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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절망의 끝에 서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지금의 주인공을 만나본 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배영수


2000년대 중반에 리그를 제패하던 에이스는 어느 날 오른쪽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을 맡은 미국 의사는 "어떻게 인대가 이 정도로 손상될 만큼 몸을 내버려두었냐?"며 자신이 여태까지 수술한 환자 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수술이 결정되고 여러 단계를 밟아가려던 차에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배영수의 간 수치가 높아서 수술이 미뤄졌던 것이죠. 그 뿐이 아니라 그는 원래 발목도 좋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설상가상의 지경에 이른 것이죠.

배영수는 리그를 호령하던 최고 에이스의 모습은 고사하고, 졸지에 선수생명의 갈림길에 서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 배영수의 팔꿈치 수술 자국(좌)과 팔꿈치에서 나온 뼈조각(우)


흔히 수술 후 오랜 시간의 재활은 도를 닦는 것에 비유합니다. 특히 선수들의 재활은 그 성공 여부가 보장되지 않은 기약 없는 일이거니와 재활을 한다고 해서 원래의 몸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보장이 없기에 선수들에 있어서 재활은 끝을 모를 사막에 선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게 되면, 처음에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습니다. 남의 팔 같은 자기 팔을 갖고 끊임없이 통증과 씨름하며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선수로서 뛰어볼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대개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은 선수들은 6개월 ~ 1년반 가량 재활의 시간을 갖고, 기량 회복까지 2~3년의 과도기를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얻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선수들도 많습니다.

배영수도 재활 후 공을 던지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량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부 운이 좋은 선수들의 경우에는 수술을 받으면 오히려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기도 한데, 배영수는 수술받기 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기에 회복하는 것조차 불투명했죠.

그런 그가 작년에 마음을 먹고 공을 던졌지만 그는 단 1승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리그에서 2번째로 많은 패배(12패)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팬들은 "이제 배영수는 갔어. 예전 배영수는 없어."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랬던 그가 투구패턴과 구종개발에 힘 쓴 끝에 3월 31일 광주 기아전에서 344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승리를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보다는 발전한 투구내용을 선보였기에 다시 일말의 희망을 선사한 것이죠.

여전히 많은 고비가 남아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희망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엄정욱


2005년 8월 21일 현대전 구원승 이후 1694일 만에 승리
2004년 8월 10일 현대전 이후 2070일 만의 선발승


이 기록의 주인공이 누구냐구요? 바로 엄정욱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비공인 최고 강속구 신기록을 세웠던 주인공이죠.

엄정욱은 타고나야만 누릴 수 있는 강속구 투수였기에 많은 야구팬들이 그에 대해 높은 관심을 두었고, 언론들도 '앞으로 그가 어떤 투수가 될 것인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오히려 그는 자꾸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한 때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아무렇지 않게 던졌던 그에게도 부상이라는 악마가 찾아왔습니다. 2006년 어깨 수술, 2007년 팔꿈치 수술의 과정을 거쳤지만 2009년까지 희망, 재기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 등재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만년 유망주로 불린데다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되어버리자, 팬들은 그에 대해 기대하는 일도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팬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그랬던 그가 올 시즌 최고의 투수조련사 김성근 감독과 뜻을 모은 뒤,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성숙해진 엄정욱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결실이 지난 11일 넥센전에서 승리(선발승)로 이어진 것이죠. 여러 투수들이 빠진 SK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더구나 최근 몇 년간 김광현을 포함한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강속구 투수가 많지 않았던 SK였기에 '불 같은 공'을 뿌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속이 뻥 뚫린 듯 시원시원한 느낌을 받은 팬들도 많이 늘어났을 겁니다. 그의 복귀가 반가운 이유입니다.



김광삼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안 해 본 게 없었습니다. 그는 투수였지만 공격에선 타자도 하고, 수비에선 야수로도 뛰었습니다. 투수로서 주로 1군에만 있었는데, 야수가 되고 나니 2군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김광삼의 이야기입니다. 신일고 출신의 김광삼은 커브와 슬라이더가 좋은 전도유망한 투수였습니다. 일찍 군대도 다녀와 다른 선수들만큼 군복무에 대한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지만, 10승 투수라는 벽을 넘는데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7~8승에 전전하며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한 그는 결국 야수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외야수로 뛸 무렵 엘지의 2군 홈구장인 구리구장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초구, 2구를 좋아하는 적극적인 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투수로서 가진 재주가 아까웠기 때문에 방망이를 든 그의 모습은 왠지 어색해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습니다. 과거에 비해 그의 공은 아직 무디고 약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짐과 집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보였습니다.

