

 

“자유와 역사적 연대를 넘어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이 지나고 한국과 터키는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이었습니다. 이틀 후인 7월27일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잠시 중지하기로 합의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4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식 수교국도 아니며, 터키의 국민과 젊은이들이 들어보지도 못하였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도우려, 함께 싸우고 피 흘리며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터키로서도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고려 요소가 있었겠지만 나는 여기서 두 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자유’입니다.

모든 면에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신생국 한국은 이제 그 국민이 그나마 누려왔던 자유마저 잃게 될 위기였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생명과 자유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 의해 나라가 없어지고 국민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피 흘려 나라를 지켜왔고, 또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당한 자유를 힘들게 누리게 된 터키로서는 한국민의 자유가 유린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터키군은 한국전에서 힘들고 어려운 전투에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리하여 미국·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지켜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신념이 묻어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역사적 연대감’입니다.

첫머리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라”라고 말했습니다만, 우리는 1300년 전 강한 역사적 연대를 형성한 적이 있습니다. 터키는 지금부터 2천 년도 더 전부터 중앙아시아의 주인이었습니다. 가장 넓은 대륙에서 가장 오랜 기간 푸른 초원을 지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와는 사신 왕래를 비롯,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역사적 연대는 한국전을 통해 피로써 다져지고, 터키 지진 사태 때는 땀으로 적시고, 2002년 월드컵 때는 양국기를 함께 흔들며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응원을 하였습니다. 승리와 패배를 가리기 위한 축구 시합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의 기반 위에 양국 모두의 승리를 위한 탑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도 두 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나라를 손꼽으라면 한국에선 터키, 터키에선 한국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대감이 뿌리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수교 60년간 두 나라는 엄청나게 변하고 발전했습니다. 경제·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성화되고, 인간적 신뢰는 더욱 두텁게 쌓였습니다.

한국, 동양적 세계관에서 60년이란 일생, 한평생을 말합니다. 한 생이 끝나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의미에서 ‘환갑 또는 회갑’이라 부르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터키 관계에서 ‘첫 번째 국가 일생(the first nation’s lifetime)’인 60년은 매우 의미가 깊었습니다. 다가올 새로운 제2의 국가 일생은 더욱 의미 깊게 승화·발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특히 양국 간의 학술적·문화적 교류와 협력이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더욱 심화·발전되리라 기대합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이며 심도 있는 연구가 다방면에서 진척된다면 세계적 수준의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터키 기업이 함께 건설하는 ‘1915 차낙칼레 대교’공사가 막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세계 최고·최장의 현수교가 터키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 2023년 개통될 때, 이 다리처럼 두 나라의 협력과 기술 수준, 우의는 더욱 발전하고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때쯤 우리는 오랜 숙원인 남북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대륙의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광범위한 문화 공동체가 오래 전 150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구축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혈맹이며 형제이며 함께 가야 할 영원한 동지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응분의 역할을 해야 할 나라이며 국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며 축사에 갈음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동 | 헌정기념관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Golden Gate(Altın Kapı)


마르마라 해와 가장 가까운, 육지 성벽 남쪽 끝에 있는 성문. 건축미학적으로도 수려하고 웅장하며, 군사적으로도 활용도가 높았다. 황제의 취임식과 거물급 포로들을 앞세운 개선 행진도 여기에서 거행되었다. 부대와 무기들, 전리품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금과 진주로 장식된 예복을 입은 황제가 허리에는 검을 찬 채 백마를 타고 등장했다. 그 옆으로는 왕자 혹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권력자가 흰색 군마를 타고 수행했다. 교황의 특사나 고위 외교 사절 또한 이 관문을 통해 환영받았다. 세 개의 아치형 통로가 있으며, 중앙 통로가 좌우측보다 좀 더 높고 넓게 만들어졌다. 중앙 통로 위에는 네 마리의 코끼리, 그 양 옆에는 각 한 마리의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중앙 아치에는 라틴어로 "테오도시우스가 폭군(막시무스로 추정됨)을 진압한 뒤 이 문을 세우다. 황금의 문을 세운 이는 황금 기를 가져온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2010년 8월, 비잔틴 제국의 자존심인 황금문을 성 바깥쪽에서 찍은 모습. 해저물녘 성문 근접 촬영을 위해 공원 묘지를 헤치며 걸어 들어갔지만 출입구가 잠겨 있어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전면 4각형 흰색 대리석의 두 성탑이 황금문. 울창한 무화과나무가 성벽과 해자(지금은 밭)를 구분해 주고 있다.

 


두 개의 대리석 성탑 중 하나. 초승달과 별의 조합인 터키 국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대리석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잡초들이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밖에서 본 황금문 정문. 이 개선문으로부터 옛 황궁까지 1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승리의 길'이 나 있었다.(2012년 사진)

 

대리석의 길이와 높이를 설명하고 있는 역사학도 니사 양. 이스탄불공대 출신 박사로 '성벽 복구' 분야가 전공이다.

 

850년 당시의 황금문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복원도. 도시의 번영과 행운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황동 코끼리가 성문 위 옥상에서 트럼펫처럼 생긴 코를 길게 뻗거나 위로 올린 채 개선하는 황제와 군대를 맞이했다.


 

황금문을 둘러싸고 있는 7개의 성탑(예디 쿨레) 중 일부. 이 탑들은 방어 및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무화과나무들이 발돋움을 하며 성 안을 넘겨다보려 하고 있지만 위풍당당한 주탑에는 키가 못 미친다.


 

* 예디쿨레

육지 성벽에 4개, 도성 안쪽에 3개, 그렇게 7개의 성탑이 5각형을 이루며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 두 개(4각형)는 황금문.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설립,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비잔틴 시대 탑은 정방형 대리석, 오스만 시대 탑은 5각형 벽돌로 이루어져 있어 뚜렷이 식별된다.

 

예디쿨레(황금문)에 대한 설명문.


 

 

정복 전쟁 때 사용됐던 다양한 크기의 대포알들이 황금문 안쪽 광장에 2열 종대로 도열해 있다. 거대한 공룡 알을 연상시킨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로뎀나무 2013.02.11 2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 잘보고 있습니다.
    현대기술을 이용해 보다 다양하게 책의 내용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점에 세삼 감사가 느껴집니다. 한가지 아쉬운 건 깨진 사진들도 소중한 자료일텐데 속히 복구되어 함께 공유되길 소망합니다.

정치 중앙무대서 물러나 터키 다녀온 김형오(외교67) 전 국회의장 인터뷰

콘스탄티노플,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근대의 시작

 

제18대 국회 전반기 2년간 국회의장을 지냈던 김형오 전 의장은 작년 8월,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불출마 선언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4월 16일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스탄불로 떠난 지 47일 만인 6월 2일, 한국에 돌아왔다. 성공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그를 불현듯 이스탄불로 떠나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6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팔래스 호텔에서 김 동문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가 작년 8월,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오래전부터 결심이 서있었던 일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주된 이유는 바로 ‘터키’였다. 구체적인 관심 분야는 바로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은 1453년 이슬람 세력(오스만튀르크)이 기독교 세력(비잔틴 제국)을 포위한 채 총공격을 감행한 세계 전쟁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이 전쟁으로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의 본격적인 전투는 1453년 4월 6일 시작되어 5월 29일 비잔틴 제국 멸망으로 끝난다.

김 전 의장은 지금으로부터 559년 전 4월 6일부터 5월 29일까지의 전쟁의 현장에서 역사를 보고 느끼고 기술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4월에 총선이 끝나면 뒷마무리하는 동안 정신이 없는 사이에 5월 29일이 다가올 터. 60대 중반이 넘어가는 시점에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면, 체력이나 기억력이 자신의 지적 욕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김 동문이 19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한 진짜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터키로 떠나기 전 정치권 후배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20년간 현역 의원으로 지낸 공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세를 보였다. 특히 지난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의 명예 선거대책위원장 및 명예후원회장으로서 손 후보를 아낌없이 지원해줬다. 공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세를 다한 후 총선 직후인 4월 16일, 그는 터키 이스탄불로 향했다. 만약 19대 총선에 출마했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지인들이 김 동문에게 “불출마를 했는데 얼굴이 왜 편안하냐”고 많이 묻는다고 한다. 그는 제2의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심리적으로 바빴어야 했지만, 불출마를 결심한 이후 “왜들 저렇게 ‘정치’에 매몰돼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총선 현장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와 터키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9년 1월, 당시 국회의장으로서 터키를 공식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김 동문의 이스탄불 첫 방문이었다. 비공식 일정으로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골드혼(Golden Horn)을 막았던 쇠사슬이 전시돼 있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만으로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쇠사슬로 막아버린 것이었다. 쇠사슬로 만을 막아버리자 돌파가 어려워 그 대신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서 만으로 진입했다. 우리나라 속담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만, 김 동문은 이것을 보고 배를 끌고 산을 넘어야 일이 성사가 된다는 걸 느꼈다. 배는 바다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언덕을 넘어 간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김 동문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해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뒤져 국내의 거의 모든 자료를 손에 넣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스티븐 런치만 교수가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이었다. 그는 이 책을 줄을 너무 많이 그어 본문이 안 보일 정도로 정독했다고 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책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었던 김 동문이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읽고 실망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애정의 깊이보다 그녀의 애정이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도 시오노 나나미처럼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김 동문은 수필집 두 권을 발간한 후, 건강에 대한 아내의 걱정이 심해 평소에는 책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집필 작업이 흥미에 의해서였다면 이제는 연구자로서의 자세로 집필 욕구가 생겼다. 당시 정치가 무익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였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1월 첫 방문한 이후, 김 동문은 총 다섯 번 터키를 방문했다. 2010년 6월, 국회의장을 그만두고, 8월에 열흘간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공방전이 벌어진 성곽과 성소피아 사원에 머물렀다. 이번 방문은 칼싸움도 실제로 보고 당시의 무속, 당시 의상도 살피며 현장감을 제대로 읽는 기회로 삼았다.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로 많은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다. 김 동문은 터키 국립 보아지치대학에서 방문교수로 초빙을 받아 이 대학 도서관 및 연구실 등에 머물며 저술 준비를 했다.

김 동문이 구상하고 있는 책의 이야기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뉜다. 큰 것은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전쟁이다. 이는 유럽 문명이 아시아 문명에 패배하는 역사인 동시에 기독교가 이슬람한테 패배한 역사이면서, 또한 백인이 비(非)백인에게 패배한 역사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워 취급하지 않던 역사이지만, 비잔틴 제국의 멸망으로 중세가 끝나는 역사적인 시점이다. 좁게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와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리더십을 비교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튀르크에 둘러싸인 하나의 섬이지만 함락에 끝까지 버틴 곳이고, 그 최후의 항전을 이끈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11세다. 김 동문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고자, 책의 가제목도 황제와 술탄으로 정했다.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전투 현장에서 사라져 버리는 리더십과, 1000년의 제국을 멸망시킨 청년 술탄의 리더십 간의 비교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책에서 그는 이 두 인물을 심리적으로 또 정치·사회적으로 대비시킨다.

마지막으로 김 동문은 책을 읽을 동문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그동안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오다보니 공적 임무 수행에만 매몰돼 스스로 교양과 지식, 삶의 처세를 잊어왔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치권에 몸을 담아왔지만, 내가 몸담을 수 있는 곳은 정치권만이 아니란 걸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만큼 글로벌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환경에 처한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근대화 사업 이후에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을 통해 성장해왔다”며 “지금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글로벌 시대에 맞는 글로벌 인식, 역사, 문화, 교양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 동문이 집필할 책은 우리와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성공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터키라는 새로운 관심사에 뛰어드는 용기를 낸 그의 눈에는 여전히 소년 같은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다.

신혜주 기자 hyeryong_v@naver.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기대만빵 2012.07.04 05: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불 혹은 콘스탄티노플, 파면 팔수록 무궁무진한 세계사의 광맥!
    기대됩니다요~~~.

기사 바로가기 ☞ [김문이 만난사람] 559년전 터키를 캐는 이 남자 김형오

559년전 터키를 캐는 이 남자 김형오
비잔틴 역사전문가로 변신한 김형오 前국회의장


역사를 알면 인생의 재미가 열 배는 더 있다. 교훈이 있고 아픔이 있고 느낌이 있다. 산다는 것은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우러져야 한 인생의 스토리를 얘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 하나. 콘스탄티노플을 아는가. 대다수는 얼추 알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 그속에 진정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을까. 역사책에는 비잔틴의 최후 도시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비잔틴은 동서양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역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스티븐 런치먼이 지은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의 서문을 잠깐 들여다본다. ‘역사가들이 좀 더 단순했던 시절, 그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중세가 끝나는 특징적인 사건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끝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장벽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중세가 근세로 바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탐험가들이 해상로를 개척하여 세계 경제를 바꾸어 놓게 한 것은 비잔티움의 쇠망과 오스만튀르크족의 승리였다. 비잔티움 학문이 르네상스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에궁, 뭐든지 설명이 길면 감동이 없는 법이다. 이쯤에서 감칠맛을 그만두자.

 

 

▲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 인터뷰룸에서 만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비잔틴의 최후를 얘기하고 있다.이언탁기자 utl@seoul.co.kr


 

김형오 전 국회의장. 그가 쓴 ‘길 위에서 쓴 희망편지’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끈다. ‘1947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대학원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다. 국무총리실,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공직을 수행했다. 1992년 14대 국회부터 국회의원 직분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09년 3월에 발간된 책이니 과거형이다. 이젠 국회의원이 아니다. 기자 출신이고 수필문학가로 등단한 문인이라는 게 오히려 낫겠다.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이란 옷을 벗어던지고 나서 어떤 생활을 할까 궁금하다. 알고 봤더니 역사를 캐고 있다. 그것도 동서양을 아우르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사에 대해 열심히 삽질하고 있다.

김 전 국회의장을 지난 4일 오후 서울신문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늘 넥타이를 맨, 꽉 낀 정장 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가벼운 옷차림의 그를 보니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정치인이라는 냄새를 빡빡 씻었다고나 할까. 악수를 하면서 그는 “국회의원을 그만두니까 넥타이를 안 매게 됩디다. 아주 편해요.”라고 한다. 또 이어진다. “요새는 신문도 잘 안 보게 되고 정치 뉴스도 안 보고 참 좋다.”며 웃는다.

그를 만난 이유는 19대 국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홀연히 터키로 출국한 것 때문이다. 왜 불출마 선언을 했으며 터키는 또 왜 갔는지 등이다. 요즘 터키에 흠뻑 빠져 있다. 그것도 이스탄불, 다시 말해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다. 2009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방문했다. 우연히 군사 박물관에 잠시 들렀을 때 놀라운 충격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터키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성곽에서 포즈를 취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무엇보다도 저를 전율시킨 것은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함대를 이끌고 갈라타 언덕을 넘어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해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쳐 놓은)쇠사슬을 돌파하지 못하자 배들을 산으로 끌고 천혜의 요새인 성곽으로 진입합니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저는 비잔틴의 몰락과 오스만튀르크의 부상 등에 대해 역사적 지식이 부족했던 점을 부끄러워하게 됐고 이후 터키를 다섯 차례 다녀오면서 그 깊이에 매료됐습니다.”

지난 4월 16일 출국했다. 2일 귀국하기까지 47일간 터키에 머물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터키 최고의 명문 국립대학 보아지치대학교 방문교수로 초빙돼 이 대학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지냈다.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과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무슨 과제? 그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를 캐는 작업이다. 그는 여기에서 화해와 공존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을 합성해 ‘이스탄티노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터키에서 머무는 동안 대외 활동, 그러니까 강연이라고 해두지요. 그 대학에서 한국정치의 60년 역사를 강의했습니다. 아주 재미있어하더군요. 처음에는 30분을 약속했지만 나중에 질의응답까지 포함해 1시간 40분가량 됐습니다. 북한 갔던 일, 미국 스탠퍼드에서 강의했던 일 등 동아시아를 비롯한 한국의 정치역사를 얘기했습니다. 반응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그가 열심히 캐는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는 어느정도일까. 현장 방문 수차례, 자료수집 완료, 초고 정리 끝이란다. 올 가을쯤에는 반드시 팩트 위주의 두꺼운 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말 그대로 개봉박두. 현재 이와 관련된 책은 스티븐 런치먼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과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이 있다. 전자가 팩트에 비중을 둔 책이라면 후자는 소설 형식을 빌렸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그 정복전쟁은 지상전, 지하전, 해전, 공중전, 심리전, 첩보전, 외교전 등 모든 전략과 전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사의 물결이 확 바뀌었지요. 오스만튀르크가 그쪽을 장악하자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를 열어야만 했고 콜럼버스의 항로, 아프리카 희망봉의 항로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저작물에 한 권을 보태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인간성과 리더십에 초점을 두려 합니다.”

특히 그는 오스만튀르크가 고구려와 흉노, 그리고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는 뿌리를 함께 깔면서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서양 역사에서 관심을 덜 받고 있는지도 밝힐 예정이다. 그에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터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물었더니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인물로 추앙받는다.”고 했다. 아울러 “14살에 왕이 됐다가 왕좌에서 내려와 19살에 다시 왕이 돼 21살에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사실이 매우 흥미진진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 젊은 왕이 아버지의 아버지도 못 이룬 업적을 해냈다는 점은 참으로 역사적인 것이라고 역설한다.

“오스만튀르크로 인해 유럽은 200여년 동안 길을 잃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실크로드의 지점이자 종점이었지요. 그래서 유럽이 항해시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오스만튀르크는 그걸 모르고 있다가 다시 서양한테 당하게 됩니다. 이를 거울 삼아 우리는 글로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또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아등바등 싸우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 질문하고 싶었던 ‘불출마 선언’의 이유를 말한다.

“내 나이 65살입니다. 60살이 지나면서 한 달이 다릅니다. 100페이지 되는 책을 읽고 돌아서면 금방 50페이지밖에 생각이 안 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10페이지로 줄어듭니다. 지난해 8월쯤인가 그래요. 국회의장까지 한 제가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면 제 이력에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지요. 그러면서 제가 쓰고 싶은 글, 국회의원을 더 하면 영원히 못 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또한 4월 6일부터 5월 29일까지, 술탄 메흐메트 2세하고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대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5월 29일이 비잔틴 최후의 날이지요. 하여 모든 생각을 접고 터키로 갔던 것입니다.”

 
다시 비잔틴 최후를 얘기한다. 당시 60여일 동안 벌였던 전투에는 세계 전투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첨단 무기들이 총동원됐다는 것이다. 배를 끌고 언덕을 넘은 것도 그렇지만 헝가리인이 구상한 최대의 대포 등 흥미롭게 들여다볼 대목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는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인간적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면서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집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흥망성쇠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것은 어떤 것인지도 담을 것이란다.

“저는 다시 종군기자가 된 셈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559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는 기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날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뜁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새누리당 당원이니까 새누리당에서 되겠지요.”라고 답했다. 대선 주자들에 대한 약평을 부탁했더니 “생각 안 해 봤다. 지도자는 뭐든지 겸손하고 당당함의 덕목과 타이밍이 있어야 국민들이 따르지 않겠느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울러 19대 국회에 대한 바람을 물었더니 “폭력이 없어야 한다. 막말도 폭력의 빌미가 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he is…

1947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1966년 경남고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왔다. 1976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75년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1982년 대통령 비서실을 거쳐 1992년 14대 국회의원 당선되면서 이후 15,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9년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한나라당 부산시지부위원장(2000), 한나라당 17대 총선 선거대책본부장(2004), 한나라당 사무총장(2004), 한나라당 원내대표(2006), 대한민국 국회의장(2008)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돌담집 파도소리’,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등 다수가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터키턴키 2012.06.08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ee? Oh, No!는 별 볼 일 없고
    Lunch Man은 점심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김형오의 콘스탄티노플은?

  2. BlogIcon cheap true religion jeans 2012.11.12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의 콘스탄티노플은?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9
                              - 해상 전투의 현장에서


  2차 대전의 명장 *조지 스미스 패튼이 만약 정복자 메메드 2세를 평했더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패튼은 “군인이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하고 완전하며 거만한 자신감”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감,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완전무장한 신념의 사나이가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1885~1945년.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맹활약한 미국의 육군 장군. 북프랑스에서는 하루에 110킬로미터를 진격했을 만큼 저돌적인 작전과 무자비한 욕설로 유명했다. 멕시코 원정 당시에는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개선했다. 줄담배에 진주로 장식한 권총을 차고 호통과 엄격한 규율로 병사들을 통제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패튼은 늘 자신만만했다. 스스로를 연합군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굳게 믿었다. 패튼의 모토는 오직 진군뿐, 방어란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톱카프 궁전 전망대에서 찍은 바다 사진. 저기가 바로 내가 탐사할 해상 전투의 현장이다! 내 마음은 벌써 바다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저 하얀 배 위에 탑승해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우리는 바다에서, 해변에서, 상륙지 들판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적과 싸울 것이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동원한 총력전을 펼칠 거란 의미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술탄의 자세와 각오도 처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육상·해상·공중전(불화살과 대포알이 허공을 날아다녔으니까요)은 물론, 4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선 지하(도성 침투용 땅굴) 전투까지 치렀으니까 말입니다.