'내가 뛰는 팀을 일으켜야 겠다'는 모습에서 그는 분명 과거와는 달라보였습니다. 7년 동안 가을 잔치를 밟아보지 못했던 팀이었기에, 더구나 리그를 호령하고 있는 잠실 라이벌인 두산에게 밀릴 수 없었기에 그의 투구는 진지했습니다.

그의 혼신을 다한 역투에 동료 선수들도 많은 득점으로 화답했고, 2005년 9월8일 잠실 KIA전 이후 무려 1676일만에 선발투수로 승리하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개인적인 목표를 묻는 중계진들의 물음에 그는 "올 시즌은 100이닝 이상을 던져서 팀에 도움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여느 투수들 같으면 몇 승을 따내겠다고 호기를 부릴 터이지만 그는 팀에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 같았습니다.

갈 길이 멀어보이지만, 괜찮습니다. 희망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스포츠는 살아있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꾸밈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 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죠.

"더 이상 안 돼", "도저히 못하겠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셀 수 없는 여러 날 동안 눈물을 삼키며 절망의 터널 속에서 희망의 빛을 잡으려고 뛰어든 이들을 한 번만 떠올려보시길.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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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너서미 2010.04.26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망의 끝에서 살아돌아오는 선수들을 보면
    정말 스포츠는 감동인 것 같습니다.

  2. BlogIcon www.bsfmusic.fr 2015.04.10 1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수술을 맡은 미국 의사는 "어떻게 인대가 이 정도로 손상될 만큼 몸을 내버려두었냐?"며 자신이 여태까지 수술한 환자 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은 故 임수혁 선수의 모교인 '봉천초등학교'입니다.
원래 그는 방배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에 다이어트 삼아 운동을 하다보니
결국 5학년 때 야구부가 있는 봉천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사이에도 그의 모교에서는 후배 야구선수들이 맹활약하고 있었고
또 다른 후배들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운동장을 거닐며 故 임수혁 선수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노라니
가장 기억에 남은 3경기가 떠올랐습니다.


▲ 스포츠조선 2000년 4월 19일자



1999년 플레이오프 최종 7차전 (대구) - 기적 같은 대역전극의 초석이 되다

1승 3패로 몰린 롯데가 내리 2연승을 하며 최종 7차전을 맞이했습니다.
이승엽, 김기태, 김종훈의 홈런을 앞세운 삼성이 5:3으로 앞서고 있었죠.

2점차 뒤진 9회초를 맞이한 롯데.
공필성의 안타로 회생의 불씨를 살린 뒤 임수혁이 대타로 들어섰습니다.

임수혁은 바깥쪽 공을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른 뒤,
무언가 직감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며 1루로 달려갔죠.

우측 담장을 넘기는 2점홈런!!!

이 동점포에 힘을 얻은 롯데는 연장전에 터진 김민재의 적시타에 힘입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동점홈런의 가치가 높았던 것은 상대투수가 최고의 마무리 임창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야구팬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새긴 임수혁은 타격에 소질이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공격형 포수로 호쾌한 방망이를 과시하던 그가 그라운드를 떠난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이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무척 슬프군요.

과연 그가 쓰러진 당일,
무슨 일이 있었길래 팬들이 좋아하는 한 선수를 하늘 나라로 보내야 했던 것일까요?



▲ 스포츠서울 2000년 4월 19일자



2000년 4월 18일 (잠실) - 돌아오지 못한 그라운드

임수혁의 소속팀 롯데는 LG를 맞아 잠실에서 경기를 펼쳤습니다.

2회초에 유격수 유지현의 실책으로 출루한 임수혁은 우드의 안타 때 2루를 밟게 되었죠.
7번타자 조경환의 타석 때 갑자기 쓰러진 그는 더 이상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병상에 눕기 전까지 임수혁은
1992년 부정맥의 판정과 함께 운동을 해도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심장질환약을 복용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일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쓰러진 뒤 5분 안에는 누군가에 의해 심장 마사지가 시행됐어야 했는데
10분이 넘도록 아무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식물인간 상태에 이른 것이었죠. 
이후 임수혁은 10년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 스포츠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습니다.
임수혁의 부친인 임윤빈씨의 "제 2, 제 3의 임수혁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당부에 걸맞을 만큼
당직의사제도를 비롯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쨌든 이 사고 후 며칠 간 경과를 보니 더 이상 임수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됐구나 싶었습니다.