▲ 지대가 높아(해발 267미터) 도시 전체를 조감도처럼 실감나게 전망할 수 있는 참르자(소나무 언덕)에서 내려다본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 해협 위 오른쪽이 유럽이고 아래쪽이 아시아다. 왼쪽 소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아시아 연안 동네인 위스크다르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같은 제목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미국의 흑인 여가수 어사 키트가 터키어로 리메이크하는 등 국내외 여러 가수가 부르면서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위스크다르(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로 시작되는 노랫말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제목은 <캬팁>인데 ‘캬팁’은 하급 공무원을 일컫는 말.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공무원 총각을 사모하는 내용이 담긴 애틋한 연가이다. 노래하는 사람 기분에 따라 빠르게 부르면 흥이 나고 느리게 부르면 애잔한 곡조가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터키 전통 민요이다.

  육상 전투는 이미 서술했으니 오늘은 전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잠깐, 왜 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외교적인 배경을 더듬어 볼까요?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입니다. 1453년 전쟁에도 그 이면에는 정치적·외교적·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1780~1831년. 독일 태생으로 열두 살에 입대해 사관학교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으로 활약했으나 예나의 패전 이후 러시아군에 투항,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 진력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란 자신의 말을 증명 혹은 실천이라도 하듯 1815년 프로이센으로 복귀해 군사학자 및 참모장 등을 지냈지만 콜레라에 걸려 급사했다. 사후에 출간된 『전쟁론』은 이 분야의 손꼽히는 고전.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계속되는 정치적 행위이며 도구일 뿐”이라는 전쟁 철학을 갖고 있었다.

  황제 역시 비잔틴 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스만의 술탄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를 세우면서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고 제국의 목을 조여오자 유럽은 아연 긴장합니다. “아직 어린 술탄”이라는 느긋한 평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메메드 2세”로 인식이 급변합니다. 힘없는 황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에 매달립니다. 도성 시민과 성직자들이 굴욕감을 느끼며 반대하던 동서 교회의 통합마저도 받아들일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유럽 각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강 건너 불 보듯하는 안이한 상황 인식과 무관심, 각 나라를 연결하고 이끌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황제의 사절들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교황과 베니스의 미미하고도 형식적인 지원, 제노아 군인 주스티니아니가 이끌고 온 700명의 용병, 그게 전부였습니다.

▲ 카슴파샤 인근 수상 레스토랑에서 찍은 골든혼 풍경. 이 만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봉쇄 사슬이란 장애물을 선박의 육상 이동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돌파한 술탄의 해군과 비잔틴의 다국적 해군이 1453년 4월 28일, 드라마틱한 해상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콘스탄티노플 도성 시민들은 맞은편 언덕에서 전쟁에 패한 자국의 병사들이 공개 처형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보았으리라. 그날의 격전과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유람선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혼신의 힘을 쏟아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이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황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쩌면 1100년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매순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비장하게 맞섰습니다.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도 여러 차례의 항복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사는 대신 아름답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무두가 펼친 치열한 첩보전과 심리전 속에서 술탄은 현명하게도 비잔틴 쪽의 역정보, 허위 사실 등에 결코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이 지지부진할 거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육로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헝가리와는 동맹 조약을 맺어 예방 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에게도 압력을 넣어 그들이 비잔틴 제국을 돕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압력을 받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군의 선봉에 서서 도성을 공격했습니다. 술탄은 그렇게 힘의 외교로 이웃 나라들의 손발을 묶고, 스파이를 활용해 도성 안의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나와 함께 종군 기자가 되어 배를 타고 해상 전투, 그 격전의 현장으로 떠나 볼까요?

▲ 자, 이제 출항이다!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단단히 끼고 썼다. 이 선글라스를 통해 보면 마술처럼 1453년 당시의 해상 전투가 눈앞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배가 바다를 종횡 무진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하늘도 바다 빛깔이었지요. 그러나 육지에서 볼 때의 바다와 배 위에서의 바다는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훨씬 더 광활하게 다가왔습니다.

  3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고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흘러갑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바다의 윗물과 아랫물이 교차해 흐릅니다. 윗물은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아랫물은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그렇게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생성 이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빙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원래는 호수 상태였던 흑해의 얼음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표면을 침식시켜 생긴 해협이란 의견,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간에 급격한 지각 변동으로 깊은 틈이 벌어지며 생긴 해협이란 견해다.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기면 찢긴 부분은 들쑥날쑥하지만 맞대면 원래 모습이 되듯이, 해협 역시 들쑥날쑥 분리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보스포루스 물을 모두 빼낸 다음 양쪽 해안을 맞대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별할 때 반으로 쪼개어 둘이 하나씩 나눠 가졌던 연인들의 거울처럼….

  염도 높은 지중해 물(아랫물)과 염도 낮은 흑해 물(윗물)이 몸을 뒤섞으며 남북으로 서로 엇갈려 흐르기 때문일까요? 보스포루스는 유속이 매우 빠르고 물살이 거세어서 뱃길이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해풍도 모자를 빼앗아 갈 듯 세차게 불어 턱 끈을 단단히 조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급커브 길이 많고 안개도 짙게 끼어 이 지역에선 *해상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도 그런 사고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조선끼리 충돌해 폭발하면서 주위의 석유 저장고까지 폭발시켜 보스포루스 전체가 불타는 느낌이었던 일, 모터보트끼리 부딪쳐 승객 열세 명이 어두운 바다 속으로 사라진 일,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던 화물선이 보스포루스 해안에서 10미터쯤 육지로 올라가 단숨에 바닷가 목조 저택 두 채를 무너뜨리고는 세 명을 즉사시킨 뒤 3층 거실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온 일 등등.


▲ 크루즈 선장은 일반 관광객들의 유람 코스와는 사뭇 다른 내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고생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해상 전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그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더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 크루즈 선들의 출입 금지 구역까지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항해술이 노련한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고 물살이 뱃전으로 쳐들어올 때는 바닷가 출신인 나도 조금은 불안했다. 지금도 고마운 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선장이 해류와 해풍 등 주로 1453년 4월과 5월에 치러졌던 해상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댄 나에게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상세한 답변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해전 당시 술탄의 함대에 합류했더라면 혁혁한 공을 세웠을 것 같은 선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상 사고는 전쟁과 비교하면 견줄 바가 못 됩니다. 1453년에는 이 일대 바다가 온통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 해군과 전함은 모두 해양 도시 국가인 베니스의 차지였습니다. 베니스는 자국의 이익이 걸린  이 싸움에서 비잔틴 제국을 돕기 위해 자금 및 식량 지원과 함께 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 있던 베니스 선박들도 전함으로 개조되어 전력에 힘을 보탰습니다. 오스만 군의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혼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던 선박 수는 모두 26척이었습니다. 골든혼 해역, 특히 방재 구역의 지휘권은 제노아 공병 출신 바르톨로메오 솔리고가 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페라 지역을 관리하는 제노아 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에게 골든혼의 지휘권을 맡긴 것 같습니다.

▲ 베니스의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과 기술자들. 제노아와 함께 오리엔트 무역을 양분하고 있던 당시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해 군사용 함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냈으므로 조선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베니스 선장인 알비소 디에도 역시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해 황제를 기쁘게 했습니다. 해군의 전투력과 항해술, 실전 경험만큼은 비잔틴이 오스만보다 우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위해 싸운 베니스 선장 출신 해군 제독. 4월 20일 해전 당시 야음을 틈타 골든혼의 쇠사슬을 살며시 풀고 요란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3척의 베니스 갤리선을 끌고 나와 오스만 군을 혼란스럽게 한 뒤 아군의 배들을 안전하게 골든혼 쪽으로 인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4월 28일 기습 공격전에선 총지휘를 맡아 베니스 갤리선 2척을 몰고 골든혼 안쪽으로 쳐들어갔지만 사전 기밀 누설로 실패, 근근이 목숨만 구해서 돌아왔다.


  때문에 술탄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퍼부어 해군력의 약세를 만회하려고 전함을 대폭 보강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발토글루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함대 1453년 3월 말경 마르마라 바다에 집결시켰습니다. 선박 수로는 비잔틴 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초 십자군이 그랬듯이 함대를 골든혼 안으로 들여보내 그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강한 봉쇄용 철제 사슬이었습니다. 이 쇠사슬은 그 전부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3단 갤리선, 2단 갤리선, 노 딸린 갤리선, 푸스테(기동력이 뛰어난 가볍고 긴 배), 파란다리아(운송용 바지선), 쌍돛배, 외돛배, 소형 연락선 등으로 구성. 선원과 노잡이는 용병이 대다수였지만 죄수와 노예들도 섞여 있었다. 해군의 전투력 보강을 위해 술탄은 1452년 겨울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적의 전함과 병참 기술도 필요하다면 즉각 도입했다. 함대의 총 규모는 140척부터 480척까지 문헌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다.



▲ 15세기와 16세기 무렵 지중해를 항해하던 군사용 선박.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에 커다란 삼각돛을 달아 속도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났다. 베니스는 전투용인 경(輕)갤리선과 수송용인 중(重)갤리선을 건조, 최강의 해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중해 각국에선 죄수를 강제 동원해 전투용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는 일이 오래도록 성행했다.

  1453년 4월 12일, 발토글루는 증원군인 흑해 함대가 도착하자마자 큰 배들을 쇠사슬이 막아선 골든혼 입구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대포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불 붙은 나뭇조각들이 비잔틴 배를 향해 날아가는 가운데 오스만 군 일부는 닻줄을 끊고 쇠갈고리와 사다리를 붙잡은 채 배에 기어오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각도가 엇나간 포탄도 비잔틴 군의 키 큰 갤리선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해군 제독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大公)의 증원 함대까지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군은 결집된 조직력으로 높이가 낮은 오스만 군의 배 안으로 창과 화살과 투석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발토글루는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종교 통합에 있어서는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비잔틴 제국의 종교 지도자. 하지만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 쪽 성곽 방어의 총책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도성 함락 이후 술탄이 중용하려 했지만 처자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이 패배에 모욕감을 느낀 술탄은 며칠 뒤 탄도가 높아진 개량 대포를 갈라타 곶 바로 건너편에 배치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첫 포탄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포탄이 갤리선에 명중해 배를 침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비잔틴 군의 배들은 페라 성벽을 보호막 삼아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오스만 군의 집요한 해상 공격은 비잔틴 군의 육상 방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육지 성벽에 투입됐던 수비군을 골든혼 방어를 위한 지원군으로 분산 배치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453년 4월 20일 아침, 교황이 무기와 식량을 가득 실어 보낸  제노아 갤리선들과 옥수수를 선적한 비잔틴 대형 수송선이 남풍을 타고 마르마라 해역으로 재빨리 접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술탄은 해군 제독 발토글루에게 배들을 나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임무를 완수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도 덧붙였습니다. 발토글루는 곧바로 대함대를 이끌고 몇 척 안 되는 만만한(?) 먹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해풍이 드센 거친 바다에서 단련된 비잔틴 군의 함대를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술탄의 해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4척에 불과한 기독교 군 함대에게 100척이 넘는 오스만 해군이 참패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요?

▲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그런 캡션과 함께 6편 맨 마지막에 올렸던 사진이다. 짐작했겠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격상 멀리서 명령만 내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술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함대가 고작 4척뿐인 적의 배를 앞에 두고 고전을 면치 못하자 속이 탄 술탄은 싸움에 가담이라도 할 것처럼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말의 다리가 허용하는 깊이까지 직접 말을 몰고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해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날의 바다는 보스포루스 해류와는 정반대로 역풍이 몰아쳐서 물살이 무척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을 조종하느라 애를 먹은 반면 비잔틴 해군의 배는 선체가 높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집중 공격을 하기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틴 배들은 오스만 배들을 줄곧 따돌리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아래 지점을 막 돌아 골든혼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배의 돛들이 힘을 잃었습니다. 물살의 한 지류가 남쪽의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급류하다가 여기서 만나 북쪽의 갈라타 해안 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입니다. 그런 만큼 물살의 끌어당기는 힘이 남풍 뒤엔 특별히 더 강해져 비잔틴 배들은 그만 거기에서 거미줄에 걸린 곤충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발토글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선박들로 비잔틴 배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서 쏘는 경(輕)대포로는 앙각(仰角-올려다본 각도)을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발토글루는 자신이 탄 3단 노 갤리선의 앞머리로 비잔틴 수송선의 선미루(船尾樓-배의 고물에 만들어 놓은 선루)를 들이받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 배들로 쳐들어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얼핏 비잔틴 배들이 수많은 오스만 배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상황은 딴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제노아의 해군 병사들이 물통으로는 불을 끄면서 도끼를 휘둘러 배에 올라오려는 적군의 손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습니다. 비장의 병기인 ‘그리스의 화염’(4편 참고) 또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오스만 군은 노 때문에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배들끼리 노가 서로 뒤엉키는가 하면 공격을 받아 부러져 나가는 노도 많았습니다.
  전투는 비잔틴 수송선을 둘러싸고 가장 불꽃이 튀었습니다. 3척의 제노아 갤리선은 수송선이 곤경에 빠지자 일제히 힘을 합해 수송선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마치 네 개의 웅장한 요새가 탑을 치켜올리고 오스만 함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모양새였습니다.
  오스만 배들은 선해전술(船海戰術)이라도 쓰듯이 막대한 타격을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해풍은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해가 지면서 돌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세찬 북풍이 휘몰아치자 비잔틴 배들은 돛을 한껏 팽창시키고는 오스만 배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골든혼 쪽으로 질주했습니다. 어둠도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피아조차 식별 못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비잔틴 배들은 아군의 엄호 아래 잠깐 열린 쇠사슬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해전은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비잔틴 군은  ‘적군은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낸 반면 우리는 며칠 뒤에 죽은 두세 명의 부상병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상당히 과장된 통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처절한 전투로 인해 그 일대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원군의 배들이 무사히 도착해 합류함으로써 비잔틴 군은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까지 늘리게 되었습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도 다시 지펴졌습니다.

▲ 해상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기본 개념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린 걸까? 아니면 바다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상태? 그래도 활과 화살, 창과 칼, 소총과 대포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전에서의 거듭된 패배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술탄은  *발토글루를 비겁자며 배신자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장 목을 베려 했지만 부하들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만은 살려 두고, 자신의 측근 함자 베이를 새로운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익히 아시다시피 배들을 육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6편 참고)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발토글루는 오스만의 해군 제독이 되어 기독교 군과 싸웠다. 아군의 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눈까지 심하게 다쳐가며 술탄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패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간신히 참수형을 면했으나 직책은 물론 사유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곤장까지 맞는 형벌을 받았다. 술탄에게 버림받은 뒤로는 무명인이 되어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지에 골든혼을 장악당할 위기에 처한 비잔틴 황제는 6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중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기습 작전 계획을 짭니다. 또 한 차례의 대규모 해상 전투가 이번에는 골든혼을 무대로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볼까요?

  최초의 예정일(디데이)보다 4일 늦은 4월 28일,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쯤 트레비사노가 직접 지휘를 맡은 베니스 갤리선 2척의 호위 아래 단단히 무장한 비잔틴 군의 대형 수송선 2척(한 척은 베니스 배, 다른 한 척은 제노아 배)이 페라 성벽의 보호 구역을 살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갤리선 후미로는 트레비존드에서 온 자코모 코코 선장이 이끄는 3척의 푸스테와 가연성 물질을 실은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적들의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순간이 다가왔다면서 행동 개시를 하려는 순간, 아뿔싸, 해안가에 묵묵히 있던 오스만의 대포가 잠든 바다를 깨우는 굉음과 함께 불을 뿜으면서 선제 공격을 해왔습니다. 동참하기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연기되는 사이에 기밀이 새나가 오히려 오스만의 역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페라의 탑에서 비치는 불빛을 조명탄 삼아 오스만의 대포들은 목표물을 조준해 줄기차게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돌격 대장 역할을 맡았던 코코 선장은 용맹무쌍하게 앞장서 싸우다가 포탄을 맞고 침몰한 푸스테와 장렬하게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트레비사노도 갤리선을 버리고 선원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해안까지 헤엄쳐 나온 비잔틴 병사들은 도성 시민들에게 잘 보일 만한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육로를 통한 선박의 골든혼 진입에 이은 이 해전의 승리로 그는 더욱 확고한 해상 통제와 더불어 성벽 돌파를 위한 강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원근법과 음영을 무시하고 그린 이슬람 세밀화. 화가가 달라도 화풍이 같아 누구 작품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쌍둥이 형제들처럼 닮은꼴이다. 범선이 육지로 달리는가 하면, 백마를 탄 술탄은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1페이지 그림책’을 해독이 까다로운 암호를 풀 듯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자유자재로 발동한다.

  전세는 점점 비잔틴 제국에 불리해져 갔습니다. 1453년 5월 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다리다 지쳐 베니스 함대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면서 쌍돛 범선 한 척을 오스만 해군 몰래 파견했습니다. 투르크군으로 위장한 12명의 자원병이 오스만 깃발을 꽂은 그 배를 타고 성공적으로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를 빠져 나와 북풍을 받으며 에게해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니스 함대는 아직 콘스탄티노플로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서 콘스탄티노플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탓입니다.
  에게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베니스 함대를 찾지 못하고 그들이 곧 나타날 조짐도 발견 못한 쌍돛 범선 선장은 선원들에게 어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자체 토론 끝에 그들은 만장일치로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죽든 살든 황제에게로 돌아가 탐색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신하된 자들의 도리요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떠난 지 20일 만인 5월 23일, 이 무명의 용사들은 이미 오스만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을는지도 모를 콘스탄티노플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서 위험을 무릅쓴 채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도성 안에서 황제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특수 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쌍돛 범선이 절망적인 소식만을 가득 싣고 귀항하자 이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천년 성벽과 성모 마리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 마르마라 해는 남쪽 지중해와 북쪽 흑해 사이의 내해(內海), 바다 안에 있는 바다(Sea in Sea)이다. 연안에는 아홉 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왕자 섬’이라 불린다. 여러 종류의 배들이 흑해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폭이 좁고 안개가 자주 끼어 선박끼리 충돌하는 일이 많아 이를 막으려고 시간을 정해 교대로 일방통행시키기 때문이다. 낮에는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로 가는 배들이, 밤에는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로 가는 배들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해 항해를 한다.

  *비잔틴 시대에 왕족이나 고관, 사제들의 유배지로 쓰이던 섬들.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원들도 이곳에 많이 지어졌다. 1453년 당시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앞두고 발토글루를 보내 이 섬들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섬이었던 프린키포만의 수비대원 30명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혀 도륙되었다. 섬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려 갔다. 19세기 후반부터 이 섬들은  휴양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아홉 개의 섬 중 네 개는 무인도다. 섬 안에서는 차량 운행이 금지돼 있어 천연의 아름다움과 정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내가 ‘종군 기자’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넘치는 의욕에서 나온 말입니다. 550여 년 전 해상 전투의 현장을 생중계하듯이 전달할 능력이 내겐 없습니다. 다만 나는 책에서 읽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되새기면서 해풍의 방향과 전투 지점, 물살의 흐름과 세기 등을 가늠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미진한 부분은 눈 밝은 독자들이 사진들을 보면서 헤아려 주리라고 믿습니다.
  (해상 전투 편에서 언급한 함대의 규모와 전쟁의 양상 및 결과 등은 영국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과 작가 로저 크롤리, 터키 역사학 교수 페리둔 에메젠과 마흐뭇 바자르의 저서 및 견해를 종합한 다음 내 탐사 경험을 덧붙여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혀 둡니다.)

▲ 돌마바흐체 황궁. 19세기 중엽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을 따라 길게 지은 바닷가 궁전으로 건물 길이가 600미터에 달한다. 발토글루가 지휘하는 해군 본부가 바로 이 위치(당시 지명은 *디플로키온)에 있었다.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이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그가 서거한 시각인 오전 9시 5분에 바늘이 멈춰 서 있다. 요즘 내 시계도 돌마바흐체의 시계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 바늘이 머물러 있다.

  *바다가 조용하고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Diplokion, 터키어로는 Çifte Sütun, 영어로는 Double Columns이다. 이는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이중 기둥’이란 뜻을 담고 있다. 1422년에 제작된 부온델몬테의 콘스탄티노플 설계도에는 지금의 탁심 광장과 마츠카 사이의 계곡을 흐르고 있던 하천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닷물을 정밀 분석해 본다면 혹시 아직도 미량이나마 전쟁의 잔해인 피의 성분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자 황혼 물든 저녁 바다가 갑자기 핏빛으로 보였습니다.