▲ 일간스포츠 2000년 4월 19일자 (당시 분위기와 열악한 야구 환경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대구) - 꿈에서라도 통했다면

2002년 한국시리즈(삼성-LG)는 작년 한국시리즈(기아-SK)와 더불어서
역대 한국시리즈 가운데 가장 극적인 명승부로 기억합니다.

특히 최종전(6차전) 9회말을 시작할 때까지 9:6으로 엘지는 승기를 잡고 있었고 
삼성은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이승엽의 3점포와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시리즈 기간 동안 맹타를 휘두른 마해영은 MVP에 선정됐습니다.

"(임)수혁이 형이 병상에서 일어나 나와 함께 운동을 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극적인 끝내기홈런을 날린 마해영의 소감 중 한 구절입니다.
(당시 삼성은 마해영의 맹활약 덕분에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했습니다.)

최종전 전날 임수혁의 꿈을 꿨던 마해영은 아침에 일어난 뒤
좋은 징조라 생각하며 그라운드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역대 손꼽히는 한국시리즈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낸 주인공이 됐던 것이죠.



▲ 역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끝내기홈런을 작렬한 마해영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임수혁과 마해영은 대학(고려대), 상무에서 한솥밥을 먹은 절친한 선후배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롯데 유니폼을 입었을 당시 팬들은 이들을 두고 '마림포'라고 불렀습니다.

임수혁은 2000년 4월 18일에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고
선수협 문제 등으로 마해영은 삼성으로 이적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더 이상 마림포를 볼 수 없게 되었죠.

그래서 2002년 한국시리즈 MVP가 된 마해영의 소감이 더욱 인상 깊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수혁 선수가 병상에서 일어난다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지 궁금했지만
이제는 영영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게 되었군요.



▲ 월간 베이스볼 1998년  


임수혁은 1998년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가장 불만스러운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야구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것."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야구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자상한 가장이었다고 합니다.

사고가 났던 당일, 상경하기 전에 임수혁은 스킨로션을 사기 위해 부인과 함께 백화점을 들렀습니다.
모처럼 데이트의 분위기를 즐겼던 그는 부인에게 "일 때문에 가족에게 소홀해서 미안하다"며
"원정경기를 마치면 모처럼 다 함께 영화 한 편 보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때가 의식을 갖고 있던 임수혁이 부인과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경기장에서의 비보를 들게 된 부인은 아이들에게 차마 아빠의 슬픈 소식을 전하지 못하여
"아빠가 멀리 전지훈련을 떠났다"며 둘러댔다고 합니다.



▲ 손문상 화백의 <얼굴> 중 '돌아오지 않는 주자 임수혁' 편
(지난 7일 이 그림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글귀가 새겨졌더군요.)



이후 10년간 병상을 지키고 살림살이에 육아까지 맡아
고생만 한 임선수의 부인과
그 고통을 함께 안은 가족들을 생각하니 하늘이 무심하게 느껴지더군요.


임수혁이 병상에서 일어나 그라운드를 누비길 기대했던 
많은 야구인들과 팬들의 바람도 이제 물거품이 됐습니다.

'제 2의 임수혁'이 나와서는 안 되겠지만,
무엇보다 '제 1의 임수혁'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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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악랄가츠 2010.02.09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치료가 조금만이라도 빨랐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텐데,
    정말 안일한 야구의료체계에 한숨만 나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BlogIcon 칸타타~ 2010.02.09 1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옳은 말씀입니다.
      응급처치라는 건 시각을 다투는 거라
      사고가 터지고 5분 안에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데.
      아직 우리 나라는 멀었다는 느낌입니다.

      야구장 문제도 그렇고.
      전담의사제도도 제대로 시행되는 건 광주 밖에 없다고 하고.

  2. BlogIcon 커피믹스 2010.02.09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포츠에 무지한 저는 그런 사연이 있는줄 몰랐네요
    안타깝습니다. 응급처치만 했어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BlogIcon 칸타타~ 2010.02.10 0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제 발인을 했다는데,
      이제 병상의 모습조차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민방위 훈련 가면 응급처치에 관한 부분을 교육받는데
      임수혁 선수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