▲ 해안 성벽 바로 앞에 있는 마르마라 바다로 물놀이를 즐기러 나온 청소년들. 지금 이들은 방학 기간이다. 오스만과 비잔틴 전사의 후예들답게 늠름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인다. 수심이 꽤 깊고 가까이로 선박들이 지나가는 바다에서 튜브나 구명 조끼도 없이 헤엄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또 어느 순간 나는 저 깊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2만 마리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1991년 11월 15일에 일어났던 기막힌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날 루마니아에서 구입한 2만 마리가 넘는 양을 싣고 보스포루스를 지나던 레바논 선박이 러시아로 밀을 싣고 가던 필리핀 화물선과 충돌해 양들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몇 마리 빼고는 모두 파티 대교(보스포루스 제2대교) 밑 어두운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한동안은 또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자동차들이 유행처럼 파티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더군요.


▲ 유럽(왼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왕복 6차선 도로가 나 있다. 총길이는 1560미터, 양 교각 사이 거리는 1074미터, 다리의 폭은 33.4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이다. 교각 오른쪽으로 오르타쾨이 모스크(빨간 동그라미 안)가 보인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이다.

  이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바다에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숱한 사건과 비극적인 사연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밑바닥에는 온갖 것들이 해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뼈, 창검과 소총, 대포와 대포알, 녹슨 훈장과 계급장, 부서진 선박과 자동차의 쇳조각들 등등….

▲ 여기는 골든혼 입구. 갈라타타워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다. 나는 골든혼 저 끝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선장은 항해 금지 구역이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배가 선장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놀이동산 바이킹과는 전혀 다른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다시 보스포루스로 향해야 했다. 보스포루스에서는 배를 세워 놓으면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남쪽으로 떠내려 가지만, 골든혼 일대는 다르다. 어떤 해역에서는 바람이 정지하면 배가 오도가도 못한 채 발이 묶인다고 한다. 런치만의 책에 나오는, 조류가 한데 얽혀 배들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해상 전투 현장을 탐사하고 돌아와 관련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선명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다!
전쟁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오스만에 첩보를 제공하는 스파이도 적지 않았다. 물론 비잔틴을 위해 싸운 제노아인도 많았다. 700명의 용병을 거느리고 맹활약한 제노아의 명문가 출신 주스티니아니, 골든혼 봉쇄 사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제노아인 공병 솔리고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바닷속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을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을 올렸습니다. 저녁 노을이 바다로 스며들어 번지고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바다가 내 눈에는 위령제를 위해 불을 밝힌 수많은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마침 바람도 강하게 불면서 바다 표면과 맞부딪치며 장송곡 같은 마찰음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 바다위로 안개가 마치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종군 기자들의 수첩 맨 마지막 줄에는 아마도 애도사 혹은 추도사가 적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에 표시돼 있는 파란 색깔 바다 부분은 거의 다 크루즈 선을 타고 탐사했다고 보면 된다. 단 지금은 흙이나 시멘트로 메워진 해자 부분은 빼고 말이다.

P.S.
  요즘 국회는 연중 가장 바쁘게 돌아갑니다. 국정감사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은 상임위가 없는 국회의장으로서 이 기간을 이용해 ‘희망 탐방’을 떠났던 나도 올해는 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국감을 치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는 해외 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9편은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미리 써 둔 다음 남미 국감 도중에 이메일을 통해 마지막 교정을 보고, 10월 13일, 블로그에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육지 성벽과 해안 성벽, 루멜리 히사르와 해상 전투 등 직접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매듭짓게 됩니다.

  10편부터는 약 7회 분량으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해 몇몇 모스크와 박물관, 우르반의 대포, 술탄과 황제의 약전(略傳) 및 리더십 비교 등을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그 동안 내 이스탄티노플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아래 한 장의 사진으로 잠깐의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마르마라 바다 위에서 바라본 아야소피아(빨간 동그라미 안)와 그 일대. 10편과 11편, 12편에서는 교회에서 모스크로, 다시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아야 소피아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펄프픽션 2010.10.13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편 대서사시를 읽고 난 느낌입니다.
    블로그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길면서도 알찬 포스팅인 것 같습니다. 강추!!

  2. 쏘시오 2010.10.13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대 100의 전투에서 4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숫자지만 100을 너끈히 이겨습니다. 전투력은 숫자에 비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골든 혼 해전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선을 물리친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승리를 결정하는 요인은 단순한 양이 아닌가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군도 현대화, 정예화에 박차를 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북의 100만 대군에 대칭돼 60만 대군이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군부 엘리트, 즉 직업군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군, 이제 정말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입니다. 값싼 인력(징병제)에 취해 인적자원을 낭비하지 말고 언젠가 모병제가 될 때를 대비해 하나씩 하나씩 정예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3. 엠파이어 2010.10.14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신을 읽고 나서 무릎을 쳤습니다.
    역시 이런 열정과 집착이 있어야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4. 보헤미안 2010.10.14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로이보다 더 멋진 역사적 대 서사시!! 이스탄티노플
    러브라인 살짝 깔면 불멸의 영화 한편 탄생하겠군요.
    공격하는자와 방어하는자의 입장이라 그런지 어쩌면 술탄과 콘스탄티누스의 성향또한 이렇게 반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영웅은 어떤 배우자를 두고 있었을지도 궁금하구요.
    건장한 짐승남들로 예니체리 부대원들을 캐스팅하고, (음 근데4편의 예니체리 자료를 보면 긴팔에 긴바지라 근육구경은 못할듯 하네요. 아쉽~~)
    발토글루와 함자베이, 자가노스 파샤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라 박진감 넘치는 영상들이 머릿속에 자동상영됩니다.

  5. 배가본드 2010.10.15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드라마틱한 소재가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할리우드 감독들도 편협된 서양 사학자들의 시각을 못 벗어난 걸까요?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굴욕과 패배의 역사라서?

  6. 오노 야스마로 2010.10.15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서기>를 쓸 때가 생각나는군요...나는 백제의 후손이지만, 일본 땅에 터를 잡은 사람. 이왕지사,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일본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주체성을 위해, 난 <일본서기>를 써야했지요...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터키의 역사는 흥미진진 그 자체로군요. 이번 연재물로 한국과 터키의 역사가 오작교 위로 오가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사요나라 아나따~~

  7. 레퀴엠 2010.10.16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만 마리 양들이 빠져 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그 전에 죽은 영혼들까지 호명하며 위령제를 지내 주듯
    글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읽어내기에도 만만찮은 글을
    멋진 사진과 함께 탄탄하게 써 올린 분의 열정이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8. 마린보이 2010.10.22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도시가 되었다.
    누가 그 향기와 빛깔에 걸맞은 이름을 불러주랴.
    글 쓰기란 역시 의미 찾기이다.

  9. 롱롱타임 2010.10.24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도 수월치 않은 긴 글이지만 쓴 사람 성의를 헤아려 끝까지 읽다.
    결론은 시간이 아껍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의 노력과 마음씀이 여러 사람을 즐겁게, 이롭게 한다.

  10. 거석이 2010.10.26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따 뭘 이러코롬 길게 쓴다요
    좀 짤뚱짤뚱 단편으로 해주셔도 괜찮을터인디
    지처럼 가방끈 짧은넘은 끝꺼정 읽다가 앞에 내용 다까묵습니더
    ㅎㅎㅎ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전쟁의 전초 기지 루멜리 히사르

  그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언어나 문자를 통한 공식 선언만 생략되었을 뿐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는지도 모릅니다.

▲ 루멜리 히사르 입구에서. 증명사진처럼 돼 버렸지만 나로선 두 번째 방문이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니 참 편하고 좋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 양 옆에 매달린 갓등도 제법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에 수문장이 지켜 서 있었겠지?

  *145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고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곳에 모으며 뭔가를 준비하던 오스만의 군사들이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요새를 새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유럽의 성’이란 뜻)가 그 주인공입니다.

  *강성했던 비잔틴 제국은 점점 쇠락하여 15세기 무렵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일부에만 통치력이 미칠 정도로 왜소해져 있었다. 100만을 헤아리던 도성의 인구도 5만 명이 채 안 되게 줄어들어 있었다. 반면 오스만 투르크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한 뒤 비잔틴의 남은 영토를 잠식해 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육지 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 바다 위 유람선에서 바라본 루멜리 히사르의 전경. 장엄하고도 웅장하다. 성벽 길이는 250여 미터, 높이는 15~33미터, 두께는 3~6.5미터에 이른다. 3개의 큰 성탑과 9개의 작은 탑을 공격과 수비에 모두 유리한 구조로 연결해 놓았다. 술탄 메메드 2세가 직접 설계 및 감독을 맡아 5000명에 이르는 인부와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지었다고 한다. 술탄은 하릴 파샤, 자가노스 파샤, 사루자 파샤 등 세 명의 중신이 분담해 책임지고 공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경쟁을 유발해 공사의 완성도와 진척 속도를 높였다. 성탑의 이름도 축성한 신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요즘으로 치면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기능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제노아와 베니스 상인들을 비롯해 아라비아·아르메니아·유대인 등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해상 무역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투르크의 눈치를 살펴가며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알라신도 부수지 못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수호신처럼 의지한 채 말입니다. 다행히 오스만의 전임 술탄 무라드 2세는 통치 기간 중 1422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포위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이후 경제적 이득만 취할 뿐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는 않았습니다.

▲ 루멜리 히사르의 늠름한 위용.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에는 아나돌루 히사르가 자리해 있다. 왼쪽으로 해협을 길게 가로지른 다리는 보스포루스 제2대교인 *파티 대교. 정복자(파티) 술탄 메메드 2세를 기념해 이름을 붙였다. 옛날 같았으면 바다와 가까운 주탑 위에서 대포알이 저 흰 배를 겨누고 날아갔으리라.

  *원래 이름은 파티 술탄 메메드 대교로 1988년 여름에 개통되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 양단에 세워진 교각 거리는 1090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 대교의 폭은 39미터로 왕복 8차선 도로이다.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차량 통행료가 무료이나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들어올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무라드 2세의 급사로 1451년, 그의 열아홉 살난 아들 메메드 2세가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루멜리 히사르는 말하자면 그 정복을 위한 상징 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이 이 도시는 ‘모든 세계 정복의 열쇠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심장부’인 보스포루스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메메드 2세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의 술탄 재위 기간을 갖고 있다. 1444~1446년, 1451~1481년. 전임 술탄인 무라드 2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1444년, 고작 열두 살인 아들 메메드 2세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하고 은퇴했다. 하지만 내각과 군대가 거만하고 고집 센 소년 지도자에게 불만이 많은 데다가 유럽 국경 지대의 분란이 끊이지 않아 여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그리고는 5년 뒤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메메드 2세는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완공일이 8월 31일이라니 겨우 넉 달 반 만에 그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구축한 셈입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은 루멜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 두 개의 거센 손아귀에 의해 목을 움켜잡힌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마주보고 있는 두 성에 군대와 대포를 배치함으로써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보급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강력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입니다.

  * 보스포루스는 터키어로 보그하즈. 동음이의어로서 ‘목구멍’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당시 투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보그하즈 케센’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날’ 또는 ‘목구멍의 칼날’이란 살벌한 뜻이다.

  ** Anadolu Hisar, ‘아시아의 성’이란 뜻으로 메메드 2세의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가 139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지은 요새. 바예지드는 당시만 해도 비잔틴 황제의 승인 아래 이 성을 지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루멜리 히사르를 신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의의 뜻으로 도성 안에 있던 600명가량의 투르크 인들을 붙잡아 감금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모두 석방했다.

▲ 원근법과 건물 구도를 무시하고 그린 두 요새 그림. 위쪽 성채가 아나돌루 히사르, 아래쪽 성채는 루멜리 히사르이다. 각각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650여 미터) 동쪽과 서쪽 연안에 마주보고 서 있다.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루멜리 히사르의 규모가 훨씬 더 크고 높다.

▲ 루멜리 히사르에서 찍은 아나돌루 히사르의 원경(遠景). 아시아와 유럽이 이 좁은 해협(650미터~3.6킬로미터)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다. 주탑 위로 빨간색 터키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두 성채의 크기가 그것을 지은 두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의 서로 다른 야망의 크기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 앞 바닷가에 네모와 세모의 조합으로 건축된 집들이 마치 레고로 지은 듯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으로 하여금 요새 앞에 멈추어 검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배는 침몰시킨다면서 위협적인 대포 3문을 바다와 가장 가깝게 지은 탑에 배치시켰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나는 지금 루멜리 히사르의 스케치풍 그림과 요새의 구조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본문과 캡션에 이미 설명해 놓은 내용이지만 영문 표지판 내용이 궁금하다면 비록 내 몸으로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영어 공부 삼아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11월 초 흑해에서 출항한 두 척의 베니스 선박이 정지 명령을 거부했다가 대포의 공격을 받았으나 용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2주 후 똑같은 시도를 하던 세 번째 선박은 포탄에 맞아 침몰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참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삽시간에 공포의 바닷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점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주탑의 내부. 나선형 회전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지하까지 합해 6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왼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배치되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탑 안으로 비쳐든 햇살이 훌륭한 조명기사 역할을 해주어 멋진 예술 사진이 만들어졌다.

  우리 일행은 그 살벌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주변 풍경, 그리고 요새는 난생 처음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저 우뚝 솟은 루멜리 히사르 성 위에서 대포알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성 안쪽에 1452년 당시와 그 이후 실전에 사용되었던 오스만의 대포들을 진열해 놓았다.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공격했던 큰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거포는 성벽 위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발포하면 그 반동으로 성벽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 섹시한 대포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영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묘한 모양의 대포알이 돌기둥 위에 놓여 있다. 가운데에 홈을 파 놓은 까닭은 아마도 밧줄에 묶어 성벽 위로 끌어올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쏘던 대포 발사대 구멍. 지금은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나뭇잎 저편은 바다이다. 내부 벽이 화염의 흔적인 듯 그을음으로 까맣게 덮여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여기도 안쪽 구멍이 넓고 바깥쪽 구멍은 좁은 형태이다. 그러니까 방어와 공격 모두를 유리하게 만든 구조이다.

  실제로 우리는 루멜리 히사르의 가장 높은 성탑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대포와 화살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쏘았는지 실감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난간도 없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험한 보람이 있었지요. 전망이 탁 트인 보스포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 밑은 비록 아찔했지만 술탄이 왜 여기에 요새를 구축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그 무시무시했던 루멜리 히사르가 박물관 겸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5편에서 소개한 갈라타 타워도 오랜 기간 군사용 감시탑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 보스포루스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거세다. 바다 표면에 울퉁불퉁 주름이 잡혀 있다. 대포알이 배를 스치기만 해도 전복될 것 같은 느낌이다. 큰 대포알이라면 배 근처에만 떨어져도 선박이 요동을 쳤을 것 같다. 중견 작가 한승원씨의 「그 바다, 끓며 넘치며」라는 해양 소설 제목이 문득 생각난다. 저 멀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평화롭던 학교 교실은 포로수용소가 되고 운동장은 적들의 제식 훈련장이 되고 극장은 야전 병원이 되는 경우는 우리도 이미 60년 전에 겪지 않았습니까.

▲ 스탠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루멜리 히사르는 요즘 종종 야외 공연장 및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한여름 밤에는 터키의 톱스타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축제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의 전초 기지였으며 그 뒤 포로수용소 역할도 했던 이곳이 이제는 평화의 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역사는,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의 전쟁에 관한 격언 중 음미할 만한 몇 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와도 맥락이 닿는 금언들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로마 격언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아돌프 히틀러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맨토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단어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윈스턴 처칠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이승만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다.”-칼 폰 클라우제비츠


▲ 루멜리 히사르의 야경.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동화의 나라 같은 느낌이다. 왠지 오늘 밤 저 성 안에서는 환상적인 공연과 함께 연인들의 로맨스가 무르익고 있을 것만 같다. 아래사진 왼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시시각각으로 빛깔을 달리 하며 ‘이스탄티노플’의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많은 격언들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위력, 자주국방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주변 국가, 이해 당사국들과의 신뢰 및 우호 협력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함을 이어지는 다음 편(9편)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양이 보스포루스를 곱게 물들였다. 이스탄티노플의 부유층이 자가용처럼 이용하는 요트로 보이는 이 배는 해 저무는 바다를 미끄러져 보금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바다, 1452년과 1453년, 그땐 결코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9편에서는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그 당시 격렬했던 해상 전투의 현장으로 배를 몰고 가 볼 생각이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는 15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대 지도를 쓸까 하다가 비록 축적과 원근감은 애매하지만 바다 모양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어 등장시켜 보았다. 왼쪽 육지 성벽 옆 해자 모양도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아래는 마르마라 바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사이를 흐르는 건 골든혼이다. 오른쪽 위의 해협이 바로 보스포루스이다. 보스포루스 왼쪽 연안은 유럽, 오른쪽 연안은 아시아다. 따라서 루멜리 히사르(왼쪽 동그라미)와 아나돌루 히사르(오른쪽 동그라미)는 대략 저 위치쯤에 있었을 것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가와바다 2010.10.06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뷰티풀!
    이스탄티노플,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반할 수밖에 없는 도시입니다.

  2. 조나단 2010.10.06 0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망명하고픈 도시!

  3. 술취한 술탄 2010.10.06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봉박두 기다리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로 이야기가 흘러가는군요.
    본문에서 말했듯이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승리에 취한 오스만군의 모습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다음편 부터는 본격적인 해상전투가 그려질 예정이라니 더욱더 이스탄티노플에 빠져들것만 같습니다.

  4. BlogIcon 너서미 2010.10.06 1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길고 잘 기획된 시리즈물을 블로그로 볼 수 있다는 건
    독자들에겐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것들은 책 외에는 볼 수 없는데 말이죠.
    더구나 블로그에서 깊은 조사에 의한 컨텐츠가 드문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5. BlogIcon 술에물탄 2010.10.06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벌써 8편이 올라왔군요.
    야경도 참 아름답고,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짓는 장소라는 점이 신비(?)스럽네요.
    그리고 그곳의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성벽들..
    참 매력적이네요.

    잘보고 갑니다~

  6. 쏘시오 2010.10.06 1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에게 목젖같은 저 콘스탄티노플성은 '목엣 가시'나 다름없을 것이다. 반드시 빼놓아야 음식을 마음껏 삼킬 수 있는...
    한 때 오리엔트를 지배하던 비잔틴의 말년이 너무나 초라하다. 천년제국이 저렇게
    옹색하게 줄어들 때가지 역대 황제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나...
    비잔틴 최후의 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7. 히데요시 2010.10.06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순신은 적장이나,존경할만 하오. 후세 누군가는 <칼의 노래>라는 소설로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뭐니뭐니해도 이순신의 뛰어남은 그의 지혜(기획력)와 추진력일 것이오. 8편으로 이어지는 이스탄불 시리즈에서 상세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어서 좋소이다. but, 비유 또는 알레고리,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의 연결 또는 21세기 현재와의 구체적 연관성 등이 나타나있다면 가독성이 엄청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당시의 터키-임진왜란 당시 조선- 21세기 한국>의 멋들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외다. 잘 읽고가오."

  8. 두륜 2010.10.06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2년 술탄 메머드2세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단 4개월만에 지었다는 "루멜리 히사르 요새" 그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네요...
    치열했던 전쟁의 전초기지로써 아픈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동화같은 "이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자리잡아 우리에게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게 해 주니 참 아이러니 하네요...
    "치열한 전쟁속의 종군기자"라....^^
    9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9. 코렐리 엄 2010.10.06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 단 두차례의 방문에 이런 작품이 나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또 주말에 즉시 현장사진 장소대로 방문해 의장님 체취를 느껴 볼까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끊임없이 열정을 다해 생생한 역사재현 및 어디에도 없었던 지식전수해 주심에 감동입니다.
    참, 지적해 달라 하신부분,보스포로스 제2교는 왕복 8차선입니다. 제1교는 6차선이고요,또 석양의 보스포로스 사진에 등장한 어선은 세일용 34피트 요트로 보입니다.
    엄청난 감동으로 연일 펼쳐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지식과 경륜과 부드럽고 날카롭고 부담없는 필체에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터키에서 인사올립니다. 꾸벅.

    • 호야 2010.10.07 1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지 사정에 밝은 엄 전무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두 가지 오류, 곧바로 수정해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성원에 힘이 불끈 솟는군요.
      새치를 뽑듯이, 앞으로도 팩트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 주기 바랍니다.

  10. 대물 2010.10.07 0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섹시한 대포알? 그 사진과 캡션 읽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의장님은 역시 유머를 아시는 분입니다.

  11. 전자돌이 2010.10.07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균 일주일에 한번꼴로 올라오는 이스탄티노플 시리즈를 접하면서
    대학생때 교양 수업 듣던 기분이 나더라구요.
    한 열대여섯편 정도 쓰시면 정말 한학기 강의분량이네요 ㅋㅋ
    호야교수님 시험문제는 어떻게 내실 계획이신가요? ^^

    • 팽돌이 2010.10.09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국감으로 외통위 소속인 호야 교수님이 해외 공관 국정감사를 나가신 걸로 압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휴강?
      중간고사 대비해 열심히 복습이나 해야겠습니다.

    • 아나돌이 2010.10.09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긴급 입수! 이스탄티노플 중간고사 주관식 예상 문제!!!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루멜리 히사르 맞은편
      아시아 쪽 보스포루스 연안에 있던 요새 이름은?"
      제 아이디(아나돌이)에 힌트가 있습니다.

    • 사과나무 2010.10.14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먼저 답해도 되나요?ㅋㅋ
      정답은 '아나돌루 히사르'입니다!

  12. 거석이 2010.10.26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미 거시기 민망한 사진이 있구먼유
    워째 의장님 이미지랑 영..

    • 거시기 2010.10.27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시기란 무엇이냐.
      크게(巨) 보이는(示) 그릇(器)이란 뜻입니다.
      대물(大物)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런 점잖은 유머는 오히려
      블로그의 품격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바다 위를 걷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



  <구름 위의 산책>이란 영화가 있습니다만, 그대 혹시 바다 위를 걸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걸어 보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말입니다. 물론 특수 신발을 신었다거나, 갑자기 내 눈 앞에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로 바다 위를 활보했던 걸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바다 위의 산책’은 아니었습니다. ‘1453년 당시에는 바다였던 곳’을 답사했던 거지요. 부연하자면, 나는 지금은 대부분 매립돼 육지로 변해 버린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을 탐사했습니다. 몇 장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말입니다.


  총 길이 약 9킬로미터. 마르마라 연안을 끼고 완만한 오목렌즈 형으로 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안 성벽은 한 겹이었으며, 그 성벽을 관통하는 11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요새화된 항구를 비롯해 작은 선착장들이 있어 물자도 실어 나르고 세찬 북풍 때문에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선박들의 피난처가 돼 주었습니다.

  성벽 둘레로는 급류가 흘러 상륙용 주정(소형 배)을 성벽 끝까지 갖다 대기가 어려웠으며, 암초와 모래톱 또한 마르마라 성벽의 든든한 방어물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453년 전까지만 해도 1000년 이상 외세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성문이 열린 적이 없는 천혜의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도성 모습. 오른쪽으로 방어용 쇠사슬을 쳐 놓은 골든혼(금각만)이 흐르고, 그 옆에 제노바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갈라타 지역 일부가 보인다. 그림이 증명해 주듯이 당시에는 아래쪽 마르마라 바다가 성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파도가 성벽으로 밀려와 부딪치는가 하면, 성문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이 예니카프를 통해 마르마라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1453년 당시에는 도성의 상류 지역인 메소테이키온에서 격전이 치열했던 만큼 리쿠스 강물에도 핏물이 진하게 섞여 바다로 흘러 내렸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어순을 바꾸어 벽해상전(碧海桑田)이라 해야 할까요? 저 그림 속에서 꿈틀대던 마르마라 바다의 일부분은 흙으로 메워져 지금은 공원과 해안 도로로 변해 있습니다. 옛 성곽들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많이 허물어지고, 도로와 철길이 놓이면서 상당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설픈 복원 공사로 미관을 해친 부분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보십시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들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작가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들이지만 이번에도 올리지 못한 사진이 수백 컷입니다.
  한
컷의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 바다 위를 걸어 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라면….



▲ 골든혼 입구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배나 자동차를 우회전하면 해안 성벽이 나타난다. 오른쪽 언덕 위로 톱카프 궁전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만만치 않은 수심인데도 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안전 요원이나 ‘수영 금지’ 팻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해안 성벽으로 접어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투르굿 레이스(Turgut Reis, 1485~1565)의 동상.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왼손을 지구의에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상 오른쪽 건너편 페라 신도시 앞바다에는 하얀색 크루즈선이 떠 있다.  

*16세기 오스만의 유명한 해군 제독.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군인이 되었다. 지중해 말타 섬 원정을 총지휘했으며, 그리스도교 선박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로 유럽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1551년에는 말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조 섬의 주민 6000여 명을 모두 리비아에 노예로 팔아 버린 일도 있었다. 코르시카 섬과 마요르카 섬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투르굿 레이스에서 레이스(Reis)는 성이 아니라 ‘제독’이란 뜻을 지닌 옛 터키어이다. 아시아계 유목 민족이 그러하듯이 터키도 예전에는 성(姓)이 없었다. 특정 인물 이름에 직함을 붙여 부르는 건 터키인들의 오랜 전통. 걸출한 제독들에게는 ‘레이스’란 칭호가 붙었다. 같은 이유로 장군이나 사령관에게는 파샤(Pasha), 중견급 군인이나 지방 장관에게는 베이(Bey)란 호칭이 따라 붙는다.


 

▲ 투르굿 레이스의 동상 옆 망루 성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문자들. 테오필로스 황제(829~842년)가 이 성벽을 새로 지었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테오필로스는 9세기 무렵 아랍 함대들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을 보강했다. 이 망루 성벽 복원을 위해 역사학도(해안 성벽 전공) 니사가 관여하는 협회에서 유네스코에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 출입문인가, 경비용 혹은 감시용 문인가. 비잔틴 양식의 아치형 문이 아랫부분은 지하로 절반 이상 매몰된 채 시커먼 속을 내보이고 있다. 지표면의 융기로 땅이 솟아오른 데다가 매립까지 더해진 걸 감안하면 실제 높이는 만만치 않았으리라.


*부콜레온 황궁(Boukoleon Palace)으로 통하는 바다 쪽 수문의 원형 복원도.
   우리가 찍은 아래 관련 사진들과 비교해가며 보기 바란다.

*네아 바실리카 교회 옆, 히포드롬(원형 이륜마차 경기장) 바로 뒤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궁전. 아야 소피아와 매우 가까워 콘스탄틴 대제를 비롯한 비잔틴 황제들이 이곳에 머문 적이 많았다. 부콜레온(Boukoleon)이란 이름은 이 궁전을 지키고 있는 황소(Bull)와 사자(Lion)를 닮은 동물 조각상(붉은 사각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터키 정부가 그리스와의 우호 관계를 고려해 최근 일부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판에 고고학 박물관의 감독 아래 이 궁전과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연결되는 해안 쪽 문. 궁전을 수호하던 동물 조각상은 사라지고 물결이 넘실대던 바다는 매립으로 메워져 해안도로(케네디 대로)가 나고 해안선은 그만큼 멀어졌다. 배들이 다니던 바다를 지금은 자동차들이 달린다. 매끈했던 대리석 벽면에서는 거미줄처럼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쪽 문 내부. 카메라로 얼굴이 가려진 저 사나이는 누구인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이다. 이번 어드벤처에 기꺼이 동행해 프로 수준의 사진으로 맹활약했지만 “촬영 감독은 원래 스크린에 안 비치는 법”이라며 한사코 블로그에 등장하길 사양했다. 그런 그의 사진 찍는 모습을 내 디카에 담았다.


▲ 비잔틴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부콜레온 황궁 성벽의 맨 윗부분. 저 꼭대기에서도 무화과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두고 가지를 땅으로 향한 채 물구나무서서 자란다. 터키는 기후와 토양 모두 무화과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무화과나무(Fig-tree)를 인지르(Incir)라고 부른다. 하도 이 나무를 많이 보아서 나는 이 도시를   ‘인지르 시티(Incir City)’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주신() 바쿠스가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다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이스탄티노플은 문명과 문화 모두 다산성(多産性)인 도시이다.


◀ 아흐르카프(외양간 문) 주변. 오랜 옛날부터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 등대는 비잔틴 시대의 등대도, 오스만 시대의 등대도 아니다. 공화국 이후에 다시 지어진 현대식 등대이다. 달그림자마저 얼어붙었을 1453년 5월의 어느 날 밤을 등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서 마르마라 해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으로  *1군 사령부가 바라다 보인다.





*위스크다르 남쪽 마르마라 해 연안에 세워진 오스만 시대의 건물로 독일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크림전쟁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군 시설이라서 민간인 출입은 금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나이팅게일 기념관이 있다.


 

▲ 해안 성벽 안쪽. 성벽의 윗부분은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활을 쏘기 위해 만든 네모난 구멍은 안쪽이 넓은 반면 바깥쪽은 좁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유리하게 하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아치(Arch) 모양이지만 보다 전문적인 건축 용어로는 *니치(Niche)라고 일컫는다.

*장식을 목적으로 두꺼운 벽면을 파서 만든 움푹한 대(臺)로 보통 그 윗부분이 반(半)돔형이다. ‘벽감(壁龕)’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곳에 꽃병 등을 놓거나 아예 이 부분을 장식용 분수(噴水)로 만들기도 했다. 아치와 니치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벽이 없이 움푹 뚫려 있으면 아치, 움푹 들어가 있지만 벽으로 막혀 있으면 니치이다.



▲ 성벽의 높이를 짐작해 보자. 단 옛날에 비해 대지가 융기하고 해안이 매립됐음을 감안해야 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깊이까지 헤아린다면 결코 만만하게 볼 높이가 아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들이차고 남풍이 거세게 불고 암초까지 많았으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려는 세력들도 마르마라 해안 성벽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 내었다고 한다. 다만 강한 바닷바람(海風)에 실려온 염분으로 인해 육지 성벽이나 골든혼 쪽 성벽보다 보수 및 보강 공사를 더 자주 해야 했다.



▲ 어느 것이 먼저 무너질까? 1500년을 버텨온 성벽 틈새에 판잣집이 위태위태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즉석에서 그런 사진 캡션이 떠올랐다. 차틀라드카프 인근에는 이런 식의 건축물들과 성벽들이 흔했다. 그래서 일행 중 사진 애호가인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해도 못 들은 척 경쟁하다시피 셔터를 눌러댔다.


▲ 인간이 살고 있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허름하게 지어진 목조 가옥의 2층 처마 밑에서 빨래가 마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문득 멀리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그림을 바로 위 사진과 비교해 보라. 앞 성벽은 모양이며 구조가 위 사진 속의 성벽과 똑같다. 동일한 성벽이다. 그래픽으로 표현한 대리석 건물은 부콜레온 황궁 벽의 운형 복원도. 높이만 놓고 보더라도 그 위용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다.




▲ 이스탄티노플에선 피사체 모두가 예술 작품,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조각가, 어떤 화가가 이토록 아름답고 운치 있는 풍경을 빚어낼 수 있으랴. 오랜 세월, 비와 눈과 바람과 햇살이 합작해 빚은 천혜의 예술 작품 앞에선 오른쪽 인공으로 지은 건축물마저 불협화음이 아니라 차라리 조화롭게 느껴진다. 역설의 미학이랄까.


▲ 누가 저 고색창연한 성벽 위에 액자를 걸고 두 장의 현대식 건물 사진을 끼워 넣었을까?
눈이 잠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저 사진틀 모양 성벽들은 원래는 왼쪽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재질은 물론 대리석이다.(아래 그림 붉은 표시 부분 참고)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


▲ 성곽 끝자락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자세로 마치 1500년 전부터 거기 존재해온 것처럼 대리석 기둥을 받치고 집 한 채가 있다.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와 이 사진을 아치 기둥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보기 바란다.



▲ 황궁 터 앞은 옛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매립이 되고 그 자리에 도로와 공원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공원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폐선은 놀이터로 둔갑했다. 블루 모스크의 상징인 여섯 개의 첨탑(미너렛)이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구름 낀 하늘에 시를 적고 있다.



▲ 주말이나 휴일은 새(까마귀?)들의 잔칫날이다. 마르마라 해변 공원에서 새들이 행락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뒷설거지하고 있다. 비둘기도 아닌데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 터키 판 서낭당? 우리나라나 몽골․위구르 등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위에 매달린 실을 마르마라 해안 성벽 옆에서 보았다. 이 도시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통역사 이경숙씨에 따르면, 터키 시골에 가면 이따금 볼 수 있지만 이스탄불에서는 처음 본단다.
이경숙씨의 말, “의장님 따라 다니면서 모르던 것 새로 알고, 잘못 알고 있던 것 바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아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도시가 생긴 이래 남들이 안 다닌 곳들만 골라 다닌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여행자일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여태껏 쌓인 피로가 씻은 듯이 풀리면서 내딛는 발걸음에 다시 새 힘이 솟았다.


▲ 지도에게 길을 묻다. 거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니사가 준비해 온 1930년대 지도를 펼친 채 들여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해안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두 미녀의 눈길이 열심히 쫓고 있다. 나중에는 지도가 나달나달해졌다. 여백과 귀퉁이도 내가 써 놓은 메모로 가득 찼다.


▲ 옛 항구 자리를 찾아가던 길에 들른 카드르가 마을에서. 이 동네엔 오스만 시대의 전통 가옥들이 많았다. 기독교 문화권인 그리스 건축 양식이 창문이 굉장히 크고 돌출된 스타일인 반면,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집안에 있는 여자들이 밖에서 잘 안 보이도록 작은 창문에 창살을 달고 담을 높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 주차장으로 변한 항구. 혹시 흔적이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카드르가 앞 항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지도를 들고 이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항구는 온데 간데 없고 항구 끝자락 성벽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옛날에 배들이 정박해 있었을 법한 곳이 지금은 매립돼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 역시 이 나라 사람들은 ‘꼬레리’(한국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비잔틴 시대 해안 성벽 최대의 항구(?)를 찾아서 또 육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니카프 근처, 해저 터널과 연결되는 지하철 터미널 작업을 하고 있는 공사 현장은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우리에겐 특별히 문이 개방되었다. 여기가 바로 엘레우테리오스 항구가 있던 자리. 리쿠스 강물이 마르마라 바닷물과 몸을 섞던 최하류이기도 하다. 토목 공사 과정에서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어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 국립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도 가졌다.


특종 사진!?

▲ 출입은 특별히 허용됐지만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공식 발표 전이라서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했다. 하지만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기사(騎士? 技士?)는 ‘기사 정신’을 발휘해 눈치껏 셔터를 눌렀다. 특종 사진!? 흰 천막을 씌운 부분은 비잔틴 시대의 상선 22척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던 자리들. 파헤쳐진 발굴 현장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무토막들이 여기가 바로 옛 항구 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 옆은 *오르한 왕자와 그가 이끄는 투르크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오스만의 왕자. 술탄 쉴레이만의 손자이자 무라드 2세의 먼 사촌이다. 1453년 당시 마르마라 해에서 상륙한 극소수의 오스만 병사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술탄에게 잡히면 목이 달아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오르한과 그의 부하들은 투르크 군과 대항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르한은 정교회 수도복을 빌려 입고 변장한 채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혀 동료 죄수의 밀고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 바다 성벽 안쪽.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아치형 비잔틴 양식이 뚜렷하다. 여기저기에 동네 개들이 실례를 해놓아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1453년 당시 프사마티아와 스투디온 등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에 있던 지역은 그곳 방위군들이 육지 성벽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오스만의 함자 베이 함대에게 항복해 교회를 비롯한 주민들이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돈을 걷어 포로로 잡힌 다른 지역 주민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구해 주는 의리를 발휘했다.


▲ 바다 성벽 바깥쪽. 해안 성벽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성벽 바로 앞이 바다다. 1453년 당시에는 해안 성벽 모두가 이런 모습이었을 테니 적들이 감히 상륙할 엄두를 냈겠는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성벽 안팎 모두 야외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변 정리만 잘하면 관광 명소가 되는 건 금방일 것 같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그 옛날 영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 그리고 자갈이 뒤섞여 퇴적된 모습이지만 550여 년 전에는 온통 바다였던 곳이다. 위치는 제라파샤 병원 건너편. 택시 기사에게 그렇게 말하면 데려다 준다.


▲ 바다 성벽 끝자락에 있는 주탑. 성벽 꼭대기는 복원된 모습이 역력하다. 바로 앞은 마르마라 해와 육지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니치 양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 드디어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가 끝났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꺾어지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시작된다. 해안 성벽 탐사는 무엇보다도 길 건너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자동차들이 야생마처럼 내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때론 교통 법규 위반까지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 오, 아름다운 정원! 육지 성벽은 이렇게 운치 있는 공원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멋진 곳을 찾은 사람은 우리뿐이다. 이미 해안 성벽 이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탐사도 하고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2․3․4편에도 소개한 지역이지만 이 날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해질녘까지 대포알을 찾아 3중 성벽 구석구석을 헤매고 또 헤매었다.


▲ 황금문 앞 풀밭 위에서.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마치고 점심 식사 뒤 오후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통역을 해준 이경숙씨, 열과 성을 바쳐 성벽 탐사에 동행하며 내 물음표를 지워 준 니사 양에게 내 등 뒤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을 바치고 싶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7편은 마르마라 해안 성벽(세라글리오 곶부터 비상문까지/붉은 사각형 표시)을 탐사한 내용이다. 거리는 약 9킬로미터. 매립된 지역이 너무 많고 넓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바다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답사를 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S.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아이디 ‘중독’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구절입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다음 편(7편)을 지금 올리지만 중독님을 비롯한 6편 독자들은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9편으로 미루고, 7편에는 다른 이야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구성을 약간 달리 하면서 이야기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8편에 올릴 내용을 한 컷의 사진과 함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시작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찍은 바다 사진. 저 해협 양쪽에는 1453년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요새가 두 곳 있었다. 아나돌리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각각 아시아 쪽과 유럽 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위협하며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두 요새 이야기가 8편에서 펼쳐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보존과 발전 2010.10.01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풍스럽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먼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티나게 복원된 흔적들이 아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유지/보수를 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의 흐름만이 복원된 성곽의 흔적을 덮어줄 수 있을것 같네요

  2. 오스만 2010.10.01 1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원더풀, 뷰티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만국기처럼 다채로운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3. 두륜 2010.10.01 15: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정과 노력에 매번 놀랍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대단 하시네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
    멋진 말이 아닐수 없네요...
    다음에 시간이 흐른뒤 외국의 명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지금 의장님처럼 꿈이 현실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이라고
    소개한다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요?

  4. 술취한술탄 2010.10.01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도 가본적없는 이스탄티노플
    의장님덕에 3박4일정도 이스탄티노플 여행을 다녀온듯합니다.
    해박한지식과 격조높은 안목 다음편 기대할께요.
    더불어 말씀드리면 여행중 즐겼던 음식이나 에피소드도 올려주셨음 좋겠는데

  5. 박찬용 2010.10.01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제가 마르마라 해안을 다니는듯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생생한 현장감으로 제가 곳곳을 돌아 다닌듯
    감동과 여행후의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한편한편의 글들을 읽으며 너무도 재미있는 산교육을 받는 느낌...

    늘 불타는 열정으로 한국의 산하와 역사를 쓰다듬어 주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힘드시겠지만 책으로도 만들어 주신다면 더많은 사람들이 더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 됩니다
    8편이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글들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요

  6. 가을바람 2010.10.01 1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과 사진을 보면서 내내 제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7. 술에술탄 2010.10.03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군요.
    터키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수여해야 할 듯.

  8. 중독 2010.10.03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에 나와 바닷바람 맞으며 성벽을 따라 걷고, 성안으로 들어와 건축문화관람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도시락 먹고... 주말 나들이 하고 가는 기분입니다. 나들이하러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9. 수몰 주민 2010.10.10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 위를 걷다, 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예전 어느 시인의 '물 밑을 걷기'란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몰된 어느 마을에 얽힌 첫사랑과의 추억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바다 위를 걷든 물 밑을 걷든 옛 기억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든,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든 말입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피플 2010.09.15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2. 한가위 2010.09.16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한가위 이후에도 기대할게요
    명절 잘 보내세요

  3. BlogIcon 김화자 2010.09.18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 처럼 넉넉하시고 풍요로 우신 추석 명절 되십시요.
    행복 하시고 따듯하신 한가위 되시길 기원 합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4. 세레나데 김 2010.09.26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연립 주택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 웃었습니다.
    어라, 다시 들어가 보니 그새 사라졌네요.
    신비스런 그녀를
    <이스탄티 걸>이란 이름으로 불러 봅니다.

  5. 소나티네 2010.09.27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이스탄티걸이 또 고개를 쏘옥~~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는 그만큼 잔상을 많이 남깁니다

  6. BlogIcon 스압 2010.09.30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에 지은 집에 사는 이들은 기분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우리집 벽이 수백년전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니!!'
    집에 값비싼 골동품 하나씩은 기본이겠네요. 부럽다. 돈 떨어지면 조금씩 팔아도...ㅋㅋㅋ

  7. 유한새 2010.09.30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기의 철옹성에 무혈입성이라...!!

  8. 만국기 2010.10.12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탁월한 역사 기행문입니다.

  9. 형오투어 2010.10.12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퓨터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스탄티노플,
    그 가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정말 끝내 줍니다.
    착륙하고 싶지 않네요.

  10. BlogIcon silk flowers 2010.10.18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역사의 도시